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1] 조선 초기 인재향(人材鄕)
- 백승운기자 손동욱기자
사림파 영수 김종직… 농사직설 펴낸 정초… 과거급제자 15명 배출한 마을
|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에는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들어서 있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유명하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구미 선산은 예부터 인재향(人材鄕)으로 불린다.
야은 길재의 고향으로 역사의 중심에 섰던 수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 선산이다.
무엇보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적 기풍이 뿌리 깊게 내려 있었다.
마을마다 글 읽는 소리로 가득찼고, 문지방을 타고 담을 넘은 글 소리는 밤새 그칠 줄을 몰랐다.
이 지역 선비들이 지향한 정신적 축과 가치는 바로 학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선산 선비들은 과거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리는 선산의 작은 마을 옛 영봉리는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 개국 이후 15세기를 관통하는 동안
수많은 과거급제자가 장원방에서 배출됐다. 장원·부장원이 연이어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파워엘리트들의 요람’이나 다름없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총 13회에 걸쳐 ‘공부의 신, 천재(들)의 요람 선산 장원방(壯元坊)’ 시리즈를
연재한다. 선산 장원방을 재조명하고 이 마을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이력을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들여다본다. 시리즈 첫회는 장원방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해 짚어본다.
길재의 제자 김치를 시작으로
생육신 이맹전의 장인 김성미
단종 복위 꾀한 진주하씨 집안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여물 등
역사에 남은 수많은 인재 나와
선산중 뒤편 옛 과거길 장원봉
장원급제 회화나무 명성 증명
#1. 인재향의 으뜸 장원방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선산을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되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재향’ 선산을 한마디로 명징하는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이 기록의 모티브가 ‘선산 장원방’이다. 장원방은 옛 영봉리를 일컫는다.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 완전리 일대를 말한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이 마을에서는 무려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
이 중 장원급제자가 7명, 부장원이 2명에 이른다.
선산 중에서도 옛 영봉리를 ‘인재향의 으뜸’으로 꼽는 이유다.
이러한 영봉리를 조선시대에 장원방으로 불렀다.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서당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원방이라는 이름을 공식 문헌에 처음 소개한 이는 이 마을에서 공부한 김종직이다.
영남사림의 영수로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섰던 김종직은 1476년 선산부사로 부임한다.
당시 그는 선산지리도(善山地理圖)를 완성하고
지도 위에 선산을 상징하는 10가지(선산10절, 善山十絶)를 시로 쓴다.
선산10절 중 하나가 바로 옛 영봉리, 장원방이었다.
鄕人從古重膠庠/ 翹楚年年貢舜廊/ 一片城西迎鳳里/ 靑衿猶說壯元坊
마을 사람이 예로부터 학교를 중히 여기어/ 뛰어난 인재들을 해마다 조정에 바치었네/
성 서쪽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 영봉리를/ 학도들은 아직도 장원방이라 말하누나
김종직이 극찬한 장원방은 조선 개국부터 15세기 전반기까지 6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 기간에 선산출신 문과 급제자는 총 36명, 이 가운데 12명이 장원방에서 배출됐다.
장원 혹은 부장원으로 합격한 수는 총 7명인데, 7명 모두가 장원방 출신이다.
조선시대 과거급제는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는 1차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그중 문과가 가장 어려웠다. 문과 급제는 대를 이어 문벌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코스였고,
돈 없고 배경 없는 가난한 시골 선비들에게는 유일한 출세길이었다.
재수와 삼수, 심지어는 한평생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때문에 보통 7~8세 때 서당에 들어가 20~30년은 공부에 매달려야만 급제를 할 수 있었다.
장원이나 부장원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더욱 험난했다.
과거시험을 해마다 시행한 것도 아니었다.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는 3년에 한번씩 치렀다.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치른 부정기시험이 있었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다.
험난한 과거시험 과정 속에 장원방에서 수많은 급제자가 배출되고 장원·부장원이
잇따라 나온 것은 이 마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공부의 신 15명의 급제자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과거급제자는 길재의 제자 김치(金峙)다.
그는 고려 창왕 즉위년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조선 초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에 올랐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원방에 살면서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의 아들이자 장원방을 극찬했던 김종직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김치의 사위 정지담(鄭之澹)도 장원방 출신으로,
1416년(태종 16) 친시(親試) 을과(乙科) 급제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지낸 전가식(田可植)은 조선조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장원급제자다.
