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을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이 포스트의 맨아래 목차가 있음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3382483929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3386237245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3387573582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Ⅳ https://blog.naver.com/ohyh45/223389148282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Ⅴ https://blog.naver.com/ohyh45/223559080861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Ⅵ https://blog.naver.com/ohyh45/223691480270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Ⅶ https://blog.naver.com/ohyh45/223772236207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Ⅷ https://blog.naver.com/ohyh45/223915368700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Ⅸ https://blog.naver.com/ohyh45/224026135695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Ⅹ https://blog.naver.com/ohyh45/224141972172
37.소현세자 아들 삼 형제의 슬픈 삶 - 볼모·유배·요절로 얼룩진 잔혹한 궁중 비극
인조 14년 3월 원손(元孫)이 탄생했다. 원손(元孫)이란 아직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지 않은 왕세자의 맏아들을 가리킨다. 아버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어머니 강빈(姜嬪)이 비교적 늦은 나이인 20대 중반에 얻은 첫아들인 만큼 나라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왕은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산실청 전·현직 도제조들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고 그 외 힘쓴 여러 대신에게도 물건을 하사하고 자급을 높여 주었다. (『인조실록』 1636년 4월 2일)
원손(元孫)의 탄생을 경축하는 별시를 열어 문무(文武) 각 600명을 뽑았다.(『승정원일기』 1636년 10월 26일)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생후 9개월 된 원손(元孫)은 어머니 강빈(姜嬪)의 품에 안겨 강화도 피난길에 오른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군의 추적을 피해 원손(元孫)은 탈출하였다.
세자 부부가 청의 볼모로 잡혀갈 때도 그는 조선에 남겨졌다. 세자(世子)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원손(元孫)은 종묘사직의 안정과 조부 인조의 왕권을 지탱하는 존재로 상징되었다.
귀성하는 아버지 소현의 대체 인질 - 다섯 살 먹은 첫째 이석철, 심양 억류
역적 누명 어머니 사사 후 제주 유배 - 첫째와 둘째, 열셋·아홉 나이에 숨져
셋째 석견, 살아돌아와 방면됐지만 - 22세 별세 때 장례 못 치를 만큼 궁핍
첫째 북행 때 반대 상소 들끓어

소현세자가 묻힌 소경원 전경.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청에 억류된 8년 동안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두 차례 귀성길에 오르는데, 그때마다 청에서는 세자(世子)를 대체할 존재로 원손을 요구했다. 원손(元孫)이 심양(瀋陽)을 향해 출발했음을 확인한 후에 세자(世子)를 조선으로 출발시키는 것이다.
원손(元孫)의 북행(北行)은 국본(國本)을 흔드는 사건으로 온 나라를 비탄에 빠뜨렸다.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아이지만 종묘사직을 보존할 차차기(어쩌면 차기) 국왕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조정은 원손(元孫)의 북행을 반대하는 상소로 들끓었다.
즉 시골 농부도 나이 어린 자식을 보전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도모하는 법인데, 일국의 왕이 되어 다섯 살 난 원손(元孫)을 보전하지 못하고 이국(異國)으로 보내는 것은 부모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인조실록』 18년 2월 13일)
청의 요구와 국내의 여론, 그 사이를 조율하느라 그랬는지 원손(元孫)의 북행은 가는 곳마다 지체되며 한 달 거리 심양(瀋陽)을 거의 넉 달이 걸려 도착했다. 돌이 되기 전에 헤어져 3년 만에 비로소 모자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원손(元孫)은 심양(瀋陽)관소에서 두 달 남짓 머물다 귀국한다.
이로부터 3년, 세자(世子)의 두 번째 귀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강빈(姜嬪)도 동행했다. 국경 지역인 봉황성에서 원손(元孫) 이석철(李石鐵)과 제손(원손 외의 왕손을 가리킴) 이석린이 귀성하는 부모를 만나는데, 원손의 나이 8살, 제손의 나이 4살이었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둘째 아들 이석린(李石麟) 은 심양에서 태어나 본국으로 보내져 양육된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은 심양(瀋陽) 관소를 출발, 보름만인 1644년 1월 1일 봉황성에 도착하였다.
“원손(元孫)과 제손을 부둥켜안고 차마 서로 손을 놓지 못하니, 곁에 있던 일행이 목이 메지 않은 자가 없었고 청나라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인조실록』 22년 1월 6일)
원손(元孫)은 심양관에서 반년 남짓 머물다 1644년 8월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손은 훗날 왕위를 계승할 자로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되는데, 원손 보양관(輔養官)이 이식(李植), 김육(金堉), 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최고 학자로 꾸려졌다.
이듬해 2월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 부부가 영구 귀국했다. 그리고 아버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귀국 2개월 만에 급서하는 비운을 겪는다. 향년 34세의 세자(昭顯世子)는 원손(元孫)을 비롯해 3남 3녀의 자녀를 남겨놓았다.
(『인조실록』 1645년 4월 26일)
세자(世子)가 서거한 지 한 달 후 조정 대신들은 차기 왕위 계승자인 원손(元孫)의 세손(世孫) 책봉을 서두른다. 그들에 의하면 소현(昭顯世子)의 장남 이석철(李石鐵)은 옥 같은 자질이 이미 드러났고 학문을 탐구한 지도 얼추 3년이나 되었으니 자격은 충분했다.
그런데 국왕 인조는 이유 없이 화를 냈고, 또 한 달 후에는 원손(元孫)은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한다.(『인조실록』 1645년 윤6월 2일) 놀란 대신들은 왕위 계승이 상도(常道)를 이탈할 경우 난(亂)의 복병이 될 수 있다며 강하게 대응하지만, 왕은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차기 대권을 봉림대군에게 넘겨 주겠노라 선언한다.
원손의 자격 박탈은 강빈(姜嬪)과 그 자녀들의 불운을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소현(昭顯世子) 아내 강빈(姜嬪) 누명의 배후

경기도 광명에 있는 소현세자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묘. [사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과연 이듬해 어머니 강빈(姜嬪)은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었다.(1646년 3월 15일)
원손 이석철(元孫 李石鐵)의 6남매는 아버지·어머니를 잃은 것은 물론 자신들의 편이 되어 줄 외숙들마저 모조리 제거되었다. 말 그대로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조부 인조의 이러한 행위를 일각에서는 차기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 행위로 애써 보기도 하지만, 임금의 총희 후궁 조씨가 배후임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결국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이석철(李石鐵)·이석린(李石麟) ·이석견(李石堅)의 제주 유배령이 떨어졌다.(1647년 5월 13일)
나이는 각각 12세, 8세, 4세였다. 왕손들의 유배를 사관(史官)은 이렇게 기록했다.
“비록 국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작은 아이들이 무슨 아는 게 있겠나. 그들을 독한 안개와 뜨거운 장기(瘴氣)가 나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변고를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인조실록』 1647년 8월 1일)
국법에 의한 연좌란 어머니 강빈(姜嬪)의 역적죄와 연계된 것이다. 강빈(姜嬪)의 옥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었음이 그녀 사후 7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식화되었다.

유배지 제주에서 사망한 경선군과 경완군 형제의 묘. [사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서삼릉 안에 있다. 경선군은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 경완군은 둘째 아들이었다.
제주로 간 소현(昭顯世子)의 장남 이석철(李石鐵 : 1636~1648)은 유배 1년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같은 해 12월에 둘째 아들 이석린(李石麟 : 1640~1648)도 숨졌다. 왕은 이들을 돌보던 나인 옥진과 애영, 이생을 잡아다 엄히 국문하게 했다.
옥진은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 탓이지 보양(保養)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라고 했지만 형신을 받고 죽었다.(『인조실록』 1648년 12월 23일)
형들과 함께 유배지에 떨어진 네 살의 이석견(李石堅)은 살아남았다. 숙부인 효종은 이석철(李石鐵)을 경선군(慶善君)으로, 이석린(李石麟)을 경완군(慶完君)으로 봉했는데, 그들이 죽은 지 11년 만의 일이다.
한편 경안군에 봉해진 이석견(李石堅)은 제주도에서 강화도로 옮겼다가 유배 9년 만인 13살이 되어 방면되었다. 그리고 18살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허확의 딸과 혼인하여 임창군(臨昌君)과 임성군(臨城君)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임성군(臨城君)이 태어나던 해 경안군 이석견(慶安君 李石堅 : 1644~1665)은 22살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경안군(慶安君)의 두 아들에 대한 양육은 부인 허씨의 몫이 되었다.

