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순헌황귀비 재조명한 소설가 권현숙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순헌황귀비 알리고 싶었다”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 입력 2026.06.05 15:10
- 호수 202606
- 댓글 0
⊙ 나인에서 황귀비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면서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
⊙ 120년 전 숙명·진명·양정 등 민족사학 세운 순헌황귀비
⊙ 아관파천 실행해 고종 피신시켜… 대한제국 기반 마련에 동참
1955년생. 성균관대 미술학과 졸업 / 《한겨레신문》 ‘해방 50주년 장편소설공모’ 당선(<인샬라>), 이상문학상 우수상, 작가세계 신인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접시꽃당신>) 수상 / 저서 《인샬라》 《나의 푸르른 사막》 《우리시대의 화제소설》 《루마니아의 연인》 《에어홀릭》 《늑대신부》 《혼배낭》 등

우리 역사에서 ‘왕과 사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작물은 수없이 많다. 조선 왕의 비(妃) 또는 빈(嬪)이 타이틀롤인 작품만 해도 <명성황후> <인현왕후> <인수대비> <원경왕후> <철인왕후> <장희빈> 등이 있다. 이처럼 수많은 조선 시대 왕실 여성이 소설이나 드라마, 뮤지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대부분 궁중 내 암투를 묘사한 내용들이다. 이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조명받지 못한 왕실의 여인이 있다. 바로 명성황후 사후(死後) 고종의 황후 역할을 수행했던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1854~1911년)다. 흔히 ‘엄(嚴)귀비’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지워진 대한제국 황후

대한제국의 첫 황귀비이며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1897~1980년)의 친모(親母)인 순헌황귀비는 궁중 내 암투의 중심인물이었던 다른 왕비들과 달리 역사에 획을 긋는 역할을 수차례 수행했다. 외세가 앞다퉈 조선 침략에 나서던 구한말 격동기에 아관파천(俄館播遷·1896년 2월 고종과 세자였던 순종이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주도하고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출범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숙명 등 민족사학을 설립해 교육에도 앞장섰다. 6~8세로 추정되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궁내 여성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순헌황귀비는 왜 다른 왕비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것일까.
순헌황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지워진 대한제국 황후》(2026, 기파랑)의 저자 권현숙 작가는 “일제가 그동안 우리 국민에게 가스라이팅해 온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말했다. 순헌황귀비와 고종이 일제의 의도에 의해 역사적으로 저평가돼 왔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픽션을 가미한 역사소설 《지워진 대한제국 황후》는 순헌황귀비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까지의 일대기다. 도입부는 순헌황귀비와 고종, 명성황후 세 사람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동생이 많았던 순헌황귀비는 별다른 이름도 없이 ‘큰애’로 불릴 정도로 평범한 집안의 여식이었다. 왕실과 관계없이 살아오던 세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궁녀, 왕,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일개 나인이었던 순헌황귀비는 어느 날 고종의 승은을 입고 명성황후의 질투로 궁에서 쫓겨나 10여 년간 궁 밖에서 지내야 했다. 명성황후 사후 고종의 부름으로 다시 입궁했고, 이후 고종을 보위하며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가 된다. 당시 손주를 볼 나이였던 40대의 나이에 영친왕을 낳고 대한제국의 수립에 깊이 관여했으며, 황귀비 자리에 오른 후에는 국민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숙명·진명·양정 등 현재까지 존재하는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순헌황귀비가 조선 시대 어느 여인보다도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권력가 집안 출신도, 절세미인도 아니었던 그는 어떻게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이 됐을까. 소설의 저자 권현숙 작가를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아관파천을 실행한 순헌황귀비

권 작가는 30여 년간 소설을 써왔고 최민수·이영애 주연 영화 <인샬라>의 원작 소설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소설 <인샬라>는 1995년 《한겨레》의 ‘해방 50주년 장편소설공모’에 당선됐고 이후 권 작가는 남한과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인샬라》 《루마니아의 연인》 《늑대 신부》까지 ‘분단 3부작’을 완성했다. 권 작가가 역사소설에 도전한 것은 처음이다.