그는 1399년(정종 1)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서 1등을 차지했다.
중앙관직에 나아가서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관료였다.
1449년(세종 31)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 김성미(金成美)도 빼놓을 수 없다.
1378년(고려 우왕 4) 장원방에서 태어나 조선 태종 때 문과에 등제됐다.
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다. 예문관직제학 겸 군기시판사를 지낸 김성미는
충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사위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중앙무대에 나가지 않았다.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서(農書)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도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그는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에 올랐다.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집안은 장원방의
명문가로 꼽힌다. 김숙자는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그의 두 아들 김종석(金宗碩)과 김종직(金宗直)도 장원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문과에 급제했다.
장원방의 최고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집안이다.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급제했다.
아버지 하담은 1402년(태종 2)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을, 사육신으로 이름을 떨친 아들 하위지는
1438년(세종 20) 식년시 을과에 장원급제했다.
하위지는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탓에 동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강지는 1429년(세종 11) 식년시에 급제했고,
하기지는 형 하위지와 같은 해인 1438년(세종 20년) 식년시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급제한 유면(兪勉)은 하담의 장인으로
그 역시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처가를 합쳐 한 집안에서 5명(하담,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유면)의 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의
대표적인 가문이다. 하지만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하다 하위지가 처형되면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하고 말았다.
세조대에 이르러 하위지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면서
장원방에서는 과거급제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선초기 인재향’이라는 명성도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장원방의 학풍이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앙무대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과 정신적 가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학풍은 16세기 후반 영남사림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앙무대에 복귀하면서
다시 빛을 발한다. 명맥이 끊겼던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는 선조대에 이르러 다시 배출됐다.
그 명맥을 이은 인재가 김여물(金汝)이다. 그는 1577년(선조 10)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인재향 장원방’의 옛 영광을 재현했다.
김여물은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물에 투신해 순국한 인물로 유명하다.
김여물 이후에는 박춘보(朴春普)가 1738년(영조 14)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성품이 강직했던 그는 조정의 제반사를 능숙하게 처리해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명필로 이름을 떨쳤고, 선산읍성 낙남루의 상량문을 직접 짓기도 했다.
#3. 지금 장원방에는…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명성을 떨쳤던 장원방은 지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무엇보다 이 마을 출신 인재들과 관련된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생가는 물론이고 그들이 공부했던 곳도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효행이 지극했던 김치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렸던 정문(旌門)은 문헌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김치가 선산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었던 사당도 마찬가지다.
단계 하위지가 공부했던 독서당(讀書堂)과 그가 수양대군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한때 낙향해 거처했던 공북헌(拱北軒)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선산 선비들이 걸었던 과거길을 이웃해 솟아있는 봉우리가 ‘장원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현재 선산중학교 뒤편에 남아있다.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당시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담벼락에 끼여 위태롭게 서있다.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 한켠에 15명의 과거급제자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장원방의
옛 명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역 원로들은 장원방을 구미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은호 전 구미문화원 원장은 “선산 장원방은 인재향 구미를 상징하는 곳이다.