경안군(위)· 임창군(중간) 묘역. 서삼릉 내
. 경안군묘는 분성군 부인 허씨와 합장묘다. [사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살아남긴 했지만 경안군(慶安君)의 가족들은 여러 이유로 위태한 삶을 이어갔다. 우선 경안군(慶安君)의 상사에 예(禮)를 제대로 갖출 수 있는 집이 없을 정도로 궁핍하여 임시 집을 마련해주도록 했다.(『현종실록』 1665년 11월 13일)
숙종 5년(1679)에는 이석견(慶安君)의 두 아들 임창군(臨昌君)과 임성군(臨城君)에게 종통(宗統)이 있다며 임금으로 추대한다는 흉서가 나왔다. 임창군(臨昌君) 형제는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대신들은 “비록 관여된 적은 없지만 이미 추대하는 데 들어 있으니, 서울 안에 둘 수는 없다”고 하고, 숙종은 “어리고 약한 두 사람은 알지도 못한 일이지만 종통이 따로 있다는 구실로 반역을 도모하는 무리를 척결하는 의미에서 두 형제의 유배를 결정한다.”(『숙종실록』 1679년 3월 16일)
배소는 제주로 정해졌다. 형제의 아버지 경안군(慶安君)이 32년 전 4살의 나이로 내려졌던 유배지다. 숙종은 형제의 어머니 허씨와 임창군(臨昌君 李焜)의 아내가 유배지에 함께 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점점 완화되어 1년 후에는 강화도로 옮겨지고 또 육지로 옮겨지며 임창군(臨昌君 李焜) 형제는 5년 만에 죄인의 굴레를 벗게 되었다.
되돌리고 싶은 흑역사
최근에 발견된 경안군(慶安君) 부인 허씨(1645~1722)의 기록 『건거지(巾車志)』에는 역모죄에 연루된 어린 두 아들을 지키려는 어머니로서의 비감이 곡진하게 그려져 있다.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일로 이 땅에 이르러 나로 하여금 이렇듯 가련한 거동을 뵈게 하는고.”
“생각하니 사태가 매우 급하여 오늘 밤을 면키 어려운지라. 어찌 아이들로 하여금 밥을 굶기리오. 밥을 먹으려 하되 차마 목을 넘기지 못하여 거짓 술을 뜨면 저희도 술을 뜨고 내 혹 술을 멈추면 저희도 술을 멈춘다.”
그녀는 소현세자(昭顯世子)파의 유일한 혈육인 두 아들을 끝까지 지키며 살겠노라, 다짐한다. 한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의 세 딸은 왕실의 배려로 모두 혼인을 하여 가족을 꾸렸고, 이른 나이에 죽은 큰딸 경숙군주(慶順郡主 李正溫)를 제외한 경녕(慶寧)과 경순(慶順)의 두 군주(郡主)는 평범하게 살다 간 것으로 나온다.
원손으로 태어나 12세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이석철(李石鐵)은 동생 이석견(李石堅)의 차남 임성군(臨城君)을 후사로 삼아 소현세자(昭顯世子)파의 계보가 이어졌다. 하지만 임성군(臨城君)도 후사가 없어 임창군(臨昌君)의 차남 밀남군(密南君)을 양자로 맞이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하지만 권력과 결탁한 무리들이 만든 어린 소년들의 비극적 삶은 되돌리고 싶은 조선 역사의 한 장르이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37.소현세자 아들 삼 형제의 슬픈 삶 - 볼모·유배·요절로 얼룩진 잔혹한 궁중 비극 / 중앙일보, 2025. 10. 17.
|
Q&A 소현세자昭顯世子) 아들 삼 형제의 슬픈 삶
- 볼모·유배·요절로 얼룩진 잔혹한 궁중 비극
Q.소현세자昭顯世子)의 맏아들인 원손 이석철(元孫 李石鐵)이 태어난 후, 그와 그의 가족에게 어떤 비극적인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나요?
A.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맏아들 이석철(李石鐵)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병자호란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이후 아버지 소현세자 부부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면서 이별을 겪었습니다.
○아버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는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설상가상
으로 어머니 강빈(姜嬪)마저 역모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고, 결국 이석철(李石鐵)은 두 동생과 함께
12살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1년여 만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둘째 동생 이석린
(李石麟)도 같은 해에 숨을 거두는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Q.원손이 청나라에 보내질 때 왜 조선 조정이 그토록 반대했나요? '국본(國本)'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A.조선 조정이 원손(元孫)의 북행(北行)을 격렬하게 반대한 이유는 그가 '국본(國本)', 즉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국본(國本)은 왕위를 이을 왕세자의 맏아들을 의미하며, 종묘사직의 안정과 미래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다섯 살도 안 된 어린 원손(元孫)을 다른 나라에 보내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상소문에는 '시골 농부도 어린 자식을 지키려 애쓰는데, 한 나라의 왕이 손자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비통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Q.소현세자(昭顯世子)가 사망한 후, 할아버지인 인조는 왜 맏손자인 원손(元孫) 대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후계자로 삼았나요? 이 결정의 배후에는 어떤 의심이 있었나요?
인조는 공식적으로 원손이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후계자 교체 이유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왕위 계승의 원칙을 어기면 큰 혼란이 올 수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인조가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결정을 강행했기 때문에, 이 결정의 배후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당시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씨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해 이 일에 개입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즉, 표면적인 이유와 달리 정치적 암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Q.소현세자(昭顯世子) 가문의 비극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되었으며, 이 사건이 조선 역사에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요?
A.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는 유배지에서 요절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셋째 아들 이석견(李石堅 : 慶安君)과 그의 아들들마저 역모에 휘말려 유배되는 등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대는 이어졌지만, 이는 양자를 통해 겨우 유지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 강빈(姜嬪)은
사후 70여 년 만에 누명을 벗고 공식적으로 복권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권력 다툼이 무고한 어린 생명
들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조선 역사의 '되돌리고 싶은 흑역사'로 기록되
었습니다.이는 정당한 계승 원칙이 무너졌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
니다.
|
38.서예 최고봉 이광사(李匡師)의 지극한 딸 사랑
- 유배지에서 일가 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이 늙은이에게 어린 딸이 있었으니, 목소리는 어찌 그리 맑고, 모습은 어찌 그리 예쁜지. 성품은 어찌 그리 총명하고, 재능은 어찌 그리 많은지. 남다른 재주를 지닌 이 아이를 아버지로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님이라도 방문하여 묶여있는 날이면 가슴이 답답했는데, 손님이 나서면 댓돌에 내려서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아이를 불렀다. 아이도 달려와 품에 안기니 오랜 이별 뒤의 상봉처럼 반가웠다. 밤낮으로 함께 놀며 풀잎에 손톱으로 무늬를 넣곤 비단이라며 장사 놀이도 하고, 맑은 모래는 구슬이라 하고 색종이는 오려서 옷을 만들었다. 나무 조각으로 집을 짓고, 솥과 냄비를 받치는 받침도 만들었다. 그릇은 밤송이 껍질로 만들고, 밥그릇은 조개껍데기를 썼다. 아이는 장난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하더니 배가 북처럼 부풀었다고 자랑을 하네.” (이광사, 『원교집(圓嶠集)』)
노론에 박해 받은 소론 명문가 출신 - 22년 유배 기간, 학문·예술에 몰두
유배지에서 병들고 아내까지 자결 - 딸에게 애끓는 편지 쓰며 고통 달래
첩의 딸도 차별 않고 서예 가르쳐 - 오빠 솜씨 능가했지만 작품 안 남아

