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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名家) Ⅵ - 조봉암,이병도,김동진,김재준,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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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조봉암 - “백성 배부르게 하는 것이 정치” 이승만에 맞서다 간첩누명 사형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좌익계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정치인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대권을 겨루다 ‘사법살인(司法殺人)’을 당한 진보 세력의 주도 인물이다. 대법원은 그가 간첩죄로 사형당한 지 52년 만인 지난 1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간첩죄 등으로 기소돼 1959년 사형당한 진보당 당수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진보당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을 수정하려 했을 뿐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로 볼 수 없다’며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원심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밝혔다. 조봉암의 장녀 호정(84)씨는 그동안 부친의 신원(伸寃)을 위해 진력했다. 1950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부친의 비서로 일했던 그녀는 팔순이 되어 있었다. “제가 서른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6·25전쟁 때 납북돼서 사촌오빠 부부와 제가 아버지 옥바라지를 했지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경찰들이 집에 상주하면서 남편(이봉래 전 예총회장)을 감시했지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에 들어서자 맹견이 컹컹 짖어대며 반겼다. 조호정씨는 1959년 2월 27일에 있었던 ‘지금으로부터 진보당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언도한다’는 주심 김갑수 대법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했다. 오후 1시50분 김 대법관은 판결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김정학·양명산·이동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고인에 대한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 조봉암은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전세용·이상두는 각 징역 2년에 처한다.” 조호정씨는 “재판 과정에서 ‘평화통일론’ 문제는 슬며시 꼬리를 감추고 육군첩보부대 소속 대북첩자이자 북을 왕래하는 대북상인 양명산을 등장시켰다”라고 했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양명산 아저씨는 상하이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이지요. 약수동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만날 때면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네가 상하이에서 태어난 호정이구나. 상하이에서 너를 본 기억이 있어’라고 말씀하셨지요.” 판결이 끝나자 재판부는 곧바로 퇴정했다. 방청객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눈물이 뒤범벅된 가족만이 일어설 줄 몰랐다. 그날 이후 조호정씨는 부친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다.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 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던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아버님은 무슨 운명이 그다지 기구하시기에 일제 때는 항일투사로 구사일생을 하고, 6·25 때는 ‘반역자 조봉암을 없애라’는 공산당 벽보가 제1착으로 서울 거리를 휩쓸다시피 했고, 오늘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시던 대한민국 이 땅에서 사형수의 신세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박사님! 저희 아버님의 항일 역사를 보나, 해방 후 악질 지주와 싸우며 농지개혁을 단행한 공을 보나 죽음을 불사한 반공 이념을 보아서도 절대로 간첩이 될 수 없고, 간첩죄를 씌워서 죽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탄원서는 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탄원서를 직접 전달하려고 자택으로 찾아갔으나 이화여대 스승이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만나주지 않았다. 다시 교수실로 찾아갔으나 박 여사는 탄원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내가 뭐라고 한담’ 하시기에 ‘선생님, 어쨌든 꼭 전해 주세요.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라고 간청했어요. 그러자 ‘두고 가봐. 전해는 줄게’ 하세요. 교수실을 나서는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변호인단이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이해 7월 30일 재심은 기각됐고, 다음날 오전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의 상황을 조호정씨의 증언을 따라 재구성해 본다.(월간조선 2007년 11월호)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30분. 형무관이 감방으로 왔다. 조봉암은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감방 문이 열리고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형무소 본건물을 빠져나와 ‘고민통’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섰다. 길가에는 몇 송이 꽃이 피어 있었다. ‘이곳에도 꽃이 피는구먼, 그런데 향기가 없어.’ 조봉암은 혼잣말을 했다. 그는 머리를 산뜻하게 가다듬고 평소에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었다. 가슴에는 ‘2310’이란 수인번호를 붙이고 있었다. 현장으로 가는 길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집행관과 형무소 간부들 앞에 태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봉암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 구절(누가복음 23장 22~23절)을 읽어달라고 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조봉암은 그 옛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환상을 불러 침통한 마음을 조용히 달래며 마지막 숨결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청했지만 규정에 따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봉암은 유언을 남겼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조호정씨는 말을 잇는다. “당시 홍진기 법무부 장관도 차일피일 미루다 어쩔 수 없이 결재를 했지만, 그렇게 빨리 형이 집행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홍 장관은 만리포 해수욕장으로 여름 휴가를 떠났답니다. 그곳 호텔 식당에서 ‘曺奉岩 死刑執行, 31日 西大門刑務所(조봉암 사형집행, 31일 서대문형무소)’라고 쓰인 벽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조호정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에 서울 수표교 근처의 장택상씨 집에 갔다. 장씨가 몇 곳에 전화를 했지만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뒤이어 김춘봉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오후 3시30분. 김 변호사가 힘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이날 밤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길에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운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조봉암은 이마 부분에 약간 검은빛을 띠고 있을 뿐 잠자듯 평온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시위를 우려한 경찰의 통제로 조문객은 200여명에 불과했고, 장택상씨도 조문하지 못했습니다. 강화 선산에 모실 겨를이 없어서 망우리에 모셨습니다.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다가 1961년 김충현 선생이 ‘竹山 曺奉岩之墓(죽산 조봉암지묘)’를 써 주셨는데, 그 일로 김 선생이 곤욕을 치렀답니다.”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것은 간첩 혐의 때문이다. 1심에서 무죄로 판결나자 ‘용공판사 물러나라’는 우익단체의 시위가 있었다. 그 뒤 2심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나왔다. 일반 국민은 의혹의 눈으로 이 재판을 바라보았다. “당시 기자였던 내가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이 사형당한 그날 형무소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기자가 다가가자 ‘당신네들은 언론에 있으면서 무엇을 했단 말이오? 감투가 아무리 좋아도 죄 없는 생사람의 생명마저 빼앗을 수 있소?’라고 언론을 원망했다는 보도였다.”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남 사장의 증언은 계속된다.(‘조봉암 선생 명예회복을 소망합니다’ 동아일보 2009년 8월 18일자) “그로부터 몇 달 후 자유당 정권 치하의 법원을 출입하면서 직접 들은 이야기들, 관련자들의 회고 및 자유당 정권 말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종합해보면서 그의 간첩혐의가 조작되었다는 의심을 점점 깊이 하게 됐다. 검찰이나 사법부의 권위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권력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듬해인 1960년 마산에서 4·19혁명의 불이 붙자 자유당 정권의 검찰, 경찰 및 특무대가 합동해서 부정선거 규탄시위 배후에 북한의 공작이 있는 것으로 조작하려다가 중단한 일도 있을 정도였다.” 조봉암은 1899년 10월 29일 강화군 선원면에서 농사짓던 조병창(曺秉昌)과 강릉 유씨 사이의 3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조봉암이란 아호는 ‘곧고 청청한 대나무가 부러지기 쉬우니 그 밑에 산을 넣어 산같이 너그러우라’고 김찬 선생이 지어주었다. 조봉암은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 부내면에서 면서기로 일하다 3·1운동을 맞는다. 그는 향리에서 시위를 주동하다 서대문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세상에 대한 눈이 떠졌고 애국심에 불타게 됐다.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자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내가 걸어온 길’ 조봉암) 그의 첫사랑도 이때 찾아왔다. 조봉암은 3·1운동 때 제1여자고보(현 경기여고)에 다니던 강화 부농의 딸 김이옥(金以玉)과 함께 시위 격문을 찍고 태극기를 그려내는 일로 밤을 지새운다. 조봉암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김이옥은 자주 면회를 갔고, 두 사람은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 그러나 김이옥의 집안에서는 ‘가당치 않다’고 극력 반대한다. 조봉암은 사랑을 포기하고 1921년 도쿄로 떠나 주오(中央)대학 정경부에 입학한다. 조봉암의 일본 유학을 당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강화도 부내면 관정리에 거주하는 조봉암군은… 재작년 조선독립만세 관계로 인하야 1년 유여의 철창생활을 하다가 만기출옥하야 재가(在家) 정양 중이더니 금반 유학차로 거(去) 7일 상오 7시30분발 부산행 열차로 동경을 향하얏다더라.” (동아일보 1920년 7월 11일자) 그해 박열 등과 함께 재일유학생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한다. “나는 처음에는 흑도회까지 조직하였으나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생각에도 지식적 충족이나 관념적인 만족으로가 아니고 무슨 조직을 가지고 힘을 만들어서 일본놈과 싸우고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되고 또 독립이 된 뒤에는 사회주의 사회를 결성해야 된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가 걸어온 길’) 조봉암은 1922년 7월 귀국해 베르흐노이진스크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하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다.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23년 귀국해 혁명동지 김조이(金祚伊)를 만나 이듬해 결혼한다. 김조이는 동덕여고를 나온 좌익투사였다. 그녀는 당시 좌경지식여성들의 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의 핵심멤버로, 박헌영의 처 주세죽과 함께 맹렬여성투사로 통했다. 1927년 어느날 조봉암은 상하이에서 첫사랑 김이옥을 만난다. 조봉암에게 순정을 바쳐온 그녀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이화여전 음악과에 재학하던 중 폐병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과 통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다가 몰래 여비를 꾸려 조봉암을 찾아 상하이로 온 것이다. 