한 마을에서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장원방을 지속적으로 재조명하고 사라진 문화재를 복원해 구미를 대표할 수 있는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구미시
장원방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 현황
| ● 김치(金峙) | 창왕 즉위년(1388) 무진방(戊辰榜) 병과(丙科) 4위(문과 급제) |
| ● 전가식(田可植) | 정종 1년(1399)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 ● 하담(河澹) | 태종 2년(1402)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문과 부장원) |
| ● 유면(兪勉) | 태종 5년(1405)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 ● 김성미(金成美) | 태종 때 문과 급제(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한 것으로 기록) |
| ● 정초(鄭招) | 태종 5년(1405)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문과 부장원) |
| ● 정지담(鄭之澹) | 태종 16년(1416) 친시(親試) 을과1등(乙科一等) 1위(문과 장원) |
| ● 김숙자(金叔滋) | 세종 1년(1419)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위(문과 장원) |
| ● 하강지(河綱地) | 세종 11년(1429)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9위(문과 급제) |
| ● 하위지(河緯地) | 세종 20년(143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 ● 하기지(河紀地) | 세종 20년(143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문과 급제) |
| ● 김종석(金宗碩) | 세조 2년(1456)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1위(문과 급제) |
| ● 김종직(金宗直) | 세조 5년(1459)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0위(문과 급제) |
| ● 김여물(金汝 ) | 선조 10년(1577)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위(문과 장원) |
| ● 박춘보(朴春普) | 영조 14년(173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자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2] 풍수로 본 장원방
비봉산 영험한 기운 받는 명당…수백년간 好學풍속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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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 항공기 드론으로 촬영한 장원방(옛 영봉리) 일대 전경. 장원방은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완전리 일대를 말하며, 1 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조선초기 인재향이다. 선산읍기(邑基)의 서쪽 내백호 지맥 아래에 위치해 풍수지리적으로도 명당으로 꼽힌다. 풍수는 자연학이자 인문학이며 기(氣)의 학문이다. 자연학은 자연의 논리를 말하고, 인문학은 인간의 논리를 말하며, 기는 천기(天氣)·지기(地氣)·인기(人氣)를 말한다. 그런데 기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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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 이문·노상·완전리 일대 비봉산·선산평야·단계천 사이 산이 끝나고
들판 열리는 명당 영남유학파 부흥 밑거름 조성되다.
금오산·망장산·봉란산·죽장사…봉황
떠나지 않도록 보완한 지명
장원방 이문리서 태어난 김재규
상모리 출신 박정희와 묘한 운명
#1. 산진야개(山盡野開)·호학향풍(好學鄕風)의 명당
현재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완전리 일대는 조선초에 영봉리(迎鳳里)였는데,
장원방(壯元坊)이라는 영예스러운 별칭을 얻었다.
‘방(坊)’은 ‘마을’이니, 장원방은 곧 ‘장원이 배출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400년을 전후해서 불과 70여년 동안 이 마을에서 13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는데,
그중에 5명이 장원을 하고 2명은 부장원을 했다.
게다가 1577년과 1738년에 두 사람이 더 장원급제를 했으니,
영봉리에서 그토록 많은 ‘장원’이 나온 배경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영봉리를 품에 안은 비봉산의 영험한 기운 덕분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산평야 너머로 멀리 보이는 금오산 문필봉의 길응설(吉應說)이다.
물론 당시의 학동들이 그 같은 풍수적인 소응(所應) 얘기를 들으며 한껏 의기충천해
공부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장원을 많이 배출한 주된 요인이었다고
결론짓기에는 뭔가 설득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장원방은 선산읍기(邑基)의 서쪽 내백호 지맥 아래에 위치한 동네다.
남북축으로는 비봉산과 선산평야가 만나는 경사변환점이요,
동서축으로 읍기의 내백호 줄기가 끝나는 장원봉(壯元峰)과 내명당수인 단계천 사이다. ‘택리지’에서도
“상주는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지만, 선산의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고
했으니, 선산읍기의 한 명구(名區)를 차지하고 있는 장원방의 됨됨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골짜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른바 산이 끝나고 들판이 열리는 산진야개(山盡野開)의 명당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삶터(地)라 할지라도
시운(時運·天)과 길인(吉人)을 조우하지 못한다면 큰 발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초의 영봉리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 같은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시운은 이 땅에 유학이 처음 들어온 때요,
‘길인’이라는 것은 마침 야은 길재가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키우던 시기였으니, 저 드넓은 감천과 낙동강변의 퇴적평야를 바탕으로
탄탄한 경제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사족(士族)들로 가문 중흥의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15세기 후반 선산 출신의 저명한 관료학자 김종직은 ‘이존록(彛尊錄)’에서,
“길재의 문하로 학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소회한 바 있으며,
‘경상도지리지’에서는
“선산의 풍속이 화려함을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한다(俗尙華麗 好學問)”고 썼다.
이 호학향풍(好學鄕風)의 인문적인 배경 환경이야말로 훗날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조선초기 영남유학(선산학파)의 발흥을 가져다준 큰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선산의 장원방과 장원봉은 사람의 노력으로 일군 인문학적 곳이름(地名)이다.