70세(1774) 때 이광사의 초상(보물 제1486호).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이 그렸다. [사진 이숙인]
어린 딸과 소꿉놀이하던 때를 회상하는 이 아버지는 학문과 예술로 조선후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원교 이광사(李匡師 : 1705~1777)이다. 43세에 얻은 이 딸의 위로는 12살, 10살을 더 먹은 두 아들이 있었다. 관직에 있거나 교학(敎學)에 힘쓰거나 한창 일할 나이에 어린 딸과 노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이 한가한 선비는 어떤 사연이 있었나.
출세 포기하고 자기 공부 힘써
소론의 명문가 이광사(李匡師) 가문은 노론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로 정치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곧이어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역적으로 지목되어 고령의 나이에 옥사하는데, 이에 자질(子姪)들은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일제히 강화도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 몰입한다.
이들은 강화학파로 불리며 학문과 예술로 성취를 이룬 진(眞)과 광(匡) 항렬의 육진팔광(六眞八匡)의 인재를 배출했다. 출세를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이 시기 팔광의 한 사람 이광사(李匡師)는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백하 윤순(白下 尹淳)을 스승으로 삼아 양명학(陽明學)과 서예에 몰두했다. 생계는 아내 류씨(1713~1755)가 이것저것 돈벌이를 하여 이어갔다.
그는 이때의 일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하루는 이광사(李匡師)가 지방 수령으로 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아내가 편지를 읽어달라고 한다. 편지 속에 뭔가를 달라는 소리가 있자 아내는 언짢아하며 고쳐 다시 쓰도록 한다.
남편은 친구 사이에 예사로 있는 일이라고 하자 아내는 “당신이 시속의 예사 선비를 자처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라고 한다. 가난한 살림에도 아내 류씨는 “명분 없는 물건이나 불의한 재물은 한 터럭이라도 구차하게 취하지 않았다.”(‘망처유인문화류씨기실·亡妻孺人文化柳氏紀實’)
참고로 이 어머니의 두 아들은 나중에 탁월한 성취를 이루는데,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李肯翊 : 1736~
1806)과 예전체(隸篆體)의 대가 이영익(李令翊 : 1738~1781)이 그들이다.
부귀영화는 아니더라도 잔잔한 행복을 누리던 이들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불운이 닥쳤다. 이광사(李匡師)의 나이 51세, 노론 패권주의에 대항한 소론의 정치적 사건인 을해년(1755) 옥사가 터졌다.
나주괘서 사건(羅州掛書事件)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연루된 이광사(李匡師)의 형제 항렬 팔광이 모두 북쪽 혹은 남쪽의 극변 유배에 처해졌다. 이광사(李匡師)는 사실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주모자의 상자 안에서 그의 편지가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이광사(李匡師)는 최북단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는데, 친국을 당한 남편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아내 류씨가 자결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중 삼중의 고통에 처해있던 이광사(李匡師)는 차디찬 북변의 2월 그믐날,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는데 부모 없이 집에 남겨진 여덟살 어린 딸이 너무나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아들은 이미 혼인까지 했고 자신의 배소를 왕래하지만, 포승줄에 묶여 집을 떠난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이 어린 딸을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걸음마에서 소꿉놀이 하던 때, 공부에 몰입하던 어린 딸을 회상하며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아이는 책과 글을 좋아하여 종이와 벼루를 가지고 노는 데 부지런했다. 언문은 이미 능통했고, 해서(楷書)를 쓰는데 막힘이 없었다. 나는 이 딸을 세상에 바치어 내 삶의 계승자로 삼고자 했다. 장성한 날을 기다려 온 마음을 다해 좋은 짝을 고를 참이었다. 그러나 운명이 갑자기 크게 어그러졌으니,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 늙은 아버지는 북쪽 변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잠시 떨어지기도 어려웠던 아이를 두 해가 지나도록 보지 못했다. 이생에 다시 너를 볼 수 있다면 헤어진 뒤의 이야기를 다 해주리라.”(『원교집(圓嶠集)』)
딸은 아버지를 뵈러 가는 오라비 편에 말린 수박씨 한 봉지를 보내오고 아버지는 답장을 쓴다. “네가 이걸 고이 담아 보낼 적에 아비를 그리며 눈물 줄줄 흘렸겠지. 먹을 때마다 씨 모으느라 얼마나 마음 썼으며 아침이면 내어 말리느라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예전에 무릎 위에 널 앉히고 함께 먹었거늘, 오늘 이렇게 헤어져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답여아서과자·答女兒西瓜子’)
집을 떠날 때 여덟살이었던 딸이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이광사(李匡師)는 꼬박 7년을 최북단 부령에 머물렀다. 그토록 그리던 부녀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예 이론 체계화 ‘서결’ 저술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고지도. 왼쪽 아래 노란색 원 안이 신지도다. [사진 이숙인]
나라에서 유배지를 옮기라는 영이 내려왔다. 이광사(李匡師)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선비들에게 글씨를 가르친 것이 사달을 일으켰다. 최남단의 절해고도 신지도(薪智島)로 정해졌는데, 3000리 길이다. 아내를 잃은 이광사(李匡師)는 부령에서 첩을 얻었는데, 딸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
어미 없는 세 살배기 딸을 신지도로 데려가는데 이름을 주애(珠愛)라고 했다. 다시 시작된 유배 생활 15년, 모두 22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이광사(李匡師).
그는 신지도(薪智島)에서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한 『서결(書訣)』을 저술했고, 대흥사 대웅전의 현판 등 인근의 곳곳에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고독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을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어린 딸 주애(珠愛)와 함께 했다.

대흥사 대웅전 편액. 이광사의 글씨다. [사진 이숙인]

대흥사의 해탈문 편액. 역시 이광사 글씨. [사진 이숙인]
주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광사(李匡師) 글씨의 묘법을 전수받는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재주를 전해 받은 것은 주애다. (아들) 영익(令翊)은 그애만 같지 못하다.” 야담집을 낸 성대중(成大中)은 이광사(李匡師)의 문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썼다.
“이영익(李令翊)과 이주애(李珠愛)가 함께 쓴 서첩을 보았는데, 이주애(李珠愛)가 더 나았다.”(이종묵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또 주애(珠愛)와 동시대를 산 문인 유만주(兪晩柱 : 1755~1788)는 일기집 『흠영』에서 그녀를 언급한다. 즉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의 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글씨를 잘 썼지만 서출인 까닭에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한 이주애(李珠愛)는 섬을 떠나 상경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兪晩柱)는 이주애(李珠愛)의 이후 삶을 안타까워하며 신분과 성별이 질곡이 되는 조선사회의 문제가 천재 소녀의 재능을 좌절시킨 것으로 보았다.

