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황효원(黃孝源) 가족의 가슴 아픈 처첩 논쟁
- 처에서 첩으로 천당·지옥 오갔던 아내들의 수난
550년 전 조선 성종 7년, 황효원(黃孝源)은 이혼과 결혼을 멋대로 한 혐의로 사헌부의 리스트에 올랐다. 30세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며 청현직을 두루 거친 황효원은 42세 때 세조의 즉위를 도운 대가로 좌익공신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대사헌, 각 도의 관찰사, 한성부윤(서울시장) 등 요직에 몸을 담근 세조 시대 인사이더였다. 게다가 관향 상주의 이름을 따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지며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런 그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숨기고 싶었을 가족사가 만천하에 까발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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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신분 따라 자녀들 신분 갈려 - 육순의 공신 황효원 간절한 호소
성종은 “정리 따져 처로 인정해야” - 사헌부 “난신의 딸” 물고 늘어져
처 둘 금지 처첩분간법 역폐단 - 정치는 유능했지만 오만·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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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 사당. 황효원은 상주 황씨 중시조다.
황효원의 시호였던 양평(襄平)을 새긴 편액 ‘양평묘’가 보인다. [사진 용인시민신문]
사헌부의 보고에 따르면 황효원(黃孝源)은 처음 아내 신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버리고(棄之), 임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목하지 못하다 하여 버리고 처음 아내 신씨와 재결합하였다.
부인 신씨가 죽은 뒤에는 과거에 공신(功臣)으로 하사받은 여비(女婢) 작은조이(小斤召史)를 첩으로 삼았다가 이후 처로 변경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첩을 처로 바꾼’(以妾爲妻) 세 번째 아내인데, 국법대로 그녀를 다시 첩으로 돌려놓으라는 것이다.
사헌부가 주장하는 황효원(黃孝源)의 죄는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사욕을 채웠고 대신으로서 체통을 잃어 윤리를 훼손한 것이다. 그런데 왕은 첫 보고를 받은 날 황효원의 세 번째 아내 이씨는 후처임을 분명히 했다.
(『성종실록』 7년(1476) 5월 2일)
사헌부·사간원 한 달간 왕 흔들어

역시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의 신도비. [사진 용인시민신문]
그러자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 협공으로 5월 한 달 하루도 빠짐없이 “황효원 비(婢)의 후처 논정을 환수하라”며 왕을 흔들어댔다. 왕은 황효원(黃孝源)의 아내 이씨는 법리(法理)보다는 정리(情理)로 접근해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
즉 이씨는 단종복위에 가담한 죄로 멸문의 화를 입은 이유기의 딸로 원래 명족(名族)이자 왕실의 척족이라는 점, 오래전에 면천되어 사족의 신분을 회복한 점 등을 들어 후처로 삼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난신(亂臣)의 딸을 여종으로 받아 첩으로 삼았다가 방면되자 처로 삼은 것”은 “난신의 외손을 조정에 서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대간(臺諫)의 경고에 열아홉살의 어린 왕은 굴복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후처 이씨는 첩으로 변경되었다.
15세기 조선사회를 달군 핫 이슈는 처첩분간(妻妾分揀), 즉 누가 정실이고 누가 측실인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들은 신유학적 가족 이념에 따라 처첩 및 적서의 제도화를 추진하는데, 그들 사이에 일종의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건국 20년 태종 13년에는 “예에는 처가 둘 일수 없다”(禮無二嫡)는 유교의 혼인관을 따라 일처(一妻) 외는 모두 첩으로 논정(論定)하는 ‘처첩분간법’이 발효되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누리던 동등한 권리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강등되거나 박탈되는 법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귀족이나 사족의 경우 특히 민감하여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되어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주 황씨는 용인시 기흥구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다. 입향조는 중시조 황효원이다. 용인에 있는 묘역.
[사진 용인시민신문]
황효원(黃孝源)은 한 때 형조와 사헌부의 수장이었던 만큼 국법의 처첩제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처는 오직 1인’이라는 말은 병처(幷妻) 또는 유처취처(有妻娶妻 : 처가 있는데 또 처를 맞이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첩은 처와 양립이 가능하다.
그래서 황효원(黃孝源)은 선처(先妻) 신씨와 이혼을 한 후에 임씨를 후처로 맞았고, 임씨와 이혼한 후에 신씨와 재결합한 것이며, 신씨와 사별 후 이씨와 혼인 예를 치렀기에 세 아내 모두 처라고 주장한다. 사실 처나 첩이나 그 자신은 크게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존귀(尊貴)와 비천(卑賤)의 신분으로 갈리는 소생 자녀들이 문제인 것이다.
황효원(黃孝源)은 세 번째 아내 이씨가 첩이 아닌 처임을 증명하기 위해 혼서(婚書)와 예장(禮狀) 등의 자료를 제출했지만 대간들의 교묘한 언술에 걸려 보다시피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날 대사간 최한정(崔漢禎)은 황효원(黃孝源)의 두 번째 아내 임씨도 첩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쯤에서 한 집안을 가루로 만들 작정이라도 한 듯 덤비는 대간들이 의아하게 여겨진다. 당시 임씨 소생의 두 아들 황석경과 황준경은 생진시(生進試)와 한성시에 응시 원서를 제출했는데, 서자일 수 있다며 보류된 상태였다.
