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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김호연재

한문역사 2025. 10. 26. 11:35

21.김 호연재(金 浩然齋) - 겉도는 남편에 치솟는 비통함, 240수 시로 달래

외롭고 꼿꼿했던 김 호연재의 삶

대전시 대덕구 동춘당 공원 안에는 소대헌(小大軒)·호연재(浩然齋)의 고택이 있다. 소대헌은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를 가리키고 호연재는 그의 아내 안동 김씨다.

고택의 유래는 17세기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문신 송준길의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며 지은 집이 다시 그의 아들 송요화로 이어졌다. 오늘날 이 가옥은 소대헌·호연재(小大軒·浩然齋)의 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역사와 문화의 생산지를 자임하고 있다.

고택은 축제 분위기, 시는 상처 가득

이 고택을 중심으로 ‘김 호연재(金 浩然齋)여성문화축제’‘호연재(浩然齋) 여성휘호대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어 송씨 집 아들 소대헌보다 며느리 김호연재(金 浩然齋)를 통한 문화 유적이 되었다.

그런데 호연재(浩然齋) 는 고택의 축제 분위기와는 달리 외로움과 그리움, 상처 가득한 마음 풍경을 담아낸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시와 한글 시를 합쳐 240여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살기 위해 시를 쓴 것이다. 김호연재(金 浩然齋), 그녀는 과연 어떤 문제를 안고 어떻게 살다 갔을까.

노론 두 세도가 결혼 화려했지만 - “나는 규중의 물건, 날개가 없다”

“부모 욕 끼칠까 자나깨나 걱정” - 혼인 10년 평가한 글에서 자책도

집안 자제 가르치며 말년에 생기 - 아내 죽자 재혼 남편 83세 천수

대전광역시 동춘당 공원 안의 소대헌·호연재(浩然齋)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기호 지역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우선 호연재(浩然齋)는 친가·외가·시가의 세 가계 모두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다. 아버지 김성달은 선원 김상용(1561~1637)의 증손이고, 어머니 이옥재(李玉齋)는 월사 이정구(1564~1635)의 증손녀이자 월당 강석기(1580~1643)의 외손녀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어머니 이옥재의 이모다.

따라서 김호연재(金 浩然齋) 와 송요화의 혼인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두 세도가 장동(안동) 김씨와 은진 송씨의 결합이면서 종횡으로 연결된 노론 세가(世家)의 확장과 결속을 의미했다. 호연재(浩然齋)는 19살에 오두리(홍성군 갈산면) 장동 김씨 가에서 300리 길의 회덕 송촌(대전시 대덕구)의 은진 송씨 가로 혼인해 갔다.

사실 명문 세도가에서 차출된 남녀라고 해서 행복한 부부로 산다는 보장은 없다.20대의 호연재(浩然齋)는 외로웠다. 남편 송요화가 늘 밖으로만 돌았고 둘은 아예 등을 지고 살았다. 호연재는 종일토록 찾아오는 사람 없는(終日無人到) 집에서 그 긴긴 외로움의 시간을 달래야 했다.

“꿈속에 마음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가니,

강엔 노을 안개 자욱하고 물은 부질없이 물결치네.

어촌은 적막하고 봄빛도 저무는데

저 멀리 높은 집이 나의 집이로구나.”(‘몽귀행(夢歸行)’)

마음은 늘 형제들과 시를 짓고 놀던 오두리 집에 가 있었다.

호연재(浩然齋) 친부모 평생 다정

김 호연재(金 浩然齋) 영정. 2019년 윤여환 화백이 그렸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호연재(浩然齋)의 친정은 독특한 가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는 시로써 소통하며 시로써 서로를 격려하는 부부였다. 내기 바둑에서 진 사람이 시를 지어 올리는 놀이를 즐기던 부부, 서로 주고받은 시가 무려 250여 수에 달했다.

“다시 세세토록 부부 되어 다음 생에도 복록 누리며 편안하기를” 다짐한 이 부부의 시는 『안동세고』에 실려있다. 한편 여덟 번째 호연재(浩然齋)를 비롯한 그들의 자녀 5남 4녀도 시에 능하여 『연주록(聯珠錄)』이라는 공동 시집을 내기도 했다(문희순, ‘17세기 여성 시인 이옥재의 삶과 문학’).

오두리 친정에서 형제들과 보낸 행복한 기억들이 절대 고독의 호연재(浩然齋)를 버티게 해 준 힘이었던 것 같다. “이 아우는 규중의 물건으로 빈 골짝에서 문을 닫고 지내고 몸에 양 날개 없으니 어찌 신선이 사는 산에 이를 수 있으리오. 한 조각 마음은 나날이 아득하고 귀향을 꿈꾸며 홀로 서성이는데 아득한 회포 금할 길 없어 편지를 부쳐 속내를 토로한다오.”

시를 쓰고 편지를 쓰는 일이 호연재(浩然齋)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며 자기 존엄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혼인 9년 만에 첫 아이를 얻는다.

많은 시를 남긴 호연재(浩然齋)지만 남편과 수창(酬唱,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한 시는 한 편도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들 익흠 ‘유사(遺事)’에는 “가군(家君)은 할머니를 모시느라 서울이나 백부의 임소에서 지내시고 항상 집에 계시지 않았다”고 했다.

외손자 김종걸“외조부는 젊을 때 호방하여 법도를 생각하지 않으셨고, 외조모는 고결한 뜻을 품은 채 마음으로 숨은 근심이 있어 글 중에 종종 비통한 심정을 묘사하셨다”라고 했다.

호연재(浩然齋) 자신도 남편에 대한 마음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기로 한다. “부부의 은의가 비록 중하지만 저가 나를 저버리기를 심하게 하니, 어찌 나 홀로 구구한 정을 지녀 스스로 주위 사람의 비웃음과 경멸을 받아야 하느냐?(‘자경편(自警編)’).

