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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談

한문역사 2026. 4. 17. 11:55

박근혜 대통령 탄핵

65장면으로 본 박근혜 대통령의 65년(1952~)

“공주(公主)에서 폐주(廢主) 될 위기에… 그래도 종북(從北)은 막았다”

  •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 아버지에 이어 ‘18’ 수의 징크스 못 벗어
⊙ 6·25전쟁 중 대구에서 출생… 이름의 ‘근’자는 ‘조국’ 상징
⊙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갖은 고생… 5·16 후 청와대 입성
⊙ 가장 좋아한 소설 주인공은 《삼국지》 속 조자룡… 스스로 ‘첫사랑’이라 여겨
⊙ 교수 꿈꾸며 떠난 프랑스 유학, 어머니 죽음으로 인생 바뀌어
⊙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에 접근한 최태민… 불행의 시작
⊙ 아버지의 죽음과 측근들의 배신으로 시작된 18년의 암흑기
⊙ 박정희·김재규·전두환·노태우도 해결 못 한 최씨 일가의 마수(魔手)
⊙ 1997년 정계 데뷔 후 전승(全勝) 거둔 ‘선거의 여왕’
⊙ 최씨 일가, 대통령의 눈 귀 막아 불통(不通) 이미지, 결국 국민의 분노 사
⊙ 숱한 경고에도 최씨 일가 국정농단 방치한 미스터리
⊙ 통진당 해산·한미연합사 전작권 전환 무기 연기·국정교과서 등 종북 세력에 대한 최후의 방파제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12월 9일 정지됐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및 무소속 의원 171명이 공동 발의해 8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탄핵안은 9일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299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34명, 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으로 가결 처리됐다.
박 대통령은 18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1997년 정치를 시작한 이후 18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게 살해되면서 18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온 것과 공교롭게도 정확히 일치한다. 《월간조선》은 박근혜 대통령이 살아온 65년을 전기(傳奇)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탄생
 
  박근혜 대통령은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5번지에서 출생했다. 전날 밤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산통(産痛)을 느꼈을 때 함께 살던 동생 육예수와 장모 이경령 여사는 집에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파(産婆)를 부른 뒤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아내의 손을 잡고 곁을 지켰다. 새벽에 박정희 대통령의 두 번째 딸(첫딸은 박재옥) 박근혜가 태어났다.
 
 
  2. 이름
 
  박근혜라는 이름은 박정희가 직접 지은 것이었다. 옥편을 뒤져 무궁화 근(槿)자를 넣었는데 ‘근’은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딸의 성장 과정을 담아두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으며, 점심때에는 일부러 집에 들러 근혜를 목욕시켜 주기도 했다.
 
 
  3. 배다른 언니 박재옥
 
  박정희 대통령이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딸 박재옥은 박근혜가 태어났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재혼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 상모동에서 구미여중을 다닐 때였다. 박재옥은 집안 어른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오래전부터 ‘아버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재옥은 아버지에게 원망 섞인 편지를 많이 썼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시는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 오빠가 저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저도 힘들고요.…〉
 
  이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아라’라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4. 잦은 이사
 
 
1962년 5월 서울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박정희 의장과 가족.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육영수 여사, 박정희 의장,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어린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아버지가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처음 내 집을 마련한 것은 1956년 4월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박근혜 대통령은 첫돌을 광주광역시 동명동 셋방에서 맞았다. 1953년 여름에 서울 종로구 동숭동으로 올라왔지만, 1954년 10월 다시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1955년 7월 박정희가 사단장이 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95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에 있는 5사단 사단장으로 옮겼을 때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은 가장 비참한 시절을 보냈다.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할 때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가족은 일단 옥천으로 갔고 박정희 대통령의 당번병인 박환영과 운전병 이타관은 이삿짐을 기차에 싣고 청량리역에 내렸다. 수화물 창고에 짐을 넣어두고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아무 연락도 없었다.
 
  당시 사단 헌병부장이 나서 노량진 역전에 부엌도 없는 문간방 두 개를 구해줬다. 솥을 걸 데도 없어 풍로로 겨우 음식을 만들어 먹을 정도의 곳이었다. 집이 좁아 들여놓지 못한 짐은 청량리 부근에 살던 김종필 당시 중령의 집 처마 밑에 갖다놓았다. 당번병과 운전병 두 사람이 판자와 거적을 가지고 부엌을 만든 뒤에야 옥천으로 연락해 육영수 여사와 가족들이 올라왔다.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 이경령씨는 노량진 문간방 시절이 가장 비참했다고 회고했다.
 
