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

영남의 종가를 가다(3) 안동김씨 보백당 金係行 종가

한문역사 2026. 7. 3. 14:58

영남의 종가를 가다] <3> 안동김씨 보백당 김계행 종가와 청백(淸白) 가풍 500년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입력 2026.06.05 09:26
  •  
  • ⊙ 보백당 김계행은 자리를 지키는 능력보다 물러날 줄 아는 용기가 더 귀했던 시대의 인물

⊙ 연산조 불의한 권력 앞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두루 거치며 임금에게 직언 서슴지 않아
⊙ 보백당은 사후 400년 세월이 흘러 名人이 됐고, 名家, 名門이 돼
⊙ “도둑이 들지 않았다면 대원군 친필은 여전히 먼지 속에 묻혀 있었을지도”
⊙ “청백의 가풍은 화려한 벼슬보다 오랜 빈한(貧寒) 속에서 더 단단해져”
⊙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마라” 유언 남겨

[편집자 註] 

<영남의 종가를 가다> 세 번째 여정은 안동김씨 보백당(寶白堂) 종가입니다. 흔히 안동김씨라 하면 세도정치와 권문세가를 먼저 떠올리지만, 보백당 종가는 이와는 결이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라는 문장을 가훈처럼 품고, 500여 년 동안 청백의 가풍을 지켜온 집안입니다.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은 안동김씨 최초의 문과 급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세보다 물러남을 택했고, 권력보다 절개를 지키려 했습니다. 연산군 시절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끝내 묵계(默溪)의 산수 속으로 돌아가 만휴정(晩休亭)을 지었습니다. 그의 삶은 ‘난진이퇴(難進易退)’, 즉 나아감에는 신중하고 물러남에는 미련이 없는 선비 정신의 전형이었습니다.

이번 르포는 단순한 종가 소개에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 상속 폐지 이후 흔들리는 종가 문화, 불천위(不遷位) 제사의 변화, 종손과 종부가 감당하는 삶의 무게, 그리고 청백의 가풍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함께 물었습니다.

 
 
보백당 편액 아래에 선 종손과 종부. 이 편액은 그의 15대 종손 난포 김학규 선생이 종택의 별채를 건립한 후 당호로 현판한 것이다.
 

지난 5월 2일, 기자는 안동으로 내려갔다. 묵계(默溪)의 물소리가 잔잔히 흐르는 길 끝에 보백당(寶白堂) 종택이 있었다. 만휴정(晩休亭)의 폭포 소리와 묵계서원의 고요함을 차례로 밟았다.

“우리 집에 보물이 없으나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임종 앞에서 남긴 말이 집안의 당호(堂號)가 됐고, 당호가 자호(自號)가 됐으며, 자호가 가풍(家風)이 됐다. 한 인간의 마지막 말이 가문의 첫 원칙이 되었다는 사실은, 한 편의 서사시와 닮았다.

안동김씨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1431~1517년)의 20대 종손 김정기(金定基·72)씨와 종부 장무송(張茂松·70) 여사를 만났다.

 

안동김씨 최초의 문과 급제자 

안동김씨(신안동김씨)의 역사에서 김계행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각별하다. 가문 최초의 생원(生員) 급제자였던 비안공(比安公) 김삼근(金三近·?~1465년)의 아들 형제가 이 집안의 운명을 바꿨다. 형 김계권(?~1458년)은 한양으로 올라가 훗날 세도정치의 씨앗이 될 장동김씨(壯洞金氏)의 기반을 다졌고, 아우 김계행은 안동에 남아 안동김씨 최초의 문과 급제자가 됐다.

1447년(세종 29년) 16세에 생원에 합격하고, 50세가 된 1480년(성종 11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김삼근의 생원 급제 이후 60여 년, 안동김씨 득성 이후 60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의 저자인 영종회 이성원(李性源) 회장에 따르면, 생원·진사가 향반(鄕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문과는 국반(國班)에 들어서는 등용문이다. 보백당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가문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문과 급제자가 종9품 임시직 권지(權知)에서 출발하던 시절, 보백당의 초임은 정6품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검사 초임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보다 70여 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보다 30여 년 앞서 안동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선각자가, 연산조(燕山朝)의 불의한 권력 앞에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며 임금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

 
 