상하이에서 두 사람은 신혼살림을 차렸고, 그 사이에서 호정씨가 태어났다. 김이옥은 조봉암의 활동을 열심히 도왔다. 공산당원이 되어 기관지 ‘조선지광’ ‘혁명’ 등의 편집을 도왔다. 그러나 둘 사이의 행복은 짧았다. 1932년 조봉암이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자 김이옥과 조호정은 강화로 돌아왔다. 김이옥은 1934년에 눈을 감는다. 1939년 출옥한 조봉암은 일제의 엄한 감시 속에서 미강(쌀겨)조합장으로 일한다. 이즈음 조봉암은 별거 중이던 첫부인 김조이와 재결합한다. “아버지는 그 조합에서 일하시는 동안 빈민들을 돕는 데 힘쓰셨지요. 이때 혁명동지인 김조이 여사와 재결합하셔서 저를 키우셨어요. 그분은 6·25전쟁 때 납북되셨지요.” (조호정씨) 조봉암은 1945년 1월 일본군 헌병대의 예비검속으로 구금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오후에 석방된다. 인천에서 광복을 맞은 조봉암은 1946년 5월 공산당 노선을 비판하는 편지를 박헌영에게 보내 공산당과 결별한다. “조봉암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 준다. 악수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 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남재희 칼럼 ‘프레시안’ 2009년 7월 30일자) 1948년 5·10선거에서 인천지역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장관에 임명되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에 크게 힘썼다. 봉건적인 토지소유제도를 철폐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한다는 그의 소신을 편 것이다. 조봉암은 1950년 2대 의원에 재선되며, 국회부의장에 당선된다. 1952년에 실시된 2대 대선에 무소속으로 나서 낙선하나 초대 부통령이었던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를 눌러 크게 주목을 받는다. 그는 1956년에 진보당을 창당하고,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조봉암의 측근이었던 전세용씨의 회고담에 의하면 진보당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3분의 1은 진보계이고, 3분의 1은 동암(서상일)계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각종 정보기관원인 ‘정보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때 지방에서 거의 선거운동을 못했다는 증언이다. 신문지에 쓴 벽보 약간 붙여놓고 한 지역에서 잠깐 연설을 하다가 경찰들에 억류될까봐 급히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만 했던 그런 떠돌이식 엉성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언론인 남재희 증언) 조봉암은 당시 민주당과 후보 단일화 협상 중,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여 자동으로 야권의 단일 후보가 된다. 그러나 민주당은 태도를 바꾸어 조봉암 지지를 거부하며, 이승만의 504만표에 비해 216만표로 패배한다. 조봉암은 대구를 비롯한 전국 20여개 지역에서 이승만을 눌러 보수세력을 압박한다. “조병옥 박사는 1956년 10월 국회 본회의에서 ‘만일 자유 분위기의 선거가 이뤄졌다면 이 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진보당 실험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억압되지 않았으면, 아버지의 정치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죠.” (조호정씨) “그는 진보주의 정치이념과 평화적 통일 방안을 신봉했는데, 1958년이란 시대적 환경은 너무 엄혹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시대를 너무 일찍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김구가 통일에 대해서 보였던 열정과 같이 조봉암이 ‘평화통일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념은 그후 역사적 진행 방향과 맞아떨어졌음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특별부록) 조봉암은 1남3녀를 두었다. 아들 규호(63)씨가 있고, 맏딸 호정씨의 딸 이성란(52)씨는 섬유패션업자이며 유수현(57)씨와 결혼했다. 조봉암은 호정씨 외에 임정(65), 의정(62)씨 두 딸을 뒀다. ----------------------------------------------------------------------------------------- 내가 본 조봉암 - 조병선 전 농림부 장관 비서 죽산 조봉암 선생과 선친은 어려서부터 강화도 한 동네에서 보통학교를 함께 다니던 죽마고우다. 조봉암 선생은 중국 노령으로 가셨고, 선친(조광원)께서는 하와이로 가서 국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 그런 인연으로 조봉암 선생께서 농림장관을 하실 때, 나는 비서로 그분을 모셨다. 그분은 평소 소련이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예 말씀이 없으셨고, 백성을 배부르게 잘살게 하는 것이 곧 정치라고 하셨다. 성격이 너그러워서 혹 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질러도 문책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 한마디로 가르치는 포용력을 지니셨다. 서민적 풍모에다 아랫사람들을 아들 딸처럼 다독이셔, 마치 동네 아저씨처럼 모시기가 편했다. 철기 이범석 장군과 가깝게 지내 대소사를 자주 의논하시곤 했다. 국회의원 선거 때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운동해 당선되셨다. 농림장관 당시 농촌진흥청장이었던 강정택씨를 데려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수원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27. 이병도 90세에도 ‘한국유학사략’ 출간 100여권 저서·논문 남겨, 미국역사학회 회원에도 선임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는 한국 사학계의 태두(泰斗)이다. 그는 일제하 진단학회(震壇學會)를 창설하여 일제에 맞서는 ‘한국학의 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문교부 장관, 학술원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등의 중책을 맡아 대한민국의 교육·학술·문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문헌과 사료를 바탕으로 삼는 실증사학을 정립하였다. 그의 학맥을 잇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대다수가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병도는 1896년 8월 14일(음력)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 노곡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鳳九)와 경주 김씨 사이의 5남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병도는 우봉 이씨로, 고려 명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공정이 시조이며 조선 숙종 때 이조·형조판서를 지낸 농재공(農齋公) 이익(李翊)의 후손이 번성했다. 이병도는 농재공의 10세손이다. 이병도의 맏형 병묵(丙默)은 영천군수와 승지를 지냈으며 그 아들 재령(宰寧)의 부인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동생 계경(桂卿)이다. 둘째형 병훈(丙薰)은 구한말 부위(副尉)로, 그의 딸 인남(寅男)이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부인이다. 셋째형 병희(丙熙)는 명필가로 유명하며 넷째형 병열(丙烈)과 함께 이왕직의 예절을 맡아보는 전사(典祀) 벼슬을 지냈다. 이병도의 누이동생이 윤치영의 첫 부인이다. 이병도는 10대 중반까지 집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5세에 부인 조남숙(趙南淑)과 결혼한다. 처가는 평양 조씨로 장인 조성근(趙性根)은 구한말에 육군참장을 지낸 무관이었다. 부인은 진명학교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워 영어회화에 능통했다. 영어를 잘하는 부인과 신식 공부를 하는 처남에게 자극받아 신학문을 접한다. 가족 몰래 보광학교 중동학교, 일본강습소 등에 다닌다. “1910년 한 가을날 15세의 소년 이병도씨가 우리집에 와서 나의 누나와 혼례의 예식을 올렸다. 이로써 그이는 나의 매부가 된 것이다. 그때 우리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머리를 깎았는데, 내 주먹만한 상투를 하고 관을 쓴 새 신랑의 머리는 좀 서툴러 보이기만 하였다.… 혼인 후 어른들의 신랑 평은 양호하였다. 나이 어린 데도 인사성이 바르고 행동거지가 숙성하다고 칭찬이 대단했다. 일찍이 한문 공부를 많이 했고, 또 엄격한 구식가정에서 훈육을 잘 받아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유감없는 구식박사가 된 것이다.” (조백현 학술원 회원 ‘이병도 선생 추모문집’) 1915년 보성전문을 거쳐 와세다대학에 진학한 이병도는 일본사 교수인 요시다 도고 박사가 쓴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이라는 책을 읽고 ‘한국인에 의한 한국사’ 전공의 길을 택한다. “그는 보전에서 만국공법에 흥미를 느꼈고, 그것이 통신강의록 입시준비를 통한 일본 대학 유학으로 이어져, 당초 서양사를 공부하려 했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사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인 교수로부터도 자극을 받아, 결국 한국사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고구려 대수당(對隨唐)전쟁에 대한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하고 대학을 졸업했는데, 23세 때였다.” (‘앞서 가신 회원의 발자취, 이병도 선생’ 대한민국학술원 2004) 191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이병도는 와세다 대 1년 선배인 최두선 중앙고보 교장의 알선으로 그곳의 교원이 되어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고 영어도 가르친다. 이즈음 안서 김억(김소월의 스승)의 요청으로 문학 동인지 ‘폐허’에도 참여한다. 또 중동학교에까지 야간 강사로 출강하였는데 격무로 건강을 해쳐 요양을 받기도 한다. “선생은 일찍이 일정하의 암흑기에 비록 빈한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시 냉돌과 빈대를 벗삼아 학구에 전념하여야 했고 시종 내 나라 역사 연구를 일인에게 맡길소냐며 민족적 항쟁심과 소명감에 투철하였으며, 30대 중반에 한때 중병을 이겨낸 후로는, 평생 주(酒)·연(煙)에 조심함은 물론 아침 세수 시 전신마찰과 시간 반 정도의 조조(早朝) 산책을 게을리하지 않는 등 오로지 극기와 절제의 노력으로써 일관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역사가의 유향’ 진단학회편) 이병도는 젊은 시절 늑막염을 앓은 후부터 평생 한겨울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냉수마찰을 하는 의지와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의 아호의 유래에 대해 제자 허선도 교수가 ‘추념문집’에서 밝히고 있다. “선생의 아호 두계(斗溪)는 처음에 杜桂(桂洞에서 杜居하는 學人)에서 출발하여 삼청동으로 이사한 후 그곳(三淸洞·서울 북쪽, 北은 北斗와 通)에 두거(杜居)한다는 뜻에서 동음이의의 斗溪로 정하셨다 한다. 그러나 우리 후학들은 모두가 이를 ‘두고계장(斗高溪長)’, 즉 북두(北斗)와 같이 높고 장강(長江)과 같이 길다는 뜻에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이병도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자 도쿄제대 조선사 교수였던 이케우치의 추천으로 직장을 옮긴다. “그는 교원의 자리를 벗어나 연구자로서의 지위와 기회를 얻은 셈인데, 당시 한국사 연구자료가 거의 일제 관변 측에 독점되어 있는 현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는 전임자인 수사관보(修史官補)의 자리에서 22개월 만에 물러났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일본인들 틈새에서 연구와 편찬 업무도 힘겹고 불편하였을 것이다. 다만 무급촉탁으로 자료 이용의 길은 열어두었다.”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일조각) 이병도는 일인들만 볼 수 있던 규장각 도서를 많이 접해 한국사 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경력은 후일 식민사관 논쟁의 빌미가 된다. 이후 이병도는 계몽사학자인 이능화, 안확, 황의돈, 권덕규, 문일평, 이중화 등과 학문적 토론을 하며 스스로 ‘7인 그릅’으로 불렀다. 이병도는 1934년 진단학회 설립을 주도하며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학술지를 발간하여 일제 학계에 당당하게 맞선다. 황국사관에 젖어 있던 일본 사학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우리 고유의 국명인 ‘진(震)’과 단군의 ‘단(檀)’을 합해 ‘진단학회’로 한 것이다. “진단학회는 3·1운동 이후 고조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결실로 세워졌다. 이 무렵 한국인으로서 그 방면에 뜻을 두고 일본의 대학에 유학하거나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에서 수학한 젊은 학자들이 점차 등장하면서 학술연구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 우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한 손진태·김상기·이상백·이선근 등이 이병도의 후배로서 한국사 연구에 뜻을 둔 사람들이었다. 한편 경성제대 출신으로는 조윤제·이희승·이숭녕·방종현 등이 한국어·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한국사 분야의 신석호, 미학 미술사 방면의 고유섭, 농업 경제를 연구하는 박문규도 있었다. 또 연희전문 문과 교수로 백낙준·최현배·김윤경·이윤재도 참여하여 실로 당시 한국학 분야를 망라한 걸출한 학회였다. 찬조회원으로는 ‘7인 그룹’의 선배 계몽사학자와 조만식·김성수·송진우·윤치호·이광수 등 사회적 명망가 26명이 참여하였다. 