때는 1637년 음 1월30일 남한산성을 나온 조선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三拜九叩頭 의 항복의식을 행한다
청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식 이었다.
유사이래 초유의 의식을 끝내고 강을 건너는 인조에게
청군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1만여 조선백성이 울부짖는다.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吾君吾君 捨我以去乎)
굴욕은 또 이어져 1637년 11월
청나라는 삼전도에 청태종의 승첩비를 세우라 고 명한다
조선이 알아서 비문을 지어 바치라 고 독촉하니
다급해진 인조는 大臣 4명을 급히 부른다.
예문관제학 李景奭, 신풍부원군, 문장가인 張維 (효종의 장인)趙希逸, 李慶全이다
:여러분들이 비문을 좀 써야겠네 매우 급하네 :
하니 모두들 손사래를 치며 할 수 없다 한다
인조는 당신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 고 애원한다
그럼에도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엉망으로 써서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이 쓴 2개의 비문을 청나라에 보낸다
청은 장유의 글은 예법에 맞지않다고 트집잡고
이경석의 글도 100점짜리는 아니지만 :잘 고쳐 채택하라:
命을 내린다 조건부합격이다.
청의 명을 받은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 부탁한다
:나라의 존망이 달려잇네 지금은 후일을 도모할때 ...
오늘은 저들의 말대로 하세: 하니 이경석은
:군주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
이 한 몸 돌볼 수 없습니다 꾹 참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렇게 하여 우여곡절끝에 완성돼 건립된 삼전도비문 (1638년)
:"上國(청나라)에 죄를 얻은지 이미 오래됐다 ..
.그런데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동토 수천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됐다 .
아 성대하다. 만년토록 황제의 덕이 빛날 것이다: "
이경석은 비문을 고친뒤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한다 :
고 한탄햇다고 한다 (박세당의 서계집)
못난 임금을 대신해서 치욕의 비문을 써야만 했던
이경석(1595ㅡ1671)은 과연 누구인가
조선의 2대임금 정종의 10번째 왕자인 덕천군(후생)의 6대손이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1613년),
23세에 증광별시(1617년)에 합격한 이경석
특히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여 그가 과거시험 감독관으로 뽑은 인재가운데
무려 10명의 정승과 4명의 대제학이 배출된다
훗날 유림의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 김집, 이유태 등을 적극 추천한다
그런 이경석이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쓰게 된 이유가 잇엇다.
삼전도 비문같은 나라의 운명과 관계된 중차대한 문장이라면
당연히 예문관 대제학(정2품)이 맡아야햇다
예문관이라는 관청이 국왕의 명이나 말을 대신 글로짓는 일을 담당햇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제학 자리가 공석이엇다
이경석은 마침 예문관의 2인자인 제학(종2품) 이엇다.
어쨋든 굴욕적인 비문은 이경석의 희생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후 이경석은 척화파로 인질이된 이들의 구명에 힘을 쓴다
1650년 청에서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채고 사신6명을 보내온다
이경석은 사신들을 맞으며 모두 나의 과실이고
우리 임금과 다른 신하들은 알지못한다 고 하고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의주의 백마산성에 위리안치 된다
3년뒤에 사면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임명된다. (1653년)이후 15년뒤
1668년 (현종9년)74세가 된 이경석은 최고영에인 궤장을 하사받는다
궤장은 나라에 공이많은 70세 이상된 노대신에게 내리던
궤(몸받침대)와 장(지팡이)을 말한다
이경석은 조정의 모든 공경대부를 초청 궤장연을 베푼다
당시 유림의 영수인 송시열은 축하글을 지어 이경석의 행적을 그렷다.
:(병자호란때)영리한 자들은 팔장을 끼고 물러섰지만
公(이경석)만 홀로 생사를 돌보지않고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公은 하늘의 保祐를 받아 오래살고 편안했다 (壽而康)
누가봐도 덕담이엇다.그런데 이 오래살고 편안했다 는 뜻의
수이강에 무시무시한 가시가 돋쳐잇었다.
송시열이 언급한 수이강은 송나라 한림학사 손적(1081ㅡ1169)을 일컫는 말이다
손적은 송나라가 금나라에 멸망한뒤 송나라 황제를 대신하여 항복문서를 지은 인물이다.
그런데 항복문서 내용이 송나라 위신을 깎고 오랑캐에 아첨했다고 해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때 어떤이는 손적은 오랑캐 진영에 아첨했으니
오래살고 편안했구나(壽而康)라고 하며 비웃었다
송시열은 이 수이강 의 은유를 끌어 이경석을 비난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경석이 별다른 반격을 하지않아 겨우 봉합되고
3년뒤 1671년 (현종15년) 77세를 일기로 이경석은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난다.
역사는 말하기를 :누구든 죄가 없는 자가 (이경석에게) 돌을 던져라: 한마디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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