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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소리나는 독서인

한문역사 2026. 6. 18. 16:02

성석제의 인간사] 억, 소리 나는 독서인

2026. 6. 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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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가

어린 시절부터 궁금했다. 백만장자가 얼마나 대단한 부자인지.

우리가 자주 쓰는 백만장자(Millionaire)의 어원이 된 단어는 프랑스어 ‘Millionnaire’로 영어권 백만장자에 비해 ‘n’이 하나 더 들어간다. 18세기 프랑스에서 100만을 뜻하는 ‘Million’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aire’)가 붙으면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늦게 깨우쳤던 조선의 김득신
‘백이열전’만 11만3000번 읽어
금생에 조만장자 될 수 없으니
차라리 만 권 독서라도 하리라

김지윤 기자

1720년 당시 프랑스에는 존 로라는 인물이 주도한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식 투기 광풍이 불었고 프랑스 정부의 비호 아래 미국 미시시피강 유역(당시 프랑스령)의 개발권을 독점한 이 회사의 주가가 단기간에 수십 배로 폭등했다. 이때 하룻밤 사이에 주식으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사람들을 가리켜 “Millionnaire(백만 자산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한다. 비록 이 열풍은 전례 없는 ‘주식 거품(Mississippi Bubble)’으로 끝나버렸지만, 단어만큼은 살아남았고 1826년경 영어권으로 넘어가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당시 100만(프랑·달러)의 가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마어마했고 ‘자자손손 평생 일을 하지 않고도 풍요롭게 살 수 있을 만한 절대적인 부(富)를 물려줄 수 있는 어른(長者)’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십억장자’ 대신 ‘억만장자’
그렇다면 억만장자(Billionaire)는 어디서 나왔을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산업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백만장자를 뛰어넘는 엄청난 부자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석유왕 존 D 록펠러. 이들의 자산을 표현하기 위해 10억을 뜻하는 ‘Billion’에 접미사를 붙여 ‘Billionaire’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졌다 한다.

십억장자’가 동양권으로 넘어올 때 번역을 어떻게 할지에 관해 번역가들 사이에 고민이 생겨났다. 서양은 3자리(천, 백만, 십억…) 단위로 숫자가 올라가지만, 동양은 4자리(만, 억, 조…) 단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당시 번역가들은 영어의 ‘Billionaire’를 직역하여 ‘십억장자’로 부르기보다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옛날부터 동양에서 억만금, 억만년처럼 ‘셀 수 없이 가장 큰 수’를 비유할 때 쓰던 관용구인 ‘억만(億萬)’을 가져와 ‘억만장자’로 번역했다. 이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부자’라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억만장자’라는 표현이 정착된 것이라 한다.

참고로 한자문화권에서 고대부터 일상생활에서 돈이나 곡물을 셀 때 써왔던 단위 수로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 해 등으로 열 곱씩 올라가는 셈법이 있다. 이 방법으로 셈하면 억은 10만, 조는 100만, 경은 1000만이 된다. 옛 문헌에서 생활과 관련돼 ‘억만금이나 되는 돈’이라고 하면 바로 이 단위 수로 쓰인 말이며 이때 억만금은 10의 9 제곱이므로 오늘날 개념으로 10억이다(10만×1만).

조선의 문인·백곡 김득신(1604~1684)의 서재 이름이 억만재(億萬齋)인데 ‘책을 억만 번 되풀이하여 읽는 서재’라는 뜻으로 쓰였다. 김득신은 머리가 영리하지 못해 남들보다 학문 습득이 많이 늦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같은 글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해서 읽는 방식으로 이를 극복했는데, 자신이 34세부터 67세까지 수만 번 이상 읽은 책의 횟수를 기록한 ‘독수기(讀數記)’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중국 사마천 『사기』의 ‘백이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을 읽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셈으로 따지면 11만3000번을 읽은 것이다. 그것만 해도 ‘억’ 소리가 나는데, 그 외에도 『노자전』 『주역』 『중용』 『장자』 등 1만 번 이상 6, 7만 번까지 읽은 글만 36편에 달한다고 한다. 그 횟수를 다 합치면 1조(100만) 번이 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수다한 ‘억만장자’를 넘어 ‘1조 독서인’, 나아가 ‘1경 독서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위대한 선인을 가진 셈이다.

 

어린 시절 집안이고 동네고 간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 기왕에 방바닥을 굴러다니던 비아동문학(성인용) 서적 가운데 그나마 읽을 만한, 이야기의 단맛이 우러나는 『옥루몽』 『명화로 읽는 성경』 『노인과 바다』 『햄릿』 『러브 스토리』 『대한백년』 『나의 고백』, 일본 대하소설 같은 책을 제목과 작가를 상관치 않고 최하 백 번 이상씩 읽은 적이 있다. 나이가 두 자리 수가 되면서 읽기 시작한 무협소설·만화에 대중문학까지 읽은 책의 회수와 권수(3000종이 넘었을 무협소설은 기본이 다섯 권이었다)를 추산(곱)해보니 대략 3만은 넘겼을 것 같다.

만 권 읽으니 신들린 듯 글 써져
중국 당나라의 두보는 ‘만 권의 책을 읽으니 신들린 듯 글이 써진다’고 했고 추사 김정희는 ‘가슴 속에 만 권의 책을 담아야 그것이 흘러넘쳐 그림이 되고 글씨가 된다’고 했으며 중국의 고염무는 ‘만 권의 책을 읽는 것은 만 리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20대 이후, 나보다 무협소설을 많이 읽은(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서너 명 만났는데 그들 중 두세 명은 ‘무협소설을 하도 많이 읽다 보니 결국 내가 쓰게 되더라’고 고백했다. 나는 결코 그 경지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달러 기준으로 인류 최초의 조만장자(Trillionaire)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런데 억만금의 ‘억만’과는 달리 ‘조만’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던 말이라 그런지 다른 ‘인류 최초’에 비해서는 어쩐지 위화감이 생기고 생경하게 느껴진다.

매년 발표되는 국제구호개발기구 등의 최신 리포트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 인구의 상위 1% 미만(약 8000만 명)이 전 세계 전체 금융 자산의 59%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하위 50%(약 40억 명)의 자산은 전 세계 전체 부의 2% 미만이다.

어차피 금생에 ‘조만인간’이 되기는 그른 듯하니 만 권 독서라도 하리라.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