논정에 돌입하자 예조에서는 임씨의 혼서(婚書)와 공신록에 아들들이 적자로 기록된 사실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양사는 황효원(黃孝源)의 혼인 생활을 염탐하고 한성부 장적까지 샅샅이 뒤져 한 가족을 능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황씨 가의 쟁송 법정다툼 번져

황효원(黃孝源)의 초상.
대사간 최한정(崔漢禎)에 의하면, 황효원(黃孝源)은 신씨에게 아들이 없자 한 양녀(良女)를 첩으로 삼아 아들 둘을 낳았다. 그들을 적자로 만들기 위해 혼서(婚書)를 조작하고 신씨를 버린 것으로 꾸며 임씨를 후처로 만들었다. 한성부의 장적에는 신씨와 임씨를 고쳐 쓴 흔적이 있고 두 아들을 “버린 첩의 자식”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에 황효원(黃孝源)은 사실관계를 바로 잡는 글로 대응한다. 처음 아내 신씨와 이혼할 때 그 오라비가 까닭 없이 처를 버린다며 고소한 사실과 어머니의 뜻으로 사족녀 임씨와 혼인하게 되었는데, 그 혼례에 참석한 명단까지 제출했다.
그리고 한성부 장적에 대해서는 아비 된 자가 어떻게 ‘버린 첩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조작된 “원수의 짓”이 분명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황효원(黃孝源)은 후처 임씨를 이름도 모르는 양녀로 둔갑시켜 아들을 얼자(천인 신분의 첩에서 난 자식)로 만들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대사간 최한정에게 묻는다. 황씨 가의 처첩 쟁송은 황효원(黃孝源)과 최한정(崔漢禎)의 법정 다툼으로 번지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편 이쪽저쪽의 말을 다 듣고 난 왕은 “임씨를 황효원(黃孝源)의 후처로 논정한다”고 판결한다. 그럼에도 대사간은 물고 늘어지며 황효원(黃孝源)의 두 아내를 다시 조사할 것을 건의한다. 왕은 “나는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 그리 고집스러운가”라고 하며 법과 인정은 서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 왕이 두 번의 혼인에 많은 자식과 손자까지 둔 노년의 최한정(崔漢禎)에게 인생의 원리를 가르치는 형상이다. 황씨 가의 처첩 논정이 시작되기 2개월 전, 5품 교리이던 최한정(崔漢禎)은 몇 단계를 뛰어넘어 당상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덕망과 재능이 검증되지 않은 자라며 임명을 철회하라는 비판이 거세었다. 무능함을 상쇄할 기회로 무리수를 둔 것인가, 아니면 뒤틀린 심사 때문인가. 아니나다를까 대사간 최한정(崔漢禎)은 황효원(黃孝源) 처첩논정을 기획하여 사건을 주도해 간 것 외에 별다른 업적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 임씨가 후처로 논정되고 아들들이 사족의 일원으로 제자리를 찾자 황효원(黃孝源)은 세 번째 아내 이씨의 첩 논정을 상고해 줄 것을 건의한다. 즉 이씨는 아비의 죄로 노비가 되었는데, 그녀의 외가와 자신의 집안이 연족(連族)인 관계로 공신이 된 자신에게 배정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줄곧 외가에서 살았는데, 늙은 홀아비가 된 아들의 배우자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어머니와 이씨의 외조모가 함께 도모한 일로 이 혼례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신의 자녀는 출생 전 외조(外祖)가 범한 죄로 사족과 혼인을 맺지 못하니 신의 자녀가 인류에 복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왕은 노대신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며 이씨를 다시 후처로 논정했다. 조정은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대간들의 집요한 공격이 두달 간 지속되면서 이씨는 다시 첩이 되었다.
훗날 중종 2년에는 황효원(黃孝源)의 외손자가 서출이라며 관직 제수가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사위 박영문은 처모 이씨의 사건을 담은 『적첩상고일기초(嫡妾相考日記草)』를 제출함으로써 이씨의 딸 황씨는 박영문의 정실로 논정된다.
100차례 조정회의 국정 마비 지경
황효원(黃孝源)의 나이 63세, 성종 7년 5월 2일에 시작된 ‘황효원(黃孝源) 처첩논정’은 성종 12년 9월 19일 68세의 황효원(黃孝源)이 “피를 토하며 죽은” 후에야 끝이 났다. 그가 죽은 이후 재개된 적서 논쟁은 치지 않더라도 5년이 넘도록 100여 차의 조정회의를 잠식하며 국정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태산이 닳아 숫돌이 되고 황하가 좁아져 허리띠가 되도록(山礪河帶)”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라는 왕의 교서를 받은 상산군 황효원(黃孝源 : 1414~1481), 그 노년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그는 행정가로서 유능했지만 사람을 오만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단점이 있었고, 재산 증식에 재능이 있어 화가옹(貨家翁)으로 불리었다. (『황효원졸기』)
그의 인생이 이후 역사에 던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17.황효원 가족의 가슴 아픈 처첩 논쟁 - 처에서 첩으로 천당·지옥 오갔던 아내들의 수난/ 중앙일보, 2024, 4 . 5.
