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 청백리 재상 具致寬: 책을 읽고나서
능성구씨 7세조 具鴻과 太祖 李成桂가 :表從兄弟:라는 사실은
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다보니 일찍부터 알고는 있었는데
7세 具鴻 祖께서는 初名은 行列字인 成字 斗字 였으며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節義를 지켜(杜門洞 72賢의 1인)
그 後에 鴻으로 改名을 하였습니다.
저(능성구씨 28세 本 字)의 21대조 左政丞派祖가 되십니다.
아래로 동생 成亮, 成老가 있는데 각 判安東派祖, 都元帥派祖가
되십니다. 성로는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하러 갈 때 ,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부하로 강원도 副元帥로
참여하여 조선 건국 후 에 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됩니다.
(현 L.G그룹 直系派祖이시다)
좌정승파의 유래를 책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나라 姓氏門中 族譜, 성화보(안동권씨 1492년)가정보(문화유씨1565년)
을축보(강릉김씨 1565년) 다음으로 乙亥譜(능성구씨 1575년)를 발간한
구봉령(退溪門人1560년 別試 乙科1위 급제자)과 구사맹(16대 仁祖의 外祖)
두 분이 있었는데 구봉령(호:백담, 충청관찰사 역임)이
宣祖 때 領相 洪暹과 담소하던 중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松都(개성)를 순행하다가
동대문 밖에서 잡초 우거진 들판 전지 사이에 우뚝 선 옛 비석을 직접 보았는데
:高麗左侍中具鴻之墓:라고 쓰여 있었다. 영의정 홍섬은 홍자경의 후손으로
홍자경은 나(구봉령)의 5대조 공조정랑(具宗秀)의 매부인데 먼 姻戚간이다.
여기의 구종수는 구홍의 넷째아들이다. 즉 구홍의 첫째사위가 南陽人 洪自敬이다.
却說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와 구홍의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
구홍의 둘째 사위가 한양조씨 趙仁壁의 셋째 아들 趙候이다.
조인벽은 태조와는 처남매부 간이다 즉 조인벽의 부인이 태조에게는 同腹妹氏인
貞和宅主이다. 구홍은 태조의 매부인 조인벽 과 사돈간계 였다.
이래서 구홍과 태조사이를 :表從兄弟:라고 하였다.
구홍의 셋째 사위는 문화유씨 柳暲인데 태종대 영의정을 지낸 柳廷顯의 아들이다.
구홍의 첫째 아들 宗之는 고려 우왕때 문과급제 후 太宗 代 名臣 안성부원군 이숙번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들이고 호조참판을 역임중 막내 宗秀의 태종의 세자인 양녕대군과
惡緣으로 셋째인 宗裕와 함께 3형제가 죄를 받아 모두 斬首를 당한다.(1417년. 被禍)
둘째 宗節은 咸吉道節制使로 外地에 나가 있어 禍를 모면한다.
구홍의 姑母夫로 李茂가 있는데 太祖 代 開國原從功臣이고 태종조 定社1등공신,
佐命1등공신,인데 그 후 獄事로 終生하게 된다. 그간 미확인 궁금증 첫째가
나의 派祖이신 具鴻 祖께서 左政丞派祖로 실제로 좌정승 벼슬을 지냈는지라
위에 나오는 선조 대 領相 홍섬은 구봉령과 담소 중 : 내가 왕실 족보를 관리하는
관청인 宗簿寺(종부시) 提調가 되었을 때 왕실족보인 璿源錄(선원록)에서 구홍의
이름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太祖와 具鴻이 表從兄弟가 된다는 사실이 틀림없으며 ,
개성 동문 밖에 具鴻의 墓가있고 :高麗左侍中具鴻之墓: 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하였다.
실제 구홍의 官職은 高麗史 와 高麗史節要 에 密直副使(정3품) 밖에 언급되지 않아
(고려우왕 11년 9월) 左侍中 역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 묘비,자료를 통해
高麗左侍中(조선조 左政丞) 까지 역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내가 갖고 있는 綾城具氏 左政丞派譜 卷之一 에 기록된 文句를 옮겨 써 본다.
七世 鴻 號 松隱 重大匡 沔城君 源流 三重大匡門下左政丞 丞沔城府院君 麗亡
入 杜門洞 李太祖以左政丞 屢徵不就.諡文節 遺命不書李朝官贈
墓開城府南面禮成江上 栗谷義菴洞文貞公塋下
麗史公初諱成斗 見麗祖將盡改名鴻 取色斯擧之意也 又按松京誌 曰
及公之殁子孫 書李朝官啣則旌帛自裂如是者三改書麗啣
譯 ): 7세 홍 호 송은 중대광 면성군 원류 삼중대광문하좌정승 승면성부원군 려망
입 두문동 이태조이좌정승 루징불취 시문절 유명불서이조관증
묘개성부남면예성강상 율곡의암동문정공영하
려사공초휘성두 경려조장진개명홍 취색사거지의야 우안송경지 왈
급공지몰자손 서이조관함칙정백 자열여시자 삼개서려함
2열에 있는 이태조가 좌정승벼슬로써 여러번이나 불렀으나 不就라 취하지 않았다
4열에 고려사에 공의 초휘는 성두이고 고려조정이 다 함을 보고나서
이름을 고쳐 홍 이라 하엿다.
5열에 공이 죽고 자손들이 명정에 이조관함을 비단에 쓰니 곧장 저절로 찢어지고
세 번이나 고려관함을 썼다고 하였다.
또한 綾城具氏 족보에 5세 技의 사위로는 孟裕 가 나오는데
新昌人 子 希道 한성부윤 希道 子 思誠 左相 이라 쓰여 있다.
5세 技 의 사위는 孟裕이고 아들은 希道이고 희도의 아들은 思誠이고
左相(좌의정)을 지냈었다. 즉 외손자가 그 유명한 맹사성 대감이시다.
또한 5세 榮儉(鴻의 祖)의 첫째사위로 문화유씨 柳繼祖가 나오는데
유계조는 고려 공민왕 때 收復京城一等功臣. 과 己亥擊走紅賊一等功臣에
책록된다.(1363년)
외손자로 柳亮은 (1355~1416) 아버지는 고려 밀직사 유계조이며
어머니는 고려 면성군 능성구씨 5세 具榮儉의 딸이다.
1382년 고려 문과 급제 이후 朝鮮開國原從功臣 책록
1401년 태종 원년에 佐命功臣 4등에 이름을 올린다.
1413년 文城府院君이 되고
1415년 右議政에 이르고 시호는 忠景이다.
文化柳氏 忠景公派 派祖이다.
5세 榮儉의 넷째 딸은: 選入元朝 :라고 쓰여있는데
이는 그 당시 貢女制度가 있어서 고려국의 처녀를 뽑아서
원나라 조정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 분명 그런 사유가 있었어라.
고려 25대 忠烈王,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28대 충혜왕,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까지 고려왕은 모두 충성忠 字를 앞에다 붙여야만 했었다.
31대 공민왕에 와서야 이를 벗어났다.
이게 小國이 꼭 큰나라에게 이행하는 첫째조건 以小事大 이던가.
2025.5.24.土.16:18분 능성구씨 世川先達門中 28世 本勳 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