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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6주년 특집 )최후의 방어선이 된 도시(상)

한문역사 2026. 6. 26. 17:05

기획-6·25전쟁 76주년] 전쟁 수도, 대구를 기억하십니까<상>최후의 방어선이 된 도시

권종민 기자2026. 6. 24. 14:40
 
‘다부동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육군 50사단 장병들이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을 방문해 호국전시관을 둘려보며 한국전쟁과 낙동강 전투의 아픔과 참혹함을 되새기고 조국을 지킨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심을 기리고 있다. 대구일보DB

1950년 8월의 대구는 전쟁터가 되기 직전이었다. 서울은 이미 함락됐고 대전도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부산을 제외하면 사실상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낙동강 전선에 달려 있었다.

그 최후 방어선 중심에 대구가 있었다. 오늘날 대구 시민들에게 다부동은 칠곡군의 한 지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76년 전 다부동은 대한민국의 존망을 가를 격전지였다.

당시 군 지휘부는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구를 지켜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구가 함락될 경우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이 컸고, 이는 곧 대한민국의 패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실제로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왜관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최단 축선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북한군이 대구로 진입하기 가장 쉬운 길목이었다.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 격전지였던 다부동 일대 전황도. 북한군은 왜관을 거쳐 대구 방면으로 총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방어에 성공하며 대구 함락을 막아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지형 또한 특수했다. 328고지와 수암산(518m), 유학산(839m) 등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험준한 능선과 가파른 경사는 방어에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동시에 고지를 빼앗기면 방어선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구조였다.

1950년 여름 한반도는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렸다. 당시 기온은 섭씨 37℃까지 치솟았다. 30여 년 만의 극심한 가뭄까지 겹치면서 전장 환경은 최악이었다. 전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더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한국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던 미군 장병들은 탈진과 질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더 큰 위협은 북한군의 총공세였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군 제1사단 12연대는 상주 낙정리 일대에서 북한군 2개 대대를 저지하며 첫 교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어 15연대는 낙동강을 건너려는 북한군의 세 차례 도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전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국군과 유엔군이 다부동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는 모습. 치열한 화력전은 낙동강 방어선 사수의 핵심 전력이 됐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369고지가 북한군에 넘어가자 국군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고지를 탈환했지만 북한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8월 중순부터는 다부동 전투의 최대 격전으로 꼽히는 328고지 전투가 시작됐다. 왜관 북방 5㎞ 지점에 위치한 328고지는 대구 방어의 핵심 관문이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대구 방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8월13일 328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북한군 3사단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절했다. 328고지는 15차례 이상 주인이 바뀌었다. 국군은 일곱 차례 고지를 빼앗겼고 여덟 차례 다시 탈환했다. 새벽에 점령한 진지가 오전에 적의 손에 넘어가고, 밤이 되면 다시 탈환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일부 부대는 하루 만에 병력 절반 가까이를 잃기도 했다. 당시 참전 장병들의 증언을 보면 전투는 사실상 백병전 수준으로 전개됐다. 총검을 들고 능선을 오르내리며 싸워야 했고, 수류탄과 기관총 사격이 빗발치는 가운데 고지를 지켜야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미군은 대규모 공중폭격에 나섰다. 1950년 8월16일 왜관 북방 일대에는 B-29 폭격기 98대가 투입됐다. 약 960t의 폭탄이 투하됐다. 세계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폭격으로 산 전체가 흔들렸지만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국군은 포병 지원 아래 다시 반격을 감행했다. 8월24일 북한군 3사단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전투가 끝난 뒤 고지 일대에서는 2천여 구에 달하는 시신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328고지 공방전은 다부동 전투의 참혹함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다부동 전투 당시 참호에 몸을 숨긴 채 적의 공격에 맞서고 있는 국군 장병들. 다부동 전선에서는 고지를 둘러싼 백병전과 참호전이 수차례 반복됐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제공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8월 말 북한군은 다시 총공세를 개시하며 대구 북방 12㎞ 지점인 315고지까지 진출했다. 대구 함락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순간이었다.

당시 대구 시민들은 전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한군이 곧 대구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다시 피란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시장 상인들은 짐을 정리했고, 피란민들은 또다시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미 제7기병연대가 315고지를 탈환하면서 위기는 극복됐다. 다부동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뒤집혔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16일 전 전선에서 총반격에 나섰고, 20일에는 대구-김천-대전 축선을 따라 북진을 시작했다.

 

다부동 전투를 포함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 전차 30여 대를 격파하고 적 전사상자 1만7천500여 명의 피해를 입힌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 승리의 대가도 컸다. 아군 역시 1만여 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오늘날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자리한 산야는 평온하다. 푸른 숲과 능선은 전쟁의 흔적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박재현 다부동전적기념관장은 "76년 전 이곳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한 격전장"이었다면서 "다부동이 무너지지 않았기에 대구가 살아남았고, 대구가 살아남았기에 대한민국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6·25 전쟁 76주기를 앞둔 지난 21일 오후 국립영천호국원 참전용사 묘역에서 한 유족이 참배를 마친 뒤 고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진홍 기자

권종민 기자 jmkwon@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