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신도비는 비문을 갈아 없앤 백비일까
삼전도 비문을 써야 했던 병자호란 때 중신
새기지 못한 그의 신도비는 300년 이상 땅속에
청계산 서남쪽 기슭 대감능골(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백헌 이경석(1595~1671)의 묘. 신도비가 두 개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실물을 보니 그 차이가 심한지라 머리터럭이 쭈뼛 선다. 왼쪽이 1754년(영조 30)에 세워졌다는 옛 비석, 오른쪽이 1975년에 세운 새 비석이다. 두 비석 사이에 끼인 221년 세월이 까마득하거니와 옛 비석이 꺼끌꺼끌한 비면에 글자 하나 없는데 비해 새 비석은 매끄러운 오석에 새겨진 글자는 끌의 자취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다.
옛 비석은 본디 글자 없이 세운 ‘白碑’가 아니라 글자가 지워진 것이라 한다. 자연풍화에 의한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면이 말끔하니 인위적으로 삭제한 것이라면 살뜰하기 그지없다.
무슨 내용이기에 누가 왜 그렇게 참혹한 짓을 했을까.

전서체 ‘영의정 시(諡) 문충 이공 신도비명’ 제하의 이경석의 일대기다. 조선시대 관료를 지낸 인물의 것이니, 당연히 어떠어떠한 벼슬을 지냈다는 이력이 주내용이다. 다만 선조, 광해, 인조, 효종, 현종 대를 살았고, 인조 때 벼슬 길에 들어 주요직책을 지냈기에
병자호란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이와 함께 당파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여 기록과 평가에 가중치가 매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병자호란.
“당시 청인(淸人)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우고자 하여 그 비문을 요구하였다. 上(國王 仁祖)이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에게 명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지만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모두 저들의 뜻에 차지 않아 더욱 거칠게 으르렁대자 上이 마침내 公을 面對하여 命하기를, “구천(句踐)은 신첩(臣妾)이 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강(自强)을 도모하였으니, 지금은 다만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지 혹시라도 격노를 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이 마지못해 명을 받들고 석문공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합니다.” 하였고, 또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도다.”라는 시구가 있으니, 공의 뜻을 알 수 있다.”
1636년(병자년) 인조가 청태종한테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공덕비 건립을 강요받을 당시 모두 비문쓰기를 꺼려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쓴잔을 피해 갔다. 백헌은 왕실 종친인 동시에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인조의 간청을 못 본 체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비문에 쓰인 것처럼 문자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술회할 만큼 곤혹스런 일은 그의 몫이 되었다. 한없이 낮은 을의 자리에서 침략자의 공덕을 읊으려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삼배구고두 이마를 찧은 인조만 하겠는가.

편년체 비문에서 두 번째로 비중있게 다뤄진 건 1650년(경인년) 사건이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을 수리하겠다는 의사를 청쪽에 전하고 이에 대한 허락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던 바, 효종1년에 청 사신 6명이 조선에 와 이를 힐난하는 일이 벌어졌다. 병자년 조선이 청에 항복하면서 청에 대한 일체의 저항, 즉 성곽수리, 병력증강 등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바, 조선에서 보낸 표문은 조선이 설분을 꾀한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청사가 국경을 넘을 때부터 조선 조정은 전전긍긍하여 이경석을 파견하여 사신의 심기를 살폈다. 한양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의 숙소로 대신들을 소환해 표문의 배후에 효종이 있지 않느냐, 표문을 누가 지었느냐며 추궁했다. 이에 백헌은 잘못은 자신에게 있지 임금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여러 차례 물어도 같은 답변을 하자 거짓말 하지 말라고 몰아세웠다. 모든 사람들은 화가 경각에 달렸다고 생각하였으며 백헌 집안에서는 미리 관을 준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튿날 청사신과 효종이 면대하였을 때 효종이 적극 변호한 결과 사신이 귀국하여 황제의 조처를 받도록 하겠다, 백헌을 백마산성에 위리안치한다는 선에서 정리됐다.
