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의당 詩와 文의 고찰
김 명 희
(강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1. 들어가는 말 2. 삼의당의 문학 세계 1) 유교적 부덕의 내면화 2) 琴瑟之樂의 화답 3) 규방의 고독과 설움의 서정 4) 목가적인 전원의 일상 5) 모성애적 悲痛과 歡喜 3. 나오는 말 |
<국문 요약>
김삼의당은 조선 후기 여성 문학자 가운데 시문이 많은 여성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삼의당이 살았던 시대는 서민 생활 깊숙이 이미 유교적인 규범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따라서, 삼의당 시문학에 나타난 다분히 도덕적인 시나 유교 이데올로기에 맞게 생활한 그녀의 삶이 그 당시로서는 여성생활의 正道였을 것이다.
삼의당의 성장시 대부분은 <내칙>편에 몰입하여 살 것을 맹세하며 실천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것은 삼의당 자신의 가치관이었으며 지향점이기도 했다.
또한, 삼의당의 문학관에서 시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맑게 비춰지’는 것으로 정의하고 시 창작에 있어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
삼의당은 이런 性情으로 성장하여 결혼한다. 결혼 첫날밤 남편이 삼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주며 아내가 평생 ‘충효’ 속에 살아갈 여인임을 칭송하자 이에 삼의당은 담락당 가문 자제들의 ‘효제와 충의가 집안에 가득하다’고 응수함으로써 아름답고 신의에 찬 부부임을 화답시로 과시하며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삼의당의 화답시와 화답한 산문은 두 종류로 나뉜다. 금슬을 자랑하는 ‘부부애’에 대한 시가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남편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격려하며 충고하는 문장도 다수 있다. 또한, 삼의당은 ‘空房의 시간’을 계절 감각에 맞추어 서정성으로 표출한다. 주로 ‘창 밖에서 한가로이 꽃잎 줍는 여인의 모습’이거나, ‘문 밖에 서있는 버드나무가 봄바람에 가지가 휘어지니 술잔에 부딪쳐 이별 노래를 슬피 부르는 모습’이다. 이렇듯 삼의당은 ‘창 밖을 응시’한 채 봄을 관조하는 여인으로 살았다.
봄과 마찬가지로 가을의 계절적 심상 역시 삼의당의 시적 상상력의 한 축을 이룬다. 가을 시에서도 ‘달이 뜨고 우물이 있고 창 밖을 응시하며 임을 그리는 모습’이 주된 제재다. ‘창 밖에 교교히 흐르는 달빛을 보며 임을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은 삼의당의 자화상이다.
남편은 과거 급제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다. 이로써 삼의당은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村婦로 농촌 생활을 즐긴다. 이때 지은 삼의당의 시들은 정겹고 소박하다.
삼의당에 산문에서는 그녀의 생활이 더욱 세세히 표출된다. 두 자녀와의 死別을 통탄하며 쓴 제문이 그것이다. 삼의당은 두 딸을 잃은 슬픔을 ‘운명론으로 체념하거나 음택의 편안함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극히 ‘제한되고 약한 모성성’을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남편에게 주는 편지글이다. 편지글의 대부분은 ‘과거 급제에 대한 집착과 격려와 당부의 글’이다. 심지어 남편의 낙방 소식을 듣고도 실망하는 빛 대신 돈걱정 말고 계속 학업에 정진하기를 독려하고 있다.
이상에 나타난 삼의당은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의 이름을 빛내며 가문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삼의당은 유교적 윤리 의식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 ‘婦德 이데올로기’의 여성이었다. 남편을 출세시키는 일이 곧, 현부가 해야 할 일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는 여성이었다. 두 딸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비통함과 생활의 고달픔과 고독한 생활 속에서도 ‘賢婦’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현부가 되지 못한 채 쓸쓸히 일생을 마친 조선 후기 여성으로 대표된다.
주제어:김삼의당, 여성시인, 유교적, 순종, 화답, 규방의 고독, 서정성, 모성성, 賢婦.
1. 들어가는 말
김삼의당은 조선 후기 여성 문학자 가운데 시문이 많은 여성 시인 중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논자가 김삼의당의 詩文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조선 후기 양반 몰락가의 전형적인 부인으로서 매우 긍정적인 생활태도로 살았다는 점을 쉽게 납득할 수 없어서였다. 조선후기는 이미 서민들의 문학이 득세하여 한시보다는 산문에 능한 부인(임윤지당, 의유당 김씨) 들이 다수 있었고 한문학보다는 국문시가인 규방가사나, 사설시조를 선호하던 시대에 김삼의당이 유독 한시와 산문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결같이 유교적 ‘안분지족’의 태도를 堅持하는 삼의당의 문학에도 여성주의 시각으로 본다면 힘겹게 살아야 했던 삶에 내재된 恨이 표출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조선시대 정조대에는 삼의당의 自序대로 ‘친교가 아름답고 밝아져서 인재와 큰선비가 많고 民謠가 성하게 일어나 어진 아녀자들도 잇따랐다’라고 한다. 또한, ‘나라 고을마다 태평가가 끊이지 않았고 시골 규수들에게까지 흥겹게 교화되어 예와 문물의 볼품이 많아졌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의당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비교적 문물이 풍요로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의당이 살았던 시대는 서민 생활 깊숙이 유교적인 규범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삼의당의 시문학에 나타난 유교적인, 다분히 도덕적인 시나 유교 이데올로기에 맞게 생활한 그녀의 삶이 그 당시로서는 여성생활의 正道였을 것이다.