  “방엔 불도 들이지 못하고 방바닥에서 물이 줄줄 나서…. 그때 군인들이 비옷으로 쓰던 장옷을 방바닥에 깔면 축축하게 누기가 차서 도무지 앉지도 눕지도 못하여 밤이나 낮이나 서성거리고, 밥이라고는 풍로에다가 해서 끼니라고 때우고, 그때 참말로 고생을 말없이 하고요, 손녀딸 근혜는 아파서 울고요….”
 
  육영수 여사의 동생 육예수씨는 광주로 내려가기 전 서울 고사북동에 살 때를 비참하다고 기억했다.
 
  “말이 장성 집이지 최하층 빈민생활이었습니다. 장작 마련할 돈도 없었어요. 그때 우리가 지내던 방은 ‘뼈가 얼던 방’이었습니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어떻게 견뎠는지…. 그때 그 시절은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5. 억양
 
  박근혜 대통령의 억양에서는 잦은 이사 때문인지 경상도 사투리보다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인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충청도 사투리가 살짝 섞여 있다.
 
 
  6. 5·16 전야(前夜)
 
  박정희 대통령이 거사를 위해 신당동 집을 나서던 1961년 5월 15일 밤 10시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가 있던 방으로 갔다. 육 여사는 남편이 장태화·김종필·이낙선과 함께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저 보세요”라고 불렀다. 육 여사는 남편을 부를 때 항상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저 보세요”라고 했다.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 박정희는 서슴없이 “어, 그러지” 하고 아내를 따라갔다. 박정희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생 근혜를 굽어보고 윗목 외할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근령·지만에게 눈길을 주고는 나왔다. 장태화가 “무슨 숙제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
 
  박근혜 대통령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님께서는 집안을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님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7. 장충초등학교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1958년 3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생활기록부가 공개돼 있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 1학년 때는 ‘특정 아동들과만 노는 습관이 있음’, 3학년 때는 ‘자존심이 강한 어린이’, 4학년 때는 ‘약간 냉정한 감이 흐르는 편’이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6년 내내 성적이 우수하고 침착하고 겸손하다는 평가가 적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행동발달 상황’ 평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친절·예의, 사회성, 자율성, 근로성, 준법성, 협동성, 정직성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최우수인 ‘가’를 받았다. 다만 ‘명랑성’ 부문은 3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 전부에서 ‘나’를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삼국지》를 탐독했는데 등장인물 가운데 조자룡(趙子龍)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돌이켜보건대 나의 첫사랑은 조자룡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삼국지》 못지않게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한 것은 ‘전투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소설’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읽을 때마다 설렘과 흥분에 사로잡혀 도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독서 취향을 눈치챈 아버지가 “좀 어려울 거 같지만, 근혜가 좋아할 것 같다”며 권한 책이 바로 앞서 말한 《삼국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5·16을 일으킨 아버지가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근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큰 영애(令愛)’로 불리게 됐다. 영애 시절 박근혜의 퍼스낼리티는 검소한 육영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근혜와 중·고 6년을 함께 다녔던 친구 서임정은 “근혜는 보리밥에 감자조림 반찬을 자주 싸 왔고 외제 학용품이 없었다. 친구들이 일제 학용품을 갖고 오면 ‘예쁘다’며 부러워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8. 성심여자중학교 시절
 
 
학창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심여자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부반장을 한 것을 제외하고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성심여자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내 반장을 맡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실시한 지능검사(IQ) 결과는 127이었다.
 
  신당동에 살던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모래주머니 놀이·공기놀이·고무줄놀이·숨바꼭질을 좋아했고 ‘골목대장’ 같은 성격이었다. 개구쟁이 같던 성격이 차분해진 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성심여중 1학년 때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이를 통해 규율과 화합을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학생이던 시절 담임교사를 맡았던 서성숙(82) 교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정치와는 너무 거리가 먼 학생으로 느꼈다. 정치인이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며 “오히려 동생(근령)의 성격이 확실하고 똑똑해 정치 성향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서씨는 최순실 스캔들에 대해 “뭔가 사람을 너무 믿고 있다가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64년 3월 성심여중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다. 원래 중학교 입시는 모든 과목을 봐야 했는데 1964년에는 국어, 수학 두 과목만 보는 것으로 축소됐다가 이듬해 다시 모든 과목으로 바뀌었다. 중학교 입시는 1969년 폐지됐다.
 