이병도는 창설 당시부터 진단학회를 국제적 시야에서 폭넓게 운영하며 주목을 받는다. 1945년 8월 16일 진단학회는 총회를 열고 재건에 착수한다. 정치단체도 아닌 학술단체의 이처럼 빠른 순발력이 놀랍다고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동면해 온 한국학자들의 학구 의욕이 얼마나 절실했던지를 실감시켜 주는 구체적 사례인 것이다. 이병도가 그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이병도는 또 국사 강의에 큰 힘을 쏟는다. 일제는 일찍부터 교육과정에서 한국사를 배제하였고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연구조차 금지시켜 광복 후 한국인의 대부분은 한국사에 까막눈이었다. 그러므로 진단학회에는 국어와 국사 강의 요청이 폭주하여, 이병도는 김상기·신석호와 함께 여러 차례 국사 강의에 나선다. 특히 국사를 가르칠 교수 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강습회도 수개월 동안 개최한다. 이병도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창설에도 힘쓴다. 광복과 더불어 거의 일본인 일색이었던 교수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경성제대는 폐쇄되고 서울대가 그 뒤를 잇는다. 문리과대학에 사학과가 설치되어 이병도가 주임교수로 이끌어 간다. 교수진은 이병도를 비롯하여 손진태·이인영이 한국사를 맡았으며 뒤에 유홍렬과 강대량이 추가되었다. 동양사는 김상기와 김종무·김성칠·김일출이 담당하였으며 서양사는 김재룡이 전임을 맡았다. 이병도는 1947년에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을 맡아 대학의 연구·학습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쓴다. 그는 서지학에도 깊은 식견을 지녀 그전에 이미 서지학회를 조직하여 학술잡지 ‘서지’를 간행한다. 특히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경성제대가 소장했던 규장각도서라는 큰 보물을 이어받아 관리하였기 때문에 그 소임은 막중했다. 그는 6·25전쟁을 맞아 1·4후퇴 때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을 부산으로 소개하여 안전하게 보존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갔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돌아와 이번에 실물이 공개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파리도서관에 가서 귀환에 애써온 박병선 박사가 선친 생전에 출국신고차 오셨어요. 그 자리에서 선친께서는 외규장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시고 그 반환전략도 상세히 일러주셨지요. 그런 인연 때문에 최근 와병 중인 박병선 박사 살리기 모금운동을 조선일보가 벌였을 때 우리 형제 가족들도 발벗고 나섰지요.” (3남 태녕씨) 이병도는 1949년 연구서로 ‘고려시대의 연구’(을유문화사)와 ‘조선사대관’(동지사)를 낸다. ‘고려시대의 연구’는 이병도가 오랫동안 쌓아온 고려의 지리·도참사상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종합·발전시켜 체계화한 것이다. 이 연구는 독창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광범한 문헌 검토와 현지조사를 거듭한 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사대관’은 이병도 자신이 쌓아온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화한 개설서이다. 이병도는 1954년 서울대 대학원장이 되며 1960년에 초대 학술원 회장이 된다. 이해 4·19혁명 뒤에는 문교부 장관이 되어 사태수습에 힘쓴다. 당시 고위공무원을 모두 교수직에서 발탁하여 화제가 된다. 차관에 이항녕 고려대 교수, 고등교육국장에 김증한 서울대 법대 교수, 편수국장에 전해종 서울대 문리대 교수, 문화국장에 김은우 이화여대 교수, 과학교육국장에 최상업 서울대 문리대 교수, 사회교육국장에 조병욱 서울대 사대 교수를 임명하여 마치 ‘교수 내각’ 같다는 평을 받았다. “그때 허수반은 당시 고려대 총장으로 있던 유진오 선생에게 4·19학생혁명이 고려대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을 들어서 문교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유 총장은 학교를 떠나기 어렵다고 사의를 표했다. 그래서 허수반의 보성전문 동기동창인 이병도 선생에게 문교부 장관을 맡겼다. 강경하게 사양하시다가 할 수 없이 문교부 장관이 된 이병도 선생은 유진오 선생에게 당신이 맡아야 할 직책을 내가 맡게 되었으니 그 대신 차관을 고려대에서 보내라고 요청하셨다. 유 총장은 나를 불러 그 동안의 경과를 말하고 차관으로 가라고 하였다.… 이병도 장관의 시정방침은 철저한 민주화였다. 우선 학생들을 통제하던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켰다.” (이항녕 ‘역사가의 유향’) 이병도의 제자로는 전해종·고병익·한우근·민석홍·김원룡·이기백·김철준·윤무병·노명식·조항래·김재만·차하순·민두기·이태진·최몽룡·민현구 등이 있으며, 모두 학계의 중진들이다. 이병도는 27권짜리 ‘한국사대관’ 등 100여권의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이 중에도 ‘한국유학사략’은 90세에 출간한 역저로 꼽힌다. 중국의 호적박사에 이어 아시아인에게 단 한 자리만 배정된 미국역사학회의 회원으로 선임되기도 한다. 이병도가 이처럼 방대한 연구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학구적 입장에서 70년에 걸쳐 오로지 한국사 연구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의 모함과 눈총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실증사학의 방법을 고수하여 정통사학의 기틀을 다지고 고수해온 집념이 열매를 맺은 셈이다. 그는 평생 엄격한 학문의 길을 다지고 가르쳤다. “이병도 선생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학생 시절에는 어려운 전공서적을 읽도록 해야 하네. 한 권을 정독하는 데 1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힘들여 읽은 책의 내용이 일생 동안 머리에 간직되는 것일세.’” (강신항 ‘역사가의 유향’) 이병도는 1989년 8월 14일 서울 한국병원에서 별세해 경기도 용인 선산에 안장된다. 이병도는 조남숙과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 이병도의 장남 기녕(작고·경성의전 졸업, 소르본대 의학박사)씨는 핵산연구의 선각자로 서울대 의대 교수와 대한생화학회 회장을 지냈다. 모수미(85·숙명여대, 매사추세츠대학원 졸업, 서울대 가정대 교수 역임)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맏아들 영무(67·미시간대 교수, 이학 박사)씨는 강일희(64·캘리포니아의대 외래교수)씨와 결혼했으며, 차남 웅무(65·이학 박사, 아주대 교수 역임, 팝스 대표이사)씨는 김웅수 장군(전 6군단장, 예비역육군소장)의 딸인 김미영(61·미국에서 석사학위 )씨와 결혼했으며, 딸 인혜(70·서울대 문리대 졸업, 와이오밍대 생물학 박사)씨는 지태화(71·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와이오밍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이병도의 차남 춘녕(95·구주제대농화학과 졸업, 서울대 농대 학장 역임)씨는 임옥순(87)씨와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장인 임명재는 경성의전 교수와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지냈다. 장남 장무(66·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 졸업, 아이오와주립대 공학박사)씨는 서울대 총장을 지냈으며 이옥희(서울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차남 건무(64·서울대 고고학과 졸업)씨는 중앙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박명숙(홍익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딸 영주(54·숙명여대, 연세대 대학원 졸업, 사회과학도서관 실장 역임)씨는 부남철(외국어대 정치학 박사, 외국어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이병도의 3남 태녕(87·서울대 화학과 졸업, 이학 박사)씨는 서울대 교수 문화재위원으로 8만대장경의 보존작업에 참여하였다. 권하자(79·이화여대 약학과 졸업)씨와 사이에 1남3녀가 있다. 아들 경무(53·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충북대 의대 교수이며, 장녀 미경(54·서울대 농대 농학과 졸업, 농학 박사), 2녀 선경씨(서울대 음대 졸업, 보스턴대 음악학 박사), 3녀 희경씨(이화여대 영어교육과 졸업, 런던대 미술학 박사)가 있다. 4남 동녕(84·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런던대 플라즈마물리학 박사)씨는 포항대 교수를 지냈으며 김용우 전 국방장관의 딸 김미희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뒀다. 장남 명무(48·밴더빌트대, 노스웨스턴대 의대 졸업), 차남 진무(46·코넬대 의대 졸업)씨와 딸 은규(50·메릴랜드대 졸업, 의학 박사)씨가 있다. 이병도의 5남 본녕(76·하버드대 물리학 박사)씨는 MIT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이유한(MIT석사)씨와 사이에 2남이 있다. 장남 계무(MIT대 졸업,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씨는 미라이스대 교수, 차남 도무씨는 MIT대 분자생물학 박사이다. 이병도의 장녀 순경(91·경기여고 졸업)씨는 화가 장욱진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운경(서울여의전 졸업, 한국병원 부원장 역임)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민헌기씨와 결혼했다. 3녀 승희(73·세종대 졸업)씨는 임종도씨와 결혼했으며, 4녀 계희(70·서울대 졸업)씨는 황천봉씨(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와 결혼했다. ------------------------------------------------------------------------------------------ 내가 본 이병도 -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 두계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대학에 입학하여 국사 과목을 수강하면서이다. 두 번째 시간을 마치자 곧 4·19혁명이 발생하였고, 선생님께서는 뒤이어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으로 입각하셨기 때문에 우리 학년이 선생님의 강의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학기부터였다. 문리대(서울대) 7강의실은 넓은 교실이었지만 다른 과 학생들이 많이 몰려와 늘 붐볐다. 그러나 대가였던 선생님은 우리와 너무 먼 거리에 계셨고, 당신의 저서인 ‘국사대관’을 불러주시고 보충설명을 하시는 강의 내용도 우리에게는 너무 어렵고 궁벽진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멀고 높은 데 계시는 외경스러운 존재였고, 접근이 불가능한 거인이었다. 몇 해 뒤에 나는 선생님의 주례로 혼인을 하였고, 다시금 여러 해 뒤에는 두계학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선생님의 커다란 은덕을 입게 되었다. 두계 선생님은 진단학회를 늘 분신처럼 여기셔서 당신의 사재를 진단학회에 내놓고 떠나갔다. 28. 김동진 - ‘봄이 오면’ ‘가고파’ ‘조국찬가’… 국민애창곡 1000여곡 남겨 김동진(金東振)은 국민 누구나가 평소 즐겨 부르는 가곡 ‘봄이 오면’과 ‘가고파’를 작곡한 한국의 대표 작곡가다. ‘내 마음’ ‘수선화’ ‘목련화’ 등 주옥 같은 가곡으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온 그는 신창악곡 오페라 ‘심청전’ 등 10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열정적인 음악인이다. 북한 공산당에 반동으로 몰린 김동진은 6·25전쟁 때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월남한다. 그후 ‘행군의 아침’ ‘조국찬가’ ‘6·25의 노래’ 등 수많은 군가와 국민가요를 지어 북한 공산당의 ‘탄압’에 복수했다. 그는 서양의 발성법과 우리 고유의 판소리를 결합한 신창악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한류음악’의 원조이기도 하다. 김동진은 1913년 3월 22일 평남 안주에서 김화식(金化湜)과 백금주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김찬성에 이어 목사 일을 보던 부친은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지휘하다 2년6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다 조부와 함께 순교당했다. 김동진은 강화(江華) 김씨로 경주 김씨의 갈래이다. 신라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鍾)의 7세손을 기세조로 한다. 이 사람은 고려 명종 때 하음백(河陰伯)에 임명되어 당시 강화에 내란 평정에 공을 세워 ‘강화 김씨’를 하사받았다. .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남도 안주다. 나의 할아버지가 본촌인 평남 숙천 송저리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후 얼마 뒤에 목사가 되셨다. 본촌에서 나와 안주로 와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목사 일을 보았으며, 나의 부친도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계속 안주에서 목회를 하셨다.… 안주는 작은 도시이며 경의선 철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경편철도로 신안주에서 20리 정도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안주는 옛 성터로서 고적도 많고 산수가 아름답다. 그 유명한 청천강을 끼고 안주역에 도착하면 백상루가 눈앞에 나타난다. 백상루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껴 누각에 오르면 북으로 청천강의 기다란 강이 맑고 빛나게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가고파’ 김동진 자작 에세이) 김동진은 어린 시절 부친이 목회하던 교회의 풍금을 치며 놀다가 배운 노래를 짚어보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부친은 여름방학을 맞아 귀갓길에 바이올린을 사다준다. 