18.퇴계(退溪 李滉)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뜻밖의 고백
한국 사람 누구나 퇴계(退溪)를 알지만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학술의 최고봉을 이룬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중국과 일본도 인정한 주자(朱子) 이래 최고 학자, 학덕으로 지역의 품격을 높인 스승.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를 향한 존경이 지나쳐 미화되고 포장되면서 퇴계(退溪)는 그만 인간의 모습을 탈각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우리가 퇴계(退溪)를 그리워하는 것은 신이 된 퇴계(退溪)가 아니라 인간 퇴계(退溪)의 온기일 것이다. 그가 늘 간직한 ‘고결함을 유지하면서 올바름을 행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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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인 요절, 둘째는 정신질환 - “부부는 만복 근원 지극히 삼가야”
“세상사 초연했으나 재산은 신경” - 1000마지기 농지 결혼 통해 일궈
“여자 성질 나빠도 결별 말아야” - 며느리 개가 주선 사실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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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 이우(松齋 李堣)의 초상. 송재는 퇴계의 숙부로 퇴계 형제를 가르쳐 퇴계학의 초석을 마련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 1501~1570)이 태어난 안동 예안은 그의 조부 이계양이 처가 거주혼으로 정착한 곳이다. 진성이씨 예안파의 입향조가 된 조부는 두 아들 이식과 이우(李堣)를 두었다. 이식은 전처에서 2남 1녀를, 후처 박씨에게서 4남을 얻었는데, 막내로 태어난 퇴계는 7개월 만에 부친을 잃었다.
퇴계문집에 수록된 ‘상사형(上四兄)’ ‘상오형(上五兄)’이라는 문건은 넷째 형 다섯째 형에게 올린 편지로 동복형 온계 이해(溫溪 李瀣)와 이징을 가리킨다. 퇴계 (退溪)성장의 동력이 된 어머니 박씨의 교육열과 가난한 살림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 형제들을 학자로 길러낸 이는 숙부 송재 이우(松齋 李堣 : 1469~1517)다.
외할머니 장서가 학문 형성에 큰 역할

퇴계 이황의 초상. [사진 이숙인]
송재(松齋)는 형조 참판,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퇴계학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서른에 문과 급제한 그가 15여년의 벼슬살이를 스스로 끝내고 낙향한 것은 조카인 온계가 17세, 퇴계가 12세 때다.
퇴계(退溪)는 “내가 학업에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숙부께서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덕분”이라고 했고,
송재(松齋 李堣)는 퇴계 형제에 대해 “돌아가신 형님에게 이 두 아이가 있으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퇴계(退溪)의 조부 이계양이 이조판서에 추증된 것은 숙부 송재(松齋)의 현달(顯達, 명성과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로 인한 것이다. 송재(松齋 李堣)와 온계(溫溪 李瀣)와 퇴계, 진성이씨 예안파 3인방은 급제로 출사하며 재덕겸전(才德兼全)의 정치가로 거듭나 조선의 학술 제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다만 퇴계(退溪)의 형 온계(溫溪 李瀣)는 각도의 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냈는데, 권간(權奸)의 모략으로 갑산 유배를 가던 중 사망하였다. 퇴계 50세 때의 일이다.
한편 퇴계(退溪)의 부친 이식은 첫 부인 김씨의 어머니 의령 남씨로부터 상당한 양의 책을 받는데(『퇴계전서』 46)
이것이 예안파의 학문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퇴계라는 한 거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퇴계(退溪)는 21세 때 동갑내기 허씨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부인 허씨는 의령의 부호 허찬(許瓚)의 딸인데, 그녀 쪽의 예천과 의령의 많은 토지가 퇴계(退溪)로 건너왔다. 그런데 허씨는 27세 때 둘째 아들 이채를 낳고 한 달 만에 숨을 거두는데, 갓난아이는 외가에서 데려가 길렀다.
부인을 잃은 퇴계는 3년 후 권질(權礩)의 딸을 후처로 맞이한다. 권질은 신사무옥(1521)으로 죽임을 당한 권전(權磌)의 형으로 연좌로 예안에 유배 중이었다. 그런데 후처 권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 가정생활이 어려웠다. 혼인 과정에 여러 설이 있지만 권질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한편 퇴계(退溪)는 부인 허씨가 죽은 후 안살림을 챙겨 줄 측실을 들이는데, 여기서 서자 이적(李寂)을 얻는다. 훗날 퇴계(退溪)는 장남 이준에게 서모를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한다.
며느리 개가 소문 “매우 부끄러운 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퇴계선생 문집. [사진 이숙인]
퇴계(退溪)가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식의 두 아내가 가난한 집의 딸인 데다 일곱 남매가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퇴계는 2명의 아내를 통해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는데, 노비 150명에 농지 1000마지기에 달했다. 전처 허씨로부터 온 토지 외에 후처 권씨로부터 온 풍산의 토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또 봉화 금씨와 혼인한 아들 이준에 이르러서는 노비 367명에 농지 3000마지기, 집 4채로 불어났다. 이준이 1586년과 1611년에 3남 2녀에게 분급한 내용이다(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2018년).