여기에서 서당마을 뒷산을 ‘장원봉’이라 이름한 후에 장원 급제자가 나왔느냐,
아니면 화려하게 귀향하는 장원 급제자 행렬을 본 후에
장원봉이라 이름지었느냐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당시에 장원방(서당마을)을 출발한 선비들이 과거장으로 향하면서 반드시
이 장원봉 아래로 지나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원봉과 장원방이 유생들에게 긍정적 심리효과를 극대화하는 이중적 기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승유지(人勝由地·사람은 땅으로 말미암아 유명해지게 된다)
든 지승유인(地勝由人·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이든 장원 급제자가
연이어 나온 이상,
그 터가 지닌 유무형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28세였던 1459년에 장원급제했던 이 마을 출신 김종직은 여러 관직을 거쳐
1476년에 선산부사로 금의환향했는데 “학도들은 아직도 (영봉리를) 장원방이라
말하누나(靑衿猶說壯元坊)”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577년에는 김여물(金汝)이,
1738년에는 박춘보(朴春普)가 각각 영봉리 출신자로서 장원급제 전통을 이어갔으니,
김종직의 ‘아직도(猶)’는 놀랍게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장원방의 전설 아닌 실제 얘기가 불과 수십 년 전인 1970년대 말에도 일어났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김재규(1926~80)였다.
#2. 비봉산 아래 장원방 출생 김재규 vs 금오산 아래 상모리 출생 박정희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2007년 필자는 한 월간지에 기상천외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 김재규 부친이 돌아갔을 때 한 풍수사가 묘터를 잡아주면서
‘군왕지지(君王之地)’라고 하는 바람에
그가 ‘자기암시’로 대통령 시해를 결단했다는것이다.
그 풍수사는 박정희의 선대 묘도
‘금오탁시혈 제왕지지(金烏啄屍穴 帝王之地·까마귀가 시체를 쪼아 먹는 형국의
대길지로서 제왕이 날 터)’로 미화했던 장본인이었다.
김재규는 장원방인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한 정신적인 자존감은 조선초 무학대사의 금오산 ‘왕기설’을 믿고
5·16의 강단(剛斷)을 보였던 박정희에 못잖았을 법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생가 터를 품고 있는 비봉산과 금오산의 관계에 대해
해평 출신 최현(崔晛, 1563~1640)이 쓴 ‘일선지(一善誌·선산읍지)’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다.
“형세를 보고 주산을 비봉산이라 이름하였기에,
봉황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주변의 모든 산 이름과 절 이름을 거기에 맞춰 지었는데
망장산(網障山), 무래산(舞來山), 봉란산(鳳卵山), 금오산(金烏山), 봉암산(鳳巖山),
죽장사(竹杖寺), 죽림사(竹林寺), 오동사(梧桐寺)가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봉황이 죽순을 먹은 후 오동나무에 깃들어, 알을 품으면서 영원히 선산고을을
떠나지 말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런 각종 풍수지명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초점은 바로 금오산이다. 금오는 금까마귀다.
해질녘 붉은 노을 속을 날아가는 금까마귀를 보고 고려말에 ‘금오’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오지만, 입증해줄 만한 고문헌자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일선지’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금오’라는 산 이름은 과거에
구미가 선산도호부의 한 외곽 변두리에 불과했던 시기에,
고을의 복록을 담보해주는 봉황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당시 선산 유림들이 비봉산에 종속시켜 지었던
여러 비보(裨補·부족한 점을 보완함) 지명 중 하나임이 확실하다.
영천시의 작산(鵲山·까치 산)과 진주시의 작평(鵲坪·까치 들)도 그와 유사한 봉황 관련
비보지명이다. 주로 삶터 뒷산이 비봉산이거나 아니면 읍기가 봉황형일 때
그 봉황에 대응하는 앞산을 상징하는 새(鳥)로 ‘까치’를 설정했는데,
문제는 그에 대한 풍수해석이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어용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의 풍수’에서 말한
“봉황은 까치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잡으려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는다”고
한 해석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봉황은 상상 속의 신조(神鳥)로서 만조(萬鳥)의 우두머리 새다.
그런 새가 굳이 까치를 잡으려 할 이유도 없으려니와 또한 잡으려 한다면
일단 날아올라야 하기 때문에 “봉황이 까치를 잡기 위해 날지 않는다”는 말은
아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봉황이 까치를 잡는다”는 상극(相剋) 논리적인 해석은
알고 보면 일제의 간악한 우리민족 정신문화 말살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나 이원명의 ‘동야휘집’, 이희준의 ‘계서야담’ 등을 보면
까치는 오히려 과거 합격이나 벼슬 진급과 연관돼 있다.