부친은 평양신학생이었고, 김동진은 11세 초등학생이었다. 이즈음 겪은 3·1독립만세 사건을 김동진은 떠올리고 있다. “할아버지가 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으며, 아버지가 교회의 조사일을 보고 계실 때였으므로 만세사건의 사전 계획은 전부 우리 집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태극기를 야밤중에 몰래 숨어 제작하던 일이며 선언문 등의 전단을 프린트하는 작업, 그밖에 독립만세 부를 장소 등을 전부 집에서 일본 순사놈들의 눈을 피해가며 은밀히 계획하였다. 그때 그 비장하게 굳어 있던 어른들의 표정은 무섭기조차 하였다. 비록 어렸을 때 일이지만 비밀리에 하던 일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며, 만세 부르던 당일 교회에서 일제히 일어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가며 만세를 부를 때 나도 어린 마음에 들떠 그 꽁무니를 따라 나갔다.” (‘가고파’) 김동진은 1927년 안주 유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에 진학해 미국인 선교사 말스베리에게 바이올린 피아노 화성악과 대위법 작곡법을 배운다. 전 국민의 애창곡 ‘봄이 오면’은 그가 중학 5학년(18살) 때 작곡한 것이다. “나는 숭실중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학교 음악실에 가서 혼자 바이올린 연습을 끝내고 풍금을 치면서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소 애송하던 파인 김동환님의 시 ‘봄이 오면’에서 ‘건너 마을 젊은 처자’의 악상이 뇌리에 떠올랐다. 동시에 나의 손가락은 어떤 선율을 짚고 있었다. 곡이 완성된 후, 나는 한 방에서 같이 지내던 장택욱군에게 처음 그 노래를 배워주어 함께 불렀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삽시간에 온 기숙사에 퍼졌으며 숭실전문학교에까지 파급되어 모르는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애창되었다.” (‘호심의 독백’ 김동진) 김동진은 문학에도 상당히 흥미를 가져 ‘봄이 오면’뿐만 아니라 주요한의 ‘부끄러움’, 이광수님의 ‘외붓 한 자루’ 등은 늘 외우고 다니던 애송시였다. 그는 말스베리 선생으로부터 정식으로 바이올린 지도를 받는다. 또 피아노 조율법도 배워 용돈을 벌게 되어 이후 학교 생활에 큰 도움을 받는다. 1932년에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해서도 말스베리 선생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며, 성악은 루스 부인에게 배운다. 루스 부인은 숭실농과대학 선생의 부인으로 유명한 성악가였다. “나는 늘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학의 작곡과를 지망한 학생이나 작곡하는 이들에게 ‘작곡가가 꼭 되고 싶다면 먼저 유명한 연주가가 되라’고 권한다. 연주를 못하고는 음악 세계를, 특히 멜로디 세계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음악의 언어, 즉 작곡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작곡한다는 것이 음악 세계의 사람으로서 음악의 언어를 잘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주는 꼭 필요하다.” (‘가고파’) 대학 1년생인 김동진은 대동강 뱃사공들의 흥겨운 뱃노래를 ‘어떻게 하면 그대로 오선지에 옮길 수 있을지’를 궁리한다. ‘어야지어 어야지여’…. 그는 공부방으로 돌아와서는 끙끙 앓으며 곡을 붙여나갔다. 가사가 미처 다 정리되지 않아 곡부터 작곡됐으며, 훗날 김동진과 동창인 시인 김현승이 처음 가사를 붙였고, 더 먼 뒷날 이 곡에 절수(節數)를 늘릴 적에 역시 그의 친구인 시인 양명문에게 의뢰해 절수를 늘렸다. ‘뱃노래’는 김동진의 절친한 학우인 이용준(바리톤)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평양 음악회에서 발표해 대단히 좋은 평을 받는다. 대학 2학년 때 김동진은 양주동 선생으로부터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이은상의 시조 ‘가고파’ 10수(首) 강의를 들었다. 그 시조가 너무나도 큰 감명을 주어 곧 작곡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김동진은 그때 이 시조를 현제명이 작곡해 늘 독창하는 것도 듣고 또 그 악보도 보았다. 자기도 이 시를 가지고 한번 작곡해 보겠다는 열정에 북받쳐 즉흥적 감흥이 떠오를 때마다 노트에 적어 두곤 했다. “하루는 어떤 기회로 ‘봄이 오면’과 함께 ‘가고파’를 나의 스승에게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면서 ‘너는 작곡가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 바이올린만 아니라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등을 배우도록 하라’ 하시면서 나에게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부 가르쳐주셨다. 이 노래는 그후 친구들이 많이 불러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이처럼 이 노래가 유명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며, 그 당시에는 몇몇 성악가들의 애창곡으로 무대에도 올려졌다.” (‘가고파’) 김동진은 나머지 6수는 ‘가고파 후편’이라고 이름 붙여 40년 후인 1973년에 완성시켜서 발표한다. “아마도 40년 만에 곡을 완성한 예는 음악사상 없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20대 작곡 감정과 60대의 작곡 감정이 전혀 다를 것이로되 예술이라는 것은 몸은 늙어도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내가 20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여 늘 숙제로 삼았던 곡을 60대에도 20대의 감정을 가지고 연결하여 완성한 것이다. 내가 작곡을 전공하게 된 동기도 이 ‘가고파’ 때문이었다.” (‘가고파’) 김동진 이야기를 하는 부인 이보림씨. 김동진은 숭실전문학교 영문과 재학 중 이미 6~7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당시 평양에서 명창 이동백이 이끄는 창극단의 심청전과 춘향전의 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훗날 신창악 운동의 밑거름이 된다. 김동진은 1936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 하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바이올린과를 택하며, 졸업연주회에서는 부루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 악장을 연주한다.(‘가고파’) 1938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김동진은 만주로 향한다. 당시 만주 신경에서는 새로 교향악단을 조직하기 위해 널리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부친의 친구인 신경교회의 김창덕 목사가 그를 꼭 그리로 오라고 종용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만주국 수립 10주년 기념 경축 음악회에서 한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만주 등 5개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할 때 일본 유학 시절의 작품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제1악장’을 직접 지휘해 대호평을 받는다. 가곡 ‘내마음’과 ‘수선화’는 당시의 작품인데, ‘수선화’는 낭만적인 성격의 그를 매료시킨 나머지 거의 즉흥적으로 건반 위에서 작곡된 것이다. 특히 ‘내마음’은 그가 늘 애송하던 초등학교 시절 은사 김동명의 시로서, 적공을 들인 작곡의 사연이 돋보인다. “신경에서 유명한 남호라는 호숫가를 산책하며 이 곡의 멜로디를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좀처럼 악상을 얻지 못하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조일(朝日) 통로를 걸어 동보극장 앞을 지나칠 때 돌연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의 선율이 떠올랐다. 나는 잊어버릴세라 입속으로 중얼대며 연습장에 와서 오선지에 옮기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이 곡이 완성될 무렵, 이인범·김생려씨 등의 음악인들로 구성된 후생악단이 신경에서 순회 음악회를 하였는데, 이때 이인범씨가 내 집에 놀러왔다가 아직 정리도 안 된 ‘내마음’의 초고를 그대로 갖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 노래를 불러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에 퍼졌던 것이다.” (‘목련화’ 김동진 가곡집) 1945년 8월 15일 김동진은 만주에서 평양으로 귀국한다. 평양국립교향악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조직해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약한다. 이 시기 작품으로는 ‘신 밀양아리랑’과 주요한의 시 ‘부끄러움’, 김영삼의 ‘섬색시’가 있으며, 만주 시절에 시작했던 ‘심청전’은 이때 비로소 완성한다. ‘가고파’는 광복 이후 공산치하 이북에서도 많이 불렸는데, 한번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돌연 국립극장장이 중지를 시켰다.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웃고 지나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이 문구가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니 현재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금지곡으로 찍어버렸다. 김동진은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숙청된다. 조부와 부친은 투옥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끝내 옥사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동진은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월남한다. 그때가 12월 4일. 김동진은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곡예하듯 건너야 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결의와 모험심이 강한 사람만이 철교 위를 다람쥐처럼 기어올라 대동강을 건너고 있는 서늘한 광경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부르면서 철교를 건넜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혹한이 몰아치는 북서풍의 차디찬 바람도 차갑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손끝이 아찔아찔하고 엉금엉금 옮기는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가고파’) 김동진은 그때 대동강을 건너면서 두 누이동생과 숙부도 만났다. 그중 한 누이동생 선옥(87)씨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임진강을 거쳐 서울에 온 김동진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헌병의 심문을 받는 순간 그들 일행의 신분을 확인해줄 증거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궁여지책으로 ‘당신 가고파라는 노래 아시오?’ 물었더니 의외로 두 헌병 모두 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그 노래를 작곡한 김동진이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한 헌병이 자기가 내 음악회를 본 적이 있다면서 그때의 상황을 말하라는 데까지 질문이 발전하고 나서야 두 헌병이 ‘가고파’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때 비로소 ‘가고파’가 오히려 여기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마음’ 김동진 가곡집) 이후 김동진은 군가보급합창단을 지휘하는 한편 ‘행군의 아침’ ‘병기애호의 노래’ 등 많은 군가를 작곡한다. 어릴 적 친구인 시인 양명문과 함께 향로봉을 비롯해 여러 번 일선 병사를 위문하며, 가는 곳마다 사단가, 부대가를 작곡해 ‘음악으로 보국’한다. 군 복무했던 사람들은 새벽에 ‘행군의 아침’을 부를 때마다 늘 뭉클한 마음이 솟곤 했다고 한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비록 군가이긴 하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새겨보면 김동진의 독특한 분위기가 와 닿는다. “‘행군의 아침’은 내려와서 맨 처음 작곡한 거예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찻간에서 작곡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조, 마이너를 좋아해요. 그래서 단조를 썼지.” (‘김동진 인터뷰’ 월간조선 1999년 3월호) 김동진은 해군정훈음악대 창작부장을 거쳐 1953년 서라벌예대 교수가 된다. 당시 주로 영화음악을 다루면서 소월 시에 곡을 붙인 ‘진달래꽃’ ‘길’ ‘초혼’ ‘못잊어’와 ‘창문을 열면’을 작곡한다. 1964년 경희대 음대 교수를 거쳐 1974년 경희대 음대 초대학장이 되며 1981년 예술원 회원이 된다. 김동진이 일생의 대작으로 꼽는 ‘심청전’은 1978년에 완성한다. 만주에서 쓴 것을 몽땅 찢어버리고 판소리를 배우면서 46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1979년 신창악회를 창설해 회장직을 맡는다. 신창악이란 판소리의 창법을 가곡과 오페라에 접목하려는 시도다. 우리 전래의 창이 구전으로만 전수되는 것이어서 이를 악보로 남겨 성악곡으로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1950년대에 문공부에서 판소리 채보사업이 있었어요. 그때 나운영, 김성태, 나, 셋이서 춘향전 판소리 채보하는 사업을 맡았는데… 그때 김소희한테 가서 1년 동안 집을 드나들며 배웠어요. 심사 결과 내 것만 오케이됐어. 국악 하는 사람들 모아놓고 채보한 대로 내가 노래 불렀거든요. 판소리 명창 임방울 알죠? 그때 그분이 새로운 판소리 명창이 나왔다고 그랬어요. 신창악에도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인재가 나와야 해요.” (‘김동진 인터뷰’) 김동진은 1986년에 판소리 채보집 ‘한국정신음악 신창악 작곡집’을 내며, 1990년에는 신창악 발표회를 연다. 