호연재(浩然齋)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시가와의 관계가 정해지는 것이라 사실 자신의 시집 생활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외손자는 이를 두고 “이성(異姓)이 서로 모여 신맛 짠맛이 같지 않은 것이 많았다”고 표현했다.

지난해 김호연재(金 浩然齋) 문화축제의 한 장면.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호연재(浩然齋)는 혼인 생활 10년을 평가한 글을 남기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자모의 사랑스러운 가르침을 받지 못해 부인의 행실 대강도 알지 못했다. 부모를 일찍 여윈 나를 형들이 외람되이 명문 가문에 맡기어 출가한 것이 이제 10여 년이 되었다. 시부모 봉양이 천박하고 남편 대우가 예모에 어긋났으며 종들을 부리되 상벌이 분명치 못했다. 진퇴와 주선(周旋, 일이 잘되도록 여러 방면으로 힘씀)의 모든 행실이 규범에 어긋났고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도 예의를 알지 못해 사람들의 원망이 나에게 몰렸다. 과실을 자초한 것으로 인해 아래로는 나 자신이 위태로웠고, 위로는 부모에게 욕을 끼쳐드려 자나 깨나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하루도 편치 못했다.”(‘자경편’)

호연재(浩然齋)의 고백을 보면 평생토록 시속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지체 높은 시집 사람들과도 껄끄러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시집 식구란 명목상 친(親)이지만 정은 소원하고, 은혜는 박하지만 의리는 무거운 존재들이라고 한다.

좋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다. 개선을 위해 노력은 하되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눈썹을 내리고 조심하며 사는 동안 연기와 불꽃이 창자 속에서 치솟는 경험을 하며 “화복은 본디 정해져 있는 운명일 뿐 인력(人力)이 아니로다”라고까지 한다.

호연재(浩然齋)가 시숙에게 보낸 편지.

콩 서너 말만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호연재는 넉넉 지 못한 삶을 살았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자신을 ‘규중의 물건(閨中之物)’으로 치부하던 호연재(浩然齋)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은 30대 중반에 들어서다. 시집과 친정 조카들이 배움을 청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송명흠은 호연재(浩然齋)가 집안 자제들을 가르치던 모습을 글로 남겼다.

“13세에 숙모를 알게 되었다. 화락한 담소에 기운이 평온하며 용모가 수려했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은 깨끗한 성품에 때가 끼지 않았다. 여러 형을 따라 가까이 좌우로 모시고 경서와 사기를 탐구하여 토론하고 시구(詩句)도 일일이 점을 찍으며 평론해주셨다.”(‘종숙모김씨천장제문(從叔母金氏遷葬祭文)’).

호연재(浩然齋) 인생 후반의 시에는 이 조카들과의 토론과 놀이로 생기가 넘친다.

호연재(浩然齋)가 시숙에게 보낸 편지.

콩 서너 말만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호연재(浩然齋)는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았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대덕문화원, 이숙인]

42세의 호연재(浩然齋)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아들에게 당부의 글을 남긴다. 아직은 어리지만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의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고, 근심과 가난이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어미는 귀신의 희롱을 받아 반평생 일신에 차질이 많았다” “내 아들에게 오로지 원하는 것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러 미움도 원망도 넘어선 그녀에게서 호연(浩然)의 기상이 느껴진다.

남편 재혼한 박씨, 시모가 흡족

호연재(浩然齋 : 1681~1722)가 세상을 떠난 뒤 남편 송요화는 18세 연하 박씨와 재혼을 한다. 계실 박씨는 호연재(浩然齋)와는 다른 방식의 시집살이를 한 것 같다.

“박씨 부인은 착하고 다정하며 부공(婦功)에 능하여 어른 말씀에 잘 응대하였다. 시어머니를 효를 다해 섬기고 집안 다스리는 데 조리가 있어 나씨 부인(시어머니)이 매우 흡족해하셨다.”(종숙모박씨묘지명)

부인 박씨는 15년 남짓한 혼인 생활 끝에 자식 없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한편 송요화(1682~1764)는 호연재(浩然齋) 사후 8년 만에 비로소 관직으로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고 83세의 수를 누렸다.

3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온 오늘의 호연재는 대전지역 문화 브랜드가 되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소대헌·호연재(小大軒·浩然齋) 부부를 격조 있고 행복한 삶을 산 모델로 안내하는 고택 행사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후세인의 기대와는 다르게 부부는 남남이었고 호연재(浩然齋)는 이 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장소로서의 고택이 문화가 되려면 그 아픈 시간들을 시로서 버텨낸 그 집 주인 호연재의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21.김 호연재(金 浩然齋) - 겉도는 남편에 치솟는 비통함, 240수 시로 달래 / 중앙일보, 2024. 7. 26.

22.딸·아들 차례로 잃은 김창협(金昌協)의 비애

- “책 보고 술 마셔도, 꽃 피고 새 울어도 생각나네”

“아아, 숭겸아, 너는 지금 어디로 가려느냐. 도성문을 나가 동으로 30리 중령포, 망우령, 왕숙탄, 북두천은 모두 네가 나귀를 타고 오가던 곳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널에 누워 그 길을 가게 되었단 말이냐. 삼주(三洲) 집 주변 3, 4리 길에 있는 서골암, 난가대, 금대산, 판사정은 모두 네가 시를 읊으며 경치를 조망하던 곳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널에 누워 그곳에 머물게 되었단 말이냐.”(‘제망아문(祭亡兒文)’)

아들 잃고 병든 아비 무덤서 통곡 - “박식 과감 큰일 하리라 여겼거늘”

정쟁에 영의정 지낸 부친은 사약 - 귀향해 지기지우처럼 아들 아껴

딸도 요절 “나는 몸이 없어진 듯” - 외손자는 잘크고 “아들은 혈육 없어”

19살 아들 발병 닷새 만에 사망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영정.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열아홉 살에 죽은 외아들 김숭겸(金崇謙)에 대한 절절한 부정이 드러나는 글을 여러 편 남겼다.

