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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산 자찬묘지명 原文,國譯本

한문역사 2026. 6. 5. 18:11

다산 정약용,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광중본(壙中本)

은인자중 2023. 4. 28. 19:06
2023. 4. 28. 19:06
 

 

 

 

 

 

與猶堂全書 所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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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다산 정약용 선생 -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是唯洌水丁鏞之墓也。 (이는 열수[한강의 별칭] 정용의 묘이다.) 本名曰若鏞。字曰美庸。號曰俟菴。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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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是唯洌水丁鏞之墓也。

시유렬수정용지묘야

(이는 열수[한강의 별칭] 정용의 묘이다.)

 

本名曰若鏞。字曰美庸。號曰俟菴。

본명왈약용자왈미용호왈사암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父諱載遠。蔭仕至晉州牧使。

부휘재원음사지진주목사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母淑人海南尹氏。

모숙인해남윤씨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

이영종임오륙월십륙일생용우렬수지상마현지리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주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幼而穎悟。長而好學。

유이영오장이호학

(용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二十二以經義爲進士。專治儷文。二十八中甲科第二人。

이십이이경의위진사전치려문이십팔중갑과제이인

(22세(1783, 정조 7)에 경의經義[과문 육체科文六體의 하나]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에 갑과甲科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大臣選啓。隷奎章閣月課文臣。旋入翰林。爲藝文館檢閱。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出而爲京畿暗行御史。

대신선계예규장각월과문신선입한림위예문관검열승위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성균관직강비변사랑관출이위경기암행어사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課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使가 되었다. )

 

乙卯春。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由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由右副至左副承旨。爲兵曹參議。

을묘춘이경모궁상호도감랑관유사간탁배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유우부지좌부승지위병조참의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上號都監郞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嘉慶丁巳。出爲谷山都護使。多惠政。

가경정사출위곡산도호사다혜정

(가경嘉慶[청 인종淸仁宗의 연호]정사년(1797, 정조 21)에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己未復入爲承旨,刑曹參議。理冤獄。

기미부입위승지형조참의리원옥

(기미년(1799, 정조 23)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

 

庚申六月。蒙賜漢書選。

경신륙월몽사한서선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是月正宗大王薨。於是乎禍作矣。

시월정종대왕훙어시호화작의

(이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十五娶豐山洪氏。武承旨和輔女也。

십오취풍산홍씨무승지화보녀야

(15세(1776, 영조 52)에 풍산 홍씨豐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旣娶游京師。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從李家煥,李承薰等得見其遺書.自此留心經籍。

기취유경사칙문성호리선생익학행순독종리가환리승훈등득견기유서.자차류심경적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 선생 익李先生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旣上庠。從李檗游。聞西敎見西書。

기상상종리벽유문서교견서서

(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丁未以後四五年。頗傾心焉。辛亥以來。邦禁嚴遂絶意。

정미이후사오년파경심언신해이래방금엄수절의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

 

乙卯夏蘇州人周文謨來。邦內洶洶。

을묘하소주인주문모래방내흉흉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

 

出補金井察訪。受旨誘戢。

출보김정찰방수지유집

(이에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辛酉春。臺臣閔命赫等。以西敎事發啓。與李家煥,李承薰等下獄。

신유춘대신민명혁등이서교사발계여리가환리승훈등하옥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西敎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

 

旣而二兄若銓,若鍾皆被逮。一死二生。

기이이형약전약종개피체일사이생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한 명은 죽고 두 명은 살았다.)

 

諸大臣議白放。唯徐龍輔執不可。鏞配長鬐縣。銓配薪智島。

제대신의백방유서룡보집불가용배장기현전배신지도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定配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秋逆賊黃嗣永就捕。惡人洪羲運李基慶等謀殺鏞。百計得朝旨。鏞與銓又被逮按事。

추역적황사영취포악인홍희운리기경등모살용백계득조지용여전우피체안사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조정의 뜻]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無與知狀。獄又不成。

무여지상옥우불성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蒙太妣酌處。鏞配康津縣。銓配黑山島。

몽태비작처용배강진현전배흑산도

(태비太妣의 작처酌處[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함]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癸亥冬。太妃命放鏞。相臣徐龍輔止之。

계해동태비명방용상신서룡보지지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그를 저지하였다.)

 

庚午秋。男學淵鳴冤。命放逐鄕里。因有當時臺啓。禁府格之。

경오추남학연명원명방축향리인유당시대계금부격지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冤[원통함을 호소함]으로 방축 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後九年戊寅秋。始還鄕里。

후구년무인추시환향리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己卯冬。朝議欲復用鏞以安民。徐龍輔又沮之。

기묘동조의욕복용용이안민서룡보우저지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鏞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鏞在謫十有八年。專心經典。所著詩書禮樂易春秋及四書諸說共二百三十卷。精研妙悟。多得古聖人本旨。詩文所編共七十卷。多在朝時作。

용재적십유팔년전심경전소저시서례락역춘추급사서제설공이백삼십권정연묘오다득고성인본지시문소편공칠십권다재조시작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

