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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또 다른 500년) 원에 바친 공녀와 환관

한문역사 2026. 6. 19. 14:41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강대국 비위 맞추기 고육책, 조선까지 이어져

2026. 6. 19. 00:12
 
元에 바친 공녀와 환관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무게는 제각각 다르고,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장례의 격식은 더없이 불평등했다.
옛날에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조차 지위에 따라 다르게 썼으니,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했다(『예기』 곡례).
조선 실록은 임금의 죽음을 ‘훙’이라고 썼다. 천자로부터 책봉받은 제후의 위상을 준수한 탓이었다.
1408년 5월 24일 태상왕으로 있던 태조 이성계가 훙했다. 창업 군주의 죽음이었고, 고려 말 수많은 전쟁터에서 백성을 구한 영웅의 죽음이었다. 그 무게에 더하여 건국 후 임금의 첫 국상(國喪)이었던 만큼 후대의 전범이 될 장례 절차가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발인도 하기 전인 6월 3일, 궁궐에서 명나라로 보낼 공녀(貢女)를 뽑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 고려 왕비 된 쿠툴룩켈미시 공주
원 황실에 공녀·환관 ‘선물’ 앞장서

“딸 잃고 실명” 호소할 만큼 비참
공녀·환관 손잡고 오히려 고려 수탈

조선은 수탈에 순응, 명과 의리 지켜
고려는 원 약화되자 곧 반원정책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부분). 1572년(선조 5) 의주에 있는 의순관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명나라 사신은 159회 조선에 왔는데, 그중 85회가 환관이었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명 황제 “예쁜 여자 데리고 오라”
조선에서 공녀를 데려가기 위해 명나라 사신이 온 것은 그해 4월이었다. 황엄을 필두로 한 사신들은 모두 환관이었다. 황엄은 태종에게 “조선에 가거든 국왕에게 말해서 예쁜 여자가 있으면 몇 명 데리고 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환관이 사신으로 와서, 이처럼 상스러운 말로 공녀를 요구했다는 사실 하나하나가 놀랍기만 하다. 그날로 조정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공녀 선발에 들어갔고 황엄 등은 금강산 유람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사이 태상왕이 훙하는 큰일이 일어났음에도 그 절차가 중단되지 않았다. 7월 2일에는 선발된 처녀들을 황엄이 직접 보고 미인이 없다며 화를 내고는 담당 관리를 결박하고 욕보이는 일이 있었다. 그는 11월까지 조선에 머물면서 무려 13번이나 면접한 끝에 다섯 명을 뽑아 데리고 돌아갔다. 이때뿐이 아니었다. 명은 1433년(세종 15년)까지 여섯 차례 더 공녀를 요구했고, 모두 114명의 처녀를 끌고 갔다. 공녀뿐이 아니었다. 명은 환관으로 쓸 화자(火者·거세한 남성)도 요구했고, 태조부터 성종 때까지 100년 동안 15회에 걸쳐 200명 넘게 데려갔다. 공녀와 화자를 명에 보낸 것은 고려 후기에 원의 요구로 시작된, 고려의 유산이었다.

 

공녀란 공물(貢物)처럼 바쳐진 여성을 말한다. 누군가의 딸을 징발해서 물건처럼 타국에 보내는 것은 웬만큼 강압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이 몽골과 전쟁이 끝난 뒤부터 벌어졌다. 전쟁 끝에 고려는 국가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며 각종 요구에 시달렸다. 공녀 요구도 그중 하나였다. 공녀 징발은 쿠빌라이 칸의 딸로서 충렬왕의 왕비가 된 쿠툴룩켈미시 공주가 앞장섰다. 이때는 주로 관리들의 딸이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왕실 종친의 딸도 포함되었다. 딸과 생이별하는 것을 누군들 참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왕비의 시퍼런 서슬 앞에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당시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전쟁 중 피난 수도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을 무너트리는 데 큰 공을 세운 홍규(洪奎)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딸을 공녀에서 빼내기 위해 딸의 머리를 깎았다. 그러자 공주가 홍규를 가두고 가혹한 형벌을 가한 뒤 재산을 몰수하고 섬으로 유배보냈다. 딸이 자기 스스로 한 일이라며 아버지를 변호하자 쇠 채찍으로 때렸고,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자 원에서 온 사신에게 주어 버렸다.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의 제9층에 조각된 삼존불. 이 탑은 1348년(충목왕 4) 고려 출신의 원나라 환관 고용보가 기황후 등 원 황실과 고려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세운 것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금지 후에도 암암리에 계속
시간이 지날수록 원의 공녀 요구는 더 심해졌고, 대상도 점차 일반 평민으로 확대되었다. 그로 인한 참상은 1335년에 이곡(李穀)이 원나라 어사대에 공녀 요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부치기 때문에 이웃에서도 알지 못합니다. 관리들이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수색하는데, 혹시라도 숨기면 이웃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친족들을 매질해서 숨긴 딸을 내놓게 하니 온 나라가 소란스럽습니다. 공녀로 뽑히게 되면 온 가족이 모여 통곡해서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고, 떠나보낼 때는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며 길을 막고 울부짖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비통하고 분개한 심정에 우물에 몸을 던져 죽기도 하고, 목을 매어 자결하는 사람도 있으며, 피눈물을 쏟다가 실명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곡의 건의 덕분에 공녀 요구가 공식적으로는 중단되었지만 그 뒤로도 암암리에 계속되었다.