삼의당의 일생을 간략히 상고하여 보면, 삼의당은 전라도 남원의 棲鳳坊에서 영조 45년 己丑년 1769년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연산대의 학자인 濯纓 金馹孫(1464- 1498)의 후손인 金海, 金仁赫의 딸이며 담락당 河氵昱(煜,湆)의 부인이다. 하립의 본관은 晋陽, 호는 湛樂堂이다. 삼의당과 남편 하립은 남원 출신인데 기이하게도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인연을 지니고 만났다. 두 사람의 집안 역시 고장에서 존경받는 학자 집안이긴 해도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을 걸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립은 번번이 낙방을 거듭하여 서른 살이 넘자 과거를 과감히 포기하고는 낙향한다. 부부는 鎭安에 땅을 조금 마련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고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으나 장녀와 셋째 딸이 일찍 죽고 아들 하나를 41세에 얻어 두 자녀를 길러냈다. 삼의당이 1823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55세다.
이와 같이 평생 유교적인 규율과 婦道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의 시문학과 그녀의 생활환경과의 연관성을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텍스트는 김지용․김미란 역의 한국의 여류한시와 민병도 편 조선역대여류문집 「삼의당고」, 허미자 편 조선여류시문전집 등으로 하되 번역문은 부분 수정하여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 삼의당의 문학 세계
기존의 연구사에서 삼의당의 문학세계를 전원적, 생활시, 목가적, 윤리관, 부부애, 긍정적, 평이성, 절제미, 閨怨, 靜的, 다양성 같은 핵심 단어로 규정짓고 있다.
이러한 삼의당이 조선 후기 여성이며, 두 딸을 잃은 어머니였다는 점, 남편과 실제 농촌 생활을 하며 생활시를 지었다는 점을 기반으로 삼의당 문학의 실상과 정체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1) 유교적 부덕의 내면화
우선 그녀는 성년을 맞이하면서부터, 자신의 성장 과정과 성년을 맞는 감회를 시로써 노래한다. 이 시편들을 통해 삼의당의 어릴 적 자화상과 조선후기 여성 교육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十三顔如花 열세 살 나이 얼굴은 꽃 같고
十五語如絲 열다섯 나이 말소리 가늘어
內則從姆聽 내칙은 이모 따라 배우고
新粧學母爲 화장법은 어머니 따라 배웠네
위의 시에서 어머니와 이모가 여성들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장법도 어머니에 의해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서 용모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그 당시 여성들의 필독서가 내칙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내칙> 편에 있는 법도에 관한 시다.
生長深閨裏 깊은 규방에서 자라나
窈窕守天性 요조숙녀의 천성을 지켜
曾讀內則篇 일찍이 내칙을 읽은 지라
慣知家門政 가문의 관습도 알게 되었네
於親當盡孝 어버이께 효도를 다하고
於夫必主敬 남편은 반드시 공경하며
無儀亦無非 잘하고 못하는 일없이
惟順以爲正 오직 순종만이 바른 일이네
이 시는 ‘여성 법도’를 익히는 노래다. 요조숙녀 같은 품성으로 자라나서 일찍이 읽은 내칙에 따라 가문의 풍습을 익히고 그에 따른 남편을 공경하는 법, 어버이께 효도하는 법 등을 배우고 익히며, 그 중 여성의 역할은 오직 ‘순종’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앞의 시가 여성 용모에 대한 노래였다면 뒤의 시는 여성의 내적인 마음가짐에 대한 노래다. 아름답고 단정한 용모에 고운 마음씨, 순종만이 여성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이었다. 이것이 조선조 여성들의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었으며 곧, 삼의당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다음 시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 분담에 대한 노래다.
早讀聖人書 일찍부터 성인의 글 읽고
能知聖人禮 성인의 예법 알 수 있었네
禮儀三千中 삼천 가지 예의 중에서
最詳男女別 남녀유별이 가장 상세하네
男不言乎內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女不言乎外 여자는 바깥일을 말하지 않네
內外旣有別 여자 남자 분별 이미 있었으니
當遵聖人戒 마땅히 성인의 훈계 따르리라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예법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지배 계층에서 서민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유교 이데올로기가 명실상부 조선 사회 전 계층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강오륜에서 ‘男女有別’이라는 예법은 성인의 훈계니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삼의당이 얼마나 <내칙>편에 몰입하여 살 것을 스스로에게 맹세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삼의당의 삶의 기준이며 가치관이었으며 인생관으로 엮어지는 모태가 되었다. 삼의당의 시 <無題>에서도 믿음을 제일로 꼽았고, 용모의 단정함과 아름다움도 매우 중요하지만 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외에도 <讀書有感>에서 삼의당은 덕을 쌓는 데는 논어 「학이」편을, 풍속의 교화에는 시경의 「주남」편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삼의당의 이런 삶은 삼의당의 문학관으로 나타난다.