54세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55세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57세에 이조전랑(吏曹銓郞), 58세에 사헌부 장령(掌令), 59세에 사간원 사간(司諫), 62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과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마침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일을 만나면 간쟁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의 직제로 비교하자면 검사로 시작해 검찰총장으로 마친 셈이었다. 그러나 승진은 더디었다. 60세 이후 10여 년간 3품 벼슬에 머물렀고, 이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아경(亞卿·참판)이나 정경(正卿·판서)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직소를 올렸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쓴 묘갈명(墓碣銘)은 이렇게 전한다.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일을 만나면 반드시 간쟁했다. 강직하여 절대 아첨하지 않았다. 무릇 관직에 임명되면 숙고하며 한 자계(資階), 반 자급(資級)이라도 반드시 사양했다.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때 나아갔으나 오래 있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는 능력보다, 물러날 줄 아는 용기가 더 귀했던 시대. 지금은 어떤지, 문득 생각이 머문다.

 

명인, 명가, 명문의 길 

이하응이 쓴 안동김씨 보백당 유훈을 내보이고 있는 종손 김정기와 종부 장무송.

난진이퇴(難進易退), 이험불이(夷險不二)의 처신이었다. 즉 보백당의 처신은 벼슬길에 나아갈 때는 늘 신중했고, 물러날 때는 미련이 없었다. 평탄한 때나 험난한 때나 태도를 달리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태형(笞刑)을 받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다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70세에는 의금부에 5달 넘게 구금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꺾이지 않았다. 65세, 연산군 즉위 원년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자 이런 사직소를 올렸다.

“신(臣)은 외람되게도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어 청현(淸顯)의 자리를 역임하며 조정의 대열에 끼친 누가 이미 한도를 넘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신과 같은 천박하고 졸렬한 사람이 어찌 오래도록 요직의 자리에 함부로 머물러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시골 텃밭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죽어야 합니다.”

보백당에게 정치는 환멸을 가져다주었고, 결벽에 가까운 성품은 깨끗한 선향(仙鄕)을 갈구했다. 이후 그가 찾은 곳은 묵촌(默村)이었다. 30세에 처음 눈여겨봐 두었다가 71세에 비로소 정착한, 40년의 꿈이 실현된 곳이다. 1501년 그 묵계계곡 폭포가에 만휴정을 지었다. 87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청백을 벗 삼아 자적(自適)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일구었다.

생전에 오르지 못한 벼슬은 사후(死後)에 모두 돌아왔다. 1858년(철종 9년) 이조참판, 이듬해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1863년 정헌(定獻)의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1909년(융희 3년) 3월 25일, 국불천위(國不遷位)가 됐다. 사후 350여 년이 지나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명인(名人)이 됐고, 명가(名家)가 됐으며, 명문(名門)이 됐다.

종택 대청마루에 마주 앉은 종손 김정기씨는 말문을 열기 전에 잠시 생각을 고르는 사람이었다. 진지하고 심각하다고 종부가 미리 귀띔해 준 그 인상이 첫눈에 읽혔다. 종부 장무송 여사는 그 옆에서 가끔 남편의 긴 이야기를 적절히 덜어내기도 하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대화에 은은한 웃음을 보탰다.

 
 

우리는 보백당 종택 대문에 붙이는 입춘방(立春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김정기 종손의 말이다.

“일반 가정은 이렇게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가는 누구든 들어와 안방 문도 열어보고 사당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늘 스스로를 삼가야 합니다. 보백당 선조의 유훈 가운데 ‘지신근신(持身謹愼), 삼가고 또 삼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입춘방에 ‘근신’ 두 글자를 크게 써 붙입니다.”

― 종가의 삶은 무엇보다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네, 방문객 스스로도 이 집의 품격과 주인의 몸가짐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매년 입춘방에 흔히 쓰는 입춘대길 대신, 그 유훈에서 근신 두 글자만 떼어 크게 적어 붙입니다. 평생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살고 싶어서입니다. 선친께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쓰셨습니다.”

 

진정한 불천위 종가의  세 요소 

1909년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내린 김계행의 부조칙명(不祧勅命). 김계행을 불천위로 계속 향사하라는 내용의 칙명이다.

― 종가(宗家)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불천위 종가에는 반드시 갖춰야 할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불천위 조상입니다. 원래 4대 봉사(四代奉祀)를 마치면 신주(神主)를 묘소에 묻습니다. 그런데 왕의 칙령이나 유림(儒林)의 공론(公論)으로 ‘이분은 100대가 지나도 제사를 모셔야 할 만큼 훌륭하다’고 인정받은 조상의 신주는 옮기지 않습니다. 이를 불천위라 합니다.

