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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추거문고 談)(12)강세황과 거문고

한문역사 2025. 9. 13. 09:55

동 추 거문고 이야기] <12〉 강세황과 거문고거문고 타는 강세황·퉁소 부는 김홍도·…당대 화가들의 '풍류 모임'

 
강세황을 비롯한 당대의 대표적 화가들이 야외(균와)에서 가진 봄날 모임을 그린 균와아집도<부분>. 강세황은 거문고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1713~1791)은 70대의 나이에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 베이징에 갔을 때 많은 현지인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려 할 정도로 유명했던 화가였지만, 과거시험 장원급제(66세 때) 후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 관료이기도 했다. 문인 출신이지만 글씨와 서화에 능해 한국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유행시켰고, 조선에 서양식 화법을 들여오기도 했다. 또한 화가인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니, 조선의 그림을 바꾼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처남 류경종, 친구 허필과 절친했다. 또한 성호 이익, 현재 심사정, 호생관 최북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교유했다. 8세에 시를 짓고 13~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 처가인 진주류씨 집안으로부터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 갔다.

18세기 화가 야유회 모습 담은 '균와아집도'
시원한 폭포·소나무 한쌍 끼고 둘러앉아
산야에서 그림 그리고 바둑 두며 '흥취 만끽'
애제자 '김홍도'와의 친분도 여실히 드러나


부친의 일로 집안이 몰락한 강세황은 안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초야에 묻혀 거문고를 즐기면서 문인이자 화가·평론가로서 당대 예술계의 총수로 자리 잡아갔다. 벼슬길이 막혀버린 후 가난을 견디지 못해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내려간 강세황이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거문고와 벗하며 학문과 그림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 류씨 덕분이었다. 빈곤한 살림살이에도 처남 류경종의 도움으로 여러 문인과 교류를 하며 높은 안목과 학식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런 그는 환갑이 넘어서야 영조의 배려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66세에는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 합격했다. 영릉참봉(英陵參奉), 병조참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거쳤다. 1785년 중국 건륭제의 나이 75세, 즉위 50년을 축하하는 천수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베이징을 다녀왔다.

 
그래픽=장수현기자

◆강세황과 '균와아집도'

이런 강세황이 안산에 살던 시절,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강세황이 거문고를 얼마나 즐겼는지, 당대 예술인들의 풍류 모임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대 대표적 화가들이 중심이 된 구성원들이 야외에서 풍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을 그림으로 남긴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이다.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화가들인 표암 강세황, 현재 심사정(1707~1769), 호생관 최북(1712~?), 단원 김홍도(1745~?), 연객 허필(1709~1768), 김덕형(1750~?) 등 8명이 주인공이다.

모임 장소인 균와(筠窩)라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안산 인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모임 시기는 1763년 4월10일. 음력이니 모인 날은 화창한 늦은 봄날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모임을 갖고, 모임을 기념하는 이 그림을 합작으로 남겼다. 발문에 이러한 내용으로 남겼는데, 발문을 쓴 이는 강세황과 친했던 문인 서화가였던 연객(煙客) 허필이다. 허필은 시·서·화 모두에 뛰어났고, 산수화와 인문화에 능했다.

먼저 균와아집도 상단 오른편에 써놓은 발문의 내용을 보자.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강세황)이고,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심사정)이다. 치건(유생이 평상시에 쓰던 두건)을 쓰고 바둑 두는 사람은 호생관(최북)이고, 호생관을 마주하고 바둑을 두는 사람으로 추계(미상)이다. 구석에 앉아 바둑 두는 것을 보는 사람은 연객(허필)이다.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균와(미상)이다. 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사람은 김홍도이다. 인물을 그린 사람은 또한 홍도(김홍도)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현재이다. 표암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하고, 호생관은 색을 입혔다. 모임의 장소는 곧 균와이다. 계미 1763년 4월10일 연객 허필이 적다.'

이 그림을 보면 크게 두 장면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강세황이 거문고를 타고 김홍도가 퉁소를 불고 있는 음악 풍류 장면이다. 이를 균와는 안석에 기대어 듣고 있고, 심사정은 담배를 피며 감상하고 있다. 어린 김덕형은 강세황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강세황의 모습 중 거문고 부분은 대부분 훼손되어 아쉬움이 크지만, 거문고 괘가 있는 부분을 오른손으로 타고 있는 모습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다른 하나는 최북과 추계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다. 허필은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다. 이 모임 주인공은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균와인데, 이 인물은 균와(筠窩) 신광익(1746~?)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담뱃대를 물고 있는 심사정도 비스듬히 누워있다. 얼굴과 상체 부분이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남아있는 모습의 분위기로 보아 최고 연장자이거나 균와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인다. 심사정은 이 그림의 근경과 산수배경을 그렸다. 절벽과 작은 폭포 앞에 두 그루 소나무가 춤을 추듯 짝을 이루고 있고, 화명 아래에는 바위들이 적절하게 막아서고 있다. 문인화의 대가다운 진솔한 화풍은 이 모임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강세황이 거문고 연주자로 등장

한양의 근교인 안산을 주 근거지로 활동하던 당대의 대표적 예술가(화가) 지식인의 야외 풍류모임이 어땠을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들은 가끔 야외 풍류 모임을 가졌을 것이고, 그런 모임 중 대표적 모임을 이날로 생각하고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이런 모임에 강세황이 거문고 연주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 등 여러 가지 예술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거문고 연주자로 묘사되고 있음은 그가 얼마나 거문고를 좋아하고 거문고 연주에도 뛰어났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같이 등장하는 김홍도는 강세황의 애제자인데, 그 역시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 악기들도 잘 다뤘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해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와 대금,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다'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김홍도의 퉁소 소리는 맑고 가락이 높아 멀리서 이것을 들으면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내려오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편 강세황은 허필과 '연옹(허필)이 나(강세황)를 아는 것이 내 스스로 나를 아는 것보다 낫다'라거나 '표암의 서화첩에 연객의 평이 없으면 점잖은 선비가 갓을 쓰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할 만큼 서로 절친했고, 서로의 예술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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