비문에는 파벌 간 권력다툼과 관련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도드라지는 곳은 두 군데인데, 서두의 여는 글과 말미에 있는 명(銘)이어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을 정도다. 서두와 명은 다음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비록 노성(老成)한 사람은 없으나 그래도 전형(典刑)은 남아 있다.” 하였으니, 전형의 유무에 국가의 치란과 존망이 달려 있고 전형은 또 노성한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노성한 사람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다행히 전형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까닭에 능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니, 아, 노성한 사람이 국가에 관계됨이 또한 크다 하겠다. 그리고 《서경》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 임금을 섬긴 나라의 원로요 / 三朝元老
한 시대의 지성스러운 신하였으니 / 一代忱臣
나라를 위해 집안일은 잊었고 / 國忘其家
임금을 위해 일신은 내팽개쳤네 / 主不顧身
붉디붉은 정성은 하늘의 해처럼 빛나고 / 丹誠炳日
깨끗한 절개는 서릿발처럼 매서웠으므로 / 素節凌霜
험하고 어려운 일을 / 險阻艱難
또한 두루 겪었다네 / 亦旣備嘗
지극한 믿음은 신뢰를 사 / 至信所孚
돈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고 / 能感豚魚
덕이 온전하고 행실이 높아 / 德全行高
사책에 누차 기록되었네 / 彤管屢書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 / 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 / 世有聞人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 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 人其來敬
서두의 노성한 사람은 이경석, 업신여기는 자는 송시열이며
명(銘)의 봉황, 군자는 이경석, 이름난 사람(聞人), 올빼미는 송시열을 지칭한다.
저간의 사정은 신도비명의 또다른 기술에서 찾을 수 있다.
기유년(1669, 현종10) 3월에 上이 온천에 행행하면서 공이 늙었다 하여 유도의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공은 차자로 서둘러 환가(還駕)할 것을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평소 조정에는 떠나가는 사람이 줄을 잇고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 문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만해하는 성색(聲色)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 법이니, 오늘날도 이에 가까운 것입니까. 전하께서 유념하셔야 할 바입니다.” 하니, 가납하였다. 이에 앞서, 송시열이 천하의 중망을 받고 있었기에 공이 인조조(仁祖朝) 때에 누차 천거하였고, 송시열이 서울에 이르러 포의(布衣)에 짚신 차림으로 문에 이르자 공은 대등하게 보아 예를 다하였으며, 효종 초에 또 맨 먼저 그를 부를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송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이미 높아진 뒤에도 공을 존경하고 숭앙하였으니, 이는 서독(書牘)에 드러나 있다. 그런데 공의 차자를 보고는 노하여 공을 추하게 비방하니, 공이 놀라 차자로 진달하기를, “송시열이 상소로 신을 배척하니, 신은 매우 부끄럽습니다. 신이 짧은 차자에서 아뢴 내용을 감히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회천(懷川 송시열)은 유림의 영수였으므로 그의 언론과 시비를 감히 논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문하의 선비조차도 모두 의아해하였고 동춘(同春,宋浚吉) 역시 공을 만났을 때에 놀라워하고 탄식하였다.
이 대목이 내포하는 사정에 비해 문장은 무척 젊잖다. 유자의 글쓰기는 대략 이러한가 싶다. 이경석이 온천에 가 있는 현종께 보낸 차자에서 행재소에 문안하는 사람이 적음을 거론하자 자신을 지칭하는 줄 오해한 송시열이 병 때문에 늦었다고 변명하고는 "금나라에 항복문서를 바친 송나라 역적 손종신처럼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나를 비난한다"고 대거리를 한 것이다.
‘수이강’이란 비수는 넉달 전 송시열이 이경석의 궤장연에 보낸 祝辭에 숨겨져 있었다.
"생사를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해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건강하여(壽而康) 우리 성상에게 융숭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때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고, 헌사에 상대방 몰래 음험한 복선을 까는 등 송시열의 인간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쓴 것을 두고 같은 무리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뒷담화는 거리낌없다.
“대체로 당시의 일이 어쩔 수 없이 몰린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알맞게 대처할 방도가 없었겠는가. 그렇건만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마음껏 아첨하여 미리 지어 놓은 글처럼, 조금도 고통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며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말하는 뜻이 없었네.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사람의 본성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처럼 하였겠는가....그 사람(이경석)은 본시 향원(鄕原)이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에게 아첨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시에 명망이 대단하여 잘못되고 틀린 말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말을 신복(信服)하여 쳐 깨뜨리지 않으니, 석가(釋迦)의 해독이라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대체로 그 사람이 향원(鄕原)의 마음으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 동안 행신(行身)하는 방법을 삼으니, 만일에 경인년 봄의 한 가지 일이 아니었다면,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네. (송도원(宋道源)에게 답함 – 1669년 5월, 송자대전 제70권 서(書))

이경석 사후 32년인 1703년 누란의 국난을 당하여 중신으로서 상식선에서 대처한 이경석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이러한 이경석을 폄훼한 송시열을 올빼미라고 지칭한 신도비문을 쓴 이는 박세당(1629~1703)이다. 명분론이 대세이고 송시열 패거리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시절에 박세당의 글쓰기는 목숨을 내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박세당의 비문이 유자들 사이에 회자되면서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계적(洪啓迪) 등 1백 80명의 연명상소가 올라왔다. 숙종29년(1703년) 4월17일치 실록의 기록이다.
