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34] 기록의 힘

대중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온다. “우리 어머니는 아흔이 넘었거든. 당신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는 걸 아셔. 그래서 매일 아침 공책에다가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이름을 쓰고 또 쓰지. 이래야 안 잊어버린다, 하시면서.”
나는 뜨끈한 탕에서 눈을 감고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의 공책을 상상해 봤다. 꼬깃꼬깃하게 손때가 묻은 종이에는 자식과 손주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으리라. 다른 것 없이, 담백하게 이름만 적힌 공책. 망각의 계곡으로 접어들기 전,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 노인의 집념. 기록이란, 이토록 간절한 기억의 수단이다. 바위에 글을 새기듯, 머리에 기억을 새기는 일이다.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연말이면 이규태 작가의 달력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구매하곤 한다. 지구상 곳곳을 여행하며 사람과 동물과 자연의 인상을 그렸다가 한 해의 달력에 담는다. 특히 흔들리는 물결이나 잎사귀, 사물의 실루엣으로 여행지의 바람과 햇살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
6월 달력은 인도의 판공초. 히말라야산맥이 감싸 안은 이 거대한 호수는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부딪치면서 바닷물이 갇혀 생성되었다고 한다. 해발 고도 4350m, 짠맛 나는 하늘의 신비로운 ‘바다’가 내 방 벽에 물결치고 있다. 반짝이는 여름 햇살과 고산지대의 시원한 바람을 안고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인도의 호숫가에서 한 달 내내 살 수 있다니, 이 역시 기록의 힘이다.
판공초 옆에는 빈 메모지가 붙어 있다.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적어두기 위한 수단이다. 때로는 바닥에 누워 있는 글자보다 벽에 붙어 있는 글자가 더 믿음직하다. 작품을 구상할 때 아이디어들이 곁을 떠나가지 말라고 걸어둔 주문 같은 것이다. 바람에 날아가는 것들은 날아가게 두고, 남은 것들은 소설 속 인물의 골격이 된다. 그렇게 잔잔한 6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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