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의 필향만리
복숭아꽃의 비웃음을 사서야(相逢不飮空歸去 洞口桃花也笑人)
중앙일보
업데이트 2026.06.18 10:20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서양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언제 밥 한번 함께 먹자”거나 “막걸리 한잔해야지”라는 인사를 자주 한다.
그리고 만났다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뭔가를 먹고 마시게 하려고 애쓴다.
인정 넘치는 인사이고 따뜻한 만남 풍경이다. 중국인도 우리와 비슷하다.
서로가 서로를 손님으로 청하는 ‘칭커(請客)’로 음식·술·차 등을 대접한다.
그래서 진즉부터
“서로 만나 마시지 않고 돌아가게 한다면 동구 밖 복숭아꽃도 비웃으리라”
는 속담이 생겼으리라.
逢;만날 봉, 歸:돌아갈 귀, 洞:고을 동, 桃:복숭아 도, 笑:웃을 소.
서로 만나 마시지 않은 채 빈 속으로 가게 한다면 동구 밖 복숭아꽃도 비웃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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鶯花猶怕春光老 豈可敎人枉度春(앵화유파춘광로 기가교인왕도춘)
방랑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삿갓 즉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걸식(乞食)’ 시가 있다.
‘네 다리 소나무 소반에 묽은 죽 한 사발,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다 비치네.
주인이시여! 미안해 마오.
나는 지금 죽사발에 거꾸로 비친 청산풍경을 감상 중이니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我愛靑山倒水來).
’ 걸식하는 김삿갓 앞에 내놓은 죽이
어찌나 묽은지 청산과 구름 그림자가 죽사발 안에 다 비친다.
그런 죽밖에 내놓을 수 없는 주인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자 김삿갓이 허허 웃으며
“괜찮소. 나는 지금 죽사발에 비친 청산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오”라고 말한 것이다.
달관의 경지다. 김삿갓은 그 묽은 죽을 눈물 섞어 달게 먹었으리라.
우리네 옛 인심은 이랬었다. 걸식도 이처럼 아름답게 이뤄졌는데
하물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은 채
빈속으로 보낸다면 동구 밖 복숭아꽃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좋은 음식, 술, 차를 혼자서만 먹다 먹다 다 못 먹어 ‘묵혀서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사는 세상이 바로 지옥이다.
낙원은 좋은 음식과 술과 차가 쌓인 곳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인심 안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
오늘, 그 낙원을 찾아 나서자.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3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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