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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속의 역사) 89.경주 천룡사

한문역사 2026. 4. 28. 12:48

신화속의 역사] 89. 천룡사

강시일 기자2026. 4. 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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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천룡사가 붕괴하면 신라가 망한다”, 고려시대 최제안이 두 딸의 이름을 따 ‘천룡사’라 짓고 비보사찰로 법등 이어
경주 남산 고위봉 아래 넓은 부지에 복원한 천룡사지 삼층석탑.

천룡사는 경주 남산 고위봉 남쪽 넓은 부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산의 중턱이지만 물이 충분하고, 부지가 넓어 경작지도 기름지다. 사찰의 법등을 이어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천룡사는 신라의 멸망과 함께 붕괴되었지만 고려시대에 최제안이 다시 중수해 나라의 안녕을 발원하는 호국사찰로 황실과 귀족은 물론 백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신라와 고려, 두 나라를 잇는 불력이 왕성한 터전이다.

지금은 발굴을 통해 무너진 탑을 복원해 삼층석탑만 우두커니 서 있다. 웅장했던 천룡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석조와 귀부 등의 유물만 곳곳에 흩어져 신화속의 이야기가 아닌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천룡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

◆신화전설: 천룡사의 붕괴와 신라 멸망

경주 남산의 가장 깊은 품, 고위봉 능선이 남쪽으로 흘러내리다 멈춰 선 곳에 '천룡사(天龍寺)'가 있다. 지금은 비바람에 깎인 석탑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천년 전 이곳은 신라의 명운을 안고 있던 서라벌의 가장 장엄한 정신적 요새였다. 천룡사의 건립과 쇠락은 단순히 한 사찰의 역사가 아니라 신라라는 거대한 제국의 심장 박동과 괘를 같이한다.

당나라에서 온 사신 악붕귀는 풍수와 지리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라의 산천을 유람하던 중 남산의 고위봉 아래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여의주를 품고 엎드린 듯한 천룡사 터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 이 절이 붕괴되면 신라도 곧 망하겠구나(此寺破則國亡)." 이 말은 삽시간에 서라벌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때부터 천룡사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비보사찰(裨補寺刹)'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땅의 부족한 기운을 메워 국운을 유지시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천룡(天龍)이라는 이름 또한 범상치 않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 중 가장 윗선에 두던 천과 용의 이름을 하나로 묶어 그렇게 부른다. 천룡은 곧 왕권을 상징하며, 하늘의 뜻이 지상에 닿는 통로를 의미한다.
천룡사지에 흩어져 있는 석조와 부재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태평성대를 누릴 때, 천룡사 상공에는 늘 상서로운 구름이 감돌았으며 사찰의 샘물은 마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경외심이 사라지고 사찰이 퇴락하기 시작하자, 악붕귀의 예언은 가혹한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신라 말기에 국정이 어지러워지고 천룡사의 기와가 하나둘 떨어져 나갈 때 서라벌의 하늘에는 붉은 혜성이 나타났고, 끝내 천년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설로 전해오던 천룡사의 붕괴와 신라의 멸망은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천룡사의 전설은 신라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제안이 이 터를 다시 중창하자 신기하게도 어지럽던 민심이 수습되고 나라가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는 천룡사의 땅이 가진 영험함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는 단순히 미신이나 설화가 아니다. 험준한 산세 속에서도 기어코 사찰을 세우고 탑을 올렸던 선조들의 간절한 염원, 즉 '나라가 평안해야 나도 평안하다'는 호국안민의 정신이 천룡이라는 이름 아래 응집된 것이다. 나이가 들면 하늘을 호령하던 장군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듯 신라가 멸망했던 것처럼 고려도 스러지고, 천룡사도 붕괴되어 웅장했던 기상도 사라졌다.

오늘날 천룡사 터에 서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하늘 용의 포효가 들리는 듯하다. 악붕귀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단순한 지형의 형세가 아니라, 국가의 상징인 사찰을 정성껏 돌보는 백성들의 마음가짐이었을지 모른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나라를 굽어살피고, 정성이 다하면 국운도 기우는 법이다.
천룡사지 삼층석탑 서쪽에 모아 둔 석재.

◆흔적: 천룡사지

신화가 하늘 위를 떠도는 구름이라면 유적은 땅속에 깊이 박힌 뿌리다. 천룡사를 둘러싼 악붕귀의 예언과 국운의 설화는 오랜 시간 동안 전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발굴 조사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천룡사의 실체를 찬란한 역사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고위봉 아래 숨겨진 거대한 분지에서 드러난 유물들은 천년 전 신라인들이 이곳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가꾸었는지를 묵직한 질감으로 웅변한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들이었다. 발굴팀이 수습한 기와들 사이에서 '천룡(天龍)'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는 삼국유사 등 고문헌에만 존재하던 사찰의 이름이 단순히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했던 역사의 공간이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물증이 됐다.
천룡사 삼층석탑을 둘러싸고 펼쳐진 넓은 부지에 흩어져 있는 석재.