 

雜纂國家典章及牧民按獄武備疆域之事醫藥文字之辨。殆二百卷。皆本諸聖經而務適時宜。

잡찬국가전장급목민안옥무비강역지사의약문자지변태이백권개본제성경이무적시의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ㆍ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不泯則或有取之者矣。

불민칙혹유취지자의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鏞以布衣。結人主之知。正宗大王寵愛嘉獎。踰於同列。

용이포의결인주지지정종대왕총애가장유어동렬

  (내가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前後受賞賜書籍廏馬文皮及珍異諸物。不可勝記。

전후수상사서적구마문피급진이제물불가승기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ㆍ문피文皮 [호표虎豹의 가죽]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

 

與聞機密。許有懷以筆札條陳。皆立賜允從。

여문기밀허유회이필찰조진개립사윤종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陳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常在奎瀛府校書。不以職事督過。

상재규영부교서불이직사독과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

 

每夜賜珍饌以飫之。凡內府祕籍。許因閣監請見。皆異數也。

매야사진찬이어지범내부비적허인각감청견개이수야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其爲人也。樂善好古而果於行爲。卒以此取禍命也。

기위인야락선호고이과어행위졸이차취화명야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夫平生罪孼極多。尤悔積於中。

부평생죄얼극다우회적어중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

 

至於今年。曰重逢壬午。世之所謂回甲。如再生然。

지어금년왈중봉임오세지소위회갑여재생연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遂滌除閑務。蚤夜省察。以復乎天命之性。自今至死。庶弗畔矣。

수척제한무조야성찰이부호천명지성자금지사서불반의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夫丁氏本貫押海。

부정씨본관압해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高麗之末。居白川。我朝定鼎。遂居漢陽。

고려지말거백천아조정정수거한양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始仕之祖。校理子伋。

시사지조교리자급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自玆繩承。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亨,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觀察使好善,校理彦璧,兵曹參議時潤。皆入玉堂。

자자승승부제학수강병조판서옥형좌찬성응두대사헌윤복관찰사호선교리언벽병조삼의시윤개입옥당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自玆時否。徙居馬峴。三世皆以布衣終。

자자시부사거마현삼세개이포의종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高祖諱道泰,曾祖諱恒愼,祖父諱志諧。唯曾祖爲進士也。

고조휘도태증조휘항신조부휘지해유증조위진사야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洪氏產六男三女。夭者三之二。唯二男一女成立。

홍씨산륙남삼녀요자삼지이유이남일녀성립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男曰學淵,學游。女適尹昌謨。

남왈학연학유녀적윤창모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卜兆于家園之北子坐之原。尙能如願。

복조우가원지북자좌지원상능여원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銘曰
명銘은 다음과 같다.

荷主之寵 
하주지총, 임금의 총애 입어

入居宥密 
입거유밀, 근밀近密에 들어갔네 

爲之腹心 
위지복심, 임금의 복심腹心 되어

朝夕以昵 
조석이닐, 조석으로 모셨도다

荷天之寵 
하천지총,  하늘의 총애 입어 

牖其愚衷
유기우충,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精硏六經
정연륙경,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妙解微通 
묘해미통,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妙解微通 
묘해미통,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憸人旣張 
섬인기장 소인이 치성해지니 

天用玉汝
천인옥여,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斂而藏之
렴이장지,  거두어 간직하고

將用矯矯然遐擧
장용교교연하거, 장차 훨훨 노니련다. 

출전 : 『정약용』「다산시문집」'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92 

 

정약용의 자찬묘지명…“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하지 못하도록 하다” - 헤드라인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⑬[한정주=역사평론가]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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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안고

궁궐 깊은 곳에 들어가 모셨으니

참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하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아

못난 충심(衷心)을 압유(納牖 : 차근차근 말씀드리면 받아들여줌)하셨고

육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오묘하게 해석하고 은미한 데 통했네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폈지만

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으니

잘 거두어 속에 갖추어 두면

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올리리라.

’” 정약용, 『다산시문집』, ‘자찬묘지명 광중본(壙中本)’

출처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http://www.iheadlinenews.co.kr)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⑬

[한정주=역사평론가]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1822년(순조 22년)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서 정조대왕과의 인연, 천주교에 대한 입장, 자신을 시기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몬 인물들, 유배 생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엮은 500여권의 책 그리고 평생의 뜻을 새긴 명(銘)을 담았다.

정약용이 스스로 묘지명을 지은 까닭은 비록 폐족(廢族)으로 몰락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정약용은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과 무덤에 묻을 ‘광중본(壙中本)’의 두 가지 자찬묘지명을 썼다.

‘집중본(集中本)’에서는 장문의 글로 자신의 생애를 상세하게 서술한 반면 ‘광중본(壙中本)’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기록했다.

여기에서는 ‘광중본(壙中本)’을 소개하는데, 이 자찬묘지명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정약용 생가와 묘지가 있는 다산 유적지 내에 게시되어 있다.

출처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http://www.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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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원문-풀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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