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老年)의 시(詩)모음 30選
(1)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象牙)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꼭 새것만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어 있듯이
이들처럼 저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욱 아름다워질 수는 없나요.
(2)
쉰 살 즈음에 / 임성춘
늙어 가는 것이 서러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더 서럽다.
내 나이 쉰 살
그 절반은 잠을 잤고
그 절반은 노동을 했으며
그 절반은 술을 마셨고
그 절반은 사랑을 했다.
어느 밤
뒤척이다 일어나
내 쉰 살을 반추하며
거꾸로 세어 본다
쉰, 마흔아홉, 마흔여덟, 마흔일곱...
아직 절반도 못 세었는데
눈물이 난다.
내 나이 쉰 살
변하지 않은 건
생겨날 때 가져온
울어도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뿐이다.
(3)
나이를 더 먹기 전에 / 이운학
굴러가는 낙엽만 보아도 웃음보다는
씁쓸한 미소만 입가에 머물고
눈꼬리 밑에는 살아온 날의 흔적만이
주름꽃을 피우고 있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 소박한 꿈으로
가슴에서 풀꽃처럼 자라고 있다
아주 추하지 않도록 단아하게 한번쯤은
머리도 길게 길러보고 싶고
짧은 미니스커트에 몸에 붙는
옷도 입어보고 싶다
젊음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이를 먹은 뒤에 해야 하는 일이
분명 따로 있을 텐데
아직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남을 위한 희생의 땀도
뚝뚝 흘려 보고 싶다
가끔은 내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건망증에 또 한번 칼바람으로 다스리며
나이를 더 먹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들을
겨울이 내 나이만큼 깊어가는 지금
부서지는 삶의 아픔들과 함께
다시금 곱십어 본다
(4)
스무 살 / 곽재구
길 가다
꽃 보고
꽃 보다
해 지고
내 나이
스무 살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워
뒹구는
돌눈썹 하나에도
입맞춤하였다네
(5)
사십대 중반이라는 나이 / 오경옥
혹 하지 않는다는 마흔 중간쯤 하는 나이
바람으로 떠돌기 쉬운 여린 나이
그리고 싶은 고운 꿈
어여쁜 색깔과 향기에 물들고 싶은
하얀 물감 같아
생의 한가운데서
무겁게 내딛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선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아
가을 강물 같이
아름다운 파문에 출렁이기 쉬운
사십대 중반이라는 나이
현실과 이상처럼
삶과 사랑의 기교 사이에서
열병처럼 아프기 쉬운 나이
(6)
단 하나의 소원 / 조병화
사람이 육십대에 들어서면
사형선고를 받을 사람들 대열에 끼고
칠십 줄에 들어서면
사형 집행을 받을 사람들 대열에
낀다고들 하는데
지금 나는 날로 그 날짜가 궁금해진다
아, 칠십 평생을 달음박질로
살아온 것 같은 인생,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
칠십 평생을 공연히 그리 바쁘게
살아왔을까
떠남을 거듭하며 살아온 생애,
실로 나의 인생은
오해, 와 포기, 와 도피, 와 이별, 과 고독.