김동진은 2009년 7월 31일 서울 금호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영락동산에 안장된다. 김동진은 월남해서 결혼한 이보림(83·재령 경신여고 졸업)씨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신영(60·경희대 체육학과 졸업)씨는 신일고 교사를 역임했으며, 차남 신원(50·미 코넬대 조경학 석사, 경희대 박사)씨는 경희대 교수로, 강현경(47·홍익대 조경학 석사)씨와 결혼했다. 딸 신화(55·서울대 음대 피아노과 졸업)씨는 강영재(60·미 조지아대 식품위생학 박사, 컨설팅 회사 운영)씨와 결혼했다 ---------------------------------------------------------------------------------------------------- 내가 본 김동진 -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동진 선생은 우리 가곡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구적 작곡가다. 그분의 작곡법은 곧 우리 후학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유절(有節) 가곡에서 통절(通節) 가곡을 만드신 분이다. 유절 가곡은 애국가 같은 것이다. 몇 수의 시가 있다면 각 수마다 똑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는 것이다. 김동진 선생보다 시대가 조금 앞선 홍난파나 현제명의 가곡이 유절 가곡이다. 이에 비해 통절 가곡은 각 수마다 다른 멜로디를 붙인 것이다. ‘가고파’가 그렇다. 각 수마다 그 시어(詩語)의 정서, 이미지를 살려 제각기 다른 곡을 붙이는 것이다. 가곡이 한국적이냐 아니냐라는 찬반론은 차치하더라도 김동진 선생이 한국 가곡의 한 정형을 만들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리 가곡을 애창 가곡 수준에서 예술 가곡으로 한 차원 높이신 분이다 -------------------------------------------------------------------------------------------------- 김동진(1913~2009)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평안도 사투리의 '가고파' 작곡가, 음악계서 그를 따돌림한 이유가…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부친은 김일성 비판한 죄로 옥사 그는 6·25사변이 터진 후 겨울에 뒤늦게 월남했다고 빨갱이라고 온갖 모략당해 '목련화'의 고독한 작곡가는 말년에 베토벤처럼 귀가 안들려 무척 고생했다 해방이 되던 해 가을, 나는 시골의 한 국민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어려서부터 다니던 장대현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일요일 예배 시간에 돌연 일본 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이 나타나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는 서북 장로교회들의 등대로 채필근·김관식을 비롯해 당대 가장 저명한 목사들이 시무하는 교회였다. 당시 담임목사가 김화식이었고 성가대를 지휘하던 청년 지휘자가 담임목사의 아들로 그 이름이 김동진이라고 했다.
해방 직후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옷은 일본 군복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김동진이 만주국에 신설된 신경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있었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그런 특이한 인연을 가진 우리 두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만날 일이 전혀 없다가 명지재단이 '기영회'라는 지식인들의 클럽을 만들어 장안의 유명 인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점심을 같이할 기회를 마련했다.
거기서 나는 90이 넘은 노인 음악가 김동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나도 노인이 되어 그런 자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김동진은 1913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서양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가 시무하던 교회의 풍금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와 화성학도 익혀 작곡도 할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 학도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던 그는 숭실학교 밴드부에 들어가 다른 악기들도 연주할 수 있는 소년 음악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동진은 중학생 시절에 김동환이 쓴 시 '봄이 오면'에 곡을 붙여 장차 작곡가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으며,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들어가 2학년 때 이은상 작시의 '가고파'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이렇게 시작하는 '가고파'는 여러 해 뒤에야 완성되지만, 그 가곡이 한국인 모두의 애창곡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나도 그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은 마산에 갈 일이 있어 그 파란 물을 바라보며 노래를 혼잣소리 높여 불러 본 적이 있다.
숭실전문을 졸업한 김동진은 동경에 있는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38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장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만주국으로 갔고 그곳에 새로 생긴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또는 작곡 담당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고 그의 아버지 김화식은 장대현의 강단을 지키면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나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니 독재자의 부하들이 그를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 그의 아버지는 구속되어 감방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아들이 감히 인민공화국을 배반하고 떠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6·25사변이 터지고 그 이상 버틸 수 없어서 김동진은 그해 겨울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시인 김동명은 김동진이 소학교 시절의 은사였다는 말이 있다. 김동진이 만주에서 일하던 1938년 은사의 시 2편에 곡을 붙여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수선화'이고 또 하나는 '내 마음'이다.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김동명의 '내 마음'은 오늘도 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적신다.
'내 마음은 호수요 /
그대 노 저어오오 /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진은 그 겨울에 뒤늦게 월남하였기 때문에 음악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육군정훈감실에서 '6·25의 노래'를 모집한 적이 있는데 김동진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가 작곡한 군가는 이북의 군가와 비슷하다느니 소련 군가를 닮았다느니 더 나아가 김동진은 빨갱이라느니 하는 온갖 중상모략을 참아야 했다.
가뜩이나 칼칼한 성격의 그가 사람을 멀리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공산 독재를 비판하다 옥사한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데 뜻밖의 시련이 그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던 것이다.
그러나 경희대 총장 조영식이 1963년 경희대 음대에 자리를 마련하고 정교수로 그를 초빙했을 뿐만 아니라 음대학장 자리에 임명했다. 그는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 학교에서 지독한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들었다.
학생들은 그를 따르고 존경했지만 그는 언제나 고독한 인간이었다. 경희대 창립 25주년에 조영식이 가사를 쓰고 김동진이 곡을 붙인 '목련화'는 엄정행이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고 또 불러 일종의 국민 가곡으로 승격하였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도 말년에는 베토벤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무척 고생하였다.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아마도 '가고파'의 멜로디를 혼자 읊조리며 하늘나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의 나이 백세가 가까웠다.
김일성의 횡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아버지를 거기서 틀림없이 만났을 것이다. 인생이란 괴롭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출처] : 김동길 단국대석좌교수,연세대명예교수<김동길의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 조선일보, 2018. 6.30.
29. 김재준 - 서울 경동교회 세운 한국 기독교가 배출한 행동파 지식인 회령 금융조합서 일하다 일본·미국 유학길 신학 공부하고 돌아와 간도서 강원룡·김영규 등 육성 1945년 서울 장충동에 경동교회 설립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4·19 가담 5·16 거치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 네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 등 고초당해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1901~1987년)은 한국 기독교계가 배출한 대표적 행동파 지식인이다. 그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표방하는 진보적 ‘생활 신앙’을 실천과제로 삼아 1960~1970년대 한국 교회가 사회참여에 앞장서는 기조를 제시했다. 그 자신이 민주회복운동의 전위·핵심으로 나서 지휘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진보개신교를 대표하는 서울 경동교회 창립자이기도 한 김재준은 강원룡·김영규·전은진·안병무 등을 간도 용정의 은진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선친께서는 아호대로 종교인으로서는 자유분방하게 살아가신 분이지요. 장공이라는 아호는 송창근 목사님께서 지어주셨다고도 하고, 선친 스스로 ‘구만리 장천과 비움의 공’이라고 하셨대요. 김정준 목사님은 ‘그의 생활과 사상이, 높고 넓고 푸르고 긴 창공 같아, 사람들이 그를 장공 선생이라 부른다’고 하셨어요.” (3남 관용씨) 김재준은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농사짓던 김호병과 채성녀 사이의 2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창꼴마을은 두만강 국경지대의 유폐된 산촌으로, 지금은 아오지탄광으로 유명하다. ‘창꼴’이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에 군량미 비축창고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김재준의 증조부 김덕영은 산지를 3만평쯤 개간하여 대농(大農) 소리를 들었고, 부친대에도 ‘집터 주위에 자연스레 펼쳐진 텃밭이 1만평쯤 한 필로 되어 있는’ 전답을 소유한 중농이었다. 모친은 경원지역의 실학파 거두 채향곡의 후손인 채동순의 3녀이다. 김재준은 다섯 살 때 부친이 훈장인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아홉 살 때 경월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하며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1915년에 회령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한다. 김재준은 회령구청 간접세과에 고원으로 취직하며 1917년에 장석연의 맏딸 분여와 결혼한다. 김재준은 결혼 후 웅기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한다. 이곳에서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을 보면서 민족의식이 싹튼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김재준은 평생 ‘신앙의 형제’이자 ‘신학적 동지’가 되는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을 만난다.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일하던 송창근 전도사가 독립운동 혐의로 징역 6개월 옥고를 치른 후 웅기에서 멀지 않은 그의 고향 웅산에 내려와 있었다. 창꼴마을과 달리 송창근의 고향 웅산은 일찍이 기독교회가 들어왔고, 송창근은 열세 살 때 집을 나와 간도로 탈출하여 간도 명동중학과 소영자 광서중학에서 공부한다. 송창근은 간도에서 이동휘의 애제자가 된다. 이동휘는 북간도 독립군 군관학교가 운영난에 부딪히자 문을 닫고 독립운동의 내일을 꿈꾸며 시베리아로 떠나면서, 함께 따라나서는 송창근에게 ‘너는 본국에 돌아가 목사가 되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 뒤 송창근은 서울에 가서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교회 전도사가 되어 일하다가 그 무렵 고향에 내려와 두 살 아래 청년 김재준을 만난다. 송창근은 김재준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지금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 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오.” (‘잊을 수 없는 만우’ 김재준) 김재준은 금융조합에 사표를 내고 서울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서울 견지동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운영하는 백부를 찾았다. 