出於性情方爲詩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 시가 되나니
見詩固何其人知 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네
存諸中者形諸外 마음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雖欲欺人焉得欺 다른 사람 속이고자 하나 어찌 속으리
淸晨坐讀召南詩 맑은 새벽에 일어나 앉아 소남 시 읽으니
墍梅懷春若相思 매실 주우며 봄 생각한다는 구절이 그리움과 같네
於此始知觀詩法 여기서 비로소 시 감상법 알 수 있으니
其意不可害以辭 가사만 보고 시의 뜻 해치면 안 되네
삼의당은 ‘시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맑게 비추어 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논어의 ‘思無邪’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삼의당은 ‘맑은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시를 읽으며, 가사만으로 시를 감상하지 말고 그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진실로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삼의당은 시를 性情을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뜻에 맞추어 평생을 詩 創作 생활을 한다.
삼의당은 이러한 유교적 부덕의 내면화로 성장하여 결혼한다. 성장과정에서 배우고 익힌 유교적 관습으로 일관되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많은 않았지만 결혼 시절에 지은 시들이 남과 다른 문학성이 있다.
2) 琴瑟之樂의 화답
삼의당은 유달리 화답 시나 화답 문이 많다. 삼의당은 첫날밤부터 남편 시에 화답을 하며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사연을 적어 두었다. 낭군이 연달아 두 수를 읊조리니 내가 화답하였다고 했다.
十八仙郞十八仙 열여덟 선랑과 열여덟 선녀가
洞房花燭好因緣 동방화촉 밝히니 좋은 인연입니다
生同年月居同閈 생일도 같은 해 같은 달, 사는 곳도 같으니
此夜相逢豈偶然 이 밤 만남이 어찌 우연이겠소
配匹之際生民始 배필의 만남이 생민의 시작이니
君子所以造端化 군자들도 이것을 바르게 세우려 했지요
必敬必順惟婦道 공경함과 순종함이 부인의 도리니
終身不可違夫子 종신토록 낭군의 뜻 어기지 않으리
삼의당은 위의 시를 첫날밤에 읊었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요, 부부 됨을 서약하는 시며, 아내 되는 다짐의 시이기도 했다. 삼의당의 일생을 시를 통해 추적해 보면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신혼 첫날밤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의당 부부의 달콤한 꿈은 우연이 아닌 生民의 시작으로 공경함과 순종을 다짐하는 부부의 연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부부 琴瑟은 아래 시들로 이어진다.
世間莫不有君臣 세간에 군신 없는 것이 없으니
草木猶然況是人 초목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랴
孝悌吾門諸子弟 효도하고 우애한 우리 가문 자제들
一心忠義滿家春 충성하고 의로움이 집안 가득 봄이라
담락당이 삼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주며 그 정원에 군자를 상징하는 모란, 대나무, 소나무를 심어 아내가 평생 충효의 뜻 속에 살아갈 여인임을 칭송한다. 이에 삼의당은 담락당 가문 자제들의 효제와 충의가 집안에 가득하다고 응수함으로써 아름답고 신의에 찬 부부임을 과시한다. 부부애를 나타내는 화답 시 이외에도 두 집안의 가문을 읊은 화답 시들도 있다. 담락당이 먼저 삼의당에게 나는 문효공의 후예이고 그대는 탁영공의 손자라 두 가문의 합치가 감격의 눈물이라고 시를 읊자 이에 삼의당은 문효공의 집안 속의 담락당이 12대 손이며 충효의 손자임을 자랑하는 시로 응수하며 이들 부부는 唱和함을 즐긴다.
이 외에도 삼의당이 낭군에게 화답한 시들은, ‘낭군과 함께 동원을 거닐며,’ ‘낭군이 산에 들어가 글을 읽다가 지어 보낸 시’에 화답한 시 등이 있다. 그 시들은 모두 삼의당과 담락당 부부의 琴瑟이 얼마나 和樂한가를 보여 준다. 다음은 낭군과 함께 동원에 갔을 때, 달빛이 너무나 곱고 좋으며 꽃 그림자가 땅에 가득해 낭군이 시 한 수를 읊기에 삼의당이 화답한 시다
滿天明月滿園花 하늘 가득 달이 밝고 정원에 꽃이 가득하니
花影相添月影加 겹쳐진 꽃 그림자에 달그림자 보태네
如月如花人對坐 달 같고 꽃 같은 임 마주 대하고 앉으니
世間榮辱屬誰家 세상 영욕 어느 집 이야기인가
달과 꽃 그림자와 임의 얼굴이 겹쳐지는 ‘봄밤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봄밤에 삼의당은 세상 영욕이 필요하지 않는 ‘無所有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이는 아름다운 밤에 임과 함께라면 어떠한 세상의 욕심도 필요치 않다는 감성적인 노래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아주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노래도 있다. 낭군이 산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데 격려와 더불어 따끔한 가르침을 내용으로 한 노래가 그것이다.
古人好讀澗投書 옛 사람은 글 읽느라 편지를 냇물에 던졌다네
此意嘗陳送子初 이런 뜻 일찍이 그대 떠날 때 말씀 드렸지요.
機上吾絲未成匹 베틀 위에서 짜던 베 아직 다 짜지 못했으니
願君無復樂羊如 낭군께선 다시는 악양자처럼 하지 마세요.
이미 삼의당의 남편이 편지에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학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음을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삼의당은 이에 화답하기를 옛 고사인 악양자의 이야기로써 학업을 포기하려는 남편에게 충고한다. 또한 삼의당의 편지글은 거의 같은 맥락에 글이다.
