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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속의 역사(93)김시습의 발자취

한문역사 2026. 6. 2. 12:48

신화속의 역사] 93 김시습의 발자취

강시일 기자2026. 6. 1. 11:20
 
조선 전기 천재 문장가 생육신 김시습,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쓰고, 다선으로 살다
설잠 김시습이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썼다고 전하는 경주 남산 용장사지. 강시일 기자

조선 전기의 천재 문장가이자 생육신으로 알려진 김시습은 시대의 비극 앞에서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방랑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다. 단종 폐위의 충격으로 세상을 등진 그는 승려 설잠이 돼 전국을 유랑했다. 마침내 천년 신라의 숨결이 남아 있는 경주 남산에 한동안 은거했다.

그는 남산에서 무너진 왕조의 아픔과 폐허가 된 신라의 흔적을 마주하며 깊은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남산은 그에게 단순한 은둔처가 아니라 절망을 예술과 숭고한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창조의 공간이었다.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탄생한 배경에도 이러한 고독과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차를 통해 마음을 닦고 자연과 하나 되고자 했던 다선(茶仙) 김시습의 모습은 그의 또 다른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경주 남산에 남겨진 김시습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문학과 차문화,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그의 정신세계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재조명해 본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로 이어지는 용장곡 입구의 짧은 출렁다리. 강시일 기자

◆신화전설 1: 김시습 남산에 들다

조선 전기의 천재 문장가이자 생육신으로 알려진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놀라게 한 신동이었다. 세종이 그의 재능을 듣고 궁으로 불러 시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는 비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찬란해야 할 그의 삶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렸다.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읽던 책을 불태우고 세상을 등진 채 방랑길에 올랐다. 벼슬도 명예도 모두 버린 그는 승려가 돼 설잠이라 이름하고 전국을 떠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이 천년 신라의 폐허가 잠들어 있는 경주 남산이었다.

당시 경주 남산은 이미 신라의 영광이 사라진 뒤였다. 무너진 절터와 이끼 낀 석탑, 바람 속에 서 있는 마애불, 훼손된 불상과 흩어진 석재들이 폐망한 천년 왕국의 흔적으로 남아 설잠의 마음을 더욱 고독하게 했으리라.
경주 남산의 가장 긴 계곡 용장곡. 강시일 기자

그러나 김시습은 오히려 그 폐허 속에서 자신의 시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단종의 왕조는 뒤집힌 현실과 몰락한 천년 신라의 문화가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로 겹쳐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남산 곳곳을 거닐며 깊은 사색에 잠겼고, 세상을 떠난 신라인들의 혼과 대화를 나누듯 폐사지에 오래 머물렀다. 사람들은 그가 밤이면 남산의 바위 아래 홀로 앉아 별빛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며 사색에 잠겼을 것이라 추측한다.

남산은 단순한 은둔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김시습이 절망 속에서 다시 자신의 정신세계를 세워가는 공간이었다. 그는 용장사에 머물며 자연과 벗했고, 세속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삶 속에서 인간 존재와 삶의 허무를 깊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남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시를 읊었고, 때로는 오래된 불상 앞에 앉아 침묵 속 수행을 이어갔다. 신라의 산천은 그렇게 방랑자 김시습을 품어 안았다.

사람들은 김시습이 남산에서 단순히 숨어 지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무너진 정의와 사랑을 되찾을 수 없었던 그는 상상과 환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평가받는 '금오신화'였다.

금오산이라 불리던 남산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단순한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절망한 시대를 살아간 한 천재의 영혼이 남긴 슬픈 기록이었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써내린 용장사지로 접어드는 계곡을 건너는 설잠교. 강시일 기자

◆흔적: 은적암 금오신화

경주 남산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 용장곡으로 접어드는 입구에서 짧지만 흔들리는 출렁다리를 만나게 된다. 계곡을 따라 끊어질 듯 아슬하게 이어지는 산길을 한참 걷다보면 못골과 용장사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개울을 건너가는 왼쪽으로 접어들면 김시습의 법명을 따서 지은 제법 규모가 있는 설잠교가 나타난다. 높게 줄을 이어 가벼운 아이가 걸어도 흔들리는 출렁다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험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설잠교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산길을 오르다보면 금오신화가 탄생한 은적암과 용장사지가 우거진 수풀 속에 주춧돌만 남은 흔적으로 드러난다.