  중학교 생활기록부에 나온 ‘부형의 희망’에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는 박 대통령이 중1 때는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으나 중2·3과 고2 때에는 ‘교육자’를 희망했다. 박 대통령 본인은 고1 때 ‘교육자’라고 썼으나 2·3학년 때는 따로 희망을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성심여중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정치적 행보는 1966년 10월 31일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訪韓) 영접이다. 《동아일보》 1966년 11월 1일 자에는 워커힐에서 있었던 ‘한국의 밤’ 행사를 보도한 내용이 나온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존슨 대통령이 러스크 국무장관, 장기영 영접위원장과 함께 차에서 내리자 현관에선 대통령 내외와 장녀 근혜양(성심여중 3년)이 영접. 존슨 대통령은 근혜양에게 그 큰 몸을 구부려 무엇인가 말하고 손에 입 맞추기도.”
 
 
  9. 성심여자고등학교 시절
 
  수석으로 입학한 성심여고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적성검사에는 ‘이과 및 사회과학 적성이 높다’고 적혀 있었다.
 
  성심여고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외교 무대에 등장한다. 1968년 5월 성심여고 2학년이었을 때 아버지와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과 함께 국빈으로 방한한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를 영접했다. 외국 원수의 방한이 드물었던 시절이어서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1968년 9월 아버지 박정희의 호주 방문에도 동행했다. 당시 언론은 “케이시 총독 내외와 고튼 수상 내외를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삼부요인들이 박 대통령 내외를 영접했다. 환영객의 특별한 관심을 끌게 한 한복 차림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딸 근혜양을 비롯한 수행원들과 숙소인 칸베라렉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68년 9월 16일 자)
 
  고3 때인 1969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 ‘유니버스 코리아’ 진수식에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했다. 미국 ‘걸프’사 중역과 일본 관계자, 주일 한국대사 등과 함께 요코하마에서 가졌던 진수식에 대해 당시 《경향신문》 1969년 6월 21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세계 최대의 유조선 6척 중 하나인 ‘유니버스 코리아’호가 21일 낮 11시 이시카와지마 하리마 중공업조선소에서 박정희 대통령, 영애 근혜양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운데 진수했다.”
 
 
  10. 서강대학교 시절
 
 
박근혜 대통령(맨 앞)은 서강대 재학 중이던 1970년 개교 10주년 행사에서 전자공학과 깃발을 들고 가장행렬에 참여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70년 3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이공계 수석이었다. 학부 졸업 시 학점은 4.0 만점에 3.8이었다. 특히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는 올 A를 맞았다. 그가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유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공계 육성 의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을 지낸 정재훈(전 개포중 교장)은 “육 여사는 큰 영애가 역사학과에 가길 바랐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전자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신념이 워낙 확고했다”며 “육 여사가 ‘근혜가 보통 여인들이 가는 평범한 길을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강대 1학년이던 시절 그를 좋아한 남학생의 일화가 인터넷에 유포돼 있다. 시골에서 자란 이 청년은 서강대생으로 박근혜에게 다가가 “저랑 빵 드시러 가지 않을래요?”라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박근혜는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글쎄요”라면서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이 남학생은 그 후에도 매번 박근혜를 따라다니며 빵을 먹자고 했다. 어느 날 그가 다시 박근혜에게 “빵 안 드실래요”라고 말한 순간 건장한 사내 4~5명이 그를 에워싸더니 빵을 가득 담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실컷 먹어!” 전날 박근혜가 아버지에게 무심코 “자꾸 빵을 먹자는 남학생이 있다”는 말을 해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일화의 진위(眞僞)는 알 수 없다.
 
 
  11. 박근혜식 외국어 공부법
 
  박근혜 대통령은 외국을 자주 순방하면서 외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영어 공부법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방을 청소할 때 뜨개질을 하거나 양치질을 할 때 등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새로운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암기하거나 테이프를 들었다”고 밝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탈무드》 등의 유명한 명작들을 원서로 읽을 만큼 영어가 익숙해진 뒤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영어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붙자 프랑스어와 스페인서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다른 나라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진다는 의미였다. 언어는 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수단이었다. 다른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컸다. 책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만족감은 맛있는 음식이나 새 옷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이었다.”
 
 
  12. 프랑스 유학 시절
 
  서강대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근혜 대통령은 프랑스 그르노블로 유학을 갔다. 정식 학위 과정은 아니고 어학 과정이었다. 다른 유학생들처럼 하숙 생활을 했는데 그는 평범한 가정의 삶을 꿈꿨다고 한다.
 
  “아침 일찍 남편이 마을로 내려가 빵을 사가지고 올 동안 아내는 수프를 끓이고 따뜻한 우유와 커피, 신선한 샐러드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면 가족이 함께 뒷마무리를 도왔다. 가족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식탁을 정돈하는 아이, 설거지를 하는 남편, 디저트를 준비하는 아내. 그 모습은 매우 합리적이고 따뜻해 보였다. 다과를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기타 연주에 맞춰 온 가족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나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도 가져보면서….”
 
