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15] 만물이 시작하는 문

입춘(立春)에 궁궐을 걸었다. 봄이 일어선다는 이름을 가진 절기답게 사뭇 따스한 햇살이 돌바닥에 드리워 걷기 좋았다.
경복궁을 찾은 사람들 얼굴에도 봄이 피었다. 기분 탓일까?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시간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 웃음이 끊이질 않고, 사뿐사뿐 걸으며, 어떤 이는 춤까지 춘다. 그 모습을 보니 청바지에 진회색 코트를 입은 나마저 나긋나긋한 발걸음으로 걷게 된다. 산뜻한 하늘색, 수줍은 분홍색, 갓난아이 살결 같은 우윳빛, 반짝이는 금실 은실, 새싹보다 힘찬 연둣빛, 궁궐 안 지구촌 사람들이 입은 하늘거리는 한복의 빛깔이 봄을 알리는 정령만큼이나 어여쁘다.
일부러 동쪽 끝 건춘문(建春門)부터 서쪽 끝 영추문(迎秋門)으로 걸어본다. 봄을 세우는 문에서 가을을 맞이하는 문으로. 계절의 움직임이 나의 발끝에 있다. 하루 아침나절에 봄에서 가을까지 걷는 셈이다. 근정전을 지나며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정말로 하루가 한 걸음처럼 빠르게 지나가. 무서울 지경이야. 그때 오래전 은사님 말씀이 떠오른다. 발걸음 하나하나 신경 쓰며 사는 버릇을 들이도록 해라. 길을 걸을 때도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걷는 네 모습을 자각해라.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어느덧 경회루에 닿았다. 경사스러운 날 배를 띄워 연회를 즐겼다는 연못은 아직 얼어 있다.
누각을 받친 스물네 개의 돌기둥은 24절기를 상징한다. 흐르는 계절 위에 떠 가는 누각이다. 까마득히 솟은 지붕 위에 하얀 것이 보인다. 백로다. 유유히 세월의 배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구나. 백로의 눈에는 인간이 콩알만 해 보일 테지. 콩알은 다시 굴러 문을 나선다. 현판을 보니 만시문(萬始門)이라고 쓰여 있다. 만물이 시작하는 문이라. 모든 것이 태동하며 꿈틀대는 문이다. 자, 이제 무엇이 시작하고 무엇이 일어설까. 올해는 저마다 뜻을 세워 나만의 만시문을 만들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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