둘째, 불천위 신주를 모시는 사당과 종택이 있어야 하고, 셋째 매년 불천위 기일에 종손이 제사를 모셔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불천위 종가로 인정받습니다. ‘내가 불천위 종가’라고 자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典禮)에 조예 있는 이들이 ‘저 집은 불천위 종가’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어릴 때는 안동김씨 명문가 후손이라는 말을 자랑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달리 말씀하셨어요. 불천위 종가라는 건 내세울 벼슬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라, 국가가 맡긴 제사를 대대로 성실히 지켜가는 책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종가의 의미는 이름값이 아니라, 조상을 잊지 않고 흔들림 없이 예를 이어가는 삶의 자세에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 보백당 선조는 어떤 분이십니까.

 
 

“정승처럼 국가적으로 우뚝한 벼슬을 지내신 분이 아니고 연산조에 삼사의 청요직에서 임금께 직언을 서슴지 않으신 것으로 후대에 알려져 있습니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즉 ‘우리 집에 보물이 없으나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라는 시구에서 자호를 따셨습니다. 이 유시는 5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큰 울림을 주는 보백당의 브랜드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도둑 덕분에 발견한 대원군 친필 

이 대목에서 김정기 종손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년)이 보백당의 15대손 난포(蘭圃) 김학규(金學圭)에게 써 준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종택에는 뜻밖의 보물이 잠들어 있었다. 보물은 화려한 곳에 있지 않았다. 도둑이 방방을 뒤집어 놓은 뒤 뒷수습을 하던 종손과 종부의 곁에 자연스레 다가왔다. 이번에는 종부 장 여사의 말이다.

“한동안 종택이 비어 있던 사이 도둑이 들었습니다. 방방마다 뒤지고 갔어요. 말총으로 만든 갓이며 증조부께서 직접 짜신 감나무 장, 제사에 쓰던 유기(鍮器), 안방 문짝에 붙어 있던 동양화 네 짝까지 다 떼어 갔습니다. CCTV 저장 장치도 가져갔고요. 그 뒤엉킨 먼지 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두 가지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대원군의 친필이고, 다른 하나는 연시례(延諡禮) 행사 일기[1868년 고종이 보백당에게 정헌공(定獻公) 시호 교지를 내린 날 묵계서원에서 베푼 행사를 기록한 일기]였습니다.”

 

“조상님들께서 응원하시는구나”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세렌디피티, 즉 뜻하지 않은 발견의 기적이기도 했다. 도둑이 들지 않았다면 대원군의 귀한 친필 역시 지금까지 종택 어딘가 먼지 속에 묻힌 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정기 종손은 “정말이지 헝클어진 간찰 더미 속에서 도적질의 뒷수습을 하며 발견한 유물을 수습할 때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며 “‘아! 조상님들께서 우리에게 종가 보전의 역사적 소임을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응원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대원군께서 이 고을을 지나다가 보백당 선조의 행적과 가풍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보물은 오직 청백’이라는 유훈과 청빈한 삶의 이력을 듣고 크게 감탄해, 직접 친필을 써 종가에 내려주셨다고 해요. 말하자면 대원군이 보백당 선조의 정신을 기려 남긴 선물 같은 것이지요.”

종택에서는 현재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고 모조본을 보관 중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전통문화와 유교적 가치가 담긴 국학 자료를 수집·보존·연구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활용하는 국학 전문 연구기관이다. 친필 원본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500주년 기념행사 때 여러 교지(敎旨)와 유물을 함께 전시했는데, 의외로 관람객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바로 그 친필 앞이었어요. 대원군의 호인 석파(石坡)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애제자로 유명한 서예가 아닙니까. 글씨에 힘과 기운이 살아 있어서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종부)

― 대원군이 안동김씨 문중에 친필을 남겼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대원군 입장에서도 정치적 갈등과 별개로, 보백당 선조 같은 옛 선비의 삶과 절개는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정치적 관계와 한 인물의 인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그 친필의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종손)

― 장자 상속이 폐지된 뒤 종가 운영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저는 보백당 20대 종손입니다. 불천위 선조 명의의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시집간 딸도 법적으로 균등 상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민법이 개정되면서 장자 상속이 폐지됐고, 종손이 조상신을 모시는 중심 역할을 맡는다는 인식도 많이 퇴락했습니다.