그러나 몇 달 후 백부가 경영난으로 어려워지자 김재준은 하숙생활을 하게 된다. “저금 잔액으로 몇 달을 버틸 수는 있었으나 김재준의 서울 하숙생활은 시골 중농의 경제력으로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내복도 의복도 없는 단벌 학생복으로 눈길, 눈보라와 맞서며 아현고개를 넘나들어야 했고, 하숙집 밥값이 밀려 이부자리를 밥값 대신 주인에게 떼이고 추운 겨울 거리로 쫓겨나기도 했다.” (‘김재준 전집’) 김재준은 정규 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해 중동학교 속성고등부와 서울 YMCA에서 공부한다.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총무 등이 민족의식과 신지식을 제공하는 샘터 구실을 해 김재준은 매주 일요강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또한 잡지실에 무시로 드나들면서 ‘개조’ ‘중앙공론’ 등 잡지를 읽었고 일본어로 된 문학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이 무렵 김재준은 숭동교회에서 열린 서울 장로교회 연합사경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화받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난 중생 체험’을 한다. 2년 후인 1926년 김재준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단돈 5원50전뿐이어서, 무작정 아오야마대학 신학부 졸업반에 재학 중인 송창근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기숙사 규칙을 어기면서 한동안 그의 방에 함께 기거하면서 막노동과 학원 청강, 도강을 한다. 얼마 후 고학생 합숙소에 잠자리를 정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낫토’ 장사, 건축 공사장 지하실 흙 실어 나르기, 잔디 깎기, 유리창 닦기, 서재 청소와 곳간 정리, 꽃나무 전지 작업, 식당 장작 패기 등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고학을 한다. “추운 겨울에 스팀도 없는 다다미방 기숙사에서 헌 외투 하나로 견디며, 식대가 떨어졌을 때는 하루에 식빵 두 쪽에 냉수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우면서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철인처럼 초연해 보기도 했다.” (‘김재준 전집’) 김재준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아주 특이하게 1928년에 졸업한다. 청강생으로 시작해 정규학생으로 등록된 적도 없는 데다, 수강 학기 수도 졸업 가능 학기에서 한 학기가 모자랐다. 생활이 어려워 학자금, 학우회비, 기숙사비 등을 제대로 제때에 낸 적도 없었다. “아마도 과묵한 조선 청년의 진지하고도 사려 깊은 학구적 태도와 방학 때마다 기숙사에 남아 엄청나게 독서를 하는 모습을 수년간 지켜본 학교 당국이었기에 그가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졸업생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김재준 평전’ 김경재) 졸업반 방학 때 귀국하여 종성·온성·경원·신아산·고건원·경흥·웅기 등 두만강 유역의 교회와 기도처를 순방하면서 설교와 강연을 한다. 졸업 후 김재준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프린스턴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던 송창근이 ‘졸업하면 곧장 미국 유학을 오라’는 권고와 함께 프린스턴대학 입학허가증과 1년 200달러 장학금 허락 통지서를 보내왔다. “지금이나 당시나 가난한 학생에게는 미국까지 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마침 숭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이재향 목사의 도움으로 재정보증서를 만들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서류와 수속을 거친 뒤에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그의 미국 유학 여비를 마련해 준 사람은 서울 YMCA 지도자 윤치호였다.…윤치호는 미래의 조선 독립을 꿈꾸며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특히 미국에 건너가 자연과학 분야와 신학 분야를 연구하려는 청년 유학생에게 태평양을 건너갈 선박료를 마련해 주곤 하였으므로, 청년 김재준은 서울 견지동 고가에서 윤치호 선생을 면회하고 여비 도움을 청했다. 윤치호는 김재준의 포부를 듣고 격려와 조언의 말과 함께 여비 100달러를 마련해 주었다.” (‘김재준 평전’) 김재준이 요코하마에서 탄 배는 열흘 만에 하와이에 닿고, 다시 나흘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안착한다. 그곳에서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를 거쳐 도착한 프린스턴역에는, 그곳에서 유학 중이던 김성락과 한경직이 마중 나와 있었다. “김재준이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보수주의, 특히 근본주의 신학을 공부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신학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건전한 신학은 극단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이다.” (‘김재준 평전’) 프린스턴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김재준은 1930년 가을 새학기를 맞아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 2학년에 등록한다. 고학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웨스턴은 장학금 조건도 좋았다. 더구나 그곳에서는 형제나 다름없는 송창근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프린스턴 시절처럼 웨스턴에서도 김재준은 식비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숙사 식당 웨이터, 키친 보이, 잔디 깎기, 농장 일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김재준은 1932년 석사학위를 받는 졸업식에서 히브리어 특별상을 받으며, 거의 모든 과목에서 최고 성적을 기록한다. 그러나 경제 공황을 맞아 장학금이 끊긴 데다 아르바이트마저 불가능해 김재준은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귀국해서 고향인 경흥군 일대의 교회를 순방한다. “나는 노회 뒷좌석에서 얼마 동안 방청했다.…내 인상으로는 은혜도 화평도 증발된 사무 절차뿐이었는데,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님들이니만큼 ‘정통 신학’ 일색이었다. 나는 좀 더 ‘복음적’인 신학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정통주의는 그대로가 ‘율법주의’여서 거기에는 자유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목사님들과 노회원 장로님들 얼굴은 평화 없는 ‘목사 탈(마스크)’로 굳어져 있었다.” (‘김재준 전집’) 이듬해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나 1936년 신사참배 문제와 민족교육금지 문제로 물러난다. 그의 자서전의 고백을 그대로 들어보자. “나는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초대교회 때 로마의 황제 예배 강요와 유를 같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 예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초대 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했다. 나는 평양신학 도서실에서 ‘성자열전’ 50여권을 한 번에 두세 책씩 빌려다 읽었다. 그중에서 우리와 비슷한 경우에 순교한 분들을 골라 순교자열전을 쓰기 시작했다.” 김재준은 숭실전문교장 마우리 선교사의 소개로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교사로 갔다. 간도 용정은 조선족의 독립운동과 특히 기독교계의 민족 교육열이 왕성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후일 한국 개신교의 큰 역할을 하는 수많은 제자를 육성한다. 강원룡·김영규·전은진·안병부·김기주·신영희·최동렵이 있었고 당시 김재준의 영향을 받았던 제자들이 광복 후 서울 경동교회를 중심으로 집결하여 ‘선린회’를 이룬다. “김재준 선생의 별명은 ‘천지 선생’이었는데, 강의할 때면 학생들의 얼굴은 보지 않고 교안 노트와 교실 천장만 자주 보곤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강원룡 목사의 회고담’ 기독교장로회 회보 2001년 6월) 김재준은 1939년 서울 숭동교회 김대현 장로가 사재 50만원을 내놓아 설립한 조선신학원의 설립 사무를 전담하며 이듬해 교수로 임명된다. 이후 그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일제강점기 말 조선신학원을 끝까지 지킨다. 광복을 맞아 김재준은 서울 동자동의 천리교 본부 건물을 불하받아 조선신학원의 기틀을 다진다. 아버지 김재준을 말하는 3남 관용씨. “김천의 만우, 신의주의 한경직, 그리고 서울의 나는 모두 조선신학원에 모였다. 셋은 학창시절의 맹우였다. 한국 교회를 세계 수준에 밀어올리기 위한 인물 양성, 그것은 자유로운 신학이다. 나는 구약을 전공하기로 해서, 학업을 마치는 대로 셋이 같이 일할 작정이었다. 이제는 일제가 물러갔으니 기회가 온 셈이다.” (‘김재준 전집’) 1945년 12월 서울 장충동에 경동교회를 세운다. 김재준의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사랑 정신과, 강원룡을 중심으로 한 ‘선린형제단’의 기독교적 사회봉사 정신이 상호작용하여 생겨난 교회이다. “경동교회는 장충동 1가에 있는 천리교 숙사에서 ‘야고보교회’란 이름으로 내가 맡았다. 지성인과 학생들을 위한 특수교회를 지향한 것이다. 나는 그때 신학교육 개혁운동에 바빠서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일 강단만은 맡아 줘야 하겠대서 동자동서 장충동까지 주일 아침 저녁, 수요일 밤, 식구들을 데리고 걸어갔다 걸어온다.” (‘김재준 전집’) 6·25전쟁 중 부산 피란살이에서 김재준은 남부민동에 천막을 치고 조선신학대학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바꿔 학장에 취임한다. 1953년에는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되어 기독교장로회가 탄생한다. 1960년 서울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4·19혁명을 맞은 김재준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교수 시위에 가담한다. 5·16 쿠데타 후 김재준은 말이나 글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다. 그는 1965년 7월 한경직·이해영·강신명·문재린·송두규·이태준 목사 등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들과 영락교회에 모여 초교파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운동을 벌인다. 이즈음 김재준은 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겸 명예학장으로 추대되며 1972년에는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된다. 이해 12월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김재준은 이듬해 3선개헌 반대 범국민위원장으로 추대되며 함석헌·천관우·이병린·지학순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을 맡는다. 김재준은 1971년 12월 6일 비상사태 선포 이래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할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 어른은 기관원을 따돌리려고 하지 않 고 품에 안고 다니셨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실 때 오히려 기관원에게 ‘고충이 많지?’ ‘지혜롭게 처신해!’라고 하셨다. 귀가하신 것을 보고 돌아가려는 기관원에게 ‘들어와 차 마시고 가라’ 하시며 사모님에게 차를 끓여오도록 하셨다. 때로는 신문사에 보낼 원고의 교정을 부탁하여 결과적으로는 그 말단 기관원이 보고할 자료를 얻게 해 주시기도 하였다.” (‘김재준 이야기’ 서도섭 서울노회 공로목사) 캐나다로 출국한 김재준은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1983년 귀국한다. 귀국 후 김재준은 함석헌 등과 함께 ‘재야원로간담회’에 참여하여 나랏일을 걱정한다. 민주화운동의 절정에서 박종철군이 고문받다 죽자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1987년 1월 벽두에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남겼다. 김재준은 그해 1월 27일 서울 한양대부속병원에서 별세, 경기도 여주군 남w한강묘원에 안장된다. 김재준은 장분여와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장남 은용(76·서울대 사학과 졸업)씨는 손행강씨(간호사)와 결혼하여 하륜(의사)·남희 남매를 두었다. 차남 경용(72·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한인교회 장로)씨는 정효순씨(간호사)와 결혼하여 하령·하준 형제와 딸 서희씨를 두었다. 3남 관용(70·한양대 건축공학과 졸업, 성북교회 장로)씨는 거제도 애광원에 근무하고 있으며 이정희씨(성북교회 장로,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와 결혼하여 명은·명혜 자매를 두었으며 명은씨는 조성철(한신대 졸업, 전주금암교회 목사)씨와 결혼했다. 김재준의 장녀 정자(작고, 정신여고 졸업)씨는 신영희씨(작고, 하얼빈의대 졸업, 중앙의원 개업)씨와 결혼하여 민섭(한양중학교장)·경섭(전 기상청장)·인섭·요섭·진섭 5형제를 두었다. 