1700년 11월 24일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은 외아들 숭겸(崇謙)의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19살의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 닷새 만에 죽은 것이다. 김창협( 金昌協)은 죽은 아들을 위해 모두 다섯 편의 글을 남겼는데, 그의 애절한 글을 읽다 보면 이보다 더한 형벌이 있을까 싶다.

네 모습 또렷한데 신주에 이름만 남긴 채 아무리 부르고 찾아봐도 다시 볼 수 없으니, 이 어찌된 일이냐, 이 어찌된 일이냐. 인사(人事)의 변고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느냐.”

(‘망아생일제문(亡兒生日祭文)’)

 
 

양주목 고지도.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김창협(農巖 金昌協 : 1651~1708)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거족 신(新)안동 김씨의 일원으로 증조가 청음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이다. 김창집(金昌集) ·김창흡 등 여섯 명의 형제는 육창(六昌)으로 불리며 벼슬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색이 노론으로 17세기 말 숙종조 환국의 정국에서 집안 전체가 진퇴를 거듭하는데, 급기야 기사년(1689)에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 유배 중에 사사되는 비운을 겪는다.

장원급제에 청현직(淸顯職)을 거쳐 대사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은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세속의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의 유지(遺旨)이기도 했다. 분수에 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재앙을 자초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득 찬 복은 천도(天道)가 덜어내기 마련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기 마련이다.”(‘농암연보’)

김창협(金昌協)이 아끼던 셋째 딸 김운(金雲)을 위해 쓴 ‘제망녀문’.

죽은 딸을 위한 제문이라는 뜻이다. 『농암집』에 실려 있다.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김창협(金昌協)은 명문거족의 자제답지 않게 소박한 삶을 선호했다.

“제가 비록 고깃국 먹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기는 했으나 본성이 담박하여 일찍이 부귀한 용모를 익힌 적이 없습니다.” 그는 나이 서른 무렵에 벌써 영평(포천) 응암골에 오두막을 지어두고 서울을 오가며 관직 생활과 병행했는데, 아버지 일을 계기로 산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린 것이다.

농촌에서 일생을 마치겠다는 뜻을 담아 호를 농암(農巖)으로 삼고,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짓고 뽕을 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서울에 계신 어머니를 자주 뵙기 위해 종국에는 근교인 삼주(三洲, 남양주시 수석동)로 거주지를 옮겼다.

부친이 사면되자 조정에서는 농암(農巖)에게 지속적으로 관직을 내리고, 농암(農巖)은 사직 상소로 응답하기를 월례 행사처럼 한 것이 근 10년 이어졌다.

낚시하고 수목 심고 아들과 10년 생활

김창협(金昌協)이 죽은 아들 김숭겸(金崇謙)을 위해 쓴 ‘제망아문’. 역시 『농암집』에 실려 있다.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의 산속 생활은 행복했다. 아들이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 10년 동안은. 아들 숭겸(崇謙)은 아버지보다 더 산수를 좋아하여 늘 아버지를 따라 다녔다. “호젓한 숲과 깊은 골짜기, 맑은 여울과 흰 바위 등 내가 가는 곳이라면 네가 함께 가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었고, 정자와 누대와 못을 만들고 낚시하고 수목을 심고 가꾸는 등 내가 하는 일이라면 네가 함께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너는 또 낚시를 잘하여 반찬거리도 마련하면서 늘 나를 즐겁게 했다.”(‘망아초기제문(亡兒初朞祭文)’)

김숭겸(金崇謙)의 묘에 새긴 ‘제망아묘문’.

“큰 일을 이룰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라며 한탄하는 문장이 들어 있다.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농암(農巖)은 아들이 떠나고 홀로 살아온 지 354일이 되는 날 다시 붓을 든 것이다.

“내가 재앙을 당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뒤로는 외로이 은거하는 10여 년 동안 오직 너와 서로 의지하여 살아갔으니, 출입하고 기거할 적에도 오직 너에게 의지했고 병에 들거나 우환이 있을 때도 오직 너에게 의지했으며 한가한 날에 술을 마시며 시를 읊어 감회를 풀어내며 즐기는 것도 오직 너와 함께했다.

고금의 인물과 문장의 수준과 일의 시비 득실을 강론하는 것도 오직 너와 함께했고 빈객과 문생을 응대하는 것도 오직 너와 함께했다. 너의 기풍과 격조, 언론과 식견이 내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드물었으니, 서로 이해되고 마음이 맞아 곤궁한 생활이 슬프지 않고 부귀가 부럽지 않았다. 부자간의 사랑이야 누구에겐들 없을까마는 부자간에 마음이 맞아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누군들 나와 너 같겠느냐.”(‘망아초기제문(亡兒初朞祭文)’)

사람들은 몸이 상한 농암(農巖)을 보고 죽은 아들 생각을 이제 그만하라고 당부한다. 살기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책을 펼치면 생각이 나고, 술과 밥이 있으면 생각이 나고, 옛사람의 좋은 시문을 보면 생각이 나고, 의논할 만한 일을 만나면 생각이 나고, 너와 나이가 비슷한 후생을 보면 생각이 나고, 산수를 만나면 생각이 나고, 풀이 나고 꽃이 피면 생각이 나고, 바람이 맑고 달이 밝으면 생각이 나고, 꾀꼬리의 지저귐, 매미 소리, 기러기 울음소리, 학 울음소리가 들리면 네 생각이 난다.”(‘망아초기제문(亡兒初朞祭文)’)

김창협(金昌協)의 비극은 아들 숭겸(金崇謙)의 죽음뿐 아니었다. 숭겸(崇謙)이 죽기 석 달 전에 오씨 집으로 시집간 딸 김운(金雲 : 1679~1700)이 아이를 낳고 7일 만에 갑자기 죽었다. 다섯 딸 중의 셋째로 아버지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딸이었다. 농암은 “너의 죽음으로 내 몸의 반쪽이 잘려나간 것 같았는데 숭겸마저 죽으니 나는 몸이 없어진 듯하다”라고 한다.

