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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는 누구? 도산 안창호가 절대 우세하다.

한문역사 2025. 6. 24. 14:46

애국가 작사자’ 누구인가

수정 2014.02.1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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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이지만 독립운동을 하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가 유력한 작사자로 거론돼 왔다. 집단창작설이란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지난해 6월 흥사단에서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새로 가열됐다. 윤치호 유족은 미 애틀란타 에모리대학에 기증한 애국가 친필본을 유력한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내년 해방 70주년을 앞두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안민석 의원과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 등은 최근 미국을 방문해 관련 증거를 살펴보았다. 윤치호 설을 지지하는 혜문 스님과 안창호 설을 주장하는 오동춘 흥사단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의 글을 싣는다.

■ 1907년 안창호가 영감 떠올라 지은 ‘애국찬미가’가 원형

순국 애국자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 흥사단이 지난해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4년간 연구한 결과 1955년 이후 논란이 많은 애국가 작사자는 육십 평생 독립운동만 하다 순국한 도산 안창호임이 바로 진리요. 정의임을 알 수 있었다.

 

1904년 8월22일 우리나라에 고문정치, 보호정치를 펴는 제1차 한일협약에 일본공사 하야시와 당시 외무대신 서리였던 친일인사 윤치호가 함께 서명하고, 이듬해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를 본 도산은 나라의 위기를 느끼고 1907년 2월20일 신민회를 조직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어 3월 경칩 무렵 찾아간 선천교회에서 부르는 찬미가 소리를 듣는 순간 시의 영감이 떠올라 그길로 평양으로 올라가 이틀간 금식기도를 하며 사철을 배경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찬미가를 지어 선천교회에 보냈다. 영국 민요곡에 얹어 부르는 이 애국찬미가는 교회는 물론 선천 일대 애창곡이 되었고 오늘의 애국가 원형이다.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은 사실은 1907년 3월20일 대한매일신보에도 보도되어 있다.

애국가는 한 편의 시이므로 작가의 생애와 창작 동기 및 배경 그리고 정서와 사상을 문학 비평방법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도산의 애국가 창작 동기와 배경은 선천교회 김정수 권사의 목격증언과 도산의 독립운동을 상하이에서 도운 윤형갑의 직접청취증언이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도산 비서로 3년간 함께 지낸 구익균도 동아일보 대담(2011년 10월25일자)에서 “빙그레 웃음 띤 도산이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고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윤형갑에게 도산은 “내가 애국가 작사자임을 당분간 밝히지 말라. 이 노래가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처럼 널리 불릴 때까지 가사도 고치지 말고 가만두어라”면서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

도산이 지은 애국가는 도산의 인격과 애국사상이 담긴 주권재민 혁명가다. 그러나 윤치호는 도산의 애국가 가사를 변조해 1908년 6월25일 역술 재판 찬미가에 황제충성가로 옮겨놓았다. 도산은 황제시대에 반역에 해당되는 애국가 작사 기록을 문헌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윤치호의 황제충성가는 생명을 잃었다.

도산의 애국가 작사설 증거를 더 살펴보면 이광수 부인 허영숙도 자유신문(1955년 4월20일자)에 도산이 애국가 작사자라고 밝혔고, 충북 세광중학교 황진섭 선생이 1950년대 만든 음악교본에도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로 기록해 1988년 3·1절 특집 방송을 하던 KBS에서 찾아가 확인하기도 했다. 이밖에 도산을 존경하는 이광수, 주요한, 강재환, 이흥호, 장리욱, 정영모 등이 도산의 인격과 생애에 비추어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임을 밝혔다.

도산은 21세 때 그가 세운 점진학교 교가 점진가를 지었고 이어 거국가, 학도가, 애국가 등 30편에 가까운 노래가사를 지었다. 1908년 도산이 세운 대성학교를 비롯해 흥사단, 상하이임시정부 등에서 애국가를 우렁차게 앞서 부르며 애국가 보급에도 앞장섰다.

1955년 정부는 미 대사관 요청에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로 통보하려다 언론에 흘려 시끄러운 논란을 지금까지 빚고 있다. 이제 정부는 흥사단이 발표한 논문(2012년 8월22일 한국프레스센터)과 흥사단이 2013년 3월 발행한 저서 <애국가와 안창호> 등을 잘 살펴본 후 2015년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가 남북 칠천만 겨레의 스승 도산 안창호임을 공식 발표해 주길 바란다.

<오동춘 | 흥사단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 위원장·시인>

■ 윤치호 스스로 작사자라고 밝힌 ‘친필본’ 면밀한 검증 우선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 확정을 위한 심의를 진행했다. 당시 국편의 심의 결과 윤치호 작사설이 11 대 2로 우세했으나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부결돼 현재까지 ‘작사가 미상’ 상태로 남아 있다. 그 당시 보고서를 살펴보니 “1907년 윤치호 작이 위조가 아니라면 윤치호 작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최남선 위원장의 언급을 남긴 채 종결됐다.

윤치호가 자신이 작사가라고 밝힌 친필본은 1990년대 유족들이 에모리 대학에 기증했다. 그렇다면 애국가 작사가의 규명을 위해서는 윤치호 친필본 확인과 친필 여부 검증을 가장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1월31일 오후 2시 에모리 대학이 소장한 윤치호의 친필본을 열람한 것은 그런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유족들의 동의하에 원본을 열람하면서 사실 좀 놀랐다. 윤치호 친필본에는 이른바 노익장이라고 할 만큼 힘이 담긴 글씨가 기괴하고 원숙한 필체로 구불구불 숨 고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개성이 묻어나는 작품을 누군가가 대신 작성한 위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했다.

친필본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희(친히) 써주신 것”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것을 두고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쓰여진 기록이므로 위작이거나 가치가 없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문서가 갖는 사료적 가치는 작성 시점이 1907년이냐 1945년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애국가 작사가라고 밝혔다는 점에 있으므로 작성 시기의 문제는 일단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윤치호 친필본의 위작 논란은 윤치호의 친필 여부에 초점이 모아져야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모리 대학에서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원본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1908년 <찬미가>라는 교회 찬송가집을 번역 출판했는데 <찬미가>의 14장에 현행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찬미가>는 ‘윤치호 작’이 아니라 윤치호 역술(譯述)이므로 작사가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유길준이 <서유견문록>을 저술할 때 ‘집술’이라고 기재한 것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개화기의 지식인들은 ‘역술’ ‘집술’ 같은 언어로 자신들의 저작물을 남기는 풍조가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1908년 윤치호 역술이란 표기가 지닌 부족함은 1907년 윤치호 작이란 친필본의 존재로 보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1910년 신한민보에 윤치호 작 ‘국민가’란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가 수록된 기사도 에모리 대학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문헌기록을 토대로 볼 때 애국가와 윤치호가 지닌 연관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이다.

윤치호 친필본 열람을 놓고 일부 사람들은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기 위한 행보가 아니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필본을 열람하는 것은 애국가 작사가 규명을 위한 증거들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일 뿐 윤치호를 옹호하거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주요 작사가가 친일파란 이유로 애국가 작사가란 사실이 부정되거나 ‘작가 미상’ 상태로 남겨두려 해서도 안된다. 사실은 사실로서 충분히 규명되어야 할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민족의 노래가 된 애국가를 언제까지 작가 미상의 상태로 방치할 것인가. 정부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 8월15일까지 애국가 작사가를 규명하기 위해 즉각 심의기구를 설치하기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

 

<혜문 |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조계종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