이광사와 아들 이영익의 함께 그린 품 ‘이어도(鯉魚圖)’. ‘이어’는 잉어를 뜻한다. [사진 이숙인]
나이 스물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밑에서 필법을 전수하여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주애(李珠愛)에 관한 세간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광사(李匡師)의 공식 기록 『원교집(圓嶠集)』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늘 곁에서 모셨던 차남 영익이 신지도에서 ‘어린 누이동생과 장난하며 놀아서 부친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적어도 이광사(李匡師)라면 딸 주애에 대한 기록을 곳곳에 남겼을 법도 하다.
차남 영익과 나눈 서신 대화에서 ‘참을 인(忍)’으로 자신을 다스린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억지로 물을 막는 격인 ‘참는 것’보다 처한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마음공부’를 권한다. 지켜야 할 규범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따르기보다 내 마음의 주체가 되는 공부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규범에 충실한 유학자이기보다 만물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마음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견고한 예법에 의한 적서(嫡庶) 구분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겠다. 딸 주애(珠愛)가 아버지의 공식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은 대가의 명예에 흠이 될 자료를 버리는, 문집 편집의 보편적 관행 때문이 아닐까.
70평생 은둔과 유배
초년부터 체제로의 진출이 아예 막혀 70평생을 은둔과 유배로 보낸 이광사(李匡師). 일견 불우해 보이지만 조선 서예의 최고봉을 이룬 그 내밀한 에너지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는 두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편지로 독려하거나 직접 가르치거나, 세상이 알아주는 인물이 되기를 기대한 아버지로 기억된다. 두 딸의 재능이 남긴 족적이 있을법도 한데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38.서예 최고봉 이광사(李匡師)의 지극한 딸 사랑 - 유배지에서 일가 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 중앙일보, 2025. 11. 14.
|
Q&A 서예 최고봉 이광사(李匡師)의 지극한 딸 사랑
- 유배지에서 일가 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Q.조선 후기 학자이자 예술가인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A.원교 이광사(李匡師 : 1705~1777)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소론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가문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관직을 포기하
고 강화도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51세 되던 해인 1755년, '나주괘서 사건'에 연루되
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겪었고, 이후 유배지가 최남단 신지도로 옮겨져 총 22
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그는 조선 서예의 최고봉으
로 평가받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Q.이광사(李匡師)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의 아내 류씨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A.‘위기지학(爲己之學)’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를 뜻합니다.
○이광사(李匡師) 가문은 정치적 사건으로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자손들이 모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
기했습니다. 이 덕분에 오히려 출세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과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이 주어졌고, 이것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의 아내 류씨는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남편이 친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편지를 쓰자
“당신이 시속의 예사 선비를 자처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라고 말하며 이를 막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는 명분 없는 재물은 절대 구차하게 취하지 않는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Q,이광사(李匡師)의 두 딸에 대한 기록은 어떻게 다른가요? 특히 둘째 딸 주애(珠愛)의 재능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나요?
A.이광사(李匡師)의 두 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째 딸은 이광사의 공식 문집인 『원교집』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 소꿉놀이하던 때를 회상하는 등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반면, 유배지에서 얻은 둘째 딸 주애(珠愛)는 공식 기록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의 기록에는 주애(珠愛)의 뛰어난 재능이 언급됩니다. 이광사(李匡師) 스스로 “내 재주를 전해
받은 것은 주애 다”라고 말했으며, 문인 성대중은 “이광사(李匡師)의 아들 이영익과 딸 이주애(李珠
愛)가 함께 쓴 서첩을 보니, 이주애(李珠愛)가 더 나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다른 문인 유만주는 주애(李珠愛)가 서출(庶出)이라는 신분과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공식 기록
에 남지 못 했다며, 조선 사회의 한계가 천재 소녀의 재능을 좌절시켰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Q.70평생을 은둔과 유배로 보낸 이광사(李匡師)의 삶에서 알 수 있는 핵심은 무엇이며, 그의 딸들에 대한 기록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A.이광사(李匡師)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는 핵심은 그가 정치적 좌절과 개인적 비극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를 예술로 승화시켜 조선 서예의 최고봉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규범에 얽매이기보다 '마음의 주인'이 되는 공부를 중시했으며, 이러한 철학은 그의 예술 세계에
깊이를 더했습니다. 한편, 그의 딸들에 대한 기록은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시사합니다. 이광사(李匡師)
는 두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하는 아버지였지만, 결국 그녀들의 재능이 남긴 족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특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둘째 딸 주애(珠愛)가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대가의 명예를 위해 문
집을 편집하는 관행과 더불어 신분과 성별의 한계가 뚜렷했던 조선 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이는 재능 있는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라져야 했던 아쉬움
을 남깁니다.
|
39.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
- 정쟁 와중에 손자 위태롭자 희대의 ‘시체 바꿔치기’
종의 자식을 손자 대신 백마강에 빠져 죽게 한 지 3년이 흘렀다.
“신의 손자 봉상이 명을 어기고 도망했는데, 미처 죄를 자수하지 못하고 있던 차 지아비의 아우 익명이 알려오기를 성상께옵서 죄를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벼슬까지 주셨다 하옵니다. 이제 봉상이 재생을 얻었으니 천지의 어짊과 하해(河海)의 큼으로도 그 은혜에 견줄 수 없겠나이다.”(‘김씨 상언’)
할아버지 이이명 사약 받고 죽자 - 고모 이씨, 조카 대신 죽도록 종 설득
할머니 김씨는 왕에게 두 차례 상언 - 구사일생 손자 종상은 평생 은둔
남성들의 당쟁에 여성들도 휘말려 - 명분 내세웠지만 목표는 권력 쟁취
할머니 김씨, 김만중의 딸

이이명의 아내 김씨가 영조에게 보낸 상언(한글 상소 글). [사진 한글박물관]
손자 이봉상(李鳳祥) 의 죄를 용서하고 참봉 벼슬까지 준 임금에게 상언(上言)으로 저간의 사연을 호소한 김씨는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의 딸이자 노론 4대신의 한 사람 이이명(李頤命·1658~1722)의 아내다. 김씨는 손자와 함께 대궐 앞에 나아가 준비된 상언을 올리며 석고대죄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죗값을 받겠다는 취지다.
즉 임금이 용서를 한 사건이지만 법을 어긴 자는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여성이나 하층민이 사적인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었던 상언은 언문으로 작성되는데, 공적인 주장을 담은 한문 상소(上訴)와 구분되었다. 그러면 김씨는 손자 봉상을 통해 무슨 죄를 지었나. 이어지는 김씨의 상언을 따라가 보자.
“망부(亡夫)는 한 아들 기지(器之)를 두었습니다. 이기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맹인으로 폐인이 되었고 봉상(鳳祥) 만이 후사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화란이 일어나던 날 봉상(鳳祥) 은 겨우 16세였는데, 왕부(王府)에서 수노적산(收孥籍産·가족을 노비로 만들고 가산을 몰수)한다는 조처가 내려왔습니다. 신이 어떻게 일신(一身)에 닥칠 죽음을 두려워하여 양대를 지나 하나 남은 핏줄을 보존시키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이이명(李頤命 : 1658~1722) 초상. [사진 이숙인]
김씨의 상언은 신임옥사(경종 1년과 2년)를 배경으로 한다. 숙종 말에 이르면 세자(경종) 편에 선 소론과 연잉군(영조) 편에 선 노론이 왕위계승권을 놓고 대립하는데, 결국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이 즉위하였다. 새 왕이 즉위하자 노론은 다시 세제(世弟) 책봉과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며 정국을 흔들었고, 소론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옥사를 일으킨다.
여기서 김씨의 남편 이이명(李頤命)과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조태채(趙泰采)의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사사되고, 이이명(李頤命)의 아들과 조카, 김창집(金昌集)의 아들과 손자 등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
당시 국청에서 처단된 자가 50여 명에 이르는 등 유배를 당하거나 이 사건에 협조한 죄로 처벌받은 사람의 수는 200여 명에 달했다.
일시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난 가운데 칠순을 바라보는 김씨는 더 근원적인 문제와 마주한다. 이대로 집안의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가문을 이을 핏줄로 손자 하나 남았는데, 관노로 끌려가면 목숨을 기약할 수가 없다.
“한 자식을 보전치 못하였는데, 하늘이 차마 이 손자마저 죽이리오. 저가 한갓 죽기를 아껴 이 일로 골육을 보전치 못한 즉 죽어 망부를 보지 못할지라. 하여 자부를 보고 이르되 이 아이 이 땅을 떠나게 하여 살기를 도모한 즉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럴 즈음 마침 집의 종이 나이며 얼굴이 봉상과 방불한지라 문 아래 강이 있어 죽을 뜻으로 말하니, 종이 강개하여 사양치 아니하고 강에 빠져 죽으니 이것은 자못 하늘이 시키신 바온지라. 이 밤에 일어난 일을 아비 무덤가에 있던 봉상에게 가만히 기별하여 심산궁곡으로 돌아가게 하였나이다.”(김씨 상언)
손자 닮은 어린 종 3일간 설득

