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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속의 역사) 97. 신라3보

한문역사 2026. 7. 3. 05:53

신화속의 역사] 97 신라 3보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에 지은 구층목탑은 1천238년 몽고 침략 때 불탔다. 고증을 거쳐 1/10 크기로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전시되고 있는 황룡사구층목탑 모형. 강시일 기자

신라는 보물을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보물은 단순히 금과 옥으로 빛나는 물건만은 아니었다. 황룡사 장륙존상에는 먼 바다를 건너온 불국토의 꿈이 깃들었고, 황룡사구층목탑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신라인의 간절한 기도가 솟아 있었다. 진평왕의 천사옥대는 하늘이 왕권에 내린 신성한 징표로 전해졌다.

이 세 가지를 사람들은 '신라 3보'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탑은 사라지고 불상도 전하지 않지만, 황룡사 목탑지 땅속에서는 사리장엄구와 공양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설은 그렇게 유물로 남아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에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신문왕에게 내려주었다는 만파식적도 신라 3보 못지않은 보물로 신화와 설화 등의 다양한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신라의 보물은 하늘과 땅, 바다와 소리를 잇는 신라 백성들의 믿음이었다.
신라 3보의 하나로 진흥왕이 조성한 황룡사장륙존상의 남아 있는 대좌. 강시일 기자

◆신화전설 1: 신라 3보

신라 사람들은 나라에도 혼이 있다고 믿었다. 산에는 신이 깃들고, 강에는 용이 살며, 왕궁의 뜰에는 하늘의 뜻이 서려있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이 가장 찬란하게 모인 곳이 서라벌의 한복판에 우뚝 솟은 황룡사였다. 신라는 그곳에 부처를 모시고 탑을 세웠으며, 왕의 몸에는 하늘이 내린 옥대를 둘렀다. 훗날 사람들은 그것을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신라 3보라 불렀다. 황룡사 장륙존상, 황룡사 구층목탑, 진평왕의 천사옥대다.

 

첫 번째 보물은 황룡사 장륙존상이다. 전설은 먼 나라에서 시작된다. 인도 아육왕이 부처의 형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그 배가 파도와 바람을 따라 흘러 신라에 닿았다. 바다는 쇠붙이를 삼키지 않았고, 하늘은 그 길을 막지 않았다. 마침내 신라 왕경에서 그 금과 철은 부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장륙존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처의 인연이 먼 천축에서 바다를 건너 서라벌까지 왔다고. 신라는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불법이 머무는 나라 불국토라고.

두 번째 보물은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이 탑은 나무로 세운 건축물이기 전에 나라를 지키려는 거대한 기도였다. 자장은 당나라에서 신비로운 계시를 받고 돌아와 신라가 큰 탑을 세워야 한다고 아뢰었다. 선덕여왕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장인들은 나무를 다듬고, 승려들은 경을 외우고, 백성들은 숨을 죽여 탑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층 한 층이 올라갈 때마다 신라는 바깥의 두려움을 안쪽의 믿음으로 바꾸어 갔다. 아홉 층은 단순한 높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를 둘러싼 외세를 불법의 힘으로 누르고, 삼한을 하나로 묶고자 한 국가의 염원이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서라벌 하늘에 꽂힌 신라의 깃발이었다.
황룡사구층목탑의 심초석. 이 아래에서 구층목탑을 건축한 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가 나왔다. 강시일 기자

세 번째 보물은 진평왕의 천사옥대다. 진평왕이 즉위한 첫해, 궁궐 뜰에 하늘의 사자가 내려왔다. 천사는 상제의 명을 받들어 옥대를 전했다. 왕은 몸을 낮추어 그 보물을 받았다. 옥대는 금과 옥으로 꾸민 허리띠였지만 그 의미는 장식에 머물지 않았다. 왕이 큰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 옥대를 찼다는 이야기는 하늘과 왕권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상징이었다. 백성들에게 그것은 왕이 스스로 권력을 움켜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받든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장륙존상은 부처의 자비를 보여주었고, 구층목탑은 나라를 지키는 불법의 힘을 드러냈으며, 천사옥대는 왕권의 신성함을 말해주었다. 이 세 보물은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라는 스스로를 하늘이 돌보고 부처가 지키는 나라로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신라 3보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가 불안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찬란한 믿음의 형상이었다.
장육존상과 10대 제자상으로 추정해 모형판을 만들어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전시하고 있다. 강시일 기자

◆흔적: 황룡사구층목탑의 사리장엄

황룡사구층목탑은 사라졌다. 몽골의 침입으로 불길에 휩싸인 뒤 서라벌 하늘을 찌르던 거대한 목탑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무와 기와 장식은 불에 타고 무너졌지만, 탑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신라가 묻어둔 믿음이 남아 있었다.

황룡사 목탑지 한가운데 중심기둥을 받치던 심초석과 그 안팎에서 확인된 사리장엄구와 공양품들이 바로 그 흔적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땅속의 시간을 다시 전시실로 불러냈다. 목탑 심초석에는 사리를 모시기 위한 네모난 사리공이 마련돼 있었다. 조사 결과 사리공의 벽면과 바닥, 덮개돌의 안쪽까지 금동판으로 장엄한 사실이 확인됐다. 말하자면 작은 구멍 하나를 단순한 보관 공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리를 모시는 하나의 금빛 세계로 꾸민 것이다. 사리공 안쪽 금동판에는 칼과 창, 활을 든 수호신상이 새겨져 있다. 부처의 사리를 지키기 위해 땅속 가장 깊은 곳에도 호위무사를 세운 셈이다.
인공지능 AI가 황룡사 장육존상을 추정해 그린 그림.