그러니까 주산과 안산을 상징하는 영물로 배정된 봉황과 까치의 관계는
“마치 제왕격인 봉황이 까치(과거 급제자)를 맞이하여
그동안의 공부 소회(까치 소리)를 경청하고 있는 듯하다”는
상생(相生)의 논리로 해석돼야 옳은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 길상조(吉祥鳥)로 받아들여지는 까치는 조류분류학상으로는
까마귓과에 속한다. 까마귀는 예부터 적오(赤烏) 혹은 삼족오(三足烏)라 하여
직접 태양을 상징하기도 했고, 또 남쪽이 붉은 태양의 화기(火氣)가 비등한 곳이어서
사방신수(四方神獸)의 하나인 ‘날아가는 붉은 새(朱雀)’와 동류(同類)로 비정(比定)되기
도 했다. 때문에 봉황을 대(對)하는 새가 까치든 금까마귀든 그 상정된 작용 원리는
같은 것이다. 무라야마 지준 같은 유(類)의 어용학자나 사이비 술사라면
또 10·26을 이와 연관시켜 “마치 봉황산하(下) 장원방 출신 김재규가 금오산하(下)
상모리 출신 박정희를 잡은 풍수감응이 현실세계에서 운명론적으로 일어났다”고
억지로 꿰맞출지도 모르겠다.
장원방 풍수의 인문학적 스토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금오산과 비봉산은 오늘도 여전히 사이좋게 바라보고 있고,
감천과 낙동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누가 감히 이 대자연의 질서와 이법을 함부로 상징 조작하고 있다는 말인가.
글=이몽일<풍수학박사·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드론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구미시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3] 김해부사를 지낸 김치(金峙)
창왕 즉위년(1388) 무진방(戊辰榜) 병과(丙科) 4위
길재의 특출난 제자…만호부 관리 비리 파헤쳐 日과 외교마찰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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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의 과거급제 이력이 기록되어 있는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등과록전편은 신라·고려시대 과거급제자 명단이 적혀 있는 문헌이다. |
왜구침입에 폐혀가 된 객관 정비 사당세워 선산 백성 교화도 힘써
선산 장원방(壯元坊·옛 영봉리, 지금의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 출신 15명의 과거급제자 중
#1. 널을 뛰는 정치인생
거제와 통영이 만든 작은 해협, 견내량(見乃梁)은 전하도(殿下渡)로도 불렸다.
그런 견내량을 지나며 김치는 쓴 침을 간간이 삼켰다. 그도 한때는 고려의 신하였다.
“가서, 알아보라.”
왕의 명은 조용하고 간결했지만, 사건의 내막은 시끄럽고 복잡했다.
“우리 사신들을 태운 배가 지난해 5월 조선으로 향하여 떠났으나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임금이 노여워했다. 그것이 김치가 견내량으로 내려온 이유였다.
김치의 서슬 퍼런 추궁에 목철은,
견내량에서 돌아온 김치는 견내량 만호의 비리를 밝힌 공로로 형조(刑曹) 정랑(正郞, 정5품)을
사건의 요는 이러했다.
#2. 솔선수범으로 고을의 기운을 바꾸다
“부사어른, 저 왔습니다.”
김숙자(金叔滋, 1389~1456)였다. 그는 김치를 여전히 ‘부사’로 부르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가까이 앉으시게.”
김치는 선산 영봉리, 즉 장원방에 둥지를 튼 이후로 김숙자와 많은 시간을 더불어 하고 있었다.
김숙자는 학문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예의범절과 문물이 날로 타락해져가고 있는데, 학자 된 자로 어찌 가만히 앉아 탄식만 하겠는가.
“지당하십니다. 저도 힘을 얹겠습니다.”
이에 사당을 세우고 김치가 나서서 예를 행하며 교육에 힘쓰니,
#3. 선산(善山)을 위해서라면
1428년(세종 10) 봄 해거름이었다.
“이 부사께서 선산에 오실 때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수령을 임명할 때마다
“예. 실로 어깨가 무겁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선산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선산이 교통의 요충지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헌데 이 부사께서 평소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림에 과감하시다
이로써 객관 정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큰일에는 임자가 있는 법이었다.