그 순수고독을 살아오며, 그 순수허무를
같이 살아온 거다
지금 이 자리 아무런 후회는 없으나
칠십을 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날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형집행을 받을 그 날짜만이다
어머님, 저는 지금 기진맥진
단 하나 소원으로, 어머님 곁에 와 있습니다
확, 단숨에 집행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7)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그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8)
늙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 김영수
주님,
저는 해놓은 것도 별로 없는데,
그래서 내세울 것도 별로 없는데,
나이만 들어 인생이 참으로 허무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저만은 늙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 속에서
실제로는 커다란 허무감만 키워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영혼의 빈집에 살아 있는 생각과 생기 어린
기도를 채워주시어,
저를 젊게 해주소서
(9)
노년의 시 / 김 대규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어휘들 잊혀지고
쉬운 말만 남는다
시도 그렇듯 단순해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허물
용서하자
세상의 일
다 잊자
하늘의 뜻
감사할 뿐
죽음에게는
"잘 부탁합니다 "
(10)
노신사의 고독사 / 유영서
오랫동안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이
주인 잃은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사물함의 우편물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손길 기다리며 굴러다니고 있다
방안에 숨어살던 온기가 도망치듯 빠져나와
쓰레기 더미속에 섞여 분리수거 된채
청소차에 실려 간다
누구도 관심 주지 않는다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싸움 싸웠을까
용을 쓰다 감지 못한 눈동자
노신사가 읽던 책꽂이에 꽂혀있는
서적 나부랭이 찌그러진 금테 뿔 안경
먹다 남은 약들이 할말 잃은 채
애도하며 서있다
가시는길 호송차라도 불러 드려야겠다
꽹과리치고 피리 불며 천국의 문 열어 달라
소원 하나쯤 빌어본다
문득 노신사의 책상 위 사랑한다는 문구가
가슴을 후벼파고 떠나갔다
(11)
독거노인 / 안원찬
독거는 독거다
창틀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쌓여 있고
천정에는 알록달록 지도가 그려져 있고
벽 구석구석 갈라진 틈새마다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다
독거는 독거다
댓돌에는 시퍼런 꽃이 피어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지붕에는 버섯들이 솟아 있고
철 대문에는 붉은 꽃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독거는 독거다
이 모두는 늙음의 꽃이다
어떤 모양으로 피든 어떤 색깔로 피든
말없이 피었다가 말없이 가야 하는 꽃이다
저승꽃이다
(12)
노년의 가을 / 유종천
늦가을 찬바람에
해가 빛을 잃었다.
새벽부터 세상을 장악한 냉기가
강열한 태양의 숨결을
끊어 놓았다.
나그네 개나리봇짐 주먹밥도
싸늘하게 죽어가고 있다.
언제 코스모스가 피었었던가
언제 푸른하늘과 단풍이
산을 적셨던가.
갈바람 찬바람에 장작더미가
산을 덮었다.
매일 걷던 이길이 왜이리도 먼지
나그네 숨결이 턱에 걸렸다.
(13)
노년의 삶 / 손계 차영섭
노년을 알아야 한다
- 잘 익은 과일처럼 성숙하는 일
내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 욕심을 버리고 양심에게 묻는 일
너그러워야 한다
- 그대로 받아들이고 매사를 용서하는 일
새로운 삶을 배워야 한다
- 나서거나 끼어들지 말 일
- 노을처럼 사색할 일
- 잔소리 말고 침묵할 일
- 마음이 맑아(明) 건강할 일
잘 살아야 잘 죽는다
(14)
굽은 노년 / 초랑(超郞) 윤만주
등 굽어
길을 걷는 저 늙은이
땅 물고 해그림자 줍는다.
거친 숨결
고단함을 토해내고
응어리진 삶의 굴곡
폐부 속의 앙금이요
홍안은 간데없고
사고(思考)는 청춘이나
주름살 눈을 뜨니
검은 머리 백발일세.
노을 지는 잎새 위로
각시 볼 새 단장에 굽은 노년
회춘(回春)으로 활기차다.
(15)
아름다운 노년 / 성백군
늙은 나무뿌리가
흙과 막돌 사이를 헤집고 올라와
계단이 되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을 실어나르다 보니
껍질 벗겨지고 진(津) 다하여
하얗게 바래어져 반들거린다
왜 세상에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땅속 캄캄한 어둠이 싫어서 열심히 살다 보니
사랑도 하게 되고 자식도 생겨나고
생명 귀한 줄 알아 도중에서 포기도 안 되고
이제는 다 산 몸이라 여겼는데
오늘 산중에서
늙은 나무뿌리를 만나니
아직은 할 일이 남았다
나도 세상 계단 되어 뭇 사람들을 실어나르다가
목숨 다하는 날
너처럼 반들거렸으면 좋겠다.