― 순헌황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물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전공이 역사인 것도 아니고 역사소설을 쓴 경험도 없는데요.
“우연한 기회에 순헌황귀비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는데, 일개 궁녀 출신 이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꿨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궁중 여인들은 군주의 사랑을 차지하려 투기, 음해, 권력투쟁에 나서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순헌황귀비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했지요. 또 교육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학교를 세운 실천적 교육가였습니다. 그가 세운 학교들(숙명여대, 숙명여고, 진명여고, 양정고)은 역사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명문학교로 살아남아 우리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어요.”
― ‘역사를 바꿨다’는 건 어떤 걸 말하나요.
“가장 큰 일은 아관파천을 추진해 고종이 대한제국 수립을 할 수 있게 도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관파천이라는 ‘작전’을 순헌황귀비가 실행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본군이 장악한 궁에서 왕과 세자가 몰래 탈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철저한 시행 계획이 없으면 불가능했고, 한 명이라도 배신자가 나오면 관계자 모두 몰살당할 상황이었다.
아관파천 3개월 전에도 고종이 미국과 영국, 러시아 세력 및 조선 고위 관료들의 협조를 받아 피신을 시도했던 춘생문 사건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일본의 경비가 더욱 삼엄해진 상황에서 순헌황귀비는 친러시아 독립운동가 이범진 등과 교류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엄상궁이었던 순헌황귀비는 작전을 위해 한동안 ‘승은을 입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못 말리는 상궁’인 척 연기를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 경비대를 구워삶는 등 자신의 가마로 궁 안팎을 출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충실한 궁녀 한 명까지 섭외해 가마 두 대가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세자까지 무사히 대피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순헌황귀비는 고종과 순종 두 사람을 궁녀용 가마에 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보낼 수 있었다. 소설에서는 순헌황귀비가 아관파천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과정이 긴박하게 그려진다.
― 아관파천을 두고 왕이 도망쳤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적지 않습니다.
“파천(播遷)은 국왕에 대한 일본의 노골적인 폄하입니다. <고종실록>에는 이어(移御)라고 기록돼 있어 ‘아관이어’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최근 많은 학자 또한 ‘아관망명(俄館亡命)’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요.”
실제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황태연 동국대 명예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장 등은 ‘아관망명’이 올바른 용어라고 보고 있다.
― 왕이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이 도피로 보이는 건 사실이죠.
“고종이 경복궁에 계속 머물렀다면 암살을 당하든지 암살이 아니더라도 점차 쇠약해져 사망했을 겁니다. 실제로 고종은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늘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았지요. 독살 공포에 수라상을 물리고 날달걀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고종은 자신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라는 교육을 받아온 군주입니다. 자신의 몸 하나 지키는 게 목표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탈출을 시도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아관으로 가려다 일본군에 들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게다가 왕과 세자가 함께 움직인다는 건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제입니다. 춘생문 사건으로 한 번 실패도 겪었고 탈출이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종이 호위무사 한 명 없이 궁녀 한 명(순헌황귀비)을 믿고 아관파천을 실행한 것은 순헌황귀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고종은 순헌황귀비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았고 궁녀 출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황귀비라는 직책까지 하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이유

― 고종의 정비였던 명성황후는 문화계에서 여러 차례 창작물로 재조명됐지만 순헌황귀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적인 최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운 감정을 얻을 수 있었고 문학적으로도 스토리텔링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 외엔 자신의 집안을 권력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기에 바빴고 무리하게 외세를 끌어들이려 하는 등 부정적인 면도 많았지요. 이 때문에 고종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요. 그런데 순헌황귀비는 인성, 지혜, 애국심, 업적 등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인물인 동시에 극적인 인생을 살아온 만큼 창작물의 주인공으로는 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보니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순헌황귀비 역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 고종은 유약하고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왕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저는 고종과 순헌황귀비가 일제 식민사관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은 60여 년 세도정치로 거덜 난 나라를 물려받았고 일본은 끊임없이 침략을 계속해 왔어요. 군사력도 빼앗긴 형편에서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이런 형편에서도 고종은 외교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각 나라에 친서를 끊임없이 보내는 등 노력해 왔고 순헌황귀비는 이를 지지하고 도왔습니다. 순헌황귀비는 정치적 전략가이며 교육가, 즉 황실 여주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이렇다 보니 일제 입장에서는 폄하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고종과 순종 실록은 일본인들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기록이에요. 사실의 상당 부분이 생략되거나 왜곡돼 있다고 봅니다.”