차녀 신자(81·한신대·동국대 국문학과 졸업)씨는 이상철씨(한신대 캐나다 유니언신학교 졸업,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씨와 결혼하여 정화·정선·정희 세 자매를 두었다. 3녀 혜원(77·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컴퓨터 프로그래머)씨는 장인철씨(한신대 졸업, 광고디자이너)와 결혼하여 딸 지영씨(회계사)를 두었다. ------------------------------------------------------------------------------------- 내가 본 장공 김재준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나는 1959년 광주의 백영흠 목사님의 소개로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장공 선생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분의 학문에 더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격에 더욱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교육자, 문필가, 사회윤리학자이다. 그분은 성경 문자 무오설과 경직된 교리의 신앙을 비판하고, 신앙은 삶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생활 신앙’을 강조했다. 김문환 시인이 말한 대로 김재준 목사는 우리 시대를 살고 간 ‘신선’이요 ‘작은 예수’였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여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른 자유인이 되고, 하늘 씨앗을 땅속에 심는 성육신의 영성으로 영글어,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지 200년 만에 대승적 기독교 시대를 연 선구자이다. 선교사들의 전도 수준에 머물던 한국 기독교를 세계와 통하는 자유분방한 기독교로 개혁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30. 최남선 - 최영 장군의 20대손 근대적 글쓰기로 문장혁명 ‘한글’ 단어 처음 사용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한국 근대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자이다. 3·1 만세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간 옥고를 치른 최남선은 1908년에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의 창간인으로 어문일치의 글을 써서 현대글의 기초를 닦았다. 또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우리 문헌의 보존·간행 작업에 앞장서 한국학 탄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일제 학자들의 어용 ‘단국신화’에 맞서 동북아문화사를 아우르는 최남선 특유의 ‘단군론’을 내세워 식민사관에 도전했다. 육당의 아우 각천 최두선은 중앙고교 교장·경성방직 사장을 거쳐 광복 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건국 유공자가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사장에서 제3공화국 첫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정치 안정에 힘썼으며,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1000만 이산가족찾기운동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하여 성사시켰다. 육당은 1890년 4월 26일 서울 중구 을지로2가 22번지에서 관상감(현 기상대장)의 기감을 지낸 최헌규(崔獻圭)와 진주 강(姜)씨 사이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동주 최씨이며, 최남선은 고려시대의 팔군도통사 최영 장군의 20대손으로, 중인 계급이었다. 중인은 지금의 사무관, 기술관 같은 정부 각 기관의 실무를 맡아보는 사람이다. 최남선의 부친 헌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늦장가를 갔다. “강원도 철원 근교로 낙향한 무관 통진부사 강위영이 과년한 딸에게 들어온 청혼을 거절했을 만큼 우리 집안은 어려웠다. 내 증조모가 된 그 딸의 ‘신랑 집의 가난이 어떻게 어린 신랑의 잘못인가?’라는 항변에 결국 허혼을 하긴 했지만, 혼례 후 새 내외가 서울 시집으로 떠나고서야 신랑이 놓고 간 빈 함을 열어 본 장모는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신랑감 내외가 동네 어귀 언덕에서 장모의 그 통곡소리를 들었다 하고, 덩달아 우는 신부의 손을 잡고 증조부는 재산을 모으겠다는 결심을 더 굳혔다고 한다.” (최남선의 손자 학주씨 ‘육당 최남선’) 23세 때 과거에 운과(雲科) 지리학 전공으로 합격한 헌규는 관상감 기감을 거쳐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에 이르렀고, 관직 외에 농력(農曆) 출판과 당초재 무역으로 재산을 크게 일궜다. “출사(出仕) 30여년 후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어린 두 아들에게 구국출판과 문장보국(文章報國)을 허락한 무렵에는 부의 규모가 기호(畿湖)에 만석거리 전답과 서울 사대문 안에 80채가량의 집과 가대(家垈)를 소유했을 정도다.” (‘육당 최남선’) 헌규가 근무하던 관상감은 중국 처자가 보내는 황력(皇曆·태양력)을 누구보다도 먼저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력을 농사에 맞게 농력으로 바꿔 목판 간행을 하면 저절로 돈이 되는 시대였다. 이렇게 해서 모은 종잣돈으로 중국 상인들에게서 약재를 받아 놓으면, 운 좋게 그 약이 필요한 역병이 돌아 약재값이 자꾸 뛰어 이문이 컸다. 그는 인품과 평판이 좋아 까탈 많은 중국 상인들도 그에게 많은 물건을 맡겼다. 무역을 통해 국제 정세에 눈뜨게 된 헌규는 같은 중인 출신 오경석과 유대치의 개화사업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고, 자신의 자식들도 그런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헌규는 자녀들에게 농부에게서 농산물을 살 때는 반드시 값을 더해서 사라고 일렀다. 며느리들에게는 음식 찌꺼기 하나도 하수구로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 했다. “조부께서는 엄동설한에 길을 가시다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덜덜 떨고 있는 걸인을 보시면, 거지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데려오시어 손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물을 따라 주시고, 헌옷가지라도 내어 주시며, 내일 아침부터라도 집의 대문채에서 하는 아침 대접을 받으러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그런데 이 걸인 대접도 큰 보답을 가져왔으니, 다름아닌 기미독립운동 때였다. 그들도 이 주인집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고 있었고 연락, 기타 물품의 운반 등 큰 활약을 하여 주었다.” (최남선의 차남 한웅씨 ‘용헌잡기’) 현진건의 조카딸과 결혼 최남선은 서당에서 글을 익히면서 12세 때에 황성신문에 투고했다. 역관 현정운(玄晶運)의 7자매 중 6녀 현영채(玄永埰)와 결혼한다. 개화기 소설가 빙허 현진건의 조카이다. 육당(六堂)이란 아호의 유래에 관해서는 ‘육당 연구’를 학위논문으로 쓴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생전에 들은 것을 전했다. “그분의 이름자 중에서 성과 항렬을 빼면 남는 것은 ‘남(南)’ 자뿐 아닙니까? 북두칠성의 반대쪽에는 남두육성이 있으니까, 남쪽에서 가장 귀한 것을 택해 육당으로 하셨다고 해요. 서재필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과 애국계몽운동에 가산을 모두 쾌척한 이회영과 최남선 집안에, 국권을 회복한 정부는 마땅히 그 재산을 보상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최남선은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어를 배우기 시작해 석 달 뒤부터 대판조일신문을 구독하여 일어를 익힌다. 1904년에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소년반장으로 일본으로 가서 도쿄부립 제1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유학 석달 만에 자진 퇴학하고 귀국한다. 이어 황성신문에 일화(日貨)배척 투고로 필화를 입어,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 민병도와 함께 한 달간 구류된다. 1906년에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여 대한유학생회보를 편집한다. 이해 6월에 열린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 문제가 의제로 되자 자퇴하고 귀국한다. “유학 중에 일본의 근대적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공부보다 국민계몽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국을 살리는 길은 국민을 계몽해 근대적 국민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국민계몽은 출판사업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엄친 최헌규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했고, 내 증조부 최헌규는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17세에 지나지 않은 아들의 사업을 허락했던 것은 평소 갑신정변의 실패를 안타까워해서였다.…증조부 최헌규는 그의 아들이 하겠다는 출판을 통한 계몽구국운동으로 혁명에 필요한 인적 기반이 창출되면 갑신정변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학주씨) 부친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받은 최남선은 일본에서 인쇄기와 기술자를 들여와 서울 상리동 21번지 맞은편, 지금의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터에 있던 집 두 채에 인쇄공장과 사무실을 차린다. 한 채에는 1층에 사무실, 2층에 편집실, 다른 한 채에는 인쇄공장을 두었다. 1907년 여름에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이 문을 열었다. 최남선의 집안 전체가 이 사업에 참여한다. 부친은 이익이라고는 거의 없는 신문관 사업에 16년 동안 계속 자금을 댔고, 장자 창선이 신문관 사주로 경영을 맡는다. 을지로 2가에 출판사 세워 신문관에서 이듬해 창간된 ‘소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다. 제호 ‘소년’은 요즘의 10대 소년이 아닌, 새로운 사상을 가진 새로운 세대를 뜻했다. ‘소년’은 근대 문물을 소개하는 잡지만이 아니었다. 도산 안창호와 최남선이 설립한 청년학우회의 기관지이기도 했다. ‘소년’은 4년 남짓 나오다 폐간된다. 최남선이 도산을 처음 만난 것은 1907년 일본에서였다. “도산 선생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한 시기의 역사의 배경은 독립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마지막 명운이 끊어지려는 위기에 처한 때였다. 당시 근대적 민족 자각으로서 진실한 독립국가를 찾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운동의 기운을 촉진시키는 ‘청년 이태리’ 운동이 우리의 모범이 되었었다. 이러한 이상과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미국에서 돌아오신 도산 선생을 도쿄에서 만나서 그의 지도하에 상의하였다.” (최남선 ‘진실정신’ 1954년) 이후 안창호가 먼저 귀국해 윤치호·이상재·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결성한다. 신문관이 설립된 해이며, ‘신민(新民)’ ‘신문(新文)’은 같은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교육진흥 민족사업육성 청년운동을 추진하는 청년운동 단체로 1909년 청년학우회가 출범했다. 청년학우회 결성에는 윤치호·차리석·이승훈·안태국과 함께 최남선이 참여하는데, 그는 다른 발기인에 비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약관의 젊은이였다. 최남선은 안창호의 부탁으로 청년학우회의 취지문을 작성한다. 첫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한번은 청년운동에 대한 슬로건, 즉 청년학우회의 취지서를 꾸며 보라는 분부였다. 그 내용의 말씀은 ‘우리 국가와 민족이 이렇게 쇠망한 근본 이유가 진실한 국민적 자각, 역사적 자각, 사회적 자각을 못 가진 데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청년운동(국민운동)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숭상하여야 한다. 언변보다는 실행을, 형용보다도 내용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무실역행(務實力行)이다’ 로 청년학우회의 취지서를 초안하라는 명령을 하셨다.” (‘진실정신’) ‘거짓말 말자’로 압축되는 무실역행 정신을 실천하는 청년학우회는 청년운동을 통해 근대 국민을 형성하고자 했다. 최남선은 ‘소년’을 통해 청년학우회의 취지·강령·동향 등을 알렸고, 전국을 다니면서 순회강연을 할 때 도산은 젊은 최남선을 단상에 세우고 소개했다. 최남선은 ‘소년’ 명사로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지만 수난도 덮쳐왔다.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 다수를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학우회도 해체됐고, ‘소년’도 절간됐다. ‘소년’이 폐간된 후 최남선은 어린이 잡지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를 발행하다가 1914년부터는 ‘청춘’을 발간한다. 문예 중심으로 편집하는 성년 대상 잡지였다. 필진은 이광수·홍명희·현상윤·권상로·이상협·진학문·민태원이었다. 신문관 시절 최남선은 근대적 글쓰기로 문장혁명을 일으킨다. ‘국주한종(國主漢從)’ ‘언주문종(言主文從)’으로 요약되는 최남선의 ‘신문장 건립’ 운동은 ‘소년’부터 일관되게 추진되어왔다. 그는 ‘소년’에 우리나라 첫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우리말을 ‘한글’이라고 이름 붙인 최남선은 ‘어린이’라는 순우리말을 처음으로 창안해 쓰기도 했다. 1914년 ‘청춘’에 ‘어린이의 꿈’이란 시를 발표하는데, 방정환이 1920년 ‘개벽’에 발표한 ‘어린이 노래’보다 6년이나 앞선 것이다. ‘아이들보이’ 제2호 10월호에서 쓴 ‘한글’이란 표현도 최초로 책에 쓴 것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그 경위를 밝히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제마다 ‘우리말’ ‘국문’ ‘언문’ ‘반절’ ‘조선글’ ‘배달글’ ‘정음’ 등 다르게 부르고 있었는데, 조선광문회는 조선의 고유한 문자에 새 이름을 주는 문제를 토의했다고 한다. 이때 최남선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을 제의했다. ‘한글’의 ‘한’은 ‘크다’와 ‘나라 韓’을 같이 의미한다. 