  그러나 이 행복한 생활은 6개월 만에 끝난다. 어머니 육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박근혜의 삶은 이후 격랑(激浪)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이런 암시를 책에 남겼다.
 
  “프랑스로 떠나온 지 6개월 만에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새로운 도전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디며 한창 꿈에 부풀어 있는 사이, 내 인생의 가장 힘들고 거센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13. 어머니의 죽음
 
 
1972년 12월 15일 부모와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어느 날, 하숙집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다며 빨리 하숙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하숙집에 도착하니 대사관에서 나온 분들이 와 계셨다. 모두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급히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커다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묻는 내 질문에 그들은 난처한 표정만 지으며 시원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짐도 챙기지 못한 채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수속을 하기 위해 바삐 걸어가다가 궁금한 마음에 신문 스탠드로 갔다. 한 신문에 실린 아버지, 어머니 사진 위 ‘암살’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급히 신문을 펼쳐보았다. 1면에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 오듯 눈물만 쏟아졌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렇게 쉬지 않고 울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굳게 다문 입술과 눈빛에서 아버지의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저려 오는 듯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족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14.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사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외국인 6·25 참전용사들을 접견하는 모습.
  “장례식을 치른 지 불과 엿새 뒤 나는 가슴에 상장(喪章)을 단 채 예정되어 있던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했다. 울먹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 자리는 인간 박근혜가 아닌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구실을 하는 ‘처음’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프랑스 유학 후 강단에 서겠다는 내 꿈은 아득히 멀어졌다. 이는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묘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그 당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꿈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성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였다. 엄청난 파도가 몰아쳐서 사람들과 같이 등대 밑에 피해 있는데 그 순간 장면이 확 바뀌면서 태양이 비추고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길 건너 언덕에 태양이 솟아올랐다. 시뻘겋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그 꿈을 꾸고 며칠 뒤 또다시 이상한 꿈을 꾸었다. 파랗고 아름다운 고리에 둘러싸인 천체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고리는 돌면서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그 천체의 총천연색 빛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이 꿈은 환상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시 일기장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다고 적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졸업을 하면 사회생활을 할 텐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련이 닥칠 거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내 삶을 그 꿈과 꼭 연관 지을 수는 없겠지만, 가끔 그 꿈과 어머니의 죽음, 달라진 내 인생의 한 지점이 맞물려서 떠오르곤 한다.”
 
 
  15. 최태민의 등장
 
 
새마음궐기대회에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와 함께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어린 퍼스트레이디 앞으로 몇 통의 편지가 왔다. 발신자는 최태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최태민은 돌아가신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딸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신동욱 부부에 따르면, 박근혜는 육 여사 피살 전부터 최태민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육 여사가 그런 사실을 알고 “그런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최태민은 1975년 박근혜에게 “죽은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와 박근혜를 구하라고 했다”고 편지를 보내고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최태민은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말하거나 ‘아시아의 지도자’ ‘여성 대통령’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박근혜에게 주입했다.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16. 중앙정보부 수사자료
 
  1977년 중앙정보부는 최태민을 수사했다.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태민의 존재가 청와대에 알려진 것은 1975년이었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구국봉사단 총재 최태민에 대한 지원을 그에게 부탁했다.
 
  “(큰 영애가) 한 건설업자에게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알아보면 최태민과 관련 있는 업자였다. 나는 박승규 민정수석에게 ‘큰 영애에 대해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시킨 뒤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큰 영애가 필요한 돈이 있다고 하면 각하께서 저한테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리 안 나게 돈을 만들어 각하께 드리겠습니다.’ 박 대통령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최씨에 대한 정보 보고는 끊이질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자주 거론됐다. 최씨는 구국봉사단을 이끌고 새마을사업의 하나로서 새마음 갖기 운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새마을 담당 장관이던 김치열 장관도 최씨를 지원했다.”
 
 
  17. 최태민을 조사한 경찰관의 증언
 
  최태민을 조사했던 한 경찰 고위 간부는 박근혜・최태민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태민은 1975년 1월쯤 박근혜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을 뵈었습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근혜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주었다. 박근혜는 편지를 다 읽고 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최태민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동안(童顔)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박근혜씨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박근혜씨는 나에게 최태민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최태민을 만나러 갔더니 최씨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근혜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최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나는 뒷조사를 시켰다. 최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 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나는 직접 박 대통령께 이 사실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이 정보를 근혜양에게 알려주고 주의를 주었다. 박 대통령은 으레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박근혜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했다. 나는 그 뒤로 대통령과 근혜양을 만날 수 없었다.”
 
