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사명대사의 귀거래사(2024.3.24)
탑비(塔碑) 낙성식에 참석하고자 경남 합천 해인사의 비림
(碑林:부도와 비석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을 주관한 제자는 스승의 고향인 전남 고흥의 돌로
승탑(浮屠)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首丘初心(죽을 때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뜻)의 승가적
수용이라 하겠다. 비문을 지은 전남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
현봉선사는 : 수월(水月:물에 비친 달)처럼 오셨다가 운영
(雲影:구름 그림자)처럼 사라져도 진흙 속에서 키운 하얀
연꽃의 향기는 남아있다:고 故人을 讚(찬)했다.
해인사는 802년 신라왕실에서 北宮(경주북쪽 여름별궁)으로
창건한 국영 사찰이다. 수많은 國師와 王師를 배출했는데도
그 흔한 신라,고려시대의 화려한 僧塔이 한 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임진란 이후 승려들의 소박한 부도들만 가야산 여기저기
흩어진 채 20기 가량 전해져 온다.
그 가운데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참배가 가장 어울리는 곳은
임진왜란 전쟁영웅 사명대사( 1544~1610)의 塔碑라 하겠다.
임진왜란 최고 공신이지만 종(鐘)모양으로 아담하게 디자인 된
浮屠(부도)에 이름조차 새기지 않았다.그래서 :전(傳)사명대사 :
즉 :사명대사 부도라고 전해온다: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因果의 법칙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혹여 일어날 수 있는 반달리즘을
미리 경계한 것일까.비석이 서 있는 평지에서 20여m 떨어진 언덕 위
숲속에 숨듯이 앉아 있다.덕분에 노출된 비석은 두 번에 걸친
반달리즘에 피해를 보았지만 부도는 별 탈이 없었다.
비문을 지은 이는 許 筠(1569~1618)이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광해군 때 역모 계획에 연루돼 참수를 당한 후 곳곳에 남아있던
그의 행적까지 지워진다. 사명대사비 著者 자격도 마찬가지다.
직위를 기록한 8字는 의도적으로 훼손당했다.
용케도 이름 두 字는 살아남았다. 1차 반달리즘이다 .
1943년 일제강점기에는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에게
네 조각으로 깨어지는 2차 반달리즘을 당한다.
다행히도 2년 만에 해방이 되었고 1958년 복원되었다.
허균 집안은 아버지(許曄)와 누이(허난설헌)까지 문장가 5명을
배출한다.언젠가 형 허봉(許篈)과 사명대사가 긴 글 외우기 시합끝에
대사가 이겼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마침내 사명은
허봉에게 당신의 모든 문서를 맡길 만큼 친한 사이로 발전한다.
어느날 동생 허균을 서울 강남 봉은사로 데려와 대사에게 소개한다
대사의 첫 인상은 :기골이 훤칠하고 얼굴은 엄숙하다:고 허균은 기록한다.
3년후 형은 죽었고 그 역할은 동생 허균이 떠 맡았다.
戰亂통에 허씨 집안에서 보관한 대사의 문서도 兵火라는 반달리즘을
피해가지 못한다. 승려, 제자들이 보관했던 일부 자료를 모아
대사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허 균에게 서문을 의뢰한다.
:두 사람은 형님 아우로 칭하는 친한 사이로 누구보다도 대사를 잘 알고있다:
(弟兄之交,知師最深) 이라고 허균은 자부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비문까지 짓게 된 것이다.
대사는 승려 모습보다는 늘 장군역할이 더 부각되면서 이로 인한 내부힐난을
항상 감수하면서 살아야햇다.허균 역시 비문 말미에 :대사가 중생들로 하여금
혼돈의 세계인 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는
일부 세평을 언급할 정도다. 뒷날 대사는 가야산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세간의
정서에 대해 歸去來辭로 답변한다.
三日公行(삼일공행)不逆君命(불역군명)夜半歸山(야반귀산)不負師訓(불부사훈)
사흘동안 영의정 벼슬살이 한 것은 임금의 명을 어길 수가 없는 까닭이요
한밤중에 산으로 돌아 온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원철 書, 2020.6.12.字 신문에서 베끼다)본훈 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