(16)
어르신의 말씀 / 김길남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말이 되나니
말을 조심하라
말은 행동이 되나니
행동을 조심하라
행동은 습관이 되나니
습관을 조심하라
습관은 인격이 되나니
인격을 조심하라
인격은 운명이 되나니
(17)
노인 징조 / 송근주
서리가 내리는
서릿발을
장식하는 머리카락
노인이 되는 징조
만족하지 못하고
검은 버섯 만들고
버섯으로 장식하는
노인의 징조가 되고
불만족이 성이 안차
만족하게 하려드는
피부의 거칠어짐
노인이 되어가는 징조
노인이 되는
기억력 감퇴
금방 했던 말도 잊혀지는
노인이 된 징조
(18)
노인과 기타아 / 박희진(朴喜璡)
죽음에 기대어 노인이 마지막
기타아 줄을 뜯자 아으 소슬한
가을 바람 일어서 백발을 적시네
오른쪽 어깨는 이미 저승으로
기울어 안 보이나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단 하나 낡은 기타아 …
노인과 마음을 더불어 해온
평생의 반려이기 지금은 오히려
주링 먼저 알아 손가락을 튕기나 봐
그가 숨지어 소리는 자더라도
죽음을 넘어선 심장의 고동처럼
줄은 울 것일세 다시 더 한 번 …
(19)
어르신 / 김근이
어르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 가요
살아오신 세월이 지루하고
지겹지는 않으섰 는 지요
때로는 살아있는 목숨이
원망스러울 때는 없었는 지요
허구만은 이별 중에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섭 슬한 미소로 돌아오는
그리움도 있겠지요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좋고
아니 하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마음을 달래주는 보람이다 보면
죽어 세상에 없는 것 보다
살아 있는 지금이 그래도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지구위에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은
다 내 땅이요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을
욕심 없이 바라보면서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
이 또한
살아 있는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체여
넘어 지는 사람도 있고
길을 가다가 돈뭉치를 주워
횡제 하는 사람도 잊지요
천을 가지면 천 가지 극정으로
만을 가지면 만 가지의 극정으로
사는 우리 내 인생살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낳다 지만
없는 만큼 마음은 비워져 있으니
다시 주서 담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또 살아갈 맛이 잊지 않을 까요
돌아누우면 저승인 것을
아직도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온 사람 없으니
저승의 삶을 기대하지 마시고
이승에 남아있는 세월
잘 챙기시고 비워져있는 마음속에
갖고 싶었던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주서 담아 모아 두셨다가
저승길 돌아 갈 때
머리맡에 풀어놓으시고
그 가치를 저승 노자로 가져가시면........
어르신
이승 삶에 맺힌 한이 있다면
이다음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이 열리면
그때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전생의 삶을 거울삼아
맺힌 일 풀어가며
좋은 일 만이 하면서
멋진 인생 살아 봅시다
(20)
손수레와 노인(종이 줍는 노인) / 박동수
바람이 굴러 온다.
폐 종이 상자에 갇혀버린
노인과 그의 인생이
수레에 실려
바람과 함께 굴러 온다
낡아 꾸부러진 고철허리
그에게도
봄이 주던 사랑이 있었고
불꽃같은 마음으로
그대 위해 풍선처럼
봄 하늘을 날았지
어느덧
살처럼 꽂혀버린
그 옛 사랑은
털어낼 수 없는 덫이 되었고
종이 상자에 묻혀
도시의 골목 바람에
굴러가야 하는 낡은 생
(21)
도장 파는 노인 / 이종섭
종일 바닥에 앉아 목도장을 파는
정선 5일장 백발의 노인
손발도 없는 몸통에
화인 같은 얼굴을 달아주면서
평생 외길을 걸어왔다
이리저리 칼을 대는 순간
동그란 평원에 계곡이 파이고
산이 솟았다
물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어오고
벼락에 맞아 부러지거나
폭설에 막히면서도
낯선 이름 새기며
모질게 견뎌왔던 세월
호명되기만을 기다리며
뭉툭한 나무속에서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상형문자들의 기지개
구불구불한 길을 파려고
각을 세월 흐르며 깎는 강물을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보았던 것일까
몸 속의 물기를 말려
정갈한 도장목 한 그루가 되어가는
노인의 굽은 등 뒤로
노을이 진다
붉은 인주를 묻혀 찍어보는
마지막 낙관
심장이 뜨겁다
(22)
노인 / 노정혜
나이 많으면
지금까지 배워 쌓은 지식 높은 줄 알았네
지식은 낮아지고 고집만 높아졌네
나이가 많으면 부자가 될 줄 알았네
통장 비었네
나이 많으면 효도받을 줄 알았는데
직장 없어 부모 주머니 바라보네
나이 많으면 친구 많을 줄 알았네
사는 곳 어디인지
소식 멀어지네
생각은 고향에 머물고 고향 친구 정 깊네
나이 많아 일하고 싶은데
노인이라 부르네
청년 일자리 모자란 데
노인 일자리가 어디 있나
집에 가서 애나 봐라
자식들은 제 둥지로 가고
어쩌다 만난 손자 노인 냄새난다고 싫다네
노인 됨 서러운데 어디서 환영받나
아픈 곳만 늘어만 가네
(23)
노인과 그림자 / 고지영
1960년 서울역 앞
펑생을 함께 지겟 짐 날으며 살아온
백발의 그림자가 있소
그림자는 어둠을 먹고 빛에 살며
노인은 지게를 먹고 외로움에 살아요
아빠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칠삭둥이 딸애 업고 야반 도주 한 마누라
찾아도 소용없는 일
솟대처럼 넋 놓고 앉아
먼 산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딸애 우는소리 환청에 잠 못 든다
허구한 날 연탄까스
쉰 김치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추억들만 도배되여 얼룩져 있는 곳
눈보라 치는 지하방 한 칸
날갯죽지 꺾인 독수리 처럼
눈빛은 녹슬어 가고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진다
(24)
노년 / 돌샘 이길옥
집안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가장의 위엄이 기를 쓰던 시대가 문을 닫고
목소리 하나로 식솔을 휘어잡던 횡포가
꼬리를 자른 뒤 고전에 스며 몸을 사린다.