퇴계(退溪)는 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들 준에게 피력한 바 있다.
“나는 평생 세상사에 초연하게 살아왔지만 나라고 해서 재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학덕의 도야에 집중하되 부차적으로 치산에도 가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태어나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외가 의령에서 성장한 둘째 아들 이채는 혼인 3년 2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48세의 퇴계가 단양군수에 부임한 직후이다. 아들이 떠난 지 6년, 며느리 류씨가 개가(改嫁)를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1554년 2월에 퇴계는 장남 이준에게 편지를 보내 평소답지 않은 매우 격앙된 모습을 보인다.
“너는 반드시 사태를 파악하고 속히 저들에게 통보하여 실본(失本)을 하지 말게 하여라.”
실본이란 개가를 가리킨다. 즉 이채의 처가에서 자식 없이 과부로 사는 딸을 개가시키려 하자 퇴계는 이를 막고자 한 것이다.
며느리의 개가는 퇴계(退溪)에게 “매우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퇴계(退溪)가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꾸며진 것이다.

경남 의령의 덕곡서원.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654년(효종5)에 세웠다. 퇴계의 첫째 부인 허씨가 의령 출신으로 차남 이채가 의령의 외가에서 자랐다. [사진 이숙인]
퇴계(退溪)의 부부 생활은 어땠을까. 부부 사이를 고민하던 문인 이함형(평숙)에게 퇴계(退溪)가 보낸 편지가 나왔는데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부부의 인륜은 지극히 소중하기에 정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소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대의 금실이 좋지 않아 불행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라.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대개는 부인의 성질이 나빠 교화가 어렵거나 못생긴 데다 슬기롭지 못한 경우가 있고, 남편이 광포하고 방종한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성질이 나빠 교화가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편 쪽에 원인이 있다.
따라서 남편이 반성하여 노력하면 대부분 해결될 일들이다. 또 성질 나쁜 여자라도 큰 죄가 아니라면 잘 선처하여 결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어서 퇴계는 자신의 경험을 전해준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줄곧 불행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박하게 하지 않고 노력하여 잘 처신한 것이 수십 년 되었습니다. 몹시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대로 하여 대륜(大倫)을 소홀히 해서 편모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퇴계집』 37, ‘여이평숙(與李平叔)’).
예순의 퇴계(退溪)가 손자 안도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너도 들어서 아는 바이니, 천 번 만 번 경계하거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이다”(‘여안도손(與安道孫)’).
또 아들 준에게는 “모든 형제자매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만 가법이 제대로 선다”고 하는데, 철인(哲人)의 가족 경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退溪)는 34세에 출사하여 30년 이상의 세월을 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그 30년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출처(出處 : 나아가고 물러남)를 반복하는데 ‘위기지학(爲己之學 : 나를 위한 학문)’과 군신지의(君臣之義 :군신의 큰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벼슬살이 중에도 늘 돌아가 이르지 못한 경지를 꿈꾸었다. 1553년 남명 조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43세부터 지금에 이른 10년 동안 세 번 돌아갔다가 세 번 소환되었다고 썼다. 그는 늘 산림으로 돌아가 원 없이 공부하며 일취월장하는 학문과 함께 즐기는 인생을 꿈꾸었다.
삶의 고단함 통해 세계적 지식 유산 남겨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퇴계 묘소의 묘비. [사진 이숙인]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 그 어떤 벼슬을 내려도 제발 자신을 놓아달라며 호소하는 퇴계(退溪)에게 임금은 제발 돌아와 달라며 애원하는 패턴이 58세에서 67세에 이르기까지 십수 차례 반복되었다.
“저로 하여금 길이 물러 나와 허물을 고치고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퇴계(退溪)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는데, 또 퇴계를 소환했다.
“경연 석상에 두고 그 행동을 보면서 논하는 것을 들으면, 나의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고 나의 마음과 지혜를 키울 수 있으리라.” 68세의 퇴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임금의 부름에 응해 도성에 들어갔다.
대제학으로 경연에 참여키로 한 것이다. 69세 3월에 왕으로부터 겨우 풀려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 이황(退溪 李滉), 현인(賢人)의 삶에도 나름의 고단함이 있었다.
만물 존재의 법칙을 밝힌 이기론과 인간 본성을 밝힌 심성론, 실천을 위한 수양론으로 구성된 그의 철학 체계는 인간 퇴계가 고뇌하고 성찰하며 일구어낸 우리의 지적 유산이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18.퇴계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중앙일보, 2024, 5 . 3.
19.가짜 남편에 걸려든 형수, 시동생을 범죄자로
- 유유(柳游)·유연(柳淵) 형제 가족의 비극
유유(柳游)·유연(柳淵)은 대구 사족(士族) 유예원(柳禮源)의 두 아들이다. 유연(柳淵)은 형 유유(柳游)의 살해범으로 형수 백씨에게 고발을 당해 체포되었고 추국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해 허위로 자백한 것이 처형으로 이어졌다. 유연(柳淵)의 나이 27세, 1564년의 일이다.
