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겉도는 남편에 치솟는 비통함, 240수 시로 달래
중앙일보 원문 기사전송 2024-07-26 00:19 최종수정 2024-07-26 05:40
외롭고 꼿꼿했던 김호연재의 삶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택은 축제 분위기, 시는 상처 가득
이 고택을 중심으로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와 ‘호연재 여성휘호대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어 송씨 집 아들 소대헌보다 며느리 김호연재를 통한 문화 유적이 되었다. 그런데 호연재는 고택의 축제 분위기와는 달리 외로움과 그리움, 상처 가득한 마음 풍경을 담아낸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시와 한글 시를 합쳐 240여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살기 위해 시를 쓴 것이다. 김호연재, 그녀는 과연 어떤 문제를 안고 어떻게 살다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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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두 세도가 결혼 화려했지만
“나는 규중의 물건, 날개가 없다”
“부모 욕 끼칠까 자나깨나 걱정”
혼인 10년 평가한 글에서 자책도
집안 자제 가르치며 말년에 생기
아내 죽자 재혼 남편 83세 천수

대전광역시 동춘당 공원 안의 소대헌·호연재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기호 지역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20대의 호연재는 외로웠다. 남편 송요화가 늘 밖으로만 돌았고 둘은 아예 등을 지고 살았다. 호연재는 종일토록 찾아오는 사람 없는(終日無人到) 집에서 그 긴긴 외로움의 시간을 달래야 했다. “꿈속에 마음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가니, 강엔 노을 안개 자욱하고 물은 부질없이 물결치네. 어촌은 적막하고 봄빛도 저무는데 저 멀리 높은 집이 나의 집이로구나.”(‘몽귀행(夢歸行)’) 마음은 늘 형제들과 시를 짓고 놀던 오두리 집에 가 있었다.
호연재 친부모 평생 다정

김호 연재 영정. 2019년 윤여환 화백이 그렸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많은 시를 남긴 호연재지만 남편과 수창(酬唱,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한 시는 한 편도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들 익흠의 ‘유사(遺事)’에는 “가군(家君)은 할머니를 모시느라 서울이나 백부의 임소에서 지내시고 항상 집에 계시지 않았다”고 했다. 외손자 김종걸은 “외조부는 젊을 때 호방하여 법도를 생각하지 않으셨고, 외조모는 고결한 뜻을 품은 채 마음으로 숨은 근심이 있어 글 중에 종종 비통한 심정을 묘사하셨다”라고 했다. 호연재 자신도 남편에 대한 마음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기로 한다. “부부의 은의가 비록 중하지만 저가 나를 저버리기를 심하게 하니, 어찌 나 홀로 구구한 정을 지녀 스스로 주위 사람의 비웃음과 경멸을 받아야 하느냐?”(‘자경편(自警編)’). 호연재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시가와의 관계가 정해지는 것이라 사실 자신의 시집 생활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외손자는 이를 두고 “이성(異姓)이 서로 모여 신맛 짠맛이 같지 않은 것이 많았다”고 표현했다.

지난해 김호연재 문화축제의 한 장면.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호연재의 고백을 보면 평생토록 시속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지체 높은 시집 사람들과도 껄끄러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시집 식구란 명목상 친(親)이지만 정은 소원하고, 은혜는 박하지만 의리는 무거운 존재들이라고 한다. 좋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다. 개선을 위해 노력은 하되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눈썹을 내리고 조심하며 사는 동안 연기와 불꽃이 창자 속에서 치솟는 경험을 하며 “화복은 본디 정해져 있는 운명일 뿐 인력(人力)이 아니로다”라고까지 한다.

호연재가 시숙에게 보낸 편지. 콩 서너 말만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호연재는 넉넉 지 못한 삶을 살았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호연재가 시숙에게 보낸 편지. 콩 서너 말만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호연재는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았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남편 재혼한 박씨, 시모가 흡족
호연재(1681~1722)가 세상을 떠난 뒤 남편 송요화는 18세 연하 박씨와 재혼을 한다. 계실 박씨는 호연재와는 다른 방식의 시집살이를 한 것 같다. “박씨 부인은 착하고 다정하며 부공(婦功)에 능하여 어른 말씀에 잘 응대하였다. 시어머니를 효를 다해 섬기고 집안 다스리는 데 조리가 있어 나씨 부인(시어머니)이 매우 흡족해하셨다.”(종숙모박씨묘지명) 부인 박씨는 15년 남짓한 혼인 생활 끝에 자식 없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한편 송요화(1682~1764)는 호연재 사후 8년 만에 비로소 관직으로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고 83세의 수를 누렸다.
3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온 오늘의 호연재는 대전지역 문화 브랜드가 되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소대헌·호연재 부부를 격조 있고 행복한 삶을 산 모델로 안내하는 고택 행사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후세인의 기대와는 다르게 부부는 남남이었고 호연재는 이 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장소로서의 고택이 문화가 되려면 그 아픈 시간들을 시로서 버텨낸 그 집 주인 호연재의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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