김운(金雲)의 학문은 아버지 농암(農巖)도 인정한 바 여성 중에서 최고가 아니라 뛰어난 유사(儒士)에 견주어도 탁월했다. “서울로 갔다가 기사년의 화를 만나 다시 영평 산중으로 돌아오니 당시 네 나이 11살이었다. 아우 숭겸과 함께 글을 배우자마자 문리(文理)가 나서 스스로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는데, 막히는 곳이 없었다. 날마다 문을 닫고서 책을 손에 들고 꼿꼿이 앉아 글을 음미하는데,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 모습이 어여쁘고 기특하여 『논어』와 『상서(尙書)』를 가르쳤다. 너와 함께 고금의 치란(治亂)과 성현의 언행을 논하는 것이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망녀오씨부묘지명(亡女吳氏婦墓誌銘)’)

노론 명문거족, 딸·아들·손자 대제학 지내

김숭겸(金崇謙)과 그의 부인 밀양 박씨의 합장묘. 경기도 남양주 이패동에 있다.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농암(農巖)은 제문을 통해 딸에게 세상의 소식을 전한다. “네 아들은 홍역을 무사히 치르고 골격이 점차 갖추어지고 있어 장래를 기대해 볼 만하다.” 농암(農巖)은 어린 외손자를 품에 보듬고 딸의 모습을 찾아낸다(農巖). “그래도 너는 혈육으로 이 아이라도 있는데 숭겸은 그마저 없으니, 그 딱한 처지가 너보다 더 심하다 할 것이다.”(‘망녀제문(亡女祭文)’) 김운(金雲)이 이생에서 7일간 함께한 아들 오원(吳瑗, 1700~1740)은 문과에 장원하여 대제학을 지냈고, 김운(金雲)의 손자 오재순(1727~1792)은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냈다.

아들 숭겸(崇謙)이 떠난 지 만 2년, 늙은 아비 농암(農巖)은 병든 몸을 이끌고 아들의 무덤에 와 술을 뿌리고 통곡한다.

“아, 숭겸(崇謙)아, 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나는 네가 정직하고 도량이 넓으며 언론이 구차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도가 쇠한 이 세상에서 꿋꿋한 절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네가 모든 일에 환히 통달하고 민첩하며 강개하여 과감한 것을 보고는 세상에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네가 일찍부터 문장력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난 것을 보고는 문단에 이름을 날리며 고금의 문장을 능가할 것이라 여겼다. 나는 네가 사리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갖추고 성품이 맑고 밝으며 욕심이 적은 것을 보고는 결국 유학(儒學)으로 돌아와 손쉽게 성취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제망아묘문(祭亡兒墓文)’)

겸재 정선이 그린 양주 석실 마을 전경. 농암(農巖)과 숭겸(崇謙 부자가 살던 마을이다.

[사진 규장각, 이숙인 구글 캡처]

김숭겸(金崇謙, 1682~1700)은 14살에 밀양 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당시 사돈집에 보낸 아버지의 혼서가 문집에 실려 있다. “제 자식 숭겸(崇謙)(金崇謙은 아직 우매한 소년으로서 육예(六藝)의 가르침을 익히지 못했는데, 외람스레 두 집안 상호 간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숭아혼서(崇兒婚書)’)

그 5년 후 숭겸(崇謙)은 동갑 아내와 부모를 남겨두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가 선창하면 아들이 화답하던 시(詩) 놀이는 아들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농암(農巖)은 지기지우(知己之友) 숭겸(崇謙)이 죽자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

“오늘은 병이 더욱 심해져 베갯머리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데, 아들의 둘도 없는 친구 이위가 찾아와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고 한다. 죽은 내 아이도 산수 유람을 특별히 좋아하여 금강산에 간 적도 있었으니 그 여한이 얼마나 심할까.”(‘송이위유풍악서(送李瑋游楓嶽序)’)

58세로 졸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은 양주 석실마을(남양주시 와부읍)에 묻혀 있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22.딸·아들 차례로 잃은 김창협(金昌協)의 비애 - “책 보고 술 마셔도, 꽃 피고 새 울어도 생각나네” / 중앙일보, 2024. 8. 23.

23.신분 상승 40년 몸부림, 가혹한 신분제에 꺾여

- 끝내 양반 거부된 노비 이만강(李萬江)

영조 21년(1745년) 전 현감(縣監) 엄택주(嚴宅周)가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죄로 고발되었다. 영조 1년(1725년)에 실시된 문과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엄택주(嚴宅周)는 내외직의 관직들을 거친 인물로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째 향존 교육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성명(變姓名)에 개부역조(改父易祖)한 자라니,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거 급제자들의 인적 정보가 실린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엄택주(嚴宅周)의 본관은 영월이고 아버지는 엄완, 조부는 엄효, 외조부는 신후종(申厚宗)이다. 과거 응시용으로 제출된 이 기록을 보면 완벽한 양반인데, 이게 조작되었다는 말인가.