최남선의 제안에 조선광문회 소속 어문학자들이 동의했다. 주시경 사후 ‘한글모’(조선어학회)의 회장을 맡게 된 최남선은 ‘한글’이라는 새 이름이 널리 보급되도록 노력했다. 최남선은 한글 쓰는 법의 한 예로 가로풀어쓰기를 창안하여 후일 발명되는 한글타자기 원리에 맥을 잇는 선견지명도 보인다. 독립선언서 판을 짜다 최남선은 1910년 12월 살림집을 삼각동 굽은다리(曲橋)로 옮기고, 부친의 사랑채 2층에 조선광문회를 창립한다. 그는 일제에 의한 약탈 반출로 희귀한 고서적이 없어질 것을 염려해 우리 문헌과 고전을 쉽게 풀어 간행하며,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의 한문 고전도 간행한다. 최남선은 이곳에서 당시의 지성인들과 다양한 문예활동을 벌인다. 박은식·장지연·유근·이인승·김교헌·현채 등과 사라져가는 고전을 간행하며, 주시경·권덕규·김두봉·임규 등과 우리말 사전의 편찬에 착수한다. 안창호·윤치호·최광옥·옥관빈 등과 청년학우회를 설립하고, 이광수·진학문·심우섭·이상협 등과 문장보국(文章報國)과 언론사업을 함께 한다. 박한영 스님과는 조선의 불교를 토론하며, 최린·송진우·현상윤 등과는 3·1운동을 계획해 독립거사를 주도한다. 조선광문회는 전국의 문화인·학자·애국지사들의 연락처이자 안식처, 피난처가 되는 당시 조선의 양산박이자 아카데미 구실을 한다.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직접 독립선언서의 판을 짠다. 3월 3일 일제에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고 1921년 10월 가출옥되었다. “할아버지는 밤에는 임규의 일본인 부인 고사와의 집에 숨어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낮에는 동지들에게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측과 교섭해 정주 오산학교의 설립자이자 기독교계 지도자인 남강 이승훈을 운동에 참여시켰다. 할아버지가 김도태를 정주로 보냈을 때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기독교계를 대표해 참가할 것을 쾌락했다.” (학주씨) 동명사 창립하고 신간회 주도 출옥 후 신문관을 해산하고 동명사를 창립한다. 1922년 9월 주간지 ‘동명(東明)’을 창간한다. ‘동명’에서 최남선은 3·1운동 후 민족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체성 정립을 향한 조선학의 수립에 진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는 ‘동명’ 제3호부터 ‘조선역사강화’를 20회에 걸쳐 연재하며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학을 세울 것’을 제창한다. 1924년 3월 일간지로 시대일보를 창간하나, 경영난으로 곧 물러난다. 이즈음 최남선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을 아우르는 단체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주도한다. “할아버지가 민족주의 경향의 신석우와 사회주의 경향의 홍명희를 연결시켜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 당신은 두 사람이 주도하는 것만으로도 신간회가 모든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학주씨) 이후 저술활동에 힘을 쏟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심춘순례’ ‘단군론’ ‘아시조선’ ‘백두산근참기’ ‘백팔번뇌’ ‘삼국유사해제’ ‘시조유취’ ‘조선유람가’ 등 역저들을 낸다. 1928년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며, 1939년에는 만주국 건국대학의 교수가 되어 후일 친일논쟁의 빌미가 된다 . 이후에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한 많은 글을 쓴다. 광복 후에는 일제하 친일 인물의 대표적 표적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처단법에 의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자열서(自列書)를 특별재판소에 제출하고 한 달 만에 보석 석방된다. 그 이후에도 국사사전 집필과 강의활동을 벌이다가 1955년 천주교에 귀의한다. 최남선은 1955년 10월 10일 서울 종로구 묘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양주군 온수리 선영에 안장된다. 최남선은 현영채와 사이에 4남1녀를 두었다. 맏아들 한인씨(장손 승계로 대를 이음)는 이선영씨와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으며, 이들의 장남 학주씨는 김여애씨와 결혼하였고, 차남 동주씨는 김영열씨와 결혼했다. 최남선의 차남 한웅씨는 이무희씨와 결혼하여 3남2녀를 두었다. 3남은 명주·국주·득주이며, 장녀 기주씨는 이주룡씨와, 차녀 혜주씨는 김중원씨와 결혼했다. 최남선의 3남 한검씨(재북)는 이영자씨와 결혼하였으며, 4남 한혁씨는 연주·정윤 자매를 두었다. 최남선의 장녀 한옥씨는 강건하씨와 결혼하여 2남4녀를 두었다. 2남4녀는 강호·강표 형제에, 옥임·덕임(박중현씨와 결혼)·복임·경임 4자매다. --------------------------------------------------------------------------------------------------------------------- 내가 본 육당 최남선 - 강영훈 전 국무총리 1941년 봄, 대학에 입학했다. 만주 건국대학에 진학한 이유의 하나가 그곳에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어디로 보나 조선 사람이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인이나 우리나라 사람 중에도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하여 그 엄연한 사실을 왜곡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너희는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 말씀을 듣고 벅찬 감격을 느꼈다. 육당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낙관적 생활 태도를 견지하면서, 주어진 기회를 어떤 것이든 간에 최대한으로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니셨다. 제자들 눈에 비친 육당 선생님은 철두철미한 민족정신의 고취자였으며 애국애족 지사였다. 나는 선생님의 진의가 이해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 -------------------------------------------------------------------------------------- 최남선(1890~1957)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천재였던 그가 친일로… 역사의 방향을 착각한 건 아닐까 어쩌면 구한말에 태어난 가장 뛰어난 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쓰던 아호만도 8가지가 된다지만 그는 앞으로도 오직 '육당 최남선'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경성학당에서 수학한 육당은 천재라는 사실이 알려져 15세의 어린 나이에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발탁되었다.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졸업하지 않고 중퇴하였다. 그 중학교에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2년 뒤에는 와세다대학 역사지리학과에 입학하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와세다대학에도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 학교의 정치학과 주최로 모의국회가 열렸는데 한국의 국왕을 모욕하는 내용이어서 육당은 한국인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결국 제적당했다. 귀국한 육당은 신문관을 설립하고 1907년 겨우 18세 때 잡지 '소년'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에서 육당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소년'을 창간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조선의 귀중한 고서들을 간행하였으며 그런 취지로 조선광문회를 창설하고 고서를 한글로 번역, 발간하였다. 그는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했고 그 과정에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하여 20여 종의 고전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강요된 뒤에는 일본의 자세가 강경해져서 '소년'은 폐간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인 1912년 이광수와 손잡고 만든 '붉은 저고리' '새별' 등 잡지가 조선총독부의 '신문지 법'을 위반했다 하여 모두 폐간 처분당했다. 최남선은 30세이던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2년 8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뒤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계명구락부'를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신춘순례'와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가 출간되었다. 그는 '단군론'에서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의 백두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육당이 조선사편찬 위원회의 촉탁일을 맡게 된 것은 총독부가 집과 연구비용을 지원하겠다고 회유했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조선민족의 '얼'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한용운 같은 이가 최남선이 총독부가 시키는 일을 맡았다고 맹비난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남선의 뜻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총독부가 식민사관 유포를 위하여 만든 어용단체가 '조선사 편수위원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남선이 그 위원직을 맡은 것도 그의 생각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가 중추원 참의가 될 것을 요청하였을 때 그가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사실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시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 결정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치고 들어간 일본은 동남아로까지 진출하여 싱가포르에서 퍼시벌 영국군 사령관을 붙잡았다. 일본군 야마시타 장군은 항복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예스(Yes)냐 노(No)냐'라며 책상을 쳤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최남선이 혹시 역사의 방향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젊은 시절부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최남선,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만큼 우국충정에 가득했던 최남선, 조국의 문화와 전통을 살리기 위해 그 연구에 몰두했던 최남선, 그런 그가 변절하여 민족 반역자가 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때 조선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그 특성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조선은 동양 역사의 장터에 앉은 늠름한 여장부요, 서리 맞고도 웃는 국화요, 눈 속에서도 피는 매화요, 바람 부는 가운데 우뚝 선 대나무요,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으로 계속 역경 가운데 지냈지만 한 번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절세의 현모양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육당의 강의를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매우 작은 모임이었는데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렇게 많은 사실을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학자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라고 생각하였다. 노트도 없이 그의 머릿속에 정리된 사실만을 가지고 그는 정말 박학다식한 지식인이라고 느끼게 했다.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여러 가지 사실들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한 시대의 애국지사이며 동시에 민주화 투사였던 장준하는 최남선에 대하여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육당이 세상을 떠나자 장준하는 '사상계'에 그를 애도하는 글을 실었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의 본의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고 이 나라의 문화를 보존함에 있었음은 오늘날 사실로 밝혀진 바요"라고 못 박으면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줄 모르는 이 겨레의 옹졸함을 비판한 바 있다. 이광수, 김성수, 김활란, 모윤숙 등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과오만을 들추어내는 것은 우리 민족성의 하나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조선 상식'을 강의하던 육당의 의젓한 모습과 낭랑한 목소리가 오늘도 그리울 뿐이다. [출처] 김동길 단국대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김동길의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조선일보,2018,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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