오직 의리로 누르고서야 애상하는 지경을 벗어날 수 있어서 충실한 마음이 속에 가득 차고 충실한 마음이 속에 가득 차면 힘차게 뜻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녀자의 그리워하는 정을 일으키시렵니까. 낭군께서는 의리로 정을 누르시어 뜻을 손상하지 마소서.
따라서, 삼의당의 화답 시와 문은 두 종류다. 금슬을 자랑하는 듯한 부부애에 대한 과시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또 다른 한 종류는 끊임없이 남편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격려하며 충고하는 문장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삼의당은 실제로 남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본인이 어려운 살림을 손수 꾸려 나가는 희생을 감내하면서 남편의 과거 공부를 도왔으나 결과는 담락당이 본인의 재주 없음을 알고 또, 식구들의 생활의 고단함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음을 인식한 후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온다. 삼의당은 담락당의 좌절에 순응하고 체념하며 夫唱婦隨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따르게 된다. 이같은 삼의당의 모습에서 체념적인 恨이 서려 있는 조선조 여성들의 뒤안길을 보는 듯하다. 결국 삼의당도 남편이 과거에 들지 못함으로 해서 양반의 가문으로 사대부가의 부인이 되지 못한 채 조선조의 평범한 부인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3) 규방의 고독과 설움의 서정
삼의당은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유독 길었다. 삼의당은 18세에 결혼하여 20세에 서울로 남편을 과거 공부를 위해 전송한다. 「贈上京夫子」의 시는 27세의 아내와 남편의 긴 이별을 10여 수의 연작시로 표현한 것이다. 그 시에는 ‘서방님 가는데 정표로 난초 꽃잎을 주워서 드린다’는 아내의 애틋함과 ‘역사책에 명예로운 이름 실리겠다’ 라는 과거 급제에 대한 희망과 ‘금의환향하여 고향 마을 빛내라’는 당부까지 세세하게 나타낸다. 그러나, 삼의당의 늦은 나이 42세 되어서야 겨우 鄕試에 붙은 담락당은 다시 會試를 보러 서울로 가지만 역시 낙방 소식만 안고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다음은 삼의당의 독수공방시절 지은 시들이다.
女兒柔質易傷心 여자들은 마음 약해 슬픔 잘 타서
所以相思每發吟 그리운 마음 들 때마다 시를 읊지요.
大丈夫當身在外 대장부는 바깥일을 하는 법
回頭莫念洞房深 고개 돌려 규방일랑 생각 마오.
人靜紗窓日色昏 인적 없는 사창에 날은 저물고
落花滿地掩重門 꽃잎은 떨어져 쌓이는데 중문은 닫혀 있네.
欲知一夜相思苦 하룻밤 상사의 괴로움 알고 싶다면
試把羅衾撿淚痕 비단 이불 걷어 놓고 눈물 자욱 살피렴.
삼의당은 서울에 계신 낭군에게 규방의 생각일랑 할 것 없다고 당부한다. 여자들은 그리움에 약해 시를 읊조리는 일로 시간을 보내지만 대장부는 바깥에서 활동을 해야만 한다며 본인의 외로움을 걱정하지 말라며 애써 자기 위안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는 계절과 함께 나타나는데 삼의당의 「春閨詞」에서 봄의 꽃들과 봄의 전령사인 제비, 꾀꼬리 등이 동원된 경치 속에서 이별을 일으키는 제재인 버드나무를 미워하면서 임을 그리고 있다. 신혼의 꽃다운 나이에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규방의 설움이 활기차게 나는 쌍쌍의 제비와 봄이라는 계절과 수심 그득한 한 여인의 여윈 모습의 대조를 통해 잘 형상화되고 있다.
삼의당의 시는 유난히 서정적이다. 그런데 삼의당의 서정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규방에서 느끼는 설움과 고독을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적 심상과 어우러져 표상한다.
봄은 민감한 여성들이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느끼는 감성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게 된다. 삼의당의 「春景」에도 봄과 꽃과 새소리 사이에서 느끼는 감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思君夜不寐 임 그리는 마음에 잠들 길 없고
爲誰對朝鏡 누굴 위해 아침이면 거울을 보랴.
小園桃李發 동산엔 복숭아꽃 오얏 꽃 피는데
又送一年景 또 한 해 좋은 경치 그냥 보내네.
위의 시에서 삼의당은 봄을 맞아 임을 그리워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삼의당은 거울을 볼 필요 없는 규방의 고독한 여인으로, 문 밖에서 들려오는 봄의 소리와 문 밖에 펼쳐진 봄의 정경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다. 깊은 정원에 봄이 무르익고 사람들은 봄잠에 취해 몽롱한데 새소리는 베갯머리에 들려오니 고독한 영혼이 여인의 성정을 흩어 놓는다. 삼의당은 또한 바람불어 비단 옷 입고 창 밖에서 한가로이 꽃잎 줍는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문 밖에 서있는 버드나무가 봄바람에 가지가 휘어지니 술잔에 부딪쳐 이별 노래를 슬피 우는 것으로도 노래하고 있다. 삼의당이 ‘늘 문밖을 응시하고 창 밖의 봄 정원을 관조’하는 여인이자 한없이 외로운 심사를 지닌 고운 성정의 조선조 여인임을 알 수 있다.