어미가 노비였으나 문재 뛰어나 - 10대 때 도망, 양반 엄택주(嚴宅周)로 위장

20년 공부 급제, 관료로 승승장구 - 죽기 10년 전 탄로나 흑산도 유배

조선 후기 신분 세탁 갈수록 늘어 - 기득권 세습 폐해 여전하지 않나

 

강원도 영월에 있는 충신 엄흥도(嚴興道)의 정려각.

엄흥도(嚴興道)는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일이 뒤늦게 알려져 훗날 그 후손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정려각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지은 비각을 뜻한다. 노비 이만강(李萬江)은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을 자처했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문과 급제와 함께 관직에 진출한 지 20년 만에 그를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소만록』 등의 기록을 통해 엄택주(嚴宅周) 66년의 삶을 따라가 보자. 엄택주(嚴宅周)의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었다. 아비는 전의현(全義縣, 지금의 세종시) 관아 아전이고 어미는 사비(私婢)였다. 그 역시 관아의 심부름 일을 했는데, 신분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사노(私奴)로 분류되었다.

멸문 처자와 결혼하려다 실패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이만강(李萬江)은 같은 고을의 신후삼(愼後三, 1683~1735년)에게 글을 배워 나이 16, 17세에 이르자 문예가 크게 진보했다.

이즈음 이만강(李萬江)은 노비의 신분으로는 나날이 성장하는 학문을 담을 수 없다는 문제 의식을 갖게 되면서 혼인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 신후삼(愼後三)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데, “어느 고을에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사는 아무개 가문의 처자가 있는데, 그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집은 멸문의 화를 당해 모두 죽고 딸 하나만 남았는데, 과년토록 혼인을 못 하고 있었다. 신후삼(愼後三)은 고향이 같은 그 처자의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신후삼(愼後三)은 “어찌 네가 감히 그런 꿈을 꾸느냐”며 크게 화를 내고 “이제부터 내 집에 발을 들이지 말라”며 꾸짖었다.

비록 멸문의 화를 입었지만 양반은 양반인데, 노비 주제에 구혼장을 내려는 이만강(李萬江)이 방자하게 보였던 것이다. 참고로 이후 신후삼(愼後三)은 숙종 43년(1717년) 온양에서 치러진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문관의 길을 걷게 된다.

영월에 있는 엄흥도(嚴興道) 묘.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스승에게 배척당한 이만강(李萬江)은 그 길로 고을을 떠나는데, 아전인 아버지와 모종의 협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만강(李萬江)이 도망한 시기를 놓고 『동소만록』은 16, 17세 때라고 하고, 『승정원일기』는 13, 14세 때라고 한다. 대과에 급제하여 역사 기록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 36세 때이니 언제 도망을 갔든 20년 이상의 세월을 홀로 고군분투한 것이다.

도망 노비 이만강(李萬江)은 강원도를 떠돌다가 영월 호장(戶長)의 딸과 혼인을 한다. 이곳에서 만강(萬江)은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을 사칭하며 성명을 엄택주로 바꾸었다.

하고 많은 성씨 중에 이만강(李萬江)은 왜 엄씨를 선택했을까. 그가 조상으로 내건 15세기 사람 엄흥도(嚴興道)는 동강 가에 버려진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준 장본인이다. 세조가 보낸 사약으로 억울하게 죽은 어린 임금에게 인간적 예우를 다한 그는 후환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먼 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런 엄흥도(嚴興道)의 일이 60년 만에 세상에 공식화되었고 다시 150년이 더 지난 현종 10년(1669년)에는 송시열의 발의로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을 찾아 벼슬을 내리도록 했다. 문제는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송시열이 문인에게 보낸 1672년의 편지에 “그 자손을 찾아보니 대체로 있기는 있으나 참으로 그 자손인지가 분명하지 않아 마음에 꺼림칙하네”라고 한 것에서 당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만강(李萬江)이 엄택주로 변성명한 1705년(숙종 31년) 경은 엄흥도(嚴興道)의 충절 정신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

영월 엄씨 엄택주(嚴宅周)로 족보 꾸며

영조 때 병조에서 엄흥도(嚴興道) 후손에게 발급한 관문서. 군역과 잡역을 면제하는 내용이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이만강(李萬江)이 영월 엄씨 흥도의 지손(支孫)으로 신분 세탁을 한 것은 신분 상승을 꾀하던 공사천(公私賤)의 노비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지적(知的)·경제적 조건을 키운 비양반층의 활약이 팽창하는데,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거나 후사가 끊긴 지손을 선택하여 갖다 붙이곤 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양반 기득권을 해체하는 방향이 아닌, 모두가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을 걸은 것이다.

이만강(李萬江)의 경우도 영월 엄씨의 족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거 원서에 기입한 외조 신후종(申厚宗)은 평산 신씨 영월 입향조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자 의병장 신돌석의 7대조이다. 그의 딸 신씨가 엄효의 아들 엄완과 혼인한 것은 족보에 나와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엄택주(嚴宅周)라는 아들은 어떻게 꾸몄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생사를 알 수 없던 잃어버린 아들 또는 혈친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겠다.

엄택주(嚴宅周)가 된 이만강(李萬江)은 용문사(龍門寺)에서 독서로 10년 세월을 보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벼슬자리의 자제들과 교유하며 인맥을 넓혀간다. 권세가의 자제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에게도 엄택주(嚴宅周)가 벗으로 삼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엄택주(嚴宅周)는 1719년(숙종 4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로부터 6년 후 영조 1년에 개설된 별시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44명 선발에 17위로 합격한다. 당시 그의 거주지는 강릉이었다. 그에게 대과 급제는 세상과 맞서 스스로 일궈낸 쾌거이자 인간 승리였다.