화자를 원나라에 보내는 문도 쿠툴룩켈미시 공주가 열었다. 고려의 궁중 문화가 생소했을 그녀는 고려 환관을 쿠빌라이 칸에게 ‘선물’했고, 뜻밖에 그들이 원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출세하면서 환관 지망자가 줄을 이었다. 원의 환관이 된 다음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어 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고려에서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일가친척에게 관직을 주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특혜를 주었다. 그러자 어렵게 살고 있던 노비 등 하층민이 고의로 거세하고 원에 가서 다투어 환관이 되었다. 권력의 크기는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에 비례하는 법이니, 황제를 지척에서 보좌하는 환관의 권력은 여느 고관대작 못지않았다. 이들이 고려에 와서는 원 황제의 명령을 빙자해서 호가호위하며 관리들을 능멸하고 수탈을 일삼았다. 고려에서는 이 하극상에 분통이 터졌지만, 명색이 상국의 사신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들을 외교 통로로 활용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럴수록 이들의 힘은 더 세졌다. 한 예로, 임바얀투구스는 본래 고려에서 노비였는데, 스스로 거세하고 원에 가서 환관이 된 다음 충선왕과 맞설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이들이 고려에 도움이 되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에게 고려는 마음껏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재물 창고나 다름없었고, 원은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데 이들을 앞잡이로 썼다.

명나라 선덕제의 유희 모습을 그린 명선종 행락도(明宣宗行樂圖·부분). 황제 주변에 여러 명의 환관이 보인다. 조선에서 공녀로 보내진 한계란은 선덕제의 후궁이 되고, 정동은 환관이 되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진 이익주]

공녀가 억지로 끌려갔다면 화자는 스스로 간 점이 달랐다. 하지만 공녀와 환관은 원의 황궁에서 만나 공생관계를 맺었다. 기황후도 처음에 공녀로 뽑혀 원에 갔고, 황궁에서 일하는 궁녀가 됨으로써 훗날 황후에 오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기씨가 궁녀가 되는 데 힘써준 사람이 고려인 환관 투멘데르였다. 당시 원의 황궁에는 투멘데르 말고도 박부카·고용보 등 고려 출신 환관이 고위직에 여럿 있었다. 이들은 기씨의 신분 상승을 도우며 정치적 기반을 닦았고, 기씨가 황후가 되자 자정원당(資政院黨)이라 불리는 권력 집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고용보에 대해서 “친왕(親王·황제의 아들이나 형제)과 승상도 그가 멀리서 나타나면 달려가 절을 하고, 뇌물을 받아서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였으며, 권세는 하늘을 뒤집을 지경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황후의 일족과 환관 무리는 고려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국왕도 이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고려에서 쫓겨나듯 원으로 간 공녀·환관들이 거꾸로 고려를 호령하는 세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원나라 순종의 황후 다기의 초상화. 한때 기황후의 초상화로 잘못 알려졌다. 대만 국립고궁원에 소장돼 있다. [사진 이익주]

강대국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
고려 말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기황후와 환관들의 영향력이 일거에 소멸되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 후 명나라가 다시 공녀와 화자를 요구해왔던 것이다. 고려-원 관계와는 다르게 조선-명 관계를 새로 정립해 가던 시기에 다시 고려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녀를 보내고, 환관에게 수모를 당하면서 누군들 분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종조차도 공녀들이 울며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이 원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명나라에 따질 수는 없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강대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같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 명의 약탈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을 내면화했다. 그랬기 때문에 명이 쇠락하는 중에도 끝까지 대명(對明) 의리를 지켰다. 반면에 고려는 원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원이 약화되는 기미가 보이자 즉시 반원 정책을 단행해서 원 세력을 몰아냈다. 역사의 물줄기는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흐르지 않는다. 강대국을 대하는 태도는 조선보다 고려가 지금 우리에게 더 가까워야 하지 않을까.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