사리장엄구의 중심에는 금동 사리함이 있다. 사리함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그릇이자, 탑의 생명을 품은 심장과 같은 존재다. 황룡사구층목탑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신라 불국토의 상징이었다면 사리함은 그 상징을 실제로 살아 있게 만든 핵심 장치였다.

사리함과 함께 확인된 사리기, 금동판, 사리공 덮개는 황룡사 목탑이 처음 세워질 때부터 사리 봉안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이뤄졌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872년 경문왕 대에 목탑 중수와 관련된 기록이다.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겨진 금동 사리함에는 목탑을 고쳐 세우고 사리를 다시 봉안한 과정이 기록돼 있다. 74행 900여 자에 이르는 글자는 목탑의 중수 사실과 당시 사람들의 이름, 봉안의 내력을 전한다.

신라 사람들은 탑을 한 번 세우고 끝내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탑을 고치면서 다시 사리를 모시고, 법사리와 공양물을 더하며 믿음을 이어갔다.
인공지능 AI가 진평왕이 천사옥대를 매고 신궁에서 나오는 모습을 그린 그림.

심초석 아래에서는 사리장엄구와 함께 여러 공양품도 확인됐다. 예전에는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은 물건이라는 뜻에서 지진구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청동그릇, 칼, 가위, 청동거울, 유리구슬, 백자 항아리, 귀걸이와 팔찌 같은 장신구들은 당시 신라인들이 탑 아래 무엇을 바쳤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의 나열이 아니었다. 왕실과 귀족, 장인과 승려, 이름 없는 신라인들이 함께 나라의 평안과 불법의 보호를 빌며 땅속에 넣은 마음이었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이제 빈터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빈터 아래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말한다. 탑은 사라졌지만 탑을 세운 신라인의 기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금동판의 빛, 사리함의 구조, 공양품 하나하나는 신라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두려워했으며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증언한다. 전설 속 황룡사구층목탑이 하늘로 솟은 신라의 기도였다면 사리장엄구는 땅속에 묻힌 신라의 심장이었다.
인공지능 AI가 신문왕이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으로부터 만파식적 보물을 선물받는 장면을 추정해 그린 그림.

◆신화전설 2: 만파식적

신라의 보물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은 눈에 보이는 금도, 손에 잡히는 옥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였다. 한 번 불면 온갖 파도가 잠잠해진다는 피리, 만파식적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 피리를 두고 나라의 근심을 쉬게 하는 신물이라 믿었다.

이야기는 동해에서 시작된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의 용이 됐다. 김유신은 하늘의 신이 되어 신라를 돕는 존재가 됐다. 통일의 큰 전쟁은 끝났지만, 신라의 마음은 아직 편안하지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품은 나라는 넓어졌고, 왕권은 더 단단한 상징을 필요로 했다. 그때 신문왕에게 동해에서 이상한 소식이 전해졌다. 감은사 앞바다에 작은 산 하나가 떠오르고, 그 산 위에 신비한 대나무가 자란다는 것이었다.

일관이 왕에게 "이는 필시 선왕께서 폐하께 선물을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 입니다"라며 동해로 행차할 것을 건의했다. 왕은 동해로 향했다. 파도는 먼 곳에서부터 숨을 죽이듯 밀려왔고, 바다는 마치 누군가의 말을 품은 듯 깊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낮이면 둘로 갈라지고 밤이면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가 있었다. 세상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대나무였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그 모습은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함께 내린 징표처럼 보였다. 나라를 세운 무력과 나라를 지키는 신성이 한 줄기 대나무 속에서 만나고 있었다.
인공지능 AI가 신라 3보가 한 곳에 밀집한 상황을 추정해 그린 그림.

신문왕은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다. 피리가 완성되자 신라는 그것을 월성 천존고에 깊이 보관했다. 그리고 나라에 큰 근심이 닥칠 때마다 사람들은 그 피리를 떠올렸다. 만파식적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든 사람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에는 하늘이 개었다. 거센 바람은 잦아들고 성난 물결은 평온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전쟁 뒤 흔들리던 나라의 마음을 다독이는 소리였고, 통일신라가 스스로에게 들려준 평화의 주문이었다.

만파식적의 신비는 신문왕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원성왕 때에도 이 피리는 다시 나라의 보물로 등장한다.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은 대대로 전해오던 만파식적을 왕에게 전했다. 왕이 이 피리를 얻자 하늘의 은혜가 두터워지고,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고 전한다. 그 소문은 바다 건너 일본까지 퍼졌다. 일본이 신라를 치려 하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뒤에는 금을 보내 그 피리를 요구했지만, 원성왕은 모른다고 말하며 내주지 않았다. 다시 많은 금을 보내 잠시 보기만 하겠다고 청했으나, 왕은 끝내 거절하고 도리어 은을 내려 사신을 돌려보냈다.

 

만파식적은 그렇게 신라의 품에 남았다. 그것은 적을 베는 칼이 아니었고, 성을 무너뜨리는 군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피리 하나가 군대보다 강하다고 믿었다. 보물은 때로 눈부신 빛보다 깊은 소리로 나라를 지킨다.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 그리고 그 뜻을 이어받은 신문왕과 원성왕의 이야기는 만파식적이라는 한 줄기 소리 속에 겹겹이 스며 있다. 신라의 파도는 그 피리 소리를 들으며 잠잠해졌고, 나라의 근심도 잠시 숨을 골랐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