"천하에 용납하지 못할 바는 성인(聖人)을 업신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왕법(王法)으로 마땅히 토벌할 바는 정인(正人)을 욕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습니다. 전(前) 판서(判書) 박세당(朴世堂)은 요려(拗戾)한 성품과 사왕(邪枉)한 소견으로, 염퇴(恬退)하다는 헛 이름을 가지고 문자(文字)의 작은 재주를 자랑하여, 무리를 모아 가르치면서 감히 사도(師道)로 자처(自處)하여, 주자(朱子)의 사서 장구 집주(四書章句集註)에 고친 것이 많아 저술하여 논설을 이루었고, 근래에는 또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무욕(誣辱)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聖人)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욕하는 죄’에 처할 만합니다.”
상소문은 주자의 학설이 순수정백하고 평실적확하여 한자 한 구절을 가감할 수 없는데, 박세당이 잘잘못을 비평하고, 선후 차례를 바꾸고, 명의와 윤류를 변란시킨다고 언급하며 사문난적에 해당함을 암시한다. 반면 송시열은 평생 주자를 존경하여 한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주자를 모범삼지 않음이 없다며 박세당과 대비시킨다. 이어 상소문은 박세당의 이경석 신도비문의 서두와 명을 언급하며 송시열을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 올빼미라 지칭한 것은 주자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고 비난한다.
유생들은 한치의 구름이 해를 가리고, 졸졸 시냇물이 큰물이 되어 하늘까지 넘칠까 두렵다며 박세당의 저술과 비문을 거둬들여 물이나 불에 던져 근본을 끊고 박세당을 징계할 것을 요구한다.
유생들의 집단상소에 앞서 처사 김창흡이 박세당의 문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격문으로써 박세당을 논박한 바, 실록의 기자는 “그 말이 통쾌하여 사림(士林)을 격려 선동시켜 조금 뒤에 태학(太學)의 상소가 과연 올라갔으니, 박세당의 무리가 김창흡을 원망함이 더욱 깊어졌다”고 썼다.
이에 숙종은 박세당을 삭탈관작하여 문외출송하고, 그의 비문과 책자를 모두 불 속에 던져버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御命은 당연히 집행되었을 터, 이경석 신도비문이 불태워졌음이 분명하다. 상소문 중 “근래에는 또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대목이 비석을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상소문 소동이 벌어진 당시 비문을 돌에 새기기 이전의 상태였다고 추론함이 옳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세운 ‘이경석 선생 묘’ 안내판의 내용은 이렇다. “묘역 진입로에 있는 신도비는 박세당이 글을 짓고 이광사가 써서 조선 영조 30년(1754년)에 세웠다. 노론 문인들이 비문을 훼손하여 1975년에 새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현재는 옛날 비석과 새로 세운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설명문에 따르면 신도비문을 포함한 박세당의 모든 글이 불태워진 뒤 50년이 지난 다음 비문을 새긴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그 다음에 비문 훼손행위가 이뤄졌다. 과연 그런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선 조선 영조 때 세워졌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신도비가 세워졌다면 그에 앞서 박세당한테 내려진 숙종의 어명이 철회되어야 한다. 만일 후대의 임금이 선대 임금의 조처를 철회하는 조처를 했다면 어명 또는 그에 버금가는 통치행위에 해당하므로 당연히 실록에 기록되었다고 추론함이 옳다. 하지만 영조 때를 포함해 어느 왕 시절에도 그러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어명에 의한 철회조처가 없는 상황에서 이경석의 집안에서 사사로이 신도비를 세웠다고 볼 수 없다. 왕명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송시열 계열에서 신도비문을 쪼아 없앴다는 기록이 있을 수 없다.
설령 비문을 새기고 비문을 쪼아 없애는 행위가 이뤄졌다고 해도 그렇다. 1975년에 일으켜 세웠다는 옛 신도비를 보면 쪼아낸 글씨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쪼아 없앤 것이 아니라 갈아 없앴다면 글자를 새긴 깊이만큼 갈아낸 흔적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일률적으로 사면을 1~2mm 갈아냈다면 비석과 삿갓, 비석과 대석 사이에 그만큼 간극이 있어야 하고, 비문 부분만을 갈아냈다면 비석의 상하단을 빼고 나머지 부분이 1~2mm 잘룩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비석의 상태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결론은 이렇다.
이경석 신도비는 애초 비명이 새겨지지 않았다. 박세당의 비문을 받아 신도비를 새기기 전 단계에서 사달이 나 신도비 건립은 중단됐다. 이미 마련된 비석 일체는 묘역에 방치되었으며 그후 토석에 묻혔다. 이후 이경석의 충정과 송시열 패거리의 패악이 대비되면서 비석 훼손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조선을 지배했던 허망한 명분론으로 말미암아 이경석 신도비가 백비로 300년 이상 땅에 묻혀야 했던 사실이 더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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