죽음 앞에 선 유연은 재산을 노리고 형을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에 울부짖는다.
“신이 비록 못났더라도 그래도 사람 사이에 살고 있는데, 봉사(奉祀)하는 것을 빼앗기 위해 동기(同氣)를 죽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이생송원록』)
유유(柳游)·유연(柳淵)의 죽음은 6년 전 형 유유(柳游)의 가출이 발단이었다. 24세에 향시에 합격까지 할 정도의 실력에다 아내까지 있는 33세의 유유(柳游)가 아예 집을 나가버린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동생을 능지처사(凌遲處死)로 내몰게 되었으니 그 6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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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 아내 백씨와 불화 끝에 가출 - 사기꾼 채응규가 남편 행세 접근
정체 발각될 위기 채응규 줄행랑 - 유연은 고문으로 허위 자백 처형
훗날 유유 돌아오자 채응규 자결 - 조사 부실 조선 법정 애꿎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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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柳游), 성불구일 가능성

조선시대 법정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김준근의 그림 ‘법정변송도’.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 이숙인]
유유(柳游)가 가출한 동기를 놓고 사람들은 미쳤다고도 하고 심질(心疾) 때문이라고도 했다. 유연(柳淵)의 증언에 따르면 유유(柳游)는 미친 게 아니라 아버지의 무시와 아내와의 불화, 가변(家變)까지 겹쳐 가출은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가변이란 무엇일까. 1557년 겨울에 유예원(柳禮源)의 대구 집에 불이 나 다 타고 남은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묵재일기』, 1557년 10월 18일)
이때 유예원(柳禮源)은 서울로 올라가 관직을 구해볼 참이라고 했다. 이듬해 유유(柳游)가 가출했으니 가변이란 화재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유예원(柳禮源)은 왜 장남 유유(柳游)를 무시했을까. “아내를 맞이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식이 없어 아버지가 업(業)이 박하다며 나무라고 가까이하지 않았다.” 유유의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유(柳游)가 성불구일 뿐 아니라 여성성을 겸한 제3의 성(性)임을 암시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아내 백씨의 성질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백씨의 아버지 백거추가 유서방(유유를 가리킴)을 곤경에 빠트린 일로 딸을 모질게 대한 일도 있었다. (『묵재일기』, 1557년 8월 11일)
집을 나간 유유(柳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황해도 해주에 유유(柳游)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가출한 지 4년이 흐른 1562년 여름이었다. 유유(柳游)가 채응규로 변성명을 하고 살아있다 하니 가서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은 서울의 큰 자형 이제(李禔)였다. 이제는 유연(柳淵)의 누나 유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사별하였고, 재혼하여 여러 자식을 두었다. 첫 부인과 사별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는 처가와의 연을 이어가며 처남 유연(柳淵)의 중매까지 선 것이다.
자형의 전갈을 받은 유연은 노비 몽합과 억종을 보내 유유(柳游)가 맞는지 사실을 알아오게 했는데, 돌아온 종들이 채응규는 유유(柳游)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채응규는 백씨가 노비 편에 보내온 옷과 편지를 받고는 백씨에게 답장을 써서 보낸다. 알지도 못하는 남의 부인에게 사적인 편지를 보낸 것이다.

1629년 이항복이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백사집』 표지.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 이숙인]
그해 겨울에도 가짜 유유(柳游) 채응규는 이제의 종을 보내 백씨에게 편지를 전했다. 이때 유연(柳淵)은 형이라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을 텐데 없는 것이 의아한 나머지 백씨에게 온 형의 편지를 보자고 하는데, 백씨는 잃어버렸다고 한다. 유연(柳淵)이 보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1년이 지난 1563년 겨울에 채응규가 서울 이제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사실 이제는 20년 전에 본 처남 유유(柳游)의 외모를 확인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유연(柳淵)과 백씨가 와서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유연(柳淵)은 억종을 먼저 올려보내고 자신은 늦게 올라갔다. 먼저 간 억종이 백씨의 안부와 버선(機子) 한 쌍을 전했다. 이에 가짜 유유 채응규는 “네 안 주인이 병이 깊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가 곧 내려가마. 너는 속히 대구로 가 노자를 갖추어 오너라”라고 한다.

유연·유유 형제의 사연을 다룬 ‘유연전’. 이항복의 『백사집』에 수록돼 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 이숙인]
유연(柳淵)은 채응규가 미심쩍었지만 그를 데리고 대구로 내려간다. 열흘 거리의 대구로 가는 동안 유연(柳淵)은 채응규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관찰하는데 가짜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대구에 도착하자 유연(柳淵) 일행은 바로 채응규를 결박하여 관에 보내며 그 진위를 가려달라고 한다. 옥에 갇힌 채응규는 자신이 진짜 유유(柳游)임을 주장하며 부부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증거 하나를 던진다.