― 책을 보면 역사용어와 궁중용어가 많은데요. 자료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습니다. 순헌황귀비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았을 텐데 집필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습니까.
“자료 조사에는 3~4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작가란 아무리 오래 자료 조사를 했어도 그 인물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으면 집필을 포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알아가면 갈수록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으로 역사소설에 도전하게 된 거죠. 집필하는 동안 구한말로 타임슬립해 당시의 공기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썼지요. 역사적 팩트를 토대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공백을 채우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심증도 가고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사건도 많은데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고요.”
― 예를 들면요.
“고종이 독살됐다는 점, 고종이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지원했다는 점 같은 거죠. 저는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고 증거는 일제가 깊이 은폐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익문사(편집자주-1902년 설립된 대한제국의 신문사로 황제 직속 정보기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실체와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워낙 자료가 부족해 충분히 쓸 수 없었던 아쉬움도 있습니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

―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선포 후 순헌황귀비의 인생도 파란만장하게 펼쳐집니다.
“아관에서 순헌황귀비의 생활도 예사롭지 않았어요. 고종은 아관에서 많은 외국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을 만났는데, 순헌황귀비는 일부러 자신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소문을 내고 고종의 외부 인사 만남 자리에 늘 배석했다고 합니다. 당시 선교사들의 회고록에는 ‘고종과 만날 때 상궁 한 명이 늘 옆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지금처럼 영부인이 외교 일정에 동행하던 시대도 아니고 왕비도 아닌 사람이 늘 옆에 있으니 신기했던 모양이에요. 이 역시 순헌황귀비의 지략이었죠. 당시 통역관이라는 사람들은 지금처럼 잘 배운 사람이 아니라 접경 지역에서 이리저리 주워들은 언어를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거든요. ‘영어를 할 줄 아는 궁중 인물이 고종의 옆을 지킨다’는 인상을 외부인들에게 주면서 만만하게 보이지 않도록 긴장감을 만든 겁니다. 또 충성스럽게 고종을 보위했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어요. 이런 이유로 고종은 순헌황귀비를 더욱 신뢰하게 됐죠.”
― 아관에서 임신해 44세에 영친왕을 낳았고 정식 후궁이 됐고요. 향후 황태자가 되는 영친왕의 어머니지만 황후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순헌황귀비의 황후 승봉 여부는 대한제국의 정국을 뒤흔드는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종의 황태자였던 순종의 외가 민씨 집안의 반대, 대신들의 의견 대립 등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죠. 결국 숙종 시대 세워진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규범 등에 따라 황후 등극에는 실패했지만,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황후를 들이지 않았고 사실상의 황후는 순헌황귀비였습니다.”
― 순헌황귀비의 업적 중 가장 돋보이는 점은 사비까지 들여 여성을 위한 민족사학을 설립했다는 것이죠. 숙명여대 등 당시 세워진 학교는 올해 창학 120주년을 맞았습니다.
“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잠식돼 가는 상황이 국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근대교육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세브란스(연세), 스크랜튼(이화) 등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뿐이었습니다. 민족사학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죠. 그 시대에 교육, 특히 여성 교육이 국가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라고 판단한 점도 대단하지만 일제의 방해 공작이 심했을 텐데 사비까지 들였습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왕이나 왕비가 사치를 했다는 기록이 종종 있는데, 순헌황귀비가 좋은 옷과 먹을 것을 찾았다든가 사치를 했다거나 사리사욕이 있었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아요. 식민사관에 따른 폄하에도 불구하고 인성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는 얘기죠. 어릴 때부터 궁녀로 받은 봉급을 모아 여성 교육 발전에 사용한 겁니다. 여러 모로 존경할 점이 많은 분입니다.”