이이명(李頤命) 아내 김씨의 부친은 『구운몽』을 쓴 김만중이었다. 김만중(1685~1686) 초상화.
김씨 상언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종을 대신 죽게 한 계책은 김씨의 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이명(李頤命)과 김씨는 1남 5녀를 두었는데, 그 넷째 딸이 김창업의 며느리이자 김신겸의 아내 이씨 (1692~1724)다.
옥사 당시 오빠 이기지(李器之)가 가장 먼저 체포되는데, 이씨는 바로 친정으로 달려가 모친과 오빠의 처자식을 보호하고 홀로 본가로 가서 문적(文籍)을 수습하였다.
또 의금부 도사가 조카 봉상(鳳祥) 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봉상(鳳祥) 을 닮은 어린 종을 3일 동안 설득하여 대신 죽을 허락을 받아 내었다. 관아에서 주검을 검안(檢案)할 때에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딸 이씨의 힘이었다. (‘완산이씨묘지명’)
한편 도망간 이후 종적을 감춰 생사 마저 알 수 없었던 이봉상(李鳳祥) 이 영조가 즉위하자 조모 김씨의 귀양지 부안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무주에 숨어 살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청풍 부사로 있는 시동생 이익명(李益命)에게 이봉상(李鳳祥) 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후의 일을 상의한다.
형의 손자 봉상(鳳祥) 이 죽은 줄 알았던 이익명(李益命)은 형수의 전갈을 받고 바로 상소하여 이봉상(李鳳祥)을 찾아 임금 앞에 자현(自現)케 할 것을 아뢴다. 임금은 이봉상(李鳳祥) 이 도망했던 죄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벼슬을 내린다. 자신을 지지했던 영의정 이이명(李頤命)의 손자라는 사실이 작용한 것이다.
임금은 김씨의 상언에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라고 한다. 도망할 때 16세이던 이봉상(李鳳祥)은 19세가 되어 있었다. 왕은 봉상(鳳祥) 대신으로 죽은 가동(家僮)에 주목했다.
“종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도 드문 일이다. 전례를 상고하여 포상하도록 하라.”(영조 1년 5월 9일)
‘이봉상(李鳳祥) 도망 사건’을 일으켜 완산 이씨 이이명(李頤命)의 가문을 지킨 사람들은 집안의 여자들이었다. 상언의 주인공 광산김씨 부인과 자부 하동정씨, 손부 안동김씨, 김씨의 딸 완산이씨가 그들이다.
노론의 최고 명문가에서 차출된 여성들이다. 이 여인 3대는 편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종손을 지켜내었다. 그들은 영조 즉위와 함께 이이명(李頤命)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부안의 귀양살이 3년 만에 부여로 귀환한다. 게다가 손자 이봉상(李鳳祥) 이 제대로 살아났으니 축배를 들 일만 남았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할머니 김씨의 상언 글 실물 발굴돼

이이명의 손자 이봉상의 처 온양정씨의 정려각과 이봉상을 대신하여 죽은 충노의 비각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에 있다. 이봉상의 첫 부인은 김창집 손녀로 43세에 죽고 재취 부인인 온양정씨는 이봉상이 죽자 따라 죽어 열녀로 정려되었다. [사진 이숙인]
조모 김씨의 상언이 있고 난 2년 후 이봉상(李鳳祥) 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된다. 봉상(鳳祥)이 법을 피해 도망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더구나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시체를 바꿔치기 한, 전대에 없던 요악(妖惡)한 짓에 도리어 은전이라니 나랏법을 침범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영조 3년 9월 12일)
게다가 시동생 이익명(李益命)은 봉상(鳳祥)의 일을 사주한 자로 지목되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에 김씨는 다시 붓을 든다. 1727년에 작성되는 2차 상언이다. 두 차례의 상언은 ‘봉상(鳳祥)의 도망 사건’이라는 같은 사안에 근거하지만 2차는 손자와 시동생의 처벌을 막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김씨는 손자 이봉상(李鳳祥) 을 도주시킨 것은 자신이며 시동생 이익명(李益命)은 모르는 일이니 죄과는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김씨의 2차 상언과 1차 상언의 실물이 최근에 차례로 발굴되면서 학계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내에 고모까지 사생결단으로 지키고자 했던 종손 이봉상(李鳳祥). 할머니 김씨의 간곡한 상언에도 불구하고 23세의 그는 진도 귀양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6년을 보내고 이리저리 배소를 옮겨 다니다 유배 12년 만에 완전히 풀려난다.
그의 나이 34세, 고향 부여로 돌아온 이봉상(李鳳祥 : 1707~1772)은 일체의 벼슬과 영예를 물리치고 66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은거로 일관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자신의 삶에 가해진 일들이 어이없게 느껴질 법도 하다.
멸족의 위기에 처한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여인 3대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도대체 당쟁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론과 노론이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자당(自黨)의 세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각 당이 국왕을 선택하여 정권을 획득하고 당인(黨人)으로서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김씨의 남편 이이명(李頤命)만 하더라도 한편으로 4대신으로 추앙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4흉(兇)으로 평가되었다.
집안과 학맥으로 연결된 당파적 싸움에서는 여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의 자식을 바꿔치기하면서까지 내 혈손을 지키고자 한 여자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엄동설한보다 더 시린 아픔을 느낀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39.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 - 정쟁 와중에 손자 위태롭자 희대의 ‘시체 바꿔치기’ / 중앙일보, 2025. 12. 12.
|
Q &A 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
- 정쟁 와중에 손자 위태롭자 희대의 ‘시체 바꿔치기’
Q.조선시대에 한 할머니가 멸문 위기에 처한 가문을 구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나요?
A.조선 후기, 노론 4대신 중 한 명인 이이명(李頤命)의 아내 김씨는 '신임옥사'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가문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녀는 유일한 후계자인 손자 이봉상(李鳳祥) 이 노비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자와 닮은 집안의 종을 설득하여 대신 강물에 빠져 죽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손자의 죽음을 위장하고 멀리 도망치게 하여 가문의 대를 잇고자 했습니다. 3년 후, 정치 상황이 바뀌자 김씨는 임금에게 이 모든 사실을 고하며 손자의 사면을 요청했습니다.
Q.이 사건의 배경이 된 '신임옥사'는 무엇이며, 왜 손자를 도망시켜야만 했나요?
A.신임옥사는 경종 임금 시절,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이라는 두 정치 세력이 격렬하게 대립하다 벌어진 정치 탄압 사건입니다.
○당시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이 권력을 잡으면서,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지지했던 노론 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했습니다. 이때 김씨의 남편 이이명(李頤命)을 포함한 노론의 핵심 인물들이 사형당하고 그 가족들까지 '수노적산(收孥籍産)'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가족을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는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에, 김씨는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손자 이봉상(李鳳祥) 마저 노비가 되어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해 그를 도망시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Q.손자를 살리기 위한 할머니의 계획이 알려진 후, 주변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A.이 사건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렸습니다. 먼저, 영조 임금은 자신을 지지했던 이이명(李頤命)의 손자라는 점을 고려하여 이봉상(李鳳祥) 의 도망죄를 용서하고 작은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또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며 상을 내리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2년 뒤, 여론은 싸늘하게 돌아섰습니다. 사람들은 시체를 바꿔치기하여 나라의 법을 속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흉악한 죄라며 이봉상(李鳳祥) 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이 계획을 도운 것으로 의심받은 김씨의 시동생 이익명(李益命)까지 탄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김씨는 손자와 시동생을 구하기 위해 모든 죄는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며 다시 한번 상언을 올려야 했습니다.
Q.이 사건의 최종 결과는 어떠했으며,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어떤 모습을 엿볼 수 있나요?
A.결론적으로 할머니 김씨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봉상(李鳳祥) 은 23세의 나이에 진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12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풀려났지만, 평생 벼슬을 거부하고 조용히 은거하며 살았습니다.
○이 사건은 당파 싸움이 개인과 한 가문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신념의 대립을 넘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음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멸족의 위기 속에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가문의 대를 지키려 했던 여성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주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39-1. 노비가 대신 죽어 살아남은 조선의 선비 이봉상(李鳳祥)
-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옥실마을 입구에 있는 비각에 숨은 사연