엄택주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영조실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엄택주(嚴宅周)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교서관에 배치되는데, 종9품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하여 3년 만에 정6품 전적(田籍)에 이르렀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맡는 제술관(製述官)을 겸한 것을 보면 문장에 능하고 학술적인 능력이 돋보였던 것 같다.

관직에 든 지 8년 차에 외직으로 나가는데 연서 찰방을 거쳐 경상도 영일(迎日 혹은 延日로 표기) 현감에 제수된다. 여기서 치적의 명성(治聲)을 얻는데, 살벌한 경쟁의 관료 사회에서 단기간에 훌륭한 평가를 얻었다는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엄택주(嚴宅周) 내면의 다짐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경로를 확인할 순 없지만 변성명한 엄택주(嚴宅周)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약헌 서종화(1700~1748)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범수(范睢)를 떠올린다(『약헌유집』 8).

사지(死地)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정치가로 변신한 범수(장록으로 개명)는 단지 한 끼 식사에 대한 은혜에도 반드시 보답했고 한번 노려본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다고 한다.

엄택주(嚴宅周)는 영조 15년(1739년) 제주 판관을 거쳐 봉상시 판관을 끝으로 관직을 털어버리는데, 권력에 빌붙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족속들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것이다. 1745년 그의 과거가 탄로 나기 직전까지, 태백산에 은거하며 글을 읽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던 엄택주다.

윤리 저버린 죄로 다시 이만강(李萬江)으로

조선시대 전의현 지도. 지금의 세종시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정언(正言) 홍중효는 현감으로 있는 형을 만나러 전의(全義)에 들락거리다가 이만강(李萬江)의 도망 사실을 알게 된다. 족속들을 탐문하여 부모 형제가 서로 못 본 지 3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수한다. 이에 왕은 조정의 논의를 모아 엄택주(嚴宅周)의 죄목을 공표하였다.

“엄택주의 일은 인간 윤리의 문제다. 왕도(王道)는 윤리를 제일로 삼는데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차마 모칭(冒稱, 성명을 거짓으로 꾸밈)하고, 그 조부(祖父)를 잊는단 말인가?”

엄택주(嚴宅周)에게 아비의 무덤에 성묘하지 않은 죄, 동생 이주영을 찾아보지 않은 죄를 물었다.흑산도로 유배해 영원히 노비로 삼고, 대소과(大小科)의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라.”(영조 21년 5월 26일)

엄택주(嚴宅周) 아니 이만강(李萬江)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다시 10년이 지난 영조 31년에 엄택주(嚴宅周)는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리며 흑산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물고(物故)를 당해 66년 그의 삶도 막을 내린다.

엄택주(嚴宅周) 그 개인의 삶은 막을 내렸지만,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신분의 굴레를 벗고자 하는 대중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살아서는 유학(幼學)이고 죽어서는 학생(學生)이 되는 꿈이었다.

몇 대조 선조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양반층의 위기의식이 조상 추숭과 부계친족의 결속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절대다수의 비양반층은 부의 축적과 같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신분 세습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했다.

엄택주(嚴宅周) 등의 몸부림이 흘러간 과거의 일일 뿐인가. 종교·돈·학벌·인맥 등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 집단이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가시덩굴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23.신분 상승 40년 몸부림, 가혹한 신분제에 꺾여 - 끝내 양반 거부된 노비 이만강(李萬江) / 중앙일보, 2024. 9. 20.

24.60년간 조선 쥐락펴락, 농부 동생 정2품 출세시켜

- 명나라 환관 된 윤봉(尹鳳)의 탐욕

“윤봉(尹鳳) 등 세 사신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왕은 황해 감사에게 “사신의 서흥(瑞興) 본가를 즉시 수리할 것과 영접하고 접대하는 모든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영을 내린다.(세종 9년 3월 23일)

윤봉(尹鳳)은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의 명나라 내사(內史)이다. 그의 출현으로 우리 역사 최고 성군 세종까지도 좌불안석이 되는데 윤봉, 그는 누구인가.

사신으로 본국 온 명의 환관

윤봉(尹鳳)은 화자(火者)로 명나라 황제의 환관(宦官)으로 차출된 사람이다. 화자(火者)를 고자(鼓子)라고도 하는데 생식 기능이 제거된 사람으로 내시 또는 환관(宦官)의 자격 요건이기도 하다. 명나라는 주변국으로부터 화자(火者)와 공녀(貢女)를 정기적으로 차출해 갔는데, 환관(宦官)의 경우 양국의 외교나 무역 문제를 조율하는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으로 투입하곤 했다.

이소사대(以小事大)의 국제질서에서 중국 황제의 칙사를 응대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황제의 측근에서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파견되는 황제의 내사는 대개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되는데, 본국 출신 환관에 대한 견제와 관리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尹鳳)은 태종 5년(1405년) 20세의 나이로 “아주 쓸모있는 환관”에 뽑혀 명나라 황궁으로 들어간다. 소년 화자들이 통상 14세에서 18세 사이인 점에서 보면 윤봉(尹鳳)은 늦은 나이다. 바로 전해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 경사(京師, 수도)를 다녀온 양부(養父) 이빈(李彬)의 권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떠난 지 1년 후에는 황제의 배려로 본국 출신 화자 18명과 함께 부모를 뵈러 고국 땅을 밟는다. 다시 1년 후에는 황제의 칙서를 든 사신의 하나로 조선의 어린 화자 300~400명을 뽑아가는 임무를 띠고 왔다.

