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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연재 조용헌 살롱(1513)

한문역사 2025. 10. 14. 08:01

조용헌 살롱] [1513] 운두탕(雲豆湯)과 장파탕(場罷湯)

입력 2025.10.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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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하동의 명소 화개장터의 전경. 소설가 김동리가 지은 ‘역마(驛馬)’의 배경이기도 하다./ 김종호 기자

지리산 화개재(峙)를 중간에 놓고 볼 때 남쪽에는 화개장, 북쪽에는 인월장이 있었다. 화개장터에는 중국 비단뿐만 아니라 울릉도·제주도 건어물도 모였고, 경북 상주에서 낙동강을 타고 내려온 보부상도 모였다. 섬진강과 남해 바다를 끼고 있어 해상 물류가 발달된 까닭이었다.

조선 팔도의 정치 돌아가는 정보가 여기에 모였다. 화개장(場)이 끝나면 장꾼들은 ‘운두탕(雲豆湯)’을 즐겨 먹었다. 지리산 북쪽 운봉(雲峯)에서 화개 고개를 넘어 가져온 서리태로 만든 두부찌개였다. 운봉과 화개를 연결하는 지리산의 고갯길을 소금과 콩이 왕래를 했다고 해서 염두고도(鹽豆古道)라고 부른다.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먹는 두부탕(운두탕)은 화개장터 장꾼들에게 최고의 별미로 꼽혔다.

반대로 지리산 북쪽 남원시 인월면에서는 장파탕(場罷湯)이 유명했다. 인월장은 지리산 약초 집산지였다. 남원·순창·구례·함양 일대 장꾼들이 모두 모이는 큰 장이었다. 인월장은 오전 5시 무렵 개장해 오후 2시 무렵 파장했다. 장이 끝나면 먹을 게 기다리고 있었다. 장이 끝나고 먹는 ‘장파탕’이었다. 장에서 팔려고 가지고 나왔다가 미처 팔지 못한 식재료들, 예를 들면 붕어·미꾸라지·채소·버섯·산나물 등을 커다란 가마솥에 모두 집어넣고 푹푹 끓여 먹는 요리를 장파탕으로 불렀다. 장파탕 끓이는 솥단지는 처음에 5개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8개로 늘어났다. 무쇠 솥단지 1개에는 60명분 음식을 끓일 수 있었다. 8개면 480명분 식사였다. 그런데 이 장파탕은 공짜였다. 밥값을 받지 않았다. 줄잡아 500명분 장파탕은 보부상 장꾼들뿐만 아니라 인근 배고픈 사람들도 와서 먹었다. 5일마다 인월장에 파티가 열렸던 셈이다.

 

장파탕을 먹으면서 빈부귀천의 계급적 갈등이 상당 부분 녹아내렸다. 똑같이 솥단지 근처 바닥에 앉아 밥을 먹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월장의 장날마다 벌어지는 파티 비용은 누가 댔는가? 운봉에 살았던 만석꾼 부자 ‘박부자’가 댔다. 박부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만 운봉읍에 13채나 있었다. 박부잣집은 하동·화개에서 출발해 염두고도를 넘어온 소금 가마의 최종 집산지였다. 처음에는 소금 장사로 자본을 축적했다. 박부자가 인월 장파탕의 식사 비용을 100년 넘게 모두 부담한 것이다. ‘장파탕’ 이야기를 필자에게 해준 사람은 지리산의 ‘염두고도’를 30년 동안 발굴한 향토 사학자 김용근(65)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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