기세등등하던 어른의 자리에서
주춧돌이 빠져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밟고
일어서는 환호 움켜쥐고
억압에 당했던 분노가 불끈 허리를 펴자
당당하고 서슬 퍼렇던 체면의 뼈마디가
삐거덕 뒤틀리면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풀이 빠진 옷깃처럼
위력 잃은 몰골이 측은하다.
수시로 열 오르던 목청이 힘을 잃고
빳빳하게 세웠던 권위와 위신이 뒷전에 몰려
눈치로 길들어지며 기가 죽는다.
가시가 박혔던 호령이 삭아 내리고
날이 섰던 위세가 무뎌지며
눈빛에 성에가 낀다.
관심의 말뚝을 뽑고 등 돌려 쥐 죽은 듯이 누워
간섭의 끈을 자른 편안함에 석양이 찾아든다.
어둠에 늙음이 젖어 든다.
(25)
꼰대 / 강보철
나 때는 말이야
요즘 것들은
푸념의 공간에서
입도 벙긋 못하는 가슴앓이
감자가 물에서
이리저리 서로 부딪히며
때를 벗듯이
시간을 끌어안은
겸손한 죄인이고 싶다
내가 왔다는 어떤 기록도
내가 갔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자
헌신과 가치는 어딘가 있다
고통은 이겨내고
삶의 품격을 되찾기 위해
당신이 찾는
부드러운 일꾼이고 싶다
지나고 나면 시간의 그림자
해가 뜨면 길게, 짧게
해가 지면 사라질 그림자가 될걸
나 때는 꽁꽁 싸매고
요즘 것은 가슴으로 받는다.
(26)
홀로 된 노인 / 고재종
저처럼 금숭어 튀어오르며 그리는
금빛 아치의 순간을 보는
저 노인, 저리는 발 담그지 않았을지라도
강물은 이미 노을에 감전돼 있다.
하루 내내 잘 익은 포도주빛 노을, 그 속에
봉우리를 헹구는 병풍친 산들은
또 검푸러지며 능선들을 미끈히 뽑을 때
저 노인, 거친 노동의 단내 나는 숨결도
이제 강심으로 잦아드는가.
적막강산, 이렇게 흘러도 좋다지만
아직도 허기를 못 면한 소쩍새는
물살을 더욱 흔들어놓는 지금, 저 노인의
가난도 절뚝거리며 강변을 돌아온다.
때마침 백양나무 잎새를 흔드는 바람,
이미 한 번 스쳐간 인연들도
우수수거리는 소리만 있어, 그 소리만으로도
저 노인, 온몸 사무치게 물살치곤 한다.
그러니 생은 얼마나 깊고 푸르른 것인가.
어깨에 맨 삽이 몇십 개 닳도록
평생을 파보아도 그러나 회한과 뉘우침뿐,
다만 강물은 유장하고 산은 우뚝해선
강으로 오늘을 씻고 산으로 내일을 세웠느니,
적막강산, 들어서는 산집 마당에
오늘처럼 또 금빛노루가 맑은 눈망울로
저 노인의 귀가를 기다린 적도 있긴 있다.