집현전(集賢殿)의 교리(校理, 정5품)였던 권채(權採, 1399∼1438)의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김치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선산 객관은 60여년이 지난 1492년(성종 23),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조선왕조실록,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 기획:구미시
기획/특집‘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4] ‘과거급제 2관왕’ 하늘이 내린 인재 정지담(鄭之澹)
[문과] 태종 16년(1416) 친시(親試) 을과1등(乙科一等) 1위
[문과] 세종 18년(1436) 중시(重試) 을과3등(乙科三等) 5위
大學者 장인 밑에서 修學…두번이나 급제한 ‘공부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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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있는 고향을 다녀오는 바람에 과거를 보지 못할 뻔했는데,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보게 된 정지담의 일화가 상세하게 기록된 태종실록. 정지담은 이 시험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했고, 훗날 안동대도호부사까지 오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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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담이 친시 제1등을 차지해 우정언을 제수받았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태종실록. |
부모님 뵈러갔다 과거 못보게 되자
신문고 울려 응시…忠孝 주제 壯元
훗날 불합리한 과거규정 개선 계기
10년에 한번 보는 重試 당당히 합격
정6품서 시작 안동대도호부사 올라
#1. 태산 같은 장인 김치(金峙)
정지담은 날이 갈수록 영봉리(迎鳳里, 일명 장원방)가 좋았다.
남귀여가(男歸女家), 즉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혼례를 거행하고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대학자인 장인 곁에서 정지담의 학문은 착실하게 성장했다. 김치가 사위의 공부에 들인 공력에
합격의식인 방방의(放榜儀)가 있던 날, 정지담은 장인으로부터 별다른 인사를 받지 못했다.
당시 방방의의 절차는 이러했다.
‘이제 시작이지. 더 큰 산이 남은 것을.’바로 대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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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담의 과거급제 이력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오른쪽은 태종 16년(1416) 친시 을과1등 1위를 차지한 기록, 왼쪽은 세종 18년(1436) 중시 을과3등 5위로 합격한 기록이다. |
#2. 두 번의 과거, 두 번의 영광
1416년(태종 16) 8월, 여름밤의 거침없는 달빛이 과장(科場)을 훑어가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병신16년친시방(丙申十六年親試榜)’이라 해서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과거시험이 치러지는 중이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속히 시험을 마무리지으라며 삼관(三館, 성균관·예문관·교서관)이 재촉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조용(趙庸)은 수험생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결국 시험은 늦은 밤 10시를 넘기고서야 어느 정도 갈무리되었다.
500장이 넘는 답안지가 시험관들에게 넘겨졌으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간신히 답지를 내놓은 이가 서른이 넘었고,
어쩌지 못하고 백지를 내버린 이도 스물을 넘었다. 그런데 그 북새에 정작 정지담은 없었다.
부모가 있는 고향 본가에 들렀다가 날을 놓친 탓이었다. 길이 험한 시절이었다.
정지담이 과장에 당도한 때는 사흘 후였다.
그런데 과장 주변에 같은 처지의 수험생들이 무려 쉰이나 넘게 몰려 있었다.
억울하거나 안타깝거나 하는 사연들이 들끓고 갖은 궁리들이 오고간 끝에,
모두의 발걸음이 신문고(申聞鼓)로 향했다.
정상을 참작해 시험을 보게해 달라는 탄원을 위해서였다.
정지담이 신문고를 울리자 조정의 관리가 나왔다.
비록 신문고의 효용이 점점 떨어져가는 형편이긴 했으나,
왕이 신문고를 세우도록 지시한 바로 그 당사자였던 만큼 아직은 반응이 빠른 편이었다.
자초지종이 전해지고 그리 오래지 않아 시험을 허한다는 명이 떨어졌다.
하지만 엄선된 열다섯 명에게만 그리 해주겠다는 조건이 따라왔다. 다행히 정지담도 해당되었다.
추가시험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장소는 똑같이 경복궁의 경회루였고,
모든 과정 또한 예에 맞게 엄격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말로만 듣던 뜨르르한 인물들이 시험관으로 나왔다.
개국공신인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을 비롯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 지신사(知申事, 도승지) 조말생(趙末生),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적(李迹),
그리고 예조판서 조용 등이었다.