2달간 머무는 동안 그는 조선 국왕의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명나라 황제의 환관이 된 지 4년, 사신 온 윤봉(尹鳳)은 조선 국왕에게 자신의 족친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한다. 태종은 그가 요청한 10여 인 모두에게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였다.(태종 9년 5월 6일)

“어리석은 동생 대접, 전하 은혜”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으로 명나라 황제의 환관이 된 윤봉(尹鳳)이 동생 윤중부에게 관직이 내려지자

기뻐하는 내용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사진 서울대 규장각]

윤봉(尹鳳)이 황제의 사신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6년만인 세종 7년 2월이었다. 그간의 윤봉(尹鳳)은 명황제 영락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오고, 또 조선으로 들어가는 내사 편에 자신의 본가에 곡식을 내려주고 요역과 잡공을 면제시켜 줄 것을 요청해온 터였다.

윤봉(尹鳳)이 사신으로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의 아우 윤중부(尹重富)의 벼슬을 높여 형을 마중하게 했다. 시골 농부에 불과했던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아우가 종5품 부사직(副司直)이 되어 나타나자 윤봉(尹鳳)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는 “중부(重富)의 어리석음은 그 외모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무슨 공로가 있어 전하의 이와 같으신 은혜를 받았단 말인가”라고 하며 조선의 임금이 황제를 공경하고 자신을 생각해 준 것에 감격한다. 윤봉(尹鳳)은 또 “서흥(瑞興)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만대(萬代)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다”(세종 7년 2월 14일)는 욕망을 피력한다.

이에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흥군(瑞興郡)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윤봉(尹鳳)이 체류한 3개월 내내 왕은 윤봉(尹鳳)의 서흥(瑞興) 본가에 쌀과 콩을 보내는 것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이면 어디든 술과 고기를 보내주며 황제가 보낸 사신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사신 길이 열린 윤봉(尹鳳)은 이후 해마다 조선에 들어왔다. 세종 7년(1425)에서 14년까지 8년 동안 매년 사신으로 입국한 윤봉(尹鳳)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간 체류하면서 무역과 청탁 등의 일에 몰두했다.

이제 태감(太監, 최고지위의 환관)이 된 그는 자신의 가계 3대(代)를 추증해 줄 것과 족친에게 관직을 제수할 것을 요청한다. “윤봉(尹鳳)의 아버지 윤신에게는 가정대부 경창부윤(慶昌府尹)으로 증직하고, 조부 윤단에게는 통정대부 공조 참의로 증직하며, 증조 윤공재에게는 통훈대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증직한다.”(세종 8년 4월 8일) 윤봉(尹鳳)의 족친 8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했다.

윤봉(尹鳳)은 황제가 하사한 물품을 싣고 와 더 많은 물품을 바꾸어갔다. 한번은 윤봉(尹鳳)이 요구한 물건이 2백여 궤(櫃)나 되었는데, 궤짝 1개를 메고 가는 데 8인이 필요하여 그 행렬이 숭례문 부근 태평관에서 사현(沙峴, 영천고개)까지 빈틈없이 이어졌다.(세종 11년 7월 16일) 사신의 물품 요구가 이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다는 불만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윤봉(尹鳳)의 고향인 황해도 서흥현(지금의 瑞興郡)의 고지도. [사진 서울대 규장각]

이듬해 다시 온 윤봉(尹鳳)이 산삼 등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자 도감에서(황제가 요구한) 칙서에 없다”며 거절하자 노한 빛을 띠기까지 했다.(세종 12년 6월 24일)

또 어떤 해는 사신 네 사람에 두목 150명이 따라 왔는데, 윤봉(尹鳳)의 본가에서 머물겠다며 요청한 비용이 너무 많아 호조(戶曹)에서 그들을 대접할 물자의 부족을 호소했다.(세종 13년 7월 21일)

이 때 세종은 윤봉(尹鳳)이 요구한 물건을 칙서에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대가가 새 칙서에 조선국 왕을 농락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며 폐해를 만들지 않을 방안을 모색한다. 가능한 내시들을 후하게 대우하자며 황희·맹사성·허조 등의 재상들과 논의한다.

“윤봉(尹鳳)을 위로하는 데에는 그 아우 중부(重富)에게 총제의 벼슬을 주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중부가 비록 이 벼슬을 받을지라도 허직(虛職)과 다름이 없으니 무엇이 그렇게 아까우랴.”(세종 13년 8월 19일)

정승들은 입을 모아 “윤봉(尹鳳)의 사람됨이 음흉하고 욕심이 많아서 불의(不義)한 일을 마음대로 행하는 자이니 후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지금 황제의 권세가 이 무리에게 있으니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세종은 윤봉(尹鳳)의 아우 윤중부(尹重富)가 사위를 본다며 안장 갖춘 말을 하사했고, 윤봉(尹鳳)은 조카사위 김숙리와 윤중부(尹重富)의 처족 이정에게 관직을 요청했다.(세종 14년 12월 1일)

돌아와 살 집까지 건축 요구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파견 된 명나라군의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만세덕(萬世德) 등을 영접하는 일을 담당한 조선 관리들이 만든 계첩(契帖)인 ‘황화사후록(皇華伺候錄)’의 일부. 계첩 의첫머리에 실린 그림으로 만세덕 일행을 압록강 변에서 영접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명나라 경리 영접을 위해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했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 간혹 조선 출신 환관도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 정부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많은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이후 윤봉(尹鳳)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6년이 지난 세종 20년에는 “북경에 가는 통사(通事, 통역관)들은 궐내에서 윤봉(尹鳳)을 만나면 피하고 불러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그런데 윤봉(尹鳳)이 다시 나타나는데, 문종의 책봉 칙서를 들고 12년 만에 입국한 것이다.