첫날 밤 백씨가 월경 중이었고 왼쪽 허벅지에 검은 점이 있으니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추관이 사람을 보내자 백씨는 사실임을 입증해주었다. 부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정보다.
그런데 길어지는 조사 과정에서 더 이상 진짜를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채응규는 갑자기 미친 척하여 보방(保放 : 보증인을 세우고 죄인을 방면)을 얻어내기에 이른다. 밖으로 나와 정해진 집에 유숙하던 채응규는 밤을 틈타 줄행랑을 놓으며 자취를 감춰버렸다. 유유(柳游)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채응규와 내통한 것으로 의심되는 백씨가 시동생 유연(柳淵)을 형을 죽인 패륜범으로 관에 고소를 했다. 이번엔 유연(柳淵)이 체포되었다. 도망간 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자가 유유(柳游)가 맞는지 아닌지 아주 기본적인 조사도 없이 유연(柳淵)은 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삼성교좌(三省交坐 : 죄가 중한 강상죄수를 의정부·의금부·사헌부가 합좌·심문하는 것)를 받게 되었다.
채응규가 유유(柳游)가 아닌 줄 어떻게 알았나? 유연이 답한다.
“형의 몸은 약질에다 왜소하다. 채응규는 장대하다. 형의 얼굴은 작고 누렇고 얽은 자국이 있으며 수염이 없다. 채응규는 얼굴이 검고 크며 수염이 빽빽하다. 형의 음성은 여자와 같은데, 채응규는 크고 우렁차다.”
둘의 다름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이유 있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위관(委官) 심통원(沈通源)은 유연(柳淵)을 능지처사에 처했다.
채응규 방술로 사람들 미혹시키는 재주
유연(柳淵)이 처형당한 지 15년이 지난 1579년에 평안도에 진짜 유유(柳游)가 나타나며 사건의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대담한 사기꾼 채응규도 살아있었다. 채응규와 그의 처 춘수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던 중 채응규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춘수만 잡혀왔다.
춘수의 진술에 의하면 채응규는 방술(方術)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재주가 있었고,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을 모아 도량을 열고 여염을 돌아다니며 촌부들에게 악독한 짓을 일삼았다.
장연 한필성의 딸이 혼인 사흘 만에 소박을 맞고 홀로 산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채응규가 듣고 남편인 것처럼 접근하여 그 딸을 범했다. 유유(柳游)를 칭한 것도 이와 유사한 수법이었다. 채응규는 유유(柳游)와 같은 지역권에서 함께 지내기도 한 사이로, 접촉을 통해 유씨 집안의 정보들을 확보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사람은 유유(柳游)의 아내 백씨다. 그녀가 직접 채응규를 만나 진짜와 가짜를 가려 줄 수 있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직접 만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채응규의 속성상 세 차례의 왕복 편지를 통해 백씨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수도 있다. 두 남녀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한문학자 강명관은 채응규가 대담하게 유유(柳游)라고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유씨 집안 내부에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백씨를 지목한다. 유유(柳游) 사건을 상속과 재산권 문제로만 접근한다면 사건을 축소시키는 것이다.(『가짜남편 만들기』, 푸른역사, 2021)
‘마르탱 게르의 귀향’ 사건과 흡사

1982년 프랑스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향’의 이미지.
유유·유연 형제와 흡사한 가짜 남편 이야기가 소재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
유유(柳游)의 가출과 가짜 유유의 등장은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유명한 사건 ‘마르탱 게르의 귀향’과 매우 흡사하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간 게르가 12년 만에 귀향해보니 자신을 사칭한 가짜가 집안의 모든 것을 차지하여 아이까지 낳은 것이다.
3년을 살아온 가짜가 어느 시점에서 의심을 받게 되는데, 아내 롤스 혼자만 진짜라고 우긴다. 다 속아도 같은 침대를 쓰는 아내는 그가 가짜임을 모를 수 없을 텐데, 끝까지 가짜를 비호하는 롤스의 욕망과 심리는 아내 백씨의 그것과 닮아 있다.
유유(柳游)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백씨가 채응규의 아들을 유유(柳游)의 아들로 둔갑시켜 양자로 삼고 10년을 양육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채응규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한편 1560년 바스크의 법정은 남의 가정을 침범한 가짜 게르에게 사형을 선고하지만 관련인 그 누구도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조선의 법정은 사건의 관련인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도 모진 고문을 가해 거짓 자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한 가족을 송두리째 파멸시키는 우(愚)를 남겼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19.가짜 남편에 걸려든 형수, 시동생을 범죄자로 - 유유·유연 형제 가족의 비극/ 중앙일보, 2024, 5 . 31.
20.아버지 원수 갚은 문랑·효랑(文娘·孝娘) 자매
- 묘 빼앗긴 부친 숨지자, 두 딸 처절한 복수혈전…왕도 감동했다
1709년(숙종 35) 성주 사람 박수하의 선산에 청안 현감 박경여가 무단으로 그 조부의 묘를 썼다. 박수하는 남의 묘역에 강제로 매장한 박경여를 성주목(牧)과 경상 감영에 고발하는데, 모두 패소하게 되었다. 5대째 선산을 지켜 온 박수하는 패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선산을 빼앗긴 박수하는 너무 억울한 나머지 서울로 올라가 왕에게 직접 호소해보기로 한다. 이른바 격쟁원정(擊錚原情,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왕·관부에 호소하는 일)이다. 이에 왕은 본도(本道)에 지시하여 재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했다.