순헌황귀비와 고종의 사랑

― 책 전반에 고종과 순헌황귀비의 러브스토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평생 이어졌는지 잘 나타나 있는데요. 연(鳶)이나 군밤으로 마음을 전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은 픽션이죠?
“고종이 연을 잘 날렸다는 건 황현의 《매천야록》과 야사 등에 기록이 있어 참고했습니다. 순헌황귀비를 아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공통점이 있어요. 평범한 집안의 나인 출신이고 외모도 특출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승은을 입었냐는 거죠. 승은을 입은 이유와 과정은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요. 저도 그 과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려 주인공의 심정이 돼보려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볼 수 있는 또래 남자라고는 왕밖에 없었어요. 당연히 왕을 흠모하지 않았을까요? 궁에는 수백 명의 궁녀가 있고 대부분의 궁녀는 왕의 용안 한 번 보기 어렵지만요. 명성황후의 상궁이 돼 왕을 볼 수 있게 되면서 그 마음을 더 키워나갔던 것 같습니다. 또 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 고종 19년) 후 거처를 한동안 옮겼는데, 순헌황귀비가 그때 고종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고종은 강한 성격에 자신과 동등하게 권력을 행사하려 했던 명성황후에 비해 충성심에 가까운 애정을 보였던 순헌황귀비에게 신뢰와 의리가 있었던 것 같고요. 또 아관에 머물던 1년간 두 사람이 서로만을 의지하며 더욱 애정이 깊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관에서 고종과 보낸 1년은 순헌황귀비에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겁니다. 아이도 그때 생겼고요.”
― 박색이었다는 말이 있는데요. 명성황후가 그래서 곁에 둔 거라는 얘기도 있죠.
“명성황후는 실제 사진이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고 순헌황귀비는 사진이 남아 있어서 비교하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역사 속 미남미녀가 현재의 미남미녀상과 같진 않잖아요? 순헌황귀비의 외모는 당시 여성들의 평균적인 정도입니다. 박색이니 추녀니 하는 것도 일제 식민사관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명성황후가 순헌황귀비를 곁에 둔 것은 영특하고 지혜로워서였습니다. 자신의 측근이 승은을 입으니 배신감이 더 컸던 거죠. 명성황후가 심하게 문초를 했는데, 고종이 직접 말렸다고 합니다. 이 점에 명성황후는 더 분노했고 아예 궁 밖으로 쫓아낸 겁니다.”
구국을 실현한 교육의 어머니
― 그렇게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는데 다시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재입궁 후에도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궁녀의 최고 지위인 제조(提調)상궁을 목표로 노력했어요. 이런 노력과 지혜, 아관파천을 시행할 정도의 대범함, 교육기관을 설립할 정도의 통찰력까지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반드시 재조명돼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역대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는 등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다시 읽게 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다만 대중문화에서 구한말의 이야기는 많이 조명되지 않는 편인데 그 시대의 이야기도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 이 책에서 독자들이 얻길 바라는 메시지가 있다면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우리는 역사관과 정체성에 깊은 상처를 입어왔습니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어요. 식민사관을 체계화하고 강제 주입했지요. 고종은 무능한 군주, 순헌황귀비는 궁중 암투로 올라온 후궁이라는 오명을 씌웠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근대국가의 기틀을 만들고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외교적 활동을 해왔고, 대한제국 선포를 통해 자주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독립운동가적인 군주였습니다. 순헌황귀비는 교육을 통해 구국을 실현한 교육의 어머니였고요. 고종과 순헌황귀비가 외교와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했던 지도자로 새롭게 인식되길 소망합니다.”⊙
다른기사 보기저작권자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새 카테고리2'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휴먼노이드 1000만대 시대. 로봇 옷 시장 열린다. (0) | 2026.06.09 |
|---|---|
| 영남 자유성) 女性 總理 (0) | 2026.06.09 |
|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 349. 동해에는 고래가 산다. (0) | 2026.06.08 |
| 매일춘추) 좋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0) | 2026.06.08 |
| 安重根과 遺墨 보존한 일본인 추모 동양평화기념비,세워. (0) | 2026.06.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