윤봉(尹鳳)의 나이도 65세에 이르렀다. 이 해에 윤봉(尹鳳)은 5개월 이상 머물면서 각종 이권을 챙기는 데 분주했다. 윤봉(尹鳳)은 왕에게 자신이 살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면 이 집에 거주하면서 주어진 내 수명을 마치게 될 것이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문종 즉위년 8월 7일)

그리고 자신이 본국으로 돌아오면 조카이자 양자인 윤길생과 함께 살 것이니 노비와 진원(珍原)에 있는 양자의 농장 곁에 자신이 쓸 땅 100결을 달라고 한다.(문종 즉위년 10월 17일) 윤봉(尹鳳)은 왕이 지어주는 자신의 집을 직접 감독하는데, 수시로 그를 위로하는 궁중의 술과 음식이 내려왔다.

집이 완성되자 윤봉(尹鳳)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다.(문종 즉위년 10월 26일) 가족에 대한 청탁 또한 계속되어 동생 윤중부(尹重富)는 정2품에 올랐고, 조카사위 김숙리는 강화부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문종 즉위년 11월 8일) 당연히 그에 대한 대신들의 평은 좋지 않아 “탐욕이 과도해서 구하는 것이 만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6년 후 세조 즉위를 알리는 황제의 고명을 들고 윤봉(尹鳳)이 다시 고국을 찾았다. 그의 나이 71세, 그렇게 아끼던 아우 윤중부(尹重富)가 죽은 지도 5년이 지났다. 윤봉(尹鳳)은 세조에게 서흥을 향관(鄕貫)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서흥 윤씨(瑞興尹氏)’를 개창한다.(세조 2년 4월 28일)

자신은 비록 생물학적 후손을 둘 수 없는 몸이지만 그 아우 윤중부(尹重富)를 서흥 윤씨(瑞興尹氏)의 시조로 삼아 자신의 존재가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랐다. 5개월 가량 머물다 간 세조 2년의 방문을 끝으로 윤봉(尹鳳)의 고국 방문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아와 살 새로 지은 집은 ‘매우 흡족하고 안온하게’ 하룻밤 자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고국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황궁에 상주하며 본국을 향한 윤봉(尹鳳)의 청탁은 계속되었다. 예종 1년 이후 그의 입김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80여 생의 그의 삶도 막을 내린 것이다.

황제를 등에 업고 조선 전기 60여 년을, 강한 군주 태종과 세종, 세조마저도 쥐락펴락했던 윤봉(尹鳳 : 1386~

1469년 이후)에게 권력이란 무엇일까. 고향과 가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의 욕망을 투사한 윤봉(尹鳳)에게 핏줄 또는 친족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24.60년간 조선 쥐락펴락, 농부 동생 정2품 출세시켜 - 명나라 환관 된 윤봉(尹鳳)의 탐욕 / 중앙일보, 2024. 10. 18.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을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3382483929

▣허균 집안의 비극-신분제 조롱한 붓끝, ▣호남 유학의 큰 기둥기대승 집안-아버지의 모성,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가족-피로 얼룩진 60년 골육생쟁, ▣우리가 몰랐던 이이-칠남매 바라지에 속울음 터트린 율곡,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3386237245

▣박세당-대쪽 부자,대를 이은 품격, ▣친정·시집 다 일으킨 여장부 장계향,

▣김상용-명가 탄생의 빛과 그림자, ▣권력·치정에 눈먼 인조-공포영화 뻄치는 궁중잔혹사,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3387573582

▣유배지서 일가 일으킨 이문건, ▣술 빚고 김치 담근 선비 김유,

▣영응대군과 세 아내- 왕실판 ‘사랑과 전쟁’, ▣김류의 가족과 병자호란-4대에 걸친 충절,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Ⅳ https://blog.naver.com/ohyh45/223389148282

▣올곧은 선비의 모델 최수성 - 출세보다 지조, ▣황희 정승과 그의 자녀들-아들 일은 해소 못 할 고통,

▣진압한 이시발의 사랑-젊은 첩 죽자“훗날 자네 곁에”, ▣예법에 맞선 정약용 집안 여인들,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Ⅴ https://blog.naver.com/ohyh45/223559080861

▣황효원 가족의 가슴 아픈 처첩 논쟁, ▣퇴계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가짜 남편에 걸려든 형수-유유·유연 형제 가족의 비극, ▣아버지 원수 갚은 문랑·효랑 자매의 처절한 복수혈전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Ⅵ https://blog.naver.com/ohyh45/223691480270

▣김 호연재(金 浩然齋)-남편에 치솟는 비통함, 시로 달래, ▣딸·아들 차례로 잃은 김창협(金昌協)의 비애,

▣노비 이만강(李萬江)의 신분 상승 40년 몸부림, ▣명나라 환관 된 윤봉(尹鳳)의 탐욕,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Ⅶ https://blog.naver.com/ohyh45/223772236207

▣연암 박지원의 청빈했던 친·인척, ▣국가폭력에 희생된 황사영의 가족,

▣일본장수 사야카(沙也可)는 왜 김충선(金忠善)이 됐나 , ▣누이·딸 혼사로 명문거족 일군 한확(韓確)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Ⅷ https://blog.naver.com/ohyh45/223915368700

▣세종조의 명재상 허조(許稠) 삼대의 삶과 죽음, ▣공신 2관왕 홍윤성의 패악질,

▣백정의 신분해방 앞장선 강상호 가족-형평사운동 차별 없는 세상 꿈꾼 아름다운 삶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Ⅸ https://blog.naver.com/ohyh45/224026135695

▣역모로 흥하고 역모로 망한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세종(世宗)의 딸,세조(世祖)의 누나였던 정의공주(貞懿公主),

▣달성 서씨의 중흥조모 고성 이씨-장애딛고 조선 최고의 가문 만든 여인, ▣3대 문인화가 윤두서·윤덕희·윤용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