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13) 대구 광해군 태실도 국가서 관심 가져야, 발굴 끝난지 6년…태실, 세계유산으로 등재 추진 중인데
- 기자명 최미화 기자
- 입력 2026.04.16 07:07

경상북도는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과 영천 은해사에 있는 인종태실 등을 충청남북도 등 타 광역시도와 손잡고 세계유산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세계유산이 된 종묘제례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종묘제례악에 이어 태어난 왕손의 건강과 왕실의 번영을 염원하는 태실유적과 안태문화까지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지구촌이 다시한번 대한민국이 지닌 문화의 힘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구시 북구 연경동 광해군 태실은 여전히 국가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미 지난 2013년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시굴조사 결과보고서를 낸데 이어 본발굴을 한 (재)다온문화재연구원이 2020년에 『대구 연경동 광해군 태실』 학술조사보고서에서 “광해군 태실은 아기태실 조성 이후 그 자리에 가봉이 이뤄진 태실로 아기태실과 가봉태실의 구조를 함께 파악할 수 있는 복합유적으로 태실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전문가들의 견해를 곁들여서 결론내렸음에도 말이다. 광해군 태실은 대구시지정 문화유산(기념비)으로 남아있다. 지난 90년대 이미 보물로 지정된 광해군 태실 유적 중 백자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은 도굴을 거쳐 세탁된 뒤 용인대 박물관에 있다.

국가지정 문화유산으로 가기위해서는 하루빨리 완전 복원이 되어야하건만, 국비는 내려오지 않고 기초지자체인 북구청은 힘이 부족하다. 최근들어 울타리를 치고, 잔디를 심고 한 상태다. 근년들어 대구시장을 역임한 이들의 지역사회의 문화콘텐츠 보존과 복원, 그를 활용한 문화자원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거의 없었다. 국가유산청 또한 광해군 태실이 있는 대구시 북구청의 국가사적지 지정요구를 수년째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가야할 길이 멀다.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여러번 국비를 신청했는데 계속 반영이 안되다가 겨우 국비 1억원을 받아서 발굴조사를 했다”는 최한태 학예사(대구시 북구청 문화유산과 주임)는 “전국에 있는 태실 유적이 발굴된 사례가 극히 드문데 대구 광해군 태실 발굴조사를 통해서 구조가 비교적 잘 남아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들려준다.

(재)다온문화재연구원은 태실 관련 유구로 태함 안치를 위한 토광, 석물 배치를 위한 적심석(내·외 석렬) 귀부 등을 확인했다. 장태 후 세운 아기태실비와 태실 가봉에 사용된 가봉태실비, 개첨석, 중동석편, 사방석편, 주석편 등의 석재도 확인했다.

광해군 태실은 발굴 조사 전 이미 심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파괴가 심했기에 1923년 일제가 전국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일괄 옮기는 이봉시에도 유구가 추가 훼손되는 화를 피했다. 일각에서는 광해군 태실이 이 일대 땅을 넓게 갖고 있는 문중에서 태실을 보존하자는 파와 광해군이 폐위됐으니 만큼 없애야한다는 파의 충돌로 인해 훼손된 것이라고 온라인에 떠돌고 있는데 대해 심현용 한국태실문화연구소장(울진 봉평 신라비 전시관 관장)은 “그건 근거가 없다, 그정도로 파괴됐다는 것은 국가(조선왕실)이 했을 것”이라고 잘라말한다. 몇차례 도굴 이전에 이미 심하게 파괴되었음을 짐작케한다.

태실 연구로 국내 1호 박사이자 유일한 전문가(아직 2호 박사가 없음)인 심현용 관장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가 됐는데 태실을 그대로두면 광해군 후손들이 계속 잘되라는 것인데 그대로 두겠냐. 폐위된 광해군 자손이 잘되면 안되지 않냐고들 생각했을 것이다”는 견해를 보인다. 국가(조선왕실)가 광해군 태실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국내 유일의 태실전문가인 심 박사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의도적으로 태실이 파괴됐다고 본다.

광해군 태실 발굴조사에서 자문위원을 역임한 김세기 전 대구한의대박물관장은 “폐위되니까 가봉했던 태실을 다 깨뜨려버리고 하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 내지는 국민성이 지금까지 똑같이 내려오고 있지 않냐”고 되묻는다.

광해군 태실이 있는 대구시 북구 연경동 산 135번지 태봉에 올라보면 “아, 이래서 이곳을 광해군 태실로 택했구나”하고 무릎을 탁치게 만들 정도로 길지, 명당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광해군 태실이 대구시 북구 연경동 태봉마을에 왜 들어섰을까" 대구와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왕실에서 광해군 태실은 이곳에 쓴 것과 대구와의 인연은 일체 없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다른 태실이 있는 곳의 이유도 똑같다. 태실은 특정 지자체와 인연은 전혀 없다. 태실을 쓴 곳들이 명당이고 길지이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섰다.

“고려시대 왕씨에서 이씨로 역성혁명을 통해 건국한 조선왕조는 자기들 같은 사람들이 또 생길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를 아주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심현용 한국태실문화연구소장은 ”조선왕조가 전국 명당에 태실을 적극 확보한 이유는 그지역에 인재가 나지 말라는 것, 인재가 날만한 자리에 왕손의 태실을 선점해서 지역의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 또다시 역성혁명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고 평가한다. 심 관장은 연경동 태봉이 땅의 기운이 솟아서 돌출된 ‘돌혈’이기에 광해군 태실로 낙점됐다고 판단한다.

팔공산 자락인 함지산-도덕산-응해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연경동 태봉마을 북편 야트막한 둥근 봉우리에 있는 광해군 태실은 태주가 임금 자리에 올라 아기태실에 가봉태실(태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태실을 석물로 단장하는 것)이 같이 있는 복합유적임에도 불구하고 읍지 및 고지도에 그 위치가 기록되거나 표시된 것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지워졌다.
천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광해군이 임란 때 훼손된 종묘사직을 복원했고, 북방정책의 균형도 잡았으며 편찬사업도 활발하게 펼쳤지만 서인들이 ‘폐모살제’(廢母殺弟,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폐위된 것을 안타까워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을 겪지 않았을 수도⋯”라고 가정하는 이들도 다수 생겼지만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일제가 전국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강제로 옮긴 ‘태호 이봉’을 겪지 않은 광해군 태실은 태지석, 태호, 태함, 아기태실비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유물은 지하에 태함을 안치하고, 그 속에 태호를 비롯한 태지석 등의 봉안유물울 매납하였으며 왕 즉위후 아기태실을 가봉하면서 가봉태실비, 귀부, 개첨석, 중동석편, 사방석편 등을 썼음까지 확인되었다. 광해군 태실에서는 팔각형 적심석(외석렬)도 확인되었고, 육각형 개첨석은 가봉태실에서 유일한 유적이어서 큰 의미를 지닌다.
심현용 한국태실문화연구소장은 “100% 완전복원이 가능하다”고 확언한다. 국가유산청이 더 힘을 기울여 제대로된 복원이 시급하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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