여기에 핵가족화, 고도 산업 사회화, 농촌 인구의 도시 이탈까지 겹치면서 문중 인력을 동원하기도 어렵고, 제사를 이어가는 일 자체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불천위 종가 문화의 토양 자체가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봐야 합니다.”(종손)

 

불천위 제사, 300인에서 60인으로 

 
 

― 오늘날 유교적 가르침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많은 분이 안동 지역 양반 문중의 인성교육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고 이야기하죠.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는 말도 하고요. 그래서 가정과 학교에서 유교적 인성교육을 강화하면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유교는 무너졌고, 어떤 분들은 그것이 유교 자체의 실패라기보다 절제되지 못한 인간의 욕심이 유교적 가르침을 밀어낸 결과라고도 말하죠. 지금 같은 자본주의 고도 산업 사회에서는 목전의 이익이 우선되기 때문에 유교적 가치가 스며들 여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사실입니다.”(종손)

― 처음 종가에 들어오셨을 때 불천위 제사는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치러졌습니까.

“결혼해서 처음 왔을 때 한 300분이 오셨어요. 밤 12시 이후 제사를 지내니까 사흘 행사가 됩니다. 멀리서 오시는 분은 점심때부터 오시니, 점심·저녁·야식을 다 대접해야 하고, 음복까지 마치면 밤이 깊어 마을 곳곳에서 주무시고 가셨어요. 마을 잔치였습니다.”(종부)

― 그것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시아버님이 공무원이다 보니 이튿날 출근이 어려웠고, 시대도 많이 바뀌었다며 결단을 내리셨어요. 기일 다음 날 저녁 7시로 옮겼습니다. 차가 많이 보급된 때라 음복 후 바로 귀가하시니 주무시는 분이 줄었고, 지금은 50~60분 정도 오십니다.”(종부)

― 제사에서 종부께서 맡으시는 역할이 있습니까.

“아헌(亞獻), 두 번째 잔을 올리는 것을 제가 합니다. 예전에는 어머님이 하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제가 맡게 됐습니다. 남자분들 사이에서 한복 입고 올라가 아헌을 드리는 그 순간이 싫지는 않습니다.”(종부)

― 어린 시절부터 보백당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저는 비교적 단순하고 실천적인 성격입니다. 거창한 철학으로 조상을 섬긴다기보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출발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공직에 계실 때 직접 하기 어려운 일들을 제가 곁에서 많이 도왔습니다. 아버지와는 스물네 살 차이가 났는데, 제가 서른여섯이나 서른일곱쯤 되었을 때 대구로 내려와 자연스럽게 종가 일을 거들게 됐습니다.”(종손)

― 종손으로서의 무게감을 어떻게 감당하십니까.

“어릴 때 증조모께서 서원에도 데려가시고 정자에도 데려가시며 ‘훈(아명)아, 니 눈에 보이는 이것, 다 니 했다(너의 소유다)’고 하셨어요. 4촌, 5촌을 비롯한 여러 족친을 방문하시면 ‘니가 어서 잘 커서 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우리 집 기운을 크게 일으켜야 된다’고 하시면 제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그러나 종손은 외롭습니다. 이렇게 해내야 하는데 잘 못한다는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닙니다.”(종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 만휴정 

국가지정명승인 만휴정. 송암폭포 암반 위에 지은 정자로 보백당이 말년에 이곳에서 보냈다.

― 종부께서는 문중의 무게를 짊어진 종손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이분은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분이에요. 저는 밝고 긍정적이죠. 쉽게 보이도록 자꾸 가지를 쳐드리려 합니다. 시어머님이 저한테 중압감을 주지 않으셨듯이, 저도 며느리에게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이제 첫 손자가 100일이 지났는데, 아이가 크면 행사 때 와서 곁에서 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겠지요. 저도 처음엔 하나도 몰랐는데 세월이 흐르니 눈에 들어왔으니까요.”(종부)

― 지난해 3월 산불 때 보백당 종택과 묵계서원, 만휴정도 정말 위험했지요. 그때 상황이 어땠나요.

만휴정은 조선 중기 보백당 김계행이 말년에 머물며 학문과 휴양을 즐겼던 정자로, 안동 묵계마을 일대를 대표하는 전통 건축물이다. 현재는 국가 지정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전통 정자 양식과 주변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지며 다시 대중적 주목을 받았다. 유진 초이와 고애신이 마주 서는 장면, 이른바 “합시다, 러브”라는 명대사가 흐르는 공간이 만휴정 자리다. 이후에도 극의 곳곳에서 인물의 내면과 운명을 비추는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종택 앞쪽에는 나무랑 인화물질이 별로 없었고, 가장 다행인 건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었다는 거예요. 바람이 이쪽으로 불었다면 싹 다 타버렸을 겁니다. 뒤편 산의 나무는 거의 다 탔는데, 건물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죠. 지금 생각해도 천우신조(天佑神助)라는 말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종부)