신라인들은 기와 한 장에도 사찰의 이름을 정성껏 새겨 넣으며, 하늘의 용이 나라를 지켜주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사찰 터의 중심에는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이 우뚝 서 있다. 오랜 세월 무너져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1991년에 다시 일으켜 세운 이 탑은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산 사찰 탑들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비례미를 자랑한다.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의 몸돌은 견고하면서도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솟아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석탑 앞에 서면 험준한 산맥을 뚫고 이 거대한 돌들을 옮겨와 한 치의 오차 없이 쌓아 올렸을 신라 석공들의 땀방울이 만져지는 듯하다. 이 탑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기운을 잇는 안테나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서라벌의 서쪽 하늘을 지켜왔다.
경주 남산 중턱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평하게 조성된 부지.

석탑 인근에서 발견된 석조와 귀부 또한 예사롭지 않은 흔적들이다. 사찰의 대중이 물을 담아 쓰던 석조는 그 규모가 상당하여 당시 천룡사에 머물던 승려들의 수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 특히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는 머리 부분이 사라진 채 몸체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의 등껍질 무늬가 정교하게 살아있어 이곳에 세워졌을 비문의 위엄을 상상하게 한다. 비문에 적혔을 글귀들은 아마도 천룡사의 창건 내력과 국왕의 기도가 담겨 있었을 것이나, 이제는 침묵하는 돌의 질감만이 남아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가람의 배치는 천룡사가 거대한 산지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경사진 지형을 따라 층층이 쌓아 올린 견고한 축대들은 거친 자연을 극복하고 불국토를 건설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이 국난을 피해 혹은 국운을 빌기 위해 이곳까지 먼 길을 올랐을 장엄한 행렬이 눈앞에 그려진다.

천룡사의 유적은 우리에게 말한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땅에 새겨지는 것이기도 하다고. 비록 화려했던 법당은 소실되고 범종 소리는 끊겼으나, '천룡'이라는 이름이 박힌 기와 한 장과 흔들림 없는 삼층석탑은 신라가 꿈꾸었던 호국의 이상이 여전히 이 깊은 산중에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천룡사의 흔적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다시 일어서야 할 우리 정신의 이정표로 다가온다.
천룡사지 삼층석탑 동쪽에 최근 지어진 암자.

◆스토리텔링: 천녀와 용녀

신라의 찬란했던 금빛 영광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남산의 깊은 계곡에는 한동안 적막만이 감돌았다. 악붕귀의 예언대로 천룡사가 퇴락하자 국운도 다했다는 탄식은 서라벌의 해묵은 상처가 되어 남았다. 기와는 깨져 흙에 묻혔고, 단청의 화려한 색은 바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하늘이 점지한 명당의 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었다. 고려가 기틀을 잡아가던 시기 문종 대의 어진 대신이었던 최제안의 발길이 이 잊힌 폐허에 닿으며 천룡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최제안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선비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무너진 석탑과 잡풀만 무성한 절터를 바라보며 신라가 가졌던 호국의 이념을 떠올렸다. 땅의 기운을 보듬어 나라의 안녕을 지키려 했던 신라인들의 지혜가 지금 이 시대에도 절실하다고 믿었다. 강력한 고려를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다시 천룡사를 복원해 법등을 이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경주에서 서남산 틈수골에서 천룡사지로 오르는 길.

하지만 거대한 불사를 일으키기에는 명분과 힘이 부족했다. 그때 그의 곁에는 보물처럼 아끼던 두 딸이 있었다. 첫째의 이름은 '천녀(天女)'였고, 둘째의 이름은 '용녀(龍女)'였다. 두 딸은 아버지의 근심을 이해하고, 불심이 국력이라며 지극정성으로 돕기 시작했다.

최제안은 두 딸의 지극한 효심과 순수한 영혼을 불사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는 사재를 털고 정성을 다해 사찰을 중창하며, 두 딸의 이름을 한 자씩 따 '천룡(天龍)'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세상에 공포했다. 이는 단순히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선녀처럼 맑은 정신(天)과 땅의 물줄기를 다스리는 용의 힘(龍)이 조화를 이루어 고려라는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고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불사에 정성을 쏟았던 두 딸은 매일같이 산을 오르며 탑돌이를 했고,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절이 완공되던 날 고위봉에는 오색무지개가 천룡사까지 길게 걸렸다.

최제안은 단순히 건물만 세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천룡사가 지속 가능한 호국사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인근지역 유력자들과 백성들의 협력을 이끌어 탄탄한 경제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사찰에 토지를 기부하고 승려들이 오직 수행과 국난 극복을 위한 기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절이 흥하면 나라도 흥한다'는 고대의 예언을 고려의 대지에 다시 심었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수하고 낙성법회를 거창하게 진행한 이후 두 딸 천녀와 용녀는 구름이 걷히듯 사라졌다. 사람들은 천녀와 용녀가 열반하여 사찰과 나라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믿으며 추앙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천룡사가 단순히 무서운 용의 전설이 아닌 가족의 사랑과 국가를 향한 헌신이 어우러진 따뜻한 인문학적 공간이라고 전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