▲두칸짜리가 정려각, 옆에 한칸 짜리는 비각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입구에 있는 정려각과 비각. 정려각에는 충신 일암선생과 열녀 온양 정씨의 정려가 모셔져 있고 비각에는 전주 이씨 집안의 충노를 기리는 비가 있다. ⓒ 오창경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옥실 마을 입구에는 두 채의 비각이 있다. 시골 마을에는 이런 문화재로 짐작이 되는 오래된 비각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각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안내문조차 없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자료를 찾는 수고를 해야 알 수가 있다. 그 비각의 주인공의 행적이 남달랐기에 비석까지 만들어 기리고 있다고 하지만 세월이 흘러 후세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항상 지나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그 비각의 주인공이 궁금해서 그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설천 선생 충노비 앞에는 매년 제사를 지내주는지 제단이 마련되어있다.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은 주인을 대신해서 죽은 노비를 위해 비석을 마련해주는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
정확한 명칭은 한 채는 정려각(旌閭閣)이고 다른 한 채는 비각(碑閣)이라 한다. 이 두 채에는 조선 시대 한 집 안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겪어냈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있었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국가에서 내린 포상으로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거나 포상 내용을 현판에 써서 작은 집을 만들어서 걸어두는 것을 말한다. 그 정려각 안에는 충신 이기지(李器之 : 카스텔라 만들기를 처음 시도했던 조선의 선비)와 그 며느리 온양 정씨의 정려 현판이 모셔져 있다.
일암 이기지(李器之) 선생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 쓴 기사 '조선의 선비 카스텔라 맛에 반하다 http://omn.kr/1ming'에 자세하게 소개했다. 일암 선생이 살았던 조선은 숙종과 경종, 영조로 이어지던 시대였다. 역사를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세 임금의 시대만큼은 TV 사극과 영화 등으로 빈번하게 드라마화 되었기에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장희빈과 사도세자,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등이 그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들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희비극의 역사 뒤에는 당파 싸움이 있었다. 조선의 역사는 상대가 전멸해야 끝이 나는 제로섬 게임 같은 당파 싸움의 역사였다. 영화 <사도>(2014년 감독 이 준익)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희빈과 사도세자는 왕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지방의 선비들이나 한 가문이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던 스토리는 마을의 비석이나 정려 속에 갇혀 있다.
북경에서 선진 문물을 접하고 꿈에 부풀어서 돌아왔던 일암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휘말리게 된다. 노론에 속했던 일암의 부친 이이명은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이명은 사약을 받게 되고 일암도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면서 당시 부여의 명문 가였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 백강 이 경여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당시 임금이었던 경종이 소론의 상소를 받아들여 연잉군, 후에 영조임금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을 견제한 결과가 신임사화였다.
이쯤이면 드라마 공화국이라고 일컫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손에 땀을 쥐는 드라마 한 편 정도는 그려질 것이다. 순식간에 역적의 집 안으로 몰려 대가 끊기게 된 위기 속에서 이씨 집안 여인네들 이이명의 처와 며느리는 한 가지 묘안을 짜낸다. 감옥에서 요절한 일암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이봉상과 집안 노비의 아들을 바꿔치자는 계획을 세운다.

▲설천 이 봉상을 대신해서 죽었던 노비를 기리는 충노비
이름도 없이 주인을 대신해서 죽었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의 충직한 노비의 비석. 매년 제사를 지내주는지 비각 앞에는 제단도 마련되어 있다. ⓒ 오창경
이봉상과 동갑내기로 친형제처럼 자랐던 노비의 아들은 주인의 청을 뿌리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씨 집안에서 대대로 노비의 DNA를 타고 났던 그는 주인의 말을 거역하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이씨 집안 여인들이 시키는 대로 이봉상의 옷을 입고 백마강으로 뛰어가 투신하게 된다.
역적의 아들이 된 이봉상을 잡으러 왔던 포졸들이 시신을 건져내어 보니 인상착의가 이봉상과 다름이 없어 '역적의 아들 자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지어 버렸다. 이 씨 집안 여인네들은 노비의 아들을 이봉상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른다.
부여에서 노비의 아들이 죽음으로 시간을 끄는 동안 이봉상은 전라도 무주로 무사히 피신을 해서 죽은 듯 숨어 살았다.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 임금의 시대는 짧았다. 영조 임금의 시대가 되자 부여의 백강 가문에도 역전의 기회가 온다. 신임사화의 희생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권이 시작되자, 이이명의 부인 김씨(서포 김 만중의 딸)는 무주에서 숨어 살던 이봉상을 데려와 영조 임금을 찾아가 그 간의 자초지종을 아뢴다.
하지만 1722년 신임사화의 희생양이었던 부여의 백강 가문의 이이명과 이기지, 이봉상으로 이어지는 3대의 수난은 다시 노론, 소론 간의 당파 싸움 속에 쉽게 복권되지 못한다.
1740년에서야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매듭을 짓게 된다. 이이명에게는 충문의 시호가 내렸고 일암 이기지도 충신의 정려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의 스토리에서 보면 이봉상의 아내 온양 정씨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죽음을 바꿔치기를 했던 공(?)을 치하해 정려 현판이 하사된 것처럼 보인다.

▲열녀 온양 정씨의 열녀 행실을 기록해 놓은 현판
조선 시대의 글인 한자로 되어 있어서 현대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전주이씨 밀성군파 가문에서는 이런 훌륭한 가문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궁금증을 해소를 위해서라도 한글로 쓴 간판을 써서 세워줬으면 좋겠다. ⓒ 오창경
부여의 향토사학자인 이진현님께 자문을 구해보니, 이봉상의 아내 온양 정씨가 받은 정려 현판은 남편 이봉상이 수명을 다해 죽자 보름 동안 곡기를 끓다가 따라서 죽었던 실화에 대한 정려였다.
이봉상을 바꿔치기해서 살려냈던 이는 이봉상의 첫 부인이었던 김씨였는데 일찍 세상을 하직해서 재가했던 부인이 온양 정씨였다.
노비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이봉상은 어린 나이에 겪은 시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부여에서 선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봉상의 현손 이용은이 이런 가문의 아픈 역사의 중심 인물이었던 노비를 가문의 차원에서나마 비석으로 새겨 조상들의 정려각 옆에 나란히 세워놓은 것이었다.

▲이봉상의 재가를 해서 얻은 온양 정씨를 기리는 비석
온양 정씨는 이 봉상의 첫부인 김씨가 일찍 세상을 하직한 후에 재가한 부인으로 이 봉상이 수명을 다하자 보름동안 곡기를 끊다가 남편을 따라 세상을 하직했기에 열녀의 정려가 내려졌다. ⓒ 오창경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멸문할 뻔 했던 한 가문을 대신해 죽음을 택한 이봉상의 노비는 '충노'라고 불리게 된다. 그 노비는 죽어서도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이봉상의 호를 써서 '설천선생충노기적비'로 남겨져 있다. 전국에 이런 역사적 스토리가 있는 충노비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 오창경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노비가 대신 죽어 살아남은 조선의 선비 이봉상(李鳳祥) / 오마이뉴스, 2020. 3. 9.
40.235년 만에 역적에서 복권된 성삼문
- “난세 다음엔 치세 온다”, 역사의 정도 믿었던 만고충신
“1672년 4월, 인왕산의 무너진 벼랑 돌무더기 사이에서 도자기 하나가 나왔다. 열어 보니 세 사람의 신주(神主)가 들어 있었는데, 성삼문과 그의 외손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성근보집(成謹甫集)』)
서리 엄의룡의 보고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간 관리와 유생들은 ‘성삼문년무술생(成三問年戊戌生)’ 일곱 자가 박힌 신주에 숙연한 심신으로 예를 올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추념(追念)일 뿐이다.
외손 박호와 함께 인왕산 기슭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 1418년생 성삼문은 죽은 지 216년이 흘렀지만 난신(亂臣)의 이름을 떼지 못한, 아직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삼문의 신주는 그가 태어난 홍주(현재의 홍성) 노은동(魯隱洞)의 옛집에 봉안되었다. 한양에서 홍주까지, 성삼문의 신주를 모신 발인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옛 충신을 기리는 마음들이 모여들었다.
세조가 성삼문을 일러 “지금은 난신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고 한 말이 사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난신에서 충신으로 갈아타기는 인왕산 신주 사건이 일어나고도 19년이 더 걸렸다. 숙종 17년(1691), 병자년의 참화가 일어난 지 235년 만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멸족 형벌 알면서도 단종 복위 주도 - 세조조차 “나중에 충신될 것” 예언
“마음이 정치의 근본, 법은 도구 불과” - 자식뻘 단종 즉위하자 늘 안위 걱정
아내·딸·제수·며느리 모두 노비 신세 - 가까스로 신주 발견된 후 복권 논의

성삼문 초상.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사지 찢어 처형한 후 효시
우리 가운데 성삼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충신열사의 이미지에 그 어떤 죽음보다 참혹하게 삶을 마감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단종 복위를 주도한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도륙을 당한 것이다.
“백관들을 군기감(軍器監) 앞길에 모아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성삼문 등을 거열(車裂·사지를 다섯 대의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벌)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거리에 효수(梟首)하였다.”(세조 2년 6월 8일)
아버지 성승(成勝)과 세 동생 성삼고·성삼빙·성삼성 그리고 성맹첨·성맹평·성맹종 등의 다섯 아들이 모조리 한날한시에 참화를 입은 것이다.
혁명이 실패할 경우 멸족의 형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겠으나 무엇이 성삼문을 이러한 길로 안내했는지, 전해오는 기록에는 그의 심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세조와의 싸움에서 성삼문은 완벽하게 졌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긴 자의 편이라지만 졌던 성삼문이 만고충신으로 되살아났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능한 그에 대한 기록을 모아 보는 수밖에 없다. 거사를 일으키기까지 그의 행적과 생각,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들의 행방을 통해 그의 삶과 죽음이 함축하는 의미를 반추해보려 한다.