 
 

 

작년 火魔의 위협 

― 당시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바람을 타고 불똥이 계속 날아다녔어요. 과수원을 지키겠다고 젊은이들이 불길 바로 옆에서 물 호스를 잡기도 했고, 만휴정에는 방염포를 씌우고 소방차도 총출동했습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불씨였는데, 순식간에 큰 화마(火魔)가 됐습니다. 어떤 집은 아궁이 불쏘시개로 쌓아둔 고춧대에 불꽃이 하나 튀어 집 전체가 타버렸는데, 그 바로 옆집은 멀쩡했어요. 산불이란 게 정말 바람 한 번, 불꽃 한 번이 전부였습니다.”(종손)

― 종부님은 그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처음에는 정자랑 서원, 종택이 모두 불에 탄 줄 알았어요. 우리 애들 아빠(종손)는 그때 정말이지 흐느껴 울었어요.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지켜내기 힘든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의 정성과 선조의 덕이 겹쳐서 간신히 지켜낸 것 같아요. 그 일을 겪고 나서 문화유산이란 게 한 번의 화재나 산불로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청백의 가풍, 가난이 지켰다 

종손과 종부가 보백당 종택 사당 앞에 서 있다. 사당 문에 붙은 ‘존조(尊祖)’와 ‘중종(重宗)’ 글귀는 조상을 높이고 종통을 중히 여기는 종가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종부 장무송 여사는 상주 낙운중학교 교사 시절, 교장으로 부임한 시아버지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김정기 종손이 덧붙여 말했다.

“결혼이란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선택하는 것이고, 나머지를 자기가 일궈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은 그걸 잘 따라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보백당 19대손 김주현(金胄顯·1930~2018년)은 제9대 경상북도 교육감을 지낸 교육행정가다. 교사·교장·장학관 등을 두루 거친 현장형 교육자로 평가받았다. 특히 재임 시절 경북 초등교육계에 ‘도의교육(道義敎育)’ 기풍을 확산시키며 예절·청렴·효행 중심의 인성교육을 강조했다. 이는 청백(淸白) 정신과 종가의 가학(家學)에서 영향을 받은 정책 철학으로 해석된다.

― 보백당 선조의 유훈인 청백(淸白)·효우(孝友)·검수(儉守)는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어져 왔습니까.

 
 

“보백당 선조 이후 우리 집안은 오랫동안 빈한(貧寒)했습니다. 요즘 보면 재산을 두고 반목과 다툼이 자주 발생하는데, 우리 집안은 오히려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학교를 다니면서도 종손으로서 인문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집안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선고(先考)께서 차관급 벼슬을 하신 것이 이 집안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늘 강조하셨습니다. ‘애들 절대 비싼 옷 사 입히지 마라.’ 어른들과 밥상머리를 함께하며 들은 그런 말씀들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습니다. 유훈과 우리 아랫대의 생활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종손·종부)

 

집장 

보백당 종가의 음식 이야기를 들으며 인상 깊었던 점은 음식이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 종가의 시간과 생활방식을 온전히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무송 여사는 특히 ‘집장(集醬)’과 안동국시 이야기를 여러 차례 꺼냈다.

집장은 안동 지역 일부 종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저장 음식이다. 일반 된장처럼 장기간 숙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된장에 다시마와 채소, 고추 등을 더해 비교적 짧은 기간 발효시켜 먹는 일종의 속성 장이다. 국처럼 떠 먹거나 밥에 비벼 먹으며, 짭조름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특징이다. 장 여사는 “소화력이 약한 나에게 개인적으로 잘 맞는 음식이었다”고 말했다. 과거 종가에서는 장맛을 단순한 미각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의 품격을 담는 그릇이라 여겼다. 장독대의 냄새만으로도 그 집 살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장 여사는 시할머니에게 집장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지금도 가장 아쉽게 여긴다. 그는 “할머님이 살아 계실 때 배웠어야 했는데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쉽지만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안동국시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안동국시는 흔히 ‘안동 손국수’로 불린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손으로 썰어낸 국수에 맑은 장국을 붓고, 고명과 콩가루를 얹는 음식이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특징이다. 보백당 종가에서는 과거 할머니가 직접 밀대로 국수를 밀고 콩가루를 뿌려 손님상을 차렸다고 한다.