(27)
독거노인 / 전성호
구름 타고 산을 넘는, 피붙이들 모이는 추석
혼자 지키는 옛집이 감나무
그림자보다 무료하다
북쪽 하늘 바라보던 밤의 눈동자
차가운 길바닥 뒹구는 신문지 속
'버려진 부모' 앞에서
자신의 하얀 체온, 잉크 냄새 사라진
문자를 읽고 있다
뜰을 지키고 선 대추나무 잔가지 사이
날카로운 풀벌레 울음소리
별빛은 옷깃을 파고들고
돌아올 이 없는, 돌아갈 일만 남은 가슴에
핏빛 감입만 나풀거린다
이젠 지상에 수분이 다하는 갈수기
가을 냇물도 감나무 뿌리까지 가닿지 않고
먼 하늘 쏘아올린 불꽃처럼
늙은 고양이 한마리 하늘 향해 울음 울고
(28)
노인의 가을 연정 / 만수 강한익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
닫힌 가슴 활짝 열어
고이 모셔놓고
코스모스 꽃 지어
검은 가시 돋아나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살포시 밟으며
오신다는 사랑 하는 임이여 !
칠순 노인 얼굴에
주름살 깊게 그리는데
어느 곳에 깊은 사랑
뿌리내렸는지
오실 줄 모르는구나,
칠흑의 어둠 속
행여 길 잃으실까
오시는 길
둥근달 꺼내 들고
훤히 비추어
발걸음 가볍게 하려는데
귀뚜라미 풀 벌레
서글피 우는 가을밤
그리운 임
오신다는 기별이 없어
고운 옷 치장한
아름드리 고목에
아픈 사연 하소연한다.
(29)
노인의 아침 / 신 진
마른기침 일어나
어둠의 자투리들을 갠다
쿨럭쿨럭 삽자루 일어나고
눈곱재기 닦으며 털복숭이
한 마리 뛰쳐나온다
몽당 털복숭이 논두렁길 앞장을 서면
밤새 물을 지고 기다렸던 풀들이
노인의 발등에 한 바가지씩
물을 부리고 간다
샛바람 불어 노인의 이마에서
새로 체온을 짚고
복숭아뼈를 타고 쇄골까지
물 기운 오르는 동안
노인은 물꼬 다지고 피 싹 몇 건진다
논바닥 흙의 숨소리 여기저기
모이고 흩어지고
찌르레기 소리 내며 재잘거린다
아침은 부신 개밥그릇 만지듯
살갑고 낯이 익다
들판 여기저기 바투 돛을 올리는
농투성이들의 목선들, 여어- 여어-
또 하루 함께 지냈구나
받는 이 없어도 저마다의 무사함을
알리고 있다
일평생 칭송 받은 일 없고
알레스카며 앙코르와트며
멀리 가 본 적 없으나
넘길 것 죄 넘기고 남았나니
다시 밝는 날이 짐 되지 않다
툇마루 너머 산이며 들이며
한없이 몸을 푼다
강아지 새삼 다가와 노인의
발등에 몸을 비비고
볕살 알뜰히 날아다니며
젖은 삽날 말린다
털복숭이와 둘이 맞는
툇마루의 아침 밥상
홰나무 가지 사이 샛별조차 기웃거리니
오늘은 갈 때 아니라고 하루 더 쉬다 가자고
몽당 털복숭이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주둥이 입에 문지르며 조르고 있다
(30)
노인에게 경고한다 / 은석 김영제
늙은 것은 자랑이 아니외다
경로석이라고 무조건 앉지 마소
늙은 것도 급수가 있나니
허리 구부러진 형 지팡이의존 형 올백발 형
그리고 60대 이상 형 등이 있거늘
자기네도 양보 안하면서
젊은 사람 앉았다고 나무라지 말라.
경로석이라 특별 귀빈석 공짜로 타서
따스한 온돌같은데서 백프로 앉아가니
이거 완전 신선놀음 아닌가
그래놓고는 장애자가 타면
스르르 눈감아 외면하면서
옆사람 툭툭치는 그 싸가지는 무엇이요?
출근시간에 등산 간다며 올라 타고는
두리번 두리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지 마소
당신같은 노인들 땜에 내가 젊었어도
자리양보 못하겠소
우린 눈비비며 간신히 일 나가는데
당신은 룰루랄라
놀러가지 않소 난 그게 기분 나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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