충남 논산시 양촌리에 있는 성삼문의 묘. [사진 국가유산청]
성삼문은 홍주의 외가에서 도총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선전기 명문가로 일컬어지는데, 증조 성석용은 개국 공신으로 대사헌을 지냈고 조부 성달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냈다. 성달생은 딸이 공녀로 뽑혀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 되면서 황친(皇親)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자주 왕래한 인물이다.
부친 성승 또한 무과 급제로 관직에 진출하여 병마절도사와 의주 목사를 지냈고 성절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성삼문은 21세이던 1438년에 생원시에 하위지와 함께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는데, 집현전 학사에 뽑혀 세종의 어문정책에 깊이 관여하였다.
세종은 중국의 명사(名士)가 요동에 유배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보내 한어(漢語·중국어)를 배우게 하는데, 특히 성삼문은 요동을 13번이나 왕래하며 역학(譯學) 연구에 몰두했다.
한글 창제 최대 공신
조선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지정학적 특성상 중국어(한자)의 국어 표기가 중요한 학문 영역을 이루던 시대였다. 이에 성삼문을 비롯한 정인지·신숙주 등 세종이 총애하는 8명의 학자는 왕이 직접 뽑았다는 뜻의 친간명유(親揀名儒)라 불리며 훈민정음의 창제와 그 해례본 작성에 참여했다.
특히 성삼문은 중국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중국어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외국어 학습의 방법을 개발하는데,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이 그것이다. 그의 역학 연구는 중종조 최세진을 거쳐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성삼문은 충신이기 이전에 우리말 창제와 연구의 최대 공신이었다.
한편 성삼문은 1447년의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는데, 30세에 이르러 학자 관료로서의 탄탄한 길이 열린 셈이다. 성삼문의 역사의식이나 평소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드문 가운데, 그가 제출했던 과거 시험의 답안지도 중요한 정보원이 된다.
세종이 낸 시제(試題)는 팔준도(八駿圖) 즉 태조가 탔던 여덟 마리 준마의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그 대책에서 성삼문은 말한다.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 되고 법은 정치의 도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아니면 온갖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며, 이 마음이 아니면 모든 정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성근보선생집』) 또 말한다.
“모진 추위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있고, 격동하는 물굽이 아래는 반드시 깊은 못이 있나니, 치란(治亂)이 서로 잇대는 것은 고금이 동일합니다.”(‘팔준도명(八駿圖銘)’)
한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 세계는 끊임없이 교체되며 운동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충남 홍성에 있는 성삼문 유허지(사당 충문사).
유허지는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라는 뜻이다.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는 서원이 건립됐다. 입구 근처의 두 개의 비 가운데 하나는 유허비로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남은 하나는 노은서원 유허비.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있고, 왼쪽 언덕에 노은단이 있다. 1973년 12월 24일에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진 국가유산청]
약관의 나이에 집현전 학사로 참여하며 성군(聖君) 세종의 지도 편달로 몸집이 커진 근보(謹甫) 성삼문은 문과 급제 3년 만에 왕의 죽음을 맞게 된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은 문종이 37세로 보위에 오르자 왕의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직책으로 그 역할이 커졌다.
직집현전(直集賢殿)이라는 당상관으로 집현전의 운영과 학문 연구를 주관하던 성삼문은 국왕 자문과 세자 교육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국가 제도에 집현전의 관리는 20인(人)인데, 10인은 왕을 위한 경연에, 10인은 차기 왕 교육인 서연(書筵)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문종은 보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에 죽음을 맞게 되고 12세의 어린 임금 단종이 즉위하였다.
왕과 신하의 관계지만 성삼문은 자식뻘인 단종 이홍위(李弘暐·1441~1457)가 늘 염려되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왕은 성삼문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서적 간행을 빌미로 성삼문을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다.
이에 성삼문은 왕에게 상소하여 인사의 부당함을 알리고 철회를 요청한다. 즉 자신은 문장을 짓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배불리 먹고 안락한 삶을 즐기고 있는데, 잠시 수고한 것에 대해 직책까지 올리는 것은 공공성을 해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은총에 한갓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만을 알고 시비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안으로는 마음에 부끄럽고, 밖으로는 청의(淸議)를 더럽히는 일이니 공기(公器)를 중하게 하소서.”(단종 1년 4월 24일)