그 외의 시 「折花」 「對花」등에서도 창 밖으로 보이는 봄의 정경을 봄 햇살과 벌과 나비, 꽃의 붉은 색 이미지를 배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아름답고 화려한 계절 봄인데 삼의당이 괴로운 이유는 ‘임이 부재중’이기 때문이다. 임이 없는 봄은 짧은 밤인데도 봄꿈을 꾸게 된다. 봄날에 삼의당은 두 줄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렇게 봄의 정경과 여성 화자의 심정을 매우 서정적으로 표출하였다.
봄과 마찬가지로 가을의 계절적 심상 역시 삼의당의 시적 상상력의 한 축을 이룬다. 삼의당의 시에서 가을에 부치는 시는 「西窓」, 「秋夜雨2수」, 「秋閨詞11수」, 「梧桐雨」 등 다수 있다. 봄은 계절적 아름다움과 대조적으로 고독한 여성의 감회가 있어 恨이 서리고 가을은 가을이라서 계절적 쓸쓸함과 대비되어 고독하다. 가을을 형상화한 시에서는 담장 위의 달, 등불 심지, 가야금 소리, 오동잎 소리, 가을비 등의 소재가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우선 「秋閨詞」 에서 2수를 뽑아 보면,
獨步紗窓夜已深 홀로 사창가 걷노라니 밤은 깊어가고
斜將𨥁股滴燈心 비녀를 기울여 등불 심지 돋우고
天涯一別無消息 멀리 이별하고 가서는 소식 없으니
欲奏相思抱尺琴 가야금 부여안고 그리운 정 노래하네
孔雀屛風翡翠衾 공작 그린 병풍에 비취색 이불
一窓夜色正沉沉 온 창의 밤빛이 깊어만 간다
相思惟有靑天月 임 그리는 마음을 푸른 하늘 달님만이 알아
應照人間兩地心 응당 양쪽 세계를 비추는구나
달이 떠오르는 시각 이미지에 가야금을 타는 청각 이미지를 보태어 더욱 임이 그리워지는 화자인 나의 심정을 표현했다. 창밖에 펼쳐지는 가을 밤 정취에 임이 그리워 하늘을 응시하는데, 마침 하늘 한 가운데 달이 덩그러니 떠 있어 달에게 하소를 하든가 스스로 달에게서 위안을 받는다는 것 역시 한시의 일반적인 발상법이다. 삼의당 역시 가을밤의 서정적인 정취가 펼쳐지는 창 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는 아낙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임이 없는 가을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야금을 타기도 하고, 비록 떨어져서나마 임과 함께 달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가을밤을 지새는 것이다.
삼의당의 시중에서 「淸夜汲水」는 가을 정취를 그린 시 중에서 백미다.
淸夜汲淸水 맑은 밤에 물을 길러 갔더니
明月湧金井 밝은 달이 우물 속에서 떠오르네
無語立欄干 말없이 난간에 서 있자니
風動梧桐影 바람에 흔들리는 오동잎 그림자
가을밤에 물을 길러 가는 아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물 속에 달이 떠 있어 마치 임의 얼굴을 보는 듯 가만히 있자니 바람에 흔들리는 오동 잎 그림자에 다시 한 번 임인가 하는 의구심으로 놀라는 가을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이 밖에 밝은 달이 서창에 비추고 있어 쓸쓸하고 오동잎에 떨어지는 가을비가 임 그리는 눈물과 같아 잠 못 이루고 둥근 달을 보면서 다듬질을 하는 아낙의 모습이 되어 기나긴 가을밤을 지샌다는 시들에서 가을은 달과 함께 있다. ‘달이 뜨고 우물이 있고 창 밖을 응시하며 임을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주된 제재다.
이와 같이 가을 이미지는 봄의 서정과 마찬가지로 쓸쓸한 소회를 토로하기는 하나, 푸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임을 기다리는 현명한 여인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더불어 겨울을 준비하는 여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임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도 보인다. 그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은 달빛이다. 창 밖에 교교히 흐르는 달빛을 보면서 임을 느끼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4) 목가적인 전원의 일상
삼의당의 남편은 부인이 그렇게도 소원하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낙향한다. 삼의당의 시편마다 남편이 과거에 급제해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묻어난다. 결국 남편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삼의당의 말을 빌면 낭군이 산 양지쪽에 두어 경의 밭을 사 놓고 농업에 힘쓰므로 첩이 몇 편의 농사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竹籬東畔早鷄鳴 대울타리 동쪽 둔덕에 새벽 닭 울면
在家農夫出畝耕 집에 있던 농부들 밭을 갈러 가네
小姑汲水炊麥飯 며느리는 물 길어다 보리밥 짓고
大姑洗鼎作葵羹 시어머니 솥을 씻어 아욱국 끓이네
농촌의 하루를 평범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시골 농사는 농부와 아내와 시어머니와 나무꾼들, 하녀 모두의 공동의 작업이다. 정겨운 농사일과 정겨운 시골 풍경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런가하면 박꽃 핀 시골에 저녁연기 피어오를 때 모내기를 끝내고 황소 한 마리 끌고 도롱이 삿갓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 다시 내일 일을 준비하려고 호미를 씻어 놓는 농부의 일상을 나타낸다. 바로 이런 점이 조선조 후기에 나타나는 일상의 노래다. 삼의당은 이렇게 평범한 생활을 직접 영위하였으며 시 또한 일상을 넘는 파격을 시도하지 않는 생활 시들이다. 시골에 살면서 삼의당은 철저한 농부의 아내로 생활한다.