소송 열에 아홉은 묘지 소송

선산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박수하의 원수를 갚은 박문랑·효랑 자매
의 행적을 그린 『박효랑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묘지 소송 즉 산송(山訟)은 노비소송, 전답소송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사소송의 하나다. 타인의 묘역 안에 묘를 쓸 수 없는데, 이것을 침범한 경우에 소송이 붙는 것이다. 산송이라는 법률 용어가 조선에 처음 등장한 것은 현종 때(1664)이다. 이후 18~19세기는 묘지로 인한 소송이 극성을 부린 시대로, 소송의 열에 여덟아홉은 산송이 차지할 정도였다.
다른 소송과 달리 산송은 상중(喪中)에도 허용되었고, 싸우고 때려죽이는 것[鬪毆之殺]의 절반을 차지했다. 노비와 전답 소송이 경제적인 이권 다툼인데 반해 묘지 소송은 이권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집안의 명예라든가 후손된 도리와 같은 가치 문제가 개입되었다. 무엇보다 산송은 부계 친족 마을의 형성과 문중 집단의 등장과 함께 나온 사회 현상이었다.
박수하 선산에 박경여 조부 묘 써 - 소송 중 발언 문제 역고소로 옥사
큰딸 문랑, 파묘 후 다투다 숨지자 - 작은딸, 여론전 끝 ‘정려’ 결정 받아
유교 상장례 정착, 묘지 소송 급증 - 선산 수호 목숨 걸었던 시대 풍경
박수하의 소송 건은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질질 시일만 끌뿐 1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더니 2년이 더 지나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박경여는 박수하의 선산에 입장(入葬)한 조부의 묘소를 꾸미기 시작한다.
주위 송추(松楸, 산소 주변에 심는 나무의 통칭)를 베어내고 묘도를 만든 후 묘비를 세우려는 것이다. 소식을 접한 박수하는 송추를 무단으로 베어낸 박경여의 종을 잡아다 볼기를 쳤다. 이번에는 박경여가 박수하를 고발한다.
박수하가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 던진 말이 문제가 되었다. 경상 감사 이의현(1669~1745)이 박경여의 인척이라 공정하게 처결될지 의문스럽다고 한 것이다. 이에 이의현이 성주로 달려와 박수하를 무고죄로 형문(刑問)하여 하옥시켜 버렸다. 불행히도 박수하는 옥에 갇힌 지 7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미혼의 두 딸 박문랑(朴文娘)과 박효랑(朴孝娘)이 등장하며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회자된 사건이 되었다. 우선 박수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큰딸 문랑(文娘)이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문랑(文娘)은 아버지의 옥사가 박경여의 늑장(勒葬, 권세를 빌어 남의 땅에 강제로 장사 지내는 일) 때문이라고 보고 문제가 된 그 집 조부 묘를 파헤치기로 한다. 그녀는 일가친척 및 노복들과 함께 묘산(墓山)으로 올라가 파묘하여 관을 꺼내 시신을 불태워버린다. 사굴(私掘)을 단행한 것이다.
사굴은 범죄인 데다 더구나 시신 훼손은 살인법이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금장(禁葬) 지역에 투장(偸葬, 몰래 매장하는 행위)을 했을지언정 그 묘를 파내는 것은 묘를 쓴 당사자 외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법 규정 때문에 도둑 매장을 해 놓고 파묘 명령이 내려져도 팔짱을 끼고 세월아 네월아 하여 산송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산송 자료.
묘지 소송인 산송은 단순히 묘지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와 위상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조선시대 소송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문랑(朴文娘)이 ‘거사’를 단행한 지 7일이 지나 박경여가 창검으로 무장한 노복들을 데리고 산에 나타났다. 소식을 들은 문랑(文娘)은 칼을 빼 든 채 말을 달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박경여 측 사람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문랑(文娘)은 죽음을 맞이한다.
문랑(文娘)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박경여 측이 죽였다는 박수하 측의 주장과 사굴과 살인을 저지른 박수하 족친들이 자신들의 죄를 무마시키기 위해 문랑(文娘)의 자결을 권유했다는 박경여 측의 주장이 그것이다.
어찌 되었건 문랑(文娘)은 죽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의 종조(從祖, 할아버지의 남자 형제) 박협은 곧바로 관아로 달려가 박경여 등을 고발한다. 양측이 서로 무장한 채 충돌하여 상호 간에 살상과 고소가 잇따르게 된 이 사태를 국왕 숙종도 주시하고 있다.
“근래에 타인의 선산을 빼앗는 폐단으로 시끄럽기 짝이 없는데, 박가처럼 묘지를 파내고 관을 불태우며 사사로이 서로를 살상하는 변란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승정원일기』 숙종 38년 6월 26일)
왜들 이렇게 묘지에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조선의 건국과 함께 유교의 상장례가 국법으로 정해지자 불교식 화장(火葬)을 매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국 100년이 지나도록 완전하지는 못했다.