성삼문 유허비
성삼문 선생 유허지(成三問 先生 遺墟址)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복읍에 있는성삼문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그가 태어난 집터가 있는 곳으로 근처에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인 충문사가 있다
그런 가운데 왕의 숙부 수양대군은 권력에의 야망을 키워가고, 노련한 정치가 정인지와 한확을 혼맥으로 내 편을 만든다. 정인지의 아들을 사위로, 환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은 것이다.
이들은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자리를 꿰차고 불시에 부왕을 잃은 가련한 어린 왕을 들었다 놨다 한다. 가까스로 버티기를 만 3년,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넘기는데 1455년 윤 6월 11일의 일이다.
단종실록에는 직전 5일 동안 연달아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둡다(霧塞)”라고 기록되었다. 왕위를 넘기던 날 정3품 동부승지 성삼문은 상서사(尙瑞司)에서 옥새를 꺼내 환관 전균으로 하여금 경회루 아래의 단종에게 올리게 했다. 이로써 옥새는 단종에게서 세조로 넘어갔다.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으로 세조의 조정에 서 있지만, 불법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좁은 곳에서 역사(力士)의 감시를 받는 상왕(上王) 단종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현재의 왕 세조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차기 왕은 현재의 세자가 아닌 상왕이 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이 단초가 되어 단종 복위사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성삼문을 비롯한 성씨 남자 가족들이 몰살을 당한 지 3개월 후 집안 여자들은 사대부 가의 여비(女婢)로 나눠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次山)과 딸 효옥(孝玉)은 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성삼고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 살 된 딸은 우찬성 정창손에게 주고”
“성삼성의 아내 명수(命守)는 병조참판 홍달손에게 주고”
“성삼빙의 아내 의정(義貞)은 판종부시사 권개에게 주고”
“성맹첨의 아내 현비(現非)는 판내시부사 전균에게 주고”
“성승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 이흥상에게 주고.”(세조 2년 9월 7일)
이들은 19년이 지난 성종 6년에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김차산은 노속된 집에서 딸과 함께 남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성삼문도 외손 박호도 대 끊겨
성삼문의 신주는 박임경과 혼인한 차녀 성씨에게 맡겨졌다. 한양에서 살던 외손 박증(朴增·1461~1517)은 부모가 돌아가시자 외조의 옛터로 낙향하여 그의 절의 정신을 기리며 평생을 은거하여 사림들의 존숭을 받았다.
과거 급제로 현달한 박호(朴壕·1466~1533)는 형의 뜻에 따라 외조부 성삼문의 제사를 맡았다. 하지만 외손 박호 또한 후손이 끊어져 성삼문은 친손도 외손도 모두 적멸했다. 후세 사람들은 성삼문(1418~1456)을 명나라 충신 방효유(方孝孺)와 나란히 놓았다.
잔인하고 패악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성삼문, 우리가 그를 절실하게 기억해야하는 이유이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40.235년 만에 역적에서 복권된 성삼문 - “난세 다음엔 치세 온다”, 역사의 정도 믿었던 만고충신 / 중앙일보, 2026. 1. 9.
|
매죽헌 성삼문선생 유허지(梅竹軒 成三問 先生)
성삼문 유허비각
노은단(魯恩壇) 삼문
사육신의 위패가 매안(埋案)된 노은단(魯恩壇)
1676년(숙종 2)에 읍사 이량(李𤦻)이 성삼문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노은서원(魯恩書院)에서는 매년 12월 제사를 지내오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폐되었다.
그래서 이후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아 매안하여 ‘노은단(魯恩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왔다. 지금은 노은단(魯恩壇) 아래 새로 지어진 사당 ‘충문사(忠文祠)’에서 매년 음력 10월15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문사(忠文祠) 전경
충문사(忠文祠) 삼문인 ‘충절문(忠節門)’
충문사(忠文祠) - 성삼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이 된 성삼문은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의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육신 묘역에 있지만,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있다.
그리고 단종 때 순절을 지킨 자들과 함께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과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홍주 노은서원(魯恩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함께 배향되었다.
|
|
Q&A 235년 만에 역적에서 복권된 성삼문
“난세 다음엔 치세 온다”, 역사의 정도 믿었던 만고충신
Q.성삼문은 어떤 인물이며, 그의 삶에서 어떤 중요한 사건이 있었나요?
A.성삼문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관리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세조에 의해 '난신(亂臣)', 즉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형제, 아들들까지 모두 같은 날 처형되는 멸문지화를 겪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의
충성심이 재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세조가 "지금은 난신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사후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 17년)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오늘날에는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Q.성삼문이 목숨을 걸고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가요?
A.성삼문이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한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습니다.
○왕에 대한 깊은 신뢰와 책임감: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고, 어린 단종의
교육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는 단종을 단순한 왕이 아니라 자식처럼 아끼고 염려했다고 해요.
단종 역시 성삼문을 크게 의지했죠.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
대군(훗날 세조)이 권력을 장악하고 결국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성삼문은 이를 부당하고 불법적인
왕위 찬탈로 보았습니다.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신념: 비록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성삼문은 '현재의 왕
(세조)은 인정하더라도, 다음 왕은 세조의 아들이 아닌 상왕(단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신념이 결국 동료들과 함께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는 거사로 이어진 것
입니다.
Q.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성삼문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고 후대의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A.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는 성삼문과 그의 가문에 끔찍한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 가족들의 운명 : 성삼문을 포함한 성씨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거열형'이라는 잔혹한 형벌로 처형당했
습니다. 그의 아내, 딸, 며느리 등 여자 가족들은 사대부 집안의 여종(女婢)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들은 19년이 지난 후에야 노비 신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 평가의 변화: 성삼문은 죽은 지 216년이 지난 1672년에 인왕산에서 그의 신주(神主)가 발견되면서
재평가의 계기를 맞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비공식적인 추모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1691년(숙종 17년)
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사육신(死六臣)' 중 한 명으로 인정받으며 충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끊어진 대: 안타깝게도 성삼문의 가문은 친손과 외손 모두 대가 끊겨 후손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의 이름은 명예롭게 회복되었지만, 가문의 혈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입니다.
Q.성삼문의 삶과 죽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어떤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볼 수 있나요?
A.성삼문의 삶은 우리에게 여러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승자의 기록을 넘어선 역사의 평가: 가장 큰 교훈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통념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성삼문은 정치적으로 완벽히 패배하고 역적으로 죽었지만, 그의 신념과 충절은 시간이
지나 결국 '만고충신'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역사적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충신 이면의 위대한 학자: 우리는 그를 충신으로만 기억하기 쉽지만,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최대 공신 중 한 명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훈민정음을 활용한 외국어 학습법을 개발
하는 등, 우리말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학자였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신념을 지키는 삶의 가치: 성삼문은 가문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정도(正道)'를 지키
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권력 앞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
하게 합니다.
○ 역사의 비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그의 이야기는 권력욕이 부른 잔인한 역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을 얻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절실
하게 일깨워 줍니다.
|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을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3382483929
▣허균 집안의 비극-신분제 조롱한 붓끝, ▣호남 유학의 큰 기둥기대승 집안-아버지의 모성,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가족-피로 얼룩진 60년 골육생쟁, ▣우리가 몰랐던 이이-칠남매 바라지에 속울음 터트린 율곡,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3386237245
▣박세당-대쪽 부자,대를 이은 품격, ▣친정·시집 다 일으킨 여장부 장계향,
▣김상용-명가 탄생의 빛과 그림자, ▣권력·치정에 눈먼 인조-공포영화 뻄치는 궁중잔혹사,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Ⅲ https://blog.naver.com/ohyh45/223387573582
▣유배지서 일가 일으킨 이문건, ▣술 빚고 김치 담근 선비 김유,
▣영응대군과 세 아내- 왕실판 ‘사랑과 전쟁’, ▣김류의 가족과 병자호란-4대에 걸친 충절,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Ⅳ https://blog.naver.com/ohyh45/223389148282
▣올곧은 선비의 모델 최수성 - 출세보다 지조, ▣황희 정승과 그의 자녀들-아들 일은 해소 못 할 고통,
▣진압한 이시발의 사랑-젊은 첩 죽자“훗날 자네 곁에”, ▣예법에 맞선 정약용 집안 여인들,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Ⅴ https://blog.naver.com/ohyh45/223559080861
▣황효원 가족의 가슴 아픈 처첩 논쟁, ▣퇴계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가짜 남편에 걸려든 형수-유유·유연 형제 가족의 비극, ▣아버지 원수 갚은 문랑·효랑 자매의 처절한 복수혈전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Ⅵ https://blog.naver.com/ohyh45/223691480270
▣김 호연재(金 浩然齋)-남편에 치솟는 비통함, 시로 달래, ▣딸·아들 차례로 잃은 김창협(金昌協)의 비애,
▣노비 이만강(李萬江)의 신분 상승 40년 몸부림, ▣명나라 환관 된 윤봉(尹鳳)의 탐욕,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Ⅶ https://blog.naver.com/ohyh45/223772236207
▣연암 박지원의 청빈했던 친·인척, ▣국가폭력에 희생된 황사영의 가족,
▣일본장수 사야카(沙也可)는 왜 김충선(金忠善)이 됐나 , ▣누이·딸 혼사로 명문거족 일군 한확(韓確)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Ⅷ https://blog.naver.com/ohyh45/223915368700
▣세종조의 명재상 허조(許稠) 삼대의 삶과 죽음, ▣공신 2관왕 홍윤성의 패악질,
▣백정의 신분해방 앞장선 강상호 가족-형평사운동 차별 없는 세상 꿈꾼 아름다운 삶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Ⅸ https://blog.naver.com/ohyh45/224026135695
▣역모로 흥하고 역모로 망한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세종(世宗)의 딸,세조(世祖)의 누나였던 정의공주(貞懿公主),
▣달성 서씨의 중흥조모 고성 이씨-장애딛고 조선 최고의 가문 만든 여인, ▣3대 문인화가 윤두서·윤덕희·윤용가족,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Ⅹ https://blog.naver.com/ohyh45/224141972172
▣소현세자 아들 삼 형제의 슬픈 삶-잔혹한 궁중 비극 ,▣서예 최고봉 이광사의 일가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악착같이 종손 지켜낸 노론 집안 여인 3대-희대의 ‘시체 바꿔치기’, ▣235년 만에 역적에서 복권된 성삼문,
'새 카테고리2' 카테고리의 다른 글
| 登東山而小魯也,登泰山而小天下 (1) | 2026.03.19 |
|---|---|
| 端宗을 거둔 嚴興道 後孫에 내린 公文書 完文 첫 公開 (0) | 2026.03.18 |
|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세조의 충신 申叔舟와 그 가족들 (0) | 2026.03.18 |
| WBC결승전 패배 후 올린 트럼프의 첫 반응은? (0) | 2026.03.18 |
| 베네수엘라, MLB 올스타 美 꺾고 WBC 첫 우승 . (0) | 2026.03.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