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百濟太妃 墓誌銘 中國 西安서 出土
의자왕 증손녀 남편은 "나쁜 남자야"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부 묘지명 발굴 (서울=연합뉴스)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묘지명과 함께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의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같이 발견된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됐다. << 문화부 기사참조 >>
첫부인 효용상실하자 '헌신짝' 처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중국에서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남편 이옹(李邕)의 묘지명과 함께 같은 무덤에서 발굴되고 공개됨으로써 이 남편 또한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옹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증손자로서 당 황실 일원이며, 제후왕에까지 책봉된 적이 있는 까닭에 이번 묘지명 외에도 그의 족적은 다행하게도 문헌에서 제법 찾을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이옹은 "나쁜 남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출세와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먼저 출세를 위해서는 권력은 있으나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을 첫부인으로 맞아들이더니, 정국의 변화에 따라 이 여인이 효용 가치를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가차없이 자기 손으로 부인의 목을 벤 인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중 고조 이연의 아들 22명과 그 후손의 행적을 정리한 항목에 의하면 이옹의 할아버지는 이연의 15번째 아들이자 '괵왕'에 책봉된 이봉(李鳳)이며, 아버지는 측천무후 집권 초반기에 조주자사(曺州刺史)를 역임한 이굉(李宏)이다.
당시 당나라는 황제의 아들을 비롯한 황족들을 각 지역 제후왕(諸侯王)으로 책봉하는 소위 분봉제(分封制)를 가미해 지방을 다스렸으므로, 이렇게 분봉된 제후왕은 맏아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이옹의 직계 조상은 이미 셋째 아들인 아버지 때부터 '괵왕'이 될 수는 없었다.
나아가 정국에서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측천무후가 당 왕조를 단절시키고 주(周)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측천무후는 중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래의 당 황실 친족들에게 대대적인 '과거사 청산' 바람이 몰아쳤다. 이 와중에 이옹의 사촌형으로서 괵왕이라는 제후왕으로 있던 이우(李寓)라는 사람 또한 688년에는 제후왕의 지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기간에 이옹이 어떤 처지에 내몰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씨 집안에 다시 서광이 찾아온다. 측천무후가 죽고 중종(中宗)이 황제에 복위하면서 당 황실이 부활한 것이다.
이에 편승해 이옹 또한 큰집으로 넘어갔던 '괵왕'이란 제후왕 타이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구당서에 수록된 그의 짧은 열전에서는 "이옹이 위서인(韋庶人)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이때부터 중종 시대에 남다른 총애를 입어 비서감(秘書監)이 되더니 갑자기 또 '괵광'으로 고쳐 책봉되어서는 (중앙정부와는 다른 별도의) 지방정부를 열고 관리까지 두었다"고 했다.
위서인이라는 여자의 배경을 이용해 벼락출세했다는 뜻이다. 위서인은 글자 그대로는 위씨(韋氏) 성을 지닌 서인(평민여자)라는 의미지만 중종의 정비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던 위황후(韋皇后)를 말한다.

백제 의자왕 증손녀 묘지명 발굴 (서울=연합뉴스)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의 묘지명이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의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과 함께 발견됐다.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부여태비의 가계와 생애, 인품 등을 기록했다. << 문화부 기사참조 >>
이옹이 어떤 방식으로 위황후에게 접근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용케도 황후의 여동생과 인연이 닿아 그를 아내로까지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벼락출세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행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이 위황후의 여동생이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같은 구당서 중 외척(外戚) 일원인 위온(韋溫)이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에 의하면 위황후의 여동생은 남편이 태상소경(太常少卿)이라는 벼슬까지 지낸 풍태화(馮太和)라는 사람이지만 남편이 죽자 이내 이옹에게 개가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이옹은 출세를 위해 최고 권력자의 여동생으로서 과부가 된 위씨를 아내로 삼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위씨부인은 남편 풍태화의 생전에는 숭국부인(崇國夫人)이라고 불리면서 언니를 등에 업고 역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옹에게 다시금 시련이 닥친다. 위황후가 얼마 뒤 실각하고 평민으로 쫓겨나 '위서인'(韋庶人)이 된 것이다. 이옹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위황후 주변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는 마당에 그 일원인 그 자신은 자칫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이옹은 이 위기를 실로 드라마틱한 기법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괵왕에 책봉된 지) 한달 남짓만에 위씨(韋氏.위황후)가 실각하자 이옹은 칼을 빼어들고는 그 처(위씨부인)의 목을 베어서는 조종에다 바쳤다"고 했다.
자신의 출세 도구였던 부인을 그냥 내친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가 직접 죽이고, 그 목을 베어 조정에 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가 "당시 세상인심이 비루한 행동이라고 여긴 까닭에 (그는) 심주자사(沁州刺史)로 강등됐고 그 주(州)의 사무를 몰라 봉읍(封邑. 분봉받은 땅) 또한 삭감당했다"(구당서 이옹 열전)고 한다.
그렇지만 이옹은 이번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경운(景雲) 2년(711)에 다시 괵왕에 책봉되어 200호(戶)를 봉읍으로 하사받았으며 누차 승진하여 위위경(衛尉卿)이 되고 개원(開元) 15년(727)에 죽었다"고 했다.
이로써 보면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이옹이 첫 부인인 위씨를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뒤에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옹의 행각이 부여태비 묘지명에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김영관 관장은 "뜻밖에도 묘지명에는 그런 내용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부여태비가 두번째 부인이라는 사실도 빠져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된 이옹 자신의 묘지명에는 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발견된다고 김 관장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