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 소굴서 나오거라, 다 용서해주마”
정탁, 유서 지니고 포로 구출
선조의 한글로 쓴 심리전 삐라
1592년 4월 20일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부산을 거쳐 김해로 물밀듯 쳐들어왔다. 김해의 선비 ‘사충신’(四忠臣, 송빈 김득기 이대형 류식)은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했다. 부사 서례원(徐禮元)이 달아나고 결국 김해는 왜적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김해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약탈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로로 잡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노역에 시달리는가 하면 우리나라 진영에 대한 정탐, 길 안내 등에 앞장서야 했다.

김해 사충단 내 사당 ‘표충사’와 그 내부. 류식, 김득기, 이대형, 송빈 등 김해읍성에서 싸우다 순절한 네 명의 충신을 모셨다.

김해 동상시장 내 유공정(柳公井).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공격하던 왜군이 성으로 흐르는 물길을 끊어 식수가 고갈되자, 성을 지키던 류식(柳湜, 1552~1592)이 객사 앞 이끼 낀 계단을 파서 급히 만든 우물이다.

김해성을 지키던 사충신 중 하나인 송빈(宋賓, 1542~1592)의 순절을 기념해 세운 ‘송공순절암’. 특이하게도 커다란 고인돌 위에 비를 세웠다. ‘경상남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돼 있는데 문화재 공식명칭이 ‘서상동 지석묘’라고만 돼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권탁, 포로가 된 백성 구출해내
‘섬 오랑캐 침범하여 열읍(列邑)이 함락되고
남중(南中)의 민생들이 왜토로 끌려갈 제
선조(宣祖) 교지 받들어 호혈에 잠입하여
백여명 생령을 꾀로써 구출했네’
[권탁장군 현충사 이건기념비 중]
경북 선산(현재 구미 인근)에서 벼슬 없는 선비로 지내던 권탁(權卓, 1544~1593) 장군은 일찍부터 키가 크고 힘이 남달리 셌다. 난을 당하여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던 권탁은 포의(布衣)를 입은 채 김해로 와, 김해성을 지키는 수성장이 되기를 자청했다. 수령이 없는 김해에 온 권탁은 스스로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성을 고치고 민심을 수습했다.
1593년(선조 26) 9월 선조가 의주로 몽진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다행히 전세는 호전돼 1593년 4월 한양을 수복했고, 왜군은 남쪽으로 후퇴했다. 자신감을 얻은 선조는 왜군이 붙잡고 있는
우리 포로를 석방시키기 위해 남도의 장수들을 상대로 “우리 백성들을 구출하라”는
유서를 내렸다. 유서는 또 “무슨 짓(길 안내 등 이적행위)을 했든 처벌하지 않을테니
안심하고 돌아오라”는 내용도 담았다. 조선인 포로에 대한 안전 증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군이 두려워 선뜻 나서는 장수가 없었다.
기개가 넘쳤던 권탁은 임금의 유서에 따라 행동에 옮기기로 한다. 선조국문유서를 품에 지닌채 장사 10여명을 데리고 적진에 몰래 들어갔다. 포로의 가족처럼 꾸미고 밤중에 왜적의 진지에 잠입한 그는 선조국문유서를 보여주며 백성들을 설득했다. 권탁은 왜군 수십명을 죽이고 100여 명의 백성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심한 상처를 입고 관직을 받기도 전인 1593년 11월 21일 쉰 살의 나이로 김해성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관직에 임명한다는 교지는 안타깝게도 그가 숨진 뒤 전달된다.

권탁 장군이 수성장이 되어 성을 수리하고 민심을 수습했던 김해읍성. 김해시가 북문을 복원했으나 이처럼 철통같이 사람 접근을 막아 복원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포로를 구출한 공로로 1722년 권탁에게 내린 내린 추증 교지. 정3품의 상계(上階)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 장예원 최고위직으로 노비 송사의 판결을 맡아보았다)라는 직책이다.

