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역사 2023. 3. 2. 17:16

주요 경력[편집]

연도
계급
발령지
비고
1941년 12월
소위
(만주국)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9기졸업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졸업(군번10054번)
 
1946년 2월
제3여단[25] 제5연대 1중대장
 
1946년 9월
 
제5연대 1대대장
 
1947년 1월
제5연대 연대장
 
1947년 12월
 
제3여단 참모장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장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1948년 12월
 
 
1949년 5월
 
 
1949년 7월
 
 
1950년 4월
 
 
1950년 7월
 
 
1951년 4월
 
1951년 7월
 
휴전회담 대한민국 대표
 
1951년 11월
 
 
1952년 1월
 
 
1952년 4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 (6대)겸 계엄사령관
 
1953년 1월
 
1953년 5월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년 2월
 
 
1957년 5월
 
 
1959년 2월
 
 
1960년 5월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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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편집]

[1]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다는 전직 일본 헌병대 장교의 증언이 있으나, 공식 문서로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2] 북한 당국은 2010년 남포를 도급 도시로 삼고, 한국 이북5도의 행정구역에서 강서군에 해당하는 지역을 남포에 편입시켰다.[3] 27세손 '낙(樂)O' 항렬[4] 대한민국 창군 이래 최초의 4성 장군이다.[5] 연합합동특수임무부대 미8군 작전지휘소[6] 여기서 김종필 이후락을 만난다.[7] 장도영 회고에 의하면, 전쟁 발발 이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조직 수습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정희가 정보국 장병들을 수습하고 중요 문서를 챙겨 6월 28일에 수원에 자발적으로 나타난 점을 보고 완전히 사상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고 한다.[8] 왼쪽 세번째의 인물이 당시의 박정희 준장, 가장 왼쪽의 인물이 백선엽 대장이다.[9] #[10]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서 당시 중화민국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였다.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 전임한 건 사실상 미국과 군내 신망이 있는 그를 부담스러워한 조치였다.[11] #[12] 수원 백씨 27세손들로는 백낙준, 백낙청 등이 있고 이들은 낙(樂)자 항렬을 썼으나, 백선엽 집안은 엽(燁)을 돌림자로 썼다.[13] 두 장군은 둘 다 19세기에 태어나 장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지웨이는 1895년 생으로 98세(1993년 사망)까지, 밴 플리트는 1892년 생으로 100세(1992년 사망)까지 생존했다.[14] 공동 명의의 서문이 실린 것으로 보아, 당시 90대의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두 장군은 간단하게 구술하고 다른 사람이 글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15] 1988년에 Japan Military Review 출판사에서 『韓国戦争一千日 : 白善燁回想録 (한국전쟁 1천일 : 백선엽 회상록)』이 나온 바 있는데, '군과 나'가 연재하던 도중에 출간된 것이라 《군과 나》와의 관계는 불분명하다.[16]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비전향 종북주의자 빨치산을 부모로 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품이 있다(철저하게 종북주의자 시점에서 집필되었다). 이상 4개의 작품이 수십 종이나 되는 빨치산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텍스트이다. 3개의 작품은 이태의 『남부군』의 문학적 대성공을 보고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나왔고, 다시 『남부군』 개정판에서 이들 3개 작품을 대폭 인용하여 기술하였다.[17] 사실 이태는 시기적으로 인천 상륙작전 이후에 입산하여 1차 대토벌작전 때 잡혀 활동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았고, 게다가 쫄다구라 사건을 잘못 알고 있던 것이 매우 많았다(문학적 재능만 최강). 그래서 남부군 창설 부터 관여한 간부 출신 부모를 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나 토벌군 사령관이 쓴 『실록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가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수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18] 중앙일보 외교안보 기자 출신의 작가로, 2010년대에 나온 백선엽의 회고록은 사실상 모두 백선엽이 구술한 것을 유광종이 집필한 것들이다.[19] 중공군 2차 공세에 7사단장, 8사단장이 빤스런 했다는 에피소드와 6사단이 담당구역이었던 영월 광산에서 차량을 징발하여 기동성이 좋다는 자세한 설명은 각각 4번을 반복해서 나온다. 그외 1권에 설명한 내용이 2권과 3권에 다시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심지어 과거에 회고록에 썼던 내용이 징비록에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20] 1970년대 미국인의 평균 키는 172.7cm이었는데, 그 당시 백선엽의 키는 174cm였다. 따라서 미국인 기준으로는 평균 키 이상이었고 한국인 기준으로도 엄청 큰 편이었던 것이다.[21] 박정희 탓에 군인들이 검소한 소식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군인 출신이면서 소식가였던 박정희가 유별난 경우고 군인은 업무 특성상 고강도의 훈련량과 빈번한 육체노동,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 탓에 군인들 중에서는 대식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도 체력적으로 소요가 큰 업무 특성상 먹는 족족 살이 빠지거나 근육으로 가니 그리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당장 2년 남짓 복무하는 사병만 하더라도 짬밥으로는 모자라서 PX에서 배를 마저 채우는 게 일상이다. 여담이지만 전두환도 대식가였다.[22] 만주군으로 팔로군을 토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독립군까지 토벌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23] 백야전전투사령부는 빨치산 토벌의 사전작업으로 광주와 남원에 포로수용소를 세웠다. 붙잡힌 포로와 부역자는 두 수용소로 압송된 다음, 신원조사와 심문을 거쳐 처벌여부와 양형이 결정 되었다. 여기에 육군 중대장을 가뒀으니 사실상 부역자 내지 변절자 취급을 한 셈. 현재도 남원에는 교도소가 없다.[24]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 만주군 육군 헌병 중위 신분이었는데, 당시 헌병은 군사 경찰이 아닌 지금의 정보, 기무, 특수전 병과와 유사했다.[25] 현: 제3보병사단.[26] 국군 1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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