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甲의 위풍당당 유인극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에는 다양한 부류가 등장한다. 가장 얄미운 것은 실컷 괴롭혀 놓고 “그냥 부탁했는데 들어줬어요, 우린 친구”라며 어깨동무하는 이들이다.
강자의 부탁은 사실상 강요다. 약자에겐 ‘안 하면 죽는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약자는 그 미묘한 공기의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반면 강자는 무디다. 최근 호남 반도체 투자 과정을 보며, 이 드라마의 장면들이 묘하게 겹쳐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광주에서 호남 투자 계획을 밝히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원래는 용인 투자를 다 끝내고 그다음 단계로 호남을 얘기하시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 수요가 너무 폭증하니 동시에 추진합시다 해서 약속을 미리 받았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CEO를 향해서도 웃으며 “동의하셨죠?”라고 물었다. 한 명은 난감한 듯 웃었고, 다른 한 명은 굳은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대통령은 “좋게 말하면 유도, 좀 심하게 얘기하면 유인(을 했다). 억압, 강요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강자는 문제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좌우하는 톱2 기업의 증설 계획이 비전문가인 대통령의 요청으로 뒤집혔음을 자인한 셈이다. 반도체 기업들은 현재 시황만을 기준으로 무턱대고 공장을 늘리지 않는다. 사이클이 급변하는 특성상 훗날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기업이 사라졌다. 외신들이 호남 증설을 예민하게 지켜보는 이유다.
강자는 부탁도 잦다. 이 대통령은 작년 9월 청년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대기업 회장님들한테 읍소해서 청년 좀 뽑아달라고 했는데 다행히 들어주고 있다”고 했다. 같은 날 청와대는 대기업들이 당초 계획보다 수천 명 늘린 인력을 하반기에 채용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도 대통령의 ‘유인’에 삼성과 SK는 4700조원대의 천문학적 투자 보따리를 풀었다. 이 대통령은 두 총수를 국민 영웅이라 부르며 ‘90도 인사’를 했다. 원래 큰절을 하려 했는데 참모가 말렸다고 한다.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보다 더 낮게 고개를 숙였다고 ‘정권이 을(乙)’이라고 보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자의 마음은 은연중에 드러난다. 90도 인사 다음 날 삼성전자 CEO가 호남에 전력·용수·인력·인프라 확보를 재차 부탁하자 이 대통령은 “정부 약속 받고 싶어서 확인 사살을 하시네”라고 받아쳤다. 아마 이 CEO는 그런 얘기를 다시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시장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고 했다. 정부의 유인과 읍소에 기업은 생존을 건 결단을 강요받는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면, 그 청구서는 국민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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