比簷茅屋自成村 나란히 선 초가집들 마을을 이루고
細雨桑麻晝掩門 뽕밭 삼밭엔 가랑비 오고 낮에도 문은 닫혔네.
洞口桃花流水去 마을 앞 흐르는 물에 복사꽃 잎 떠가니
却疑身在武陵園 이 몸이 무릉도원에 있는 것 같네.
白竹雙扉日暮扃 날 저물어 대 사립문에 빗장 걸고 나니
蒼烟深處盧令令 푸른 안개 깊은 곳에선 삽살개 짖네.
田家近日麻工急 요즈음 농촌은 길쌈하기 바빠서
次第隣燈査若星 집집마다 켜 놓은 등불별처럼 반짝이네.
삼의당은 농촌의 전원생활을 무척 즐긴다. 본인 스스로 농부의 아낙으로 만족하며 길쌈을 짜는 생활을 즐기며 농촌에서 펼쳐지는 목가적인 생활을 시로 읊는다. 삼의당은 목동의 시뿐만 아니라 農歌도 즐겨 쓰는데 그의 시는 한가하며 아름다운 고향의 정겨운 풍경을 부드러운 어조로 담아내고 있다. 아이들과 향기로운 풀들이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창 밖의 풍경’이 즐겨 묘사된다. 그래서 삼의당의 시들은 더욱 정겹고 소박하게 느껴진다. 삼의당이 농촌의 생활을 갈등 없이 즐겼다는 사실은 「村居卽事」 3수를 통해 재확인된다.
棲鳳村中生長 서봉촌에서 나고 자라
來東山下寓居 내동산 밑에 자리 잡고 사네
蕭灑數間茅屋 수 칸 초가를 깨끗이 소제하고
好讀一床詩書 책상에 앉아 詩書를 즐겨 읽네
서봉촌은 지금의 전라도 남원이다. 내동산도 전북 진안의 지명이며 삼의당의 부부가 농사를 지으며 살던 곳이다. 그곳에서 집안을 깨끗이 소제하고 살면서 詩書를 즐기는 두 부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 「村行卽事」 「草堂卽事」 「草堂雪景」 등 같은 부류의 시들이다. 쓸쓸한 초가에 방은 두세 칸이며 그 뒤에는 푸른 산이 있고 꾀꼬리는 종일 우는데 창 밖 풍경 바라보는 주인은 한가롭다. 한가로운 초당에도 소식이 오는데 옛 친구가 머물다 돌아가시기도 하고 새로 오신 손님은 머물지 않고 떠나시기도 하고 눈꽃 경치를 보며 즐기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들이 삼의당의 전원적이며 목가적인 생활 터전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럽고 진솔하며 소박한 시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5) 모성애적 悲痛과 歡喜
삼의당의 시가는 당시 벼슬이 끊긴 양반 계급이었다. 媤家를 일으키기 위해 삼의당은 남편의 과거 급제를 간절히 원했으나 끝내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남편의 급제를 보지 못한 삼의당의 아내로서의 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 자녀와의 死別이 그것이다. 삼의당은 세 딸을 두었지만, 셋째와 첫째 딸을 잃고, 40이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뒤늦게 아들을 얻는다. 삼의당의 모성으로서의 恨은 제문의 형식으로 표출한다. 삼의당은 제문 3편을 썼다. 딸을 잃은 슬픔을 표현한 제문 2편과 동서를 잃은 제문 1편이 그것이다. 우선 셋째 딸을 잃은 슬픔을 읊은 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사람이 한 번은 겪는 일이고,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살아서 세상에 기탁하는 것은 기뻐하고 죽어서 돌아가는 것은 슬퍼하는가. 살아서 근심을 끼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고 장수하면서 선하지 않은 것은 요절하는 것보다 못하다.
너는 갑인년(1794) 5월에 태어나서 을묘년(1795) 3월에 죽었으니 네가 세상에서 산지가 며칠이며, 네가 나의 사랑을 받은 것이 몇 달이나 되었는가.
나는 너의 죽음을 다행이라 이르고 슬퍼하지 않는다. 만약(네가 나의) 품을 벗어나 스승의 가르침을 순순히 따라 삼실을 잡고, 명주실을 다듬어 베를 짜고 끈을 엮다가 하루아침에 나에게 작별하고 일찍 죽었다면 나의 슬픔이 어떠했겠느냐. ⋯⋯ 나는 이 때문에 사람의 살고 죽는 것으로 근심하거나 기뻐하지 아니한다.
삼의당은 셋째 딸을 낳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잃게 된다. 삼의당은 딸을 잃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제문을 써서 ‘자신을 달래고 위로’하고 있다. 셋째 딸을 저승으로 떠나보내고 난 어머니의 심정을 담담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네가 짧게 살다 간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한다는 등에서 생사에 대한 초월적 의지를 엿보게 한다. 막내딸에게 정을 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차라리 훌쩍 크고 난 후에 잃는 것보다는 그 슬픔이 덜하다고 말하는 삼의당의 모습은 체념으로 이어지는 한의 양상을 볼 수 있다. 삼의당은 ‘생사 여부에 따라 근심하거나 기뻐하지 않겠다’ 라는 마지막 말로 어느 정도 인간 수명의 장단에 대해 초탈하고자 하는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난설헌은 「哭子」 라는 시 한 편으로 자식 잃은 비통함을 체념이 아닌 한의 뼈저림으로 읊어 조선시대 뭇 여성들을 울렸다. 삼의당은 「곡자」시처럼 시로써 자식 잃은 슬픔을 형상화시키지 않고 제문으로 표출하여 많은 말로 슬픔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 같다. 삼의당이 셋째 딸에 이어 첫째 딸을 잃고 쓴 제문이다.