권탁 장군을 배향한 사당 ‘현충사’와 위패.
◇도둑 맞은 유서, 되찾아 박물관에
경남 김해시 흥동로 123-18.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면 ‘현충사’가 나온다. 안동권씨 후손들이 권탁 장군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현충사 건물 뒤편 가파른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권태돈(84세) 안동권씨 판결사공파 종친회장이 조심스럽게 어서각 문을 열어준다. 어서각 건물 내 판문을 열자, 이번에는 스테인레스 철문이 나타난다. 이를 열자 비로소 붉은 천으로 덮인 국문유서가 나온다. 내삼문, 어서각 출입문, 어서각 내 판문, 스테인레스 철문 등 4중의 문으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는 세로 75㎝, 가로 48.8㎝ 크기.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과
순 한글로 쓴 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지만 이곳 어서각 안의 유서는 가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본을 그대로 복제한 영인본(影印本)이다.
사연이 있다. 당초 안동권씨 문중은 당연하게도 진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도난을 당한다. 도박을 하다 빚을 진 한 도둑이 소문을 듣고 유서를 훔친다.
그러나 바로 도난신고가 된 장물(贓物)이었기에 팔리지 않았다.
“안 팔리니까 도둑이 유서를 비닐에 담아 땅 속에 숨겨뒀어요.
그런데 이 도둑이 주변 사람에게 우연히 유서 얘기를 꺼냈고,
얘기를 들은 사람이 경찰에 신고해서 다행히 1년여만에 되찾았습니다.”
권태돈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유서가 조금 훼손됐지만 바로 보존처리하는 한편
서울대 사학과 교수 3명이 내려와 유서의 가치와 진품 여부 등을 조사했다.
유서에는 옥새인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 찍혀 있다.
글씨보다 위조가 더 어려운 게 옥새이다. 진품임과 함께
한글로 쓴 유서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1975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88년 다시 보물 951호로 승격됐다.
이 일을 계기로 안동권씨 문중은 2002년 부산박물관에 유서를 기탁했다.
그러다 2021년 김해한글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유서를 옮겼다.
현재 한글박물관측은 유서를 수장고에 보관 중이며 영인본을 제작해 전시 중이다.

임호산 아래 흥동에 권탁의 충정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와 선조어서각이 있다. 앞은 사당, 뒤는 어서각이다.

김해시 흥동 어서각 내 국문유서 영인본. 안동권씨 문중의 권태곤(80) 씨는 “선조의 얼과 정신을 기리는 의미가 있기에 진품이 아니라 해도 늘 경건한 마음으로 대한다”라고 말했다.

김해한글박물관으로 옮겨가기 전인 2020년 2월 부산박물관에서 촬영한 진품 선조국문유서. 지금은 김해시립박물관에 기탁돼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국왕의 유서에 찍는 보물 국새 유서지보(諭書之寶). 유서는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 같은 군사권을 가진 관리를 임명할 때 임금이 내리던 명령서 등을 가리킨다. [국립고궁박물관]

지난해 6월 있었던 선조국문유서 김해시 기탁식. 오른쪽이 안동권씨 판결사공파 권태돈 종친회장, 왼쪽은 허성곤 전 김해시장이다. [출처: 김해시]
◇한글 심리전 삐라, ‘선조국문유서’
백성에게 이르는 글이다.
임금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포로가 되어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왜적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안다. 또 나라에서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탈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제 그런 걱정을 하지 말거라. 탈출해서 나오면 너희에게 죄를 주지 않겠다. 왜적을 잡아 나오거나, 왜적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나, 포로가 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오거나 공이 있으면 양민과 천민을 막론하고 벼슬도 시킬 것이다. 그러니 빨리 왜적 진영에서 나와라.
이 뜻을 각 처의 장수에게도 다 알렸으니 의심하지 말고 모두 나와라. 너희들은 어버이나 처자도 있을 것 아니냐?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와 살면 좋지 않겠느냐? 지금 나오지 않으면 향후 왜적에게 죽을지 모른다. 나라에서 왜적을 평정한 후 너희에게 벌을 내린들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또한 명나라와 우리 군사가 힘을 합하여 부산, 동래의 왜적 뿐 아니라 왜국에까지 건너가 다 토벌할 것이다. 그 때면 너희도 휩쓸려 함께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널리 알려 빨리 나오도록 하라.”
만력 21년(1593년) 구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번역을 기초로 필자가 쉽게 고침]
임진왜란 당시 경상초유사(招諭使)로 활동하던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임금에게 백성들이 왜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선조는 일반 백성 누구나 읽기 쉽도록 한글로 유서(諭書)를 썼다.
어쩔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까지 내리겠다는 약속이 실려있다. //

임진왜란 경과 일지.

임진왜란과 관련된 각종 통계. 왜적에게 잡힌 조선인 포로는 약 1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권태돈 회장이 어서각 앞에서 유서를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해한글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선조국문유서 영인본. 진본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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