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

임정 주석 석오 이 동녕 선생

한문역사 2025. 8. 6. 15:46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상해 임정 세우고 끝까지 지켰다, 독립운동계 화합의 멘토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⑪ 석오 이동녕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은 1869년 천안 목천에서 명문가의 후예로 군수 등을 지냈던 이병옥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와 부친, 8촌 이장녕, 사위 이살음 목사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유년시절 한학을 수학했고 20대 초 응제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접한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구국운동의 길로 나서게 된다.

30대 초부터 독립협회회원으로 만민공동회, 내정개혁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언론사 제국신문 논설위원도 맡았다. 1903년 스크랜턴 목사가 설립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에 가입해 이동휘·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구국활동에 나서게 된다. 을사늑약 후 1906년 이상설과 함께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설립해 항일민족교육에 나섰으나 일제의 압박과 재정난 등으로 이듬해 서전서숙이 폐쇄됐고, 이후 귀국해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고 총서기를 맡았다.

과거시험 합격했지만 구국활동에 투신

ADVERTISEMENT



‘임시정부의 큰 별’ ‘정신적 지주’라 불렸던 석오 이동녕 선생. [사진 대전지방보훈청]

일제가 대한제국 병탄을 가속화하자 선생은 이상설·이회영 등과 함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논의하고 남만주 일대를 답사한 뒤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를 기지로 선정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12월 이회영 6형제에 이어 선생은 신민회회원 등과 함께 삼원보로 망명했다. 이듬해 삼원보 대고산에서 선생이 임시의장이 되어 민단자치기구 ‘경학사’를 조직했고 이상룡이 사장, 선생이 재정부장을 맡았다. 이어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초대 교장을 맡았고, 1913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확대·개편하게 된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제가 선생과 이회영·이시영 등을 체포·암살 하려하자 선생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당시 연해주에서 최재형·홍범도·이상설 등이 ‘권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었고 선생은 권업회 특별총회에서 의사부 임시의사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14년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춰 선생과 이상설·이동휘 등 권업회 핵심 회원들이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일동맹이 이루어지자 연해주 독립운동단체들은 해산하게 되고 선생도 니콜스크(현 우스리스크)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상설은 서거하고 임종을 지킨 선생이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해 스위픈강에 뿌렸다. 이 시기에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해 광복투쟁을 계속한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수립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어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4월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가 각각 임시정부로 수립됐다. 중국에서도 선생 등 39인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상해에서 임시정부수립에 나선다. 먼저 국내외 각 지역 대표 29인으로 최초의 의회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선생이 초대 의장으로 선출됐다. 임시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행정수반인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공포함으로써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한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상동교회 머릿돌. 이곳에서 이동녕 선생은 본격적인 구국활동을 시작한다. [사진 김석동]

선생은 법규와 체제를 정비해 임정의 기초를 닦아나갔으며 국무총리 이승만이 미국에 체재하면서 상해로 오지 않은 사이 국무총리대리로 선임 되었다. 선생은 국내외 임정통합을 주창했고 마침내 1919년 9월 11일 ‘상해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임시정부’가 통합해 한민족 대표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통합임정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선출했다. 선생은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어 행정·사무를 총괄하면서 국내에는 행정조직망인 ‘연통제’를, 국외 지역에선 ‘거류민단’을 조직하는 등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체재하다 1920년 12월 상해로 부임했지만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직하는 등 임정 내부갈등이 계속되자 선생은 국무총리대리 겸 내무총장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승만을 보좌하면서 임시정부의 정상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승만이 1921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 내각이 총사임 하는 등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빠졌지만 선생은 임정유지를 위해 진력했고 1924년 4월 선생이 국무총리로, 김구가 내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임정은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해 9월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선생이 임시대통령 직무대리를 맡았고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탄핵 의결 후 1925년 개헌을 통해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구성되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한다. 개정헌법에 따라 이상룡·양기탁·안창호 등이 차례로 국무령으로 선임되나 내각구성이 난항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재차 위기에 처한다. 선생은 1926년 다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임되어 김구를 국무령으로 선출한다. 이듬해 선생과 김구는 제3차 개헌에 나서 국무령제도를 폐지하고 정부수반인 주석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다. 이후 선생이 주석, 김구가 내무장을 맡아 임시정부 기능을 회복시킨다.

1930년 선생과 안창호·김구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은 독립운동계 단결과 임시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선생이 초대 이사장에, 안창호·이시영·김구 등이 이사에 선임됐다.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나서게 되는데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장이자 국무위원으로 ‘한인애국단’ 결성을 주도한다. 한인애국단 단장은 김구가 맡아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일제는 선생과 김구 체포를 위해 현상금을 걸었고 중국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군대가 해내지 못한 위업을 한국의 일청년이 능히 달성했다” 극찬했고 임정을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다른 기사
이전 판사 직업도 버렸다, 무장독립투쟁 이끈 광복회 총사령관
다음 대한제국군서 한국광복군까지, 무장투쟁 삶 바친 군인
임정 위기 수차례 수습하고 1940년 순국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4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