남산에 은거한 김시습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세계를 이야기 속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귀신과 인간이 만나고, 죽은 연인이 다시 사랑을 나누며, 용궁과 저승이 등장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금오신화는 단순한 괴담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무너진 시대를 바라보는 김시습의 비애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숨어 있었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언덕의 낙락장송. 강시일 기자

금오신화의 대표작인 '만복사저포기'는 죽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양생의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죽음 이후에야 가능해진다는 설정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을 드러낸다.

'이생규장전' 역시 전란 속에서 헤어진 연인의 비극을 그린 작품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백성들의 슬픔을 담고 있다. 특히 '취유부벽정기'에서는 고려 멸망 이후 떠도는 여인의 혼이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잊지 못했던 김시습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김시습은 현실에서 직접 권력을 비판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환상과 저승 세계를 빌려 인간 욕망과 권력의 허망함을 풍자했다.

'남염부주지'에서는 저승 세계를 여행하며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보게 하고, '용궁부연록'에서는 인간 세상을 떠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향을 묘사한다. 현실이 너무 어두웠기에 그는 오히려 환상의 세계에서 정의와 사랑, 충절과 자유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용장사지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침대바위. 강시일 기자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이런 형식의 이야기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유교적 질서를 강조하던 시대에 귀신과 환상, 사랑과 허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존 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래서 '금오신화'는 오늘날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경주 남산이라는 공간 속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남산의 오래된 불국세계와 신라의 전설, 폐허가 된 절터의 적막함은 '금오신화' 속 환상적 분위기와 깊이 연결돼 있다.

김시습은 남산에서 단순히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무너진 시대를 견디기 위한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그에게 이야기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환상이라기 보다는 현실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래서 금오신화를 읽다 보면 귀신보다 더 슬픈 것은 인간 세상이며, 환상보다 더 허망한 것은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산의 안개와 폐사지의 바람 속에서 태어난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한국 문학의 신비로운 전설로 남아 있다.
용장사지에 기능을 상실하고 남은 석재. 강시일 기자

◆신화전설 2: 다선 김시습

오늘날 한국 차문화의 상징적 인물로는 흔히 초의선사가 거론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보다 앞서 김시습이야말로 조선 초기 차문화 정신을 꽃피운 진정한 다선이었다고 평가한다.

세속을 떠나 경주 남산에 머물던 김시습에게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혼란한 세상을 잊게 하는 수행이자, 자신을 다스리는 정신의식이었다.

남산의 새벽은 안개가 깊었다. 김시습은 작은 암자에서 물을 끓이고 차를 달이며 하루를 시작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덧입힌 산새 소리가 잠을 깨우는 적막한 새벽, 그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긴 침묵 속에 빠져들곤 했다. 권력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 그는 자연 속에서 차를 벗 삼았다. 당시 선승들 사이에서는 차를 수행의 일부로 여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김시습 역시 차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김시습은 차를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정신수양의 도구로 보았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번잡한 욕심을 씻어내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려한 다구보다 소박한 초암의 분위기를 더 중시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차문화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소박함의 미학'과도 연결된다. 일부에서는 김시습의 차정신이 후대 일본 와비차 정신과도 닿아 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용장사지 언덕을 지키고 있는 거북등바위. 강시일 기자

경주 남산은 원래 신라인들의 불국정신이 살아 숨 쉬던 불국토로 신성시 하던 산이었다. 김시습은 그 신라의 정신 위에 자신의 차문화를 덧입혔다. 폐허가 된 절터에서 차를 달이며 그는 천년 전 신라 승려들의 숨결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차문화는 단순한 음다풍류가 아니라 역사와 정신을 잇는 행위였다. 그는 남산의 자연 속에서 인간 욕망의 허망함을 바라보았고, 차향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발견했다.

남산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인 용장곡으로 들어서는 중간쯤에 그의 법명을 따서 지은 설잠교가 출렁다리로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누구나 설잠교를 건널 때면 바람에 흔들리고, 자신의 발걸음에도 흔들리며 삶의 경계를 되돌아 보게 한다.

 

세상은 김시습을 괴짜 승려로 기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시대의 아픔을 깊이 품었던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을 버리고 남산으로 들어간 그는 이야기와 차향으로 자신의 시대를 견뎌냈다. 그리고 지금도 경주 남산의 바람 속에는 '금오신화'를 쓰던 그의 숨결과 차 달이는 향기가 함께 남아 있는 듯하다.

금오신화를 집필하고, 김시습은 때때로 차를 음미하면서 차에 대한 시도 70여 편을 남겨 그의 차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보게 한다.

"봄 이슬 한 잔 산샘물에 달여/ 번뇌의 마음 씻어내니 깨달음이 원만해지고/

푸른 소나무 앞에 앉아 세상일 잊으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곧 좋은 벗이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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