 
  18. 김재규의 개입
 
 
안동일 변호사.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26 이후였다. 박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재판과 수사 과정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김재규가 직접 쓴 ‘항소이유 보충서’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 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본부에서 작성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김재규의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신동아》 2005년 12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 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19. 정보부 수사국장의 진술
 
  “김재규는 각하에게 최태민의 비위를 보고했으나 박근혜양이 비호, 각하 앞에서 대질 친국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천하의 정보부장이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사이비 목사와 나란히 앉아 우김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이었다.”
 
  다음은 정보부 수사국장의 진술이다.
 
  〈김 부장은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 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19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 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리 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20. 선우연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비망록
 
  〈1977년 9월 20일. 지난 9월 12일 밤 대통령은 근혜양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및 백광현 정보부 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최태민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친국을 했다. 박 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 영애인 근혜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최태민을 거세하고 향후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고.’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장 근혜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근혜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각하께 다시 보고드릴 테니 기다려봐요.”
 
  며칠 뒤 다시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근혜양 문제를 여쭈었다.
 
  “각하, 큰 영애가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입니다. 구국여성봉사단만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최태민을 가까이 안 하게 할 수 있나? 최를 근혜에게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자네에게 허락할 테니, 그건 따로 의논해서 계속 일하도록 하게. 사실 지난번에 특명을 내리고 나서도 근혜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팠어. 내가 그간 새마음봉사단에 관해 최태민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 늘그막에 애들이라도 잘돼야 내가 마음이라도 편안하지 않겠는가. 나를 좀 도와주게.”〉
 
 
  21. 아버지의 죽음
 
 
10·26사태 후인 1979년 11월 21일 16년간 살았던 청와대를 떠나는 박근혜 대통령.
그는 34년 후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돌아온다.
  〈또다시 비극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1979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아버지는 “오늘은 삽교천 행사에 간다” 하고 인사를 건네며 청와대를 떠나셨다.… 그날 저녁 나는 텔레비전에서 삽교천 준공식 장면을 보았다. 배수갑문 스위치를 누르자 거세게 쏟아져나오는 물줄기를 보며 아버지는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흑백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건데도 아버지는 안색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 분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의 건강에 무리가 온 것 같으니 좀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함께 따라갔던 비서에게서 평소와는 다르게 심상치 않은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제막을 하는 순간 기념탑에 씌운 커튼이 반쯤밖에 걷히지 않았고 행사를 끝낸 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도고온천 관광호텔에 내릴 때 이 호텔에서 기르는 노루 한 마리가 아버지가 탑승한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 뛰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쳐 죽었다는 것이다.
 
  새벽 1시30분쯤 되었을까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수화기 너머로 ‘일어나 몸차림을 해주십시오’라는 비서관의 말이 들려왔다. 순간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어머니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김계원 비서실장이 관저로 찾아왔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은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청와대로 옮겨졌다. 5년 전 어머니의 시신이 눕혀졌던 병풍 뒤에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누가 내 등 뒤에 비수를 꽂는다 해도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편안한 잠에 빠진 것처럼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이미 온기를 잃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께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오열하는 동생들이 보였다. 밖으로 비명이 새어나갈까 입을 틀어막고 우는 지만이의 모습에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야무지고 강단 있어 보여도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아이였다.…
 
  나는 낮에는 아픔을 뒤로한 채 문상객을 맞아야 했지만 밤이 되면 참담한 고통이 밀려왔다.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가슴에 송곳이 박힌 것처럼 아파서 잠들 수가 없었다.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악몽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 없이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상복을 걷어보니 팔 전체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부항이라도 뜬 것처럼 큰 멍자국이 어깨부터 다리까지 뒤덮었다. 내 걱정이 되었던지 잠시 방문을 열어본 근령이가 펄쩍 뛰며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잠시 의무실에 들르기로 했다.
 
  “갑자기 너무 큰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 피가 몰려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 없었다. 비서실장이 전해준 아버지의 옷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수술한다고 여기저기 찢어놓아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옷을 보고 있자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몇 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스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22. 다시 돌아온 신당동 집
 
  〈적막한 신당동 집을 보고 있자니 첩첩산중에 버려진 심정이 이렇게 막막하고 외로울까 싶었다. 누군가 틀어놓은 거실 텔레비전에서 코미디 프로를 하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갔지만 손톱만큼도 우습지 않았다. 끼니때마다 밥을 먹는 것도 곤욕이었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져서 넘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지 동생들도 점점 말을 잃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