아아 슬프다. 네가 인간 세상에 있은 지가 겨우 열 여덟 해이다. 수명은 어찌하여 이십도 채우지 못하고, 어찌 성인에 이르지도 못하고 일찍 죽었느냐. 우리 집에 부리는 노복이 없어 밥 짓는 일을 너에게 맡기고 방적 일도 너에게 맡겼다. 일이 아무리 고되어도 (너는) 사양하지 않았고, 노역이 매우 힘들어도 (너는) 피하지 않았다. 네가 나에게 힘을 다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내가 너에게 (어미의)도리를 다한 것은 만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생각이 이에 이르자 더욱더 슬퍼지는구나. 네가 막 아플 때 단지 (네가)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또한 부지런히 약을 지어 먹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네가 죽은 날에 바람이 쓸쓸히 불고 차가운 눈이 내리며 천지간의 추위가 살을 에이는 듯 스며오니 사람이 그를 따라 송구해지는구나. 외로운 집에는 돌보고 보호할 사람이 없었으며 너의 동생 또한 막 홍역을 앓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 또한 어미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마디마디 통탄스러울 뿐이나 비록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네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나 혼례를 청하는 글이 서울에서부터 왔다. (내가) 그것을 펴보다가 다 읽지 못하고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다.
삼의당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첫째 딸을 18세 되던 계해년(1803 순조 3년)에 잃는다. 삼의당 내외가 극도로 가난하게 살던 때라 약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이승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한이 제문에 나타난다. 삼의당이 더욱 비참해질 수 밖에 없는 사연은 또 있다. 그것은 딸이 세상을 등진 후에 청혼서가 날아든 일로 이 경우를 당해 모성의 힘은 혼절하여 쓰러질 수밖에 없는 처참한 지경에 빠진다. 여기서의 삼의당은 딸을 잃은 슬픈 마음을 어찌해도 가눌 길 없으나 음택의 편안함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제한되고 약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삼의당의 딸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밥짓는 일’, ‘방적 짜는 일’ 등 어머니의 가사 노동 일부를 물려받아 역할분담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어머니와 딸은 이런 연대감으로 해서 더욱 돈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오른팔 역할을 해 온 딸이 죽었으니 삼의당은 자신의 팔 하나를 잃은 듯, 가슴에 못이 박힌 듯 고통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이처럼 두 딸을 여읜 후 슬픔의 시간 속에서도 삼의당은 둘째 딸을 시집 보내면서 시를 짓는데, 이 시에서도 모성애가 물씬 풍긴다.
之子于歸日 딸자식이 시집가던 날
⋯⋯ ⋯⋯⋯
季妹泣相別 작은 딸 울면서 이별하네.
臨門贈一語 대문에서 내가 준 말 한마디
宜家又宜室 편안하게 또한 편안히 살아다오.
두 딸을 잃고 하나 남은 딸을 시집보내는 어미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였을까. 삼의당은 시집가는 딸을 대문에서 배웅하면서 진눈깨비 흩날리는 날 여종을 앞세워 떠나는 딸에게 제발 편안히 잘 살아 달라고 당부한다. 여러 말 않고 ‘잘 살라’ 는 말이 어미로서 할 수 있는 단 한마디였을 것이다. 당부하는 말의 응축성이 돋보인다. 모성으로서 삼의당에게 비통함을 더해주는 것은 여자 나이 마흔이 되도록 아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엔 아들을 두지 못하면 ‘無子’라고 하여 자식이 없는 것과 같았다. 아들을 낳지 못한 모성은 이미 모성이 아닌 不母性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힘은 자식에게서 나오고 자식은 아들을 뜻하기 때문이다. 삼의당의 집안이 세도가는 아닐지라도 향반이고 과거에 급제해 세도를 다시 찾고자 하는 가문이고 보면 유교적인 집안에서 보듯 아들 선호사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실제 삼의당은 아들을 낳기 위해 천지산천에 기도한다.
사람은 천지 가운데 삼재 속에 하나로 한 몸의 기운은 곧 천지의 기운이요 산천은 곧 천지 기운의 정기가 어린 곳이라 기운을 같이하여 서로 구하면 쉽사리 감응하여 통할 것이라 옛 어른들께서도 천지 산천에 빌어 이상한 감응을 많이 얻었다 하니 내 또한 빌기로 작정하고 목욕재계 한 뒤에 내동산 깊은 골짜기에 이르러 빌었더니 이해 순조 1808년 순조 6년 6월에 태기가 있어 만 열 달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榮進이라 하였다.