시험문제인 책문(策問, 논술)의 주제로는 ‘충효’가 출제되었다.
정지담은 고민할 것도 없이 폭풍처럼 써내려갔다. 그리고 이틀 뒤,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백의 응시생들 중 문·무과 각 9명씩이 합격한 가운데, 정지담이 장원(壯元, 1등)이었다.
이번에도 방방의가 치러졌다. 물론 생원 때와는 사뭇 달라서,
왕과 문무백관들이 참석해 지엄한 분위기가 연출됐으며,
예조정랑이 아닌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부터, 백패가 아닌 홍패(紅牌)를 받았다.
그리고 정지담은 바로 우정언(右正言, 정6품)에 제수되었다.
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을 비판하여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간쟁(諫諍)’이 그의 소임이었다.
2등을 한 김자돈(金自敦)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정9품)가 되었으니,
1등과 2등의 품계 차이가 퍽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정지담이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보게 된 일화는 훗날 과거 규정을 바꾸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31년 후인 1447년(세종 29),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은 정지담의 ‘신문고 일화’를
들어 “왕이 법을 운용하는 권도가 지극하고 선비를 뽑는 방법이 옳아 뛰어난 인물을 얻었다”고
언급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 과거 자격을 얻으려면 원점(圓點)이라는
출석일수 점수를 채워야 하는데, 이에 상관없이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왜냐하면 정지담 또한 고향에 다녀오느라 원점이 부족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문고를 울려 시험을 통과한 때문이었다. 그것도 장원이었으니,
시험을 못 보게 했더라면 어쩔 뻔했겠느냐는 의미였다. 결국 임금은 유생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과거 규정을 바꾸었다. 모두가 정지담의 일화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병신년 과거 이후 스무 해가 지난 1436년(세종 18), 정지담은 또 한 번의 과거인 중시(重試)에서
5등을 차지했다. 중시란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던 일종의
승진시험이었다. 합격하면 성적에 따라 관직의 품계를 올려주었기 때문에,
참하관(參下官, 정7품 이하)은 참상관(參上官, 종6품 이상)으로, 당하관(堂下官, 정3품 이하)은
당상관(堂上官)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를 정지담이 확실하게 잡은 것이었다.
봄의 한복판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치러진 ‘병진18년중시방(丙辰十八年重試榜)’에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의정) 황희(黃喜)를 비롯한 8명의 시험관이 감독관으로 나선 가운데,
문무과에서 각 12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통과한 인원도 적은 데다,
5등이라면 그 중에서도 최상위권이었다. 정지담의 천재성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정지담은 이후 별다른 문제없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까지 오를 수 있었다.
#3. 목민관으로서의 올바른 삶…시문도 탁월
“봄에는 밤이 제일이고, 여름은 한낮이 으뜸이며, 가을은 저녁이 제격이고,
겨울은 아침이 그만이라 했던가. 허나 운산(雲山)의 봄날 새벽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형국이구나.”
고산현(高山縣, 현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동쪽 위쪽으로 5리 여. 조그마한 산등성이와
연결된 가파른 낭떠러지 위로 안개가 얼기설기 짜놓은 피륙마냥 띄엄띄엄 흘렀다.
그 속에 서서 정지담은 모처럼 편안함에 빠져들었다. 추정컨대 당시 고산현감이었을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안녕과 자신을 향한 주민들의 신뢰가 느껍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가 절로 읊어져 나왔다.
境靜民風厚 雲深洞府幽(경정민풍후 운심동부유)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고요하고 / 구름 깊으니 동네의 관아 그윽하네.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으나,
정지담은 지방의 수령으로 다니는 동안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목민관의 삶에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졌던 때문이리라.
또한 그것이 곧 충이라고 믿었던 때문이기도 하리라.
실제로 그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를 지나면서
‘소루(召樓)’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내비치기도 했다.
‘영남 천리 길에 가을이 또 돌아오고/ 북녘을 바라보니 대궐로 가는 길 열렸는데/
작은 힘이나마 산하 같은 성덕을 도와야 하지/ 쉽사리 귀거래를 읊을 것은 아닐세’
즉 지방의 작은 마을이라고 해서 가벼이 노닥거리다가 말 일이 아니라,
성심을 다함으로써 임금이 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였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가 정치를 통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 : 구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