성종 5년(1474)에는 “존장의 유언을 따라 시체를 화장한 자는 장(杖) 100대에 처한다”는 『대명률』의 조항을 상기시키면서 매장을 고급문화로 여기는 분위기다. 이즈음에 성립된 『경국대전』에는 분묘의 한계를 정하고 경작과 방목을 금지하는 법령이 등재되었다.
분묘가 차지하는 공간은 관료 1품(영의정)이 사면(四面) 각 90보에 한정되고, 2품 이하는 10보씩 감하여 5품이 50보에 한정되었다. 6품 이하 및 생원·진사, 유음자제(有蔭子弟, 음직을 받는 자제)들은 40보를 금장 구역으로 정했다. 100보가 약 70m이므로 40보라면 사면 각 28m가 된다.
국법이 정한 한계 외에 조선후기에는 좌청룡 우백호의 용호수호(龍虎守護)가 인정되면서 불법적인 광점(廣占)이 만연해지며 묘지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형국이었다. 조선후기 사대부가라면 산송에 휘말리지 않은 집안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야기시켰다.
영남 남인 들고 일어나 억울함 호소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에 있는 박문랑(朴文娘)과 박효랑(朴孝娘) 자매의 효각. [사진 이숙인]
‘적진’으로 돌진한 박문랑이 죽자 이제 동생 효랑(孝娘)이 아버지와 언니의 원수를 갚고자 일어났다. 효랑(孝娘)은 만류하는 조모와 계모를 설득하여 남장을 하고 상경하는데, 대궐에 몰래 들어가 격쟁원정을 한다. 왕은 이 사건을 본도로 돌려보내며 재조사를 지시한다.
하지만 성주 관아는 차일피일 미루며 해결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박경여 측도 서울로 사람을 보내 자신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랑(孝娘)은 재차 서울로 올라가 거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족의 억울함을 알리기 시작한다.
여러 궁궐과 각사(各司)에 청원을 넣을 뿐 아니라 대신이 탄 수레를 붙들고 읍소하며 길 위의 삶을 이어갔다. 효랑(孝娘)의 진정어린 행위에 감동한 장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노래까지 지어 불렀고, 영조도 세자 시절에 거리에서 효랑(孝娘)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효랑(孝娘)의 요구는 간단했다. 아버지와 언니를 사망케 한 박경여와 경상 감사로 편파적인 판결을 한 이의현을 처벌해 달라는 것이다.

이효각 안의 비. [사진 이숙인]
아버지와 언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효랑(孝娘)의 행위에 감동한 경상도 안동 유림 379명은 박문랑의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 표창)를 촉구하는 통문을 성주 유림에게 보낸다. 영남 유림의 발의로 전국의 유림이 들고일어나 문랑(文娘)과 효랑(孝娘) 자매의 효성을 극구 칭송하는데, 복합상소(伏閤上疏, 대궐 앞에 엎드려 뜻을 전달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그들은 박문랑의 효행 정려를 요구하였고, 박경여의 죄상과 이의현의 불법을 비난했다. 남인 계열의 영남이 궐기한 것은 서인의 핵심 인물 이의현에 대한 감정이 개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자매 행적 그린 전기 『박효랑전』도 나와
영조 2년, 조정 회의에서 박문랑의 정려가 결정된다. 시골 부녀에 불과한 박문랑(朴文娘)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애통으로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린 용맹은 장부(丈夫)도 해내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
임금은 “박문랑이 칼을 끼고 말을 달리어 군중 속으로 돌진하는 늠름한 모습이 마치 실상을 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영조 2년 12월 20일).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박문랑(朴文娘)과 아버지와 언니의 억울함을 여론화하여 명예를 회복시킨 효랑(孝娘)의 행적이 전기로 꾸려졌다. 박수하의 친족이 저술한 『박효랑전』이 그것이다.
묘지 소송으로 시작되어 두 자매의 효행을 기리는 이야기로 마무리된 이 사건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는 유교적 상장례의 확산과 부계 친속 의식의 강화로 조상의 묘를 한 곳에 모시는 종산(宗山)이 형성되면서 산송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묘지 수호에 목숨을 건 사람들, 조상의 묘에 가문의 위상과 명예를 걸었던 사람들은 저 생이 편해야 이생도 편하다는 사생관과 무덤을 조상의 혼백(魂魄)이 깃든 영원한 안식처로 본 생멸관이 빚어낸 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장례 문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20.아버지 원수 갚은 문랑·효랑 자매 - 묘 빼앗긴 부친 숨지자, 두 딸 처절한 복수혈전…왕도 감동했다/ 중앙일보, 2024, 6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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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Ⅹ https://blog.naver.com/ohyh45/224141972172
▣소현세자 아들 삼 형제의 슬픈 삶-잔혹한 궁중 비극 ,▣서예 최고봉 이광사의 일가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희대의 ‘시체 바꿔치기’, ▣235년 만에 역적에서 복권된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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