장 여사는 “시아버님이 주말마다 내려오시면 할머님이 신이 나서 안동국시를 만드셨다”고 회상했다. 종가의 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손님을 향한 예(禮)의 표현이자 환대의 방식이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과 문중 어른, 제사를 위해 모인 친척들에게 가장 먼저 내어놓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이 때문에 안동국시에는 접빈객(接賓客)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한다. 종가는 끊임없이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공간이었고, 부엌 역시 늘 열려 있어야 했다. 장 여사는 “음식 솜씨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손님 맞는 것을 좋아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종택에서 내놓은 들깨강정도 그가 직접 만든 음식이었다. 입에 넣으니 살살 녹았다.

“우리 집을 보고 오는 분들이니까 제가 안주인 아닙니까.”

이 한마디에는 종부의 역할과 함께 수백 년 종가를 지켜온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집장과 안동국시는 지금도 보백당 종가의 시간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다.

 
 

 

“비석을 세워 미화하지 마라” 

김정기 종손이 묵계마을 안쪽에 조성한 ‘보백당 불천위 봉사손(奉祀孫) 합동 묘역’. 보백당 종가가 지켜온 검박한 정신과 절제된 품격을 드러낸다.

보백당은 장수하다 87세에 세상을 떠났다. 자손 모두 잘되어 더 없는 다복한 생애를 보냈다. 81세 헌수(獻壽)에는 내, 외손 대소과 합격자가 10여 명이었고, 관직에 있는 자가 7명이었다. 죽음에 이르자 자질(子姪)들에게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마라”고 당부했다. 아름다운 유언이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냉혹하게 평가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오랫동안 임금을 지척에서 모셨다. 그러나 조금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니, 장례 역시 간략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한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마라. 이는 거짓된 명성을 얻는 것이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김정기 종손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를 묵계마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보백당 불천위 봉사손(奉祀孫) 합동 묘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묘역은 놀라울 만큼 담백했다. 그 흔한 문인석(文人石)조차 없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풍경처럼 자연스러웠다. 김정기 종손의 말이다.

― 합동 묘역을 조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20대면 할아버지·할머니 각 한 분씩만 해도 봉분이 40기입니다. 할머니가 두 분, 세 분인 경우도 있으니 50기에 가깝습니다. 그 묘소들이 안동 곳곳에 흩어져 있어, 차종손이 일일이 찾아 시사(時祀)를 지낸다는 것은 수행 불가예요.

소위 추로지향이라 일컫는 안동에서 적잖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 우려하면서도 불천위 제사를 당대보다 다음 세대에 흔들림 없이 이어지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싶었어요. 외양이 평평한 잔디밭이라는 ‘단순 명료함’은 길이 자손들이 찾아와 조상과의 인연을 확인하고 휴식을 즐기는 데 방점을 두었어요.”

― 기존 산소를 옮기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설득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산소의 경우 관을 다시 꺼내 유해를 수습하고 화장하는 일 자체가 또 다른 훼손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봉분의 흙, 즉 취토(取土)를 해와 유골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산소 자체는 자연 그대로 두었습니다.”

 

흙으로 돌아간 선조들, 묵계에 모이다 

 
 

― 유골은 어떻게 모셨습니까.

“화장 후 항아리에 넣지 않았습니다. 유골을 그대로 흙과 맞닿게 했습니다. 하나의 자연 물질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사당(祠堂)에 모신 불천위 신주는 보백당 할아버지의 육신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은 사당에 모셔져 있다고 봅니다. 꼭 봉분을 크게 만들어야만 영혼을 공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귀근복명(歸根復命), 뿌리로 돌아가 자연의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노자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항아리 하나 없이 흙과 맞닿은 그 방식이 어쩌면 가장 깊은 경배인지도 모른다.

묵계마을에는 이른 오후의 햇살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합동 묘역의 잔디는 고르게 다듬어져 있었고, 그 위로 묵계의 물소리가 낮고 고르게 흘렀다. 봉분도 없고, 비석도 없고, 화려한 석물도 없었다. ‘유허(遺墟)에 이름만 남기라’는 보백당의 유언처럼, 조상들은 흙이 되어 이 땅에 스며 있었다.⊙

다른기사 보기저작권자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새 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列傳에 숨은 秘密. 烈丈夫의 길을 택한 司馬遷 .  (1) 2026.07.04
嶺南의 宗家를 가다(1)嶺宗會  (0) 2026.07.03
매일 야고부)超純水  (0) 2026.07.03
鶴峯의 追憶.  (0) 2026.07.03
자유성)안동 소주  (0) 2026.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