아들 출산은 삼의당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고 歡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늦게 낳은 아들의 이름을 榮進이라 함도 과거에 급제해 가문을 일으켜 보라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삼의당이 다행스럽게 늦게나마 아들을 두어, 딸을 잃은 슬픔을 거두고 삶의 희망찬 행진을 다시 하게 되지만, 그의 일생을 반추해보면 행복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삼의당은 아들 영진이 14살 되던 해 이승을 하직한다. 아들의 효도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아들의 과거 공부를 위해 남편에게 하듯 뒷바라지도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이처럼 삼의당은 어머니로서 悲痛과 歡喜의 순간을 보냈지만 환희의 시간보다는 비통함 속에서 더 많은 세월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3. 나오는 말
이상으로 삼의당의 시와 문을 고찰하였다. 삼의당의 문학세계를 유교적 부덕의 내면화, 금슬지락의 화답, 규방의 고독과 설움의 서정, 목가적인 전원의 일상, 모성애적 비통과 환희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유교적 부덕의 내면화에서는 생활고와 부부의 별리에서 오는 고독, 자식의 사망 등으로 힘겨운 일생을 살아가지만, 유교적 관습에 의한 극복과정을 작품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금슬지락의 화답에서는 부부애에 대한 애틋한 심정과 끊임없이 남편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격려하며 충고하는 문장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남편인 담락당의 과거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순응하며 따르는 유교적 여성관을 볼 수 있다.
규방의 고독과 설움의 서정은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신혼 시절에 쓴 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봄이라는 계절에 임해서는 ‘창 밖에 선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가을이라는 계절을 통해서는 달과 함께 어우러진 가을 풍치와 쓸쓸한 소회 속에서도 ‘임과 함께 달을 본다’ 라는 달의 중개자적인 역할에 대해 희망과 위안을 얻는 현숙함이 묻어난다. 이 시문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자연을 보고 느끼며 공감할 뿐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감회조차 道를 넘지 않는 차분한 抒情을 볼 수 있다.
목가적인 전원의 일상에서는 남편과 함께 실제 농촌에 살면서 夫婦和樂을 즐기는 일상의 목가적인 생활시를 읊는다. 이 시문들은 농촌풍경, 농촌 생활의 일과 등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어 그들 부부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인 듯 하다.
모성애적 비통과 환희에서는 셋째 딸과 첫째 딸을 먼저 보낸 삼의당은 祭文을 써서 딸들을 좋은 음택으로 보내고자 하는 모성애가 나타난다. 겨우 둘째딸을 결혼시키는 삼의당은 부탁하는 말이 ‘잘살라’는 당부만 할 수 있는 연약한 모성성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41세에 산천에 빌어 아들을 얻은 삼의당은 환희와 희망 속에서 14년을 살다 쓸쓸히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번 논고에서 삼의당의 기행시와 십이월사 중국시제에 붙은 시들은 제외하였다. 후에 삼의당의 문집을 전역하여 그의 삶과 문학을 새로 조망함을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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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Kimsamui-dang's Poetry and Proses
Kimsamui-dang is one of the women poets who wrote many poems during the late Chosun. The Confucian norm has taken its position in the period. Therefore, Samui-dang's Confucian life and her moral poetry may be the right path of women living in the time.
When she has grown, Samui-dang swore to herself that she would live a full life by mental principle, and tried to act up to it. That was her view, values and goal of life.
Samui-dang defines a poetry as that springs up from one's mind and is clearly reflected as if we see his or her face. And she carried out the definition in her creative writing.
Samui-dang grew up and got married having the attitude. On the first day of her marriage, she answered her husband with a poem of the ties between man and wife. Samui-dang and her husband, Damrak-dang, sang the beauty and faith of a couple; Damrak-dang praised his wife for that she would live her life with loyalty and filial piety. Samui-dang responded to it with that the Damrak-dang's family was full of filial piety, brotherly love and loyalty.
Samui-dang's poetry and proses are classified by two topics. Most of them show the love of a couple, and the others are written for encouraging her husband in studying. Samui-dang also expressed the seasonal appreciation in the lyrical poetry that she had felt in her grass widow's place: poems about a woman who leisurely gathers petals outside and of a willow whose twigs sway in a spring breeze. She was solitary woman always looking out the window and contemplating the spring garden. Samui-dang wrote the fall image as well: the moon, a well, and a woman staring outside of a window are the important materials in her poems. The woman who staring at the moonlight and missing her lover seems to be the Samui-dang's self-portrait.
Damrak-dang's fail in the State Examination(Kwa-geo) made Samui-dang live a rural life. she was no longer a waiting woman but was enjoying the farmer's life, when she wrote more affectionate and naive poems. Her proses well show her country life.
In her funeral odes, Samui-dang lamented bitterly the bereavement of her two children. Samui-dang's first daughter has died when she was eighteen years old in 1803, the third year of Sunjo. She became such a frail mother that she could not but expressing her grief as wishing her daughter to rest in a tomb.
The other proses which she wrote are the letters to her husband. We can see her persistence in the State Examination. She wasn't disappointed at the news of her husband's fail nor abandon a hope but urged her husband to go ahead of the study.
Samui-dang was an ambitious woman. She devoted herself to make her husband pass the State Examination, rise in the world and gain fame, and keep the honor to his family. She fulfilled herself in the Confucian moral consciousness and tried to complete the womanly virtues. She endured her own sacrifice since she thought a wise wife should make her husband succeed in life. While she had suffered two daughters' death, she kept wife's duty. She herself lived a hard and lonely life, but finished her lifetime without being the wise wife.
Key words:Kimsamui-dang, women poet, Confucian, values and goal of life, Damrak-dang, loyalty and filial piety, ambitious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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