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 인용문 2집

장기려박사가 북녘의 아내에게 쓴 편지 .

한문역사 2023. 10. 1. 19:38

題:나는 아직도  꿈속에서 당신을 만납니다. 

북녘의 아내에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건만 ,혹시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허탈한 마음을  주체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그렇다고 당시는 쓰지않던 :택용이 어머니: 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상하고...

어느덧 40년이 흘렀소 .

6.25 참화로 가족과 생이별한 이가 어찌어찌 나 뿐이오만 

해마다 6월이 오면 뭉클 가슴깊은 곳에서 치미는 이산의 

설움을 감당못하고 기도로 눈물을 삭이곤  합니다. 

택용,신용,성용,인용,진용,북에 두고 온 다섯애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얘기는 어찌 흘러 전해진 소식으로 들었소.

1950년 12월  3일,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을 떠날 때 

둘째 기용이만 데리고 월남한 것이 지금 내 가슴속의 못이

되었다오.그것이 벌써 40년전. 당신과 내가 나이 여든이 되도록

북과 남에 헤어져 애틋한 그리움만 간직한 채 살게되는

시작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소 .의사란 직분 때문에 국군야전병원 

엠브런스를 얻어타고 평양을 빠져나올 때 거리의 아수라장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날 아침,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이용 못해 임시 부교를 건너서나마 좀 더 남쪽에 가 있겠다고 

당신과 다섯 아이가  신양리 집을 나선 뒤 나는 교회에 가 맹렬히

기도를 했더랬소.  오후 4시 경 ,국군야전병원 일을 해 준 관계로 

친해진 安소령이 앰브런스를 대고, 타라 했을때 나는 한 두어달

후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이란 생각으로 차에 올랐답니다. 

그때 신양리 집에서 부모님들도 계셨지만 :중공군이 내려오면 

젊은이들은 모두 죽인다니 너만 타고 떠나거라 .

우리는 집을  지키겠다 :고 말씀하셔 부모님도 남겨둔 채 였지요.

그 일도 한(恨)으로 남았습니다.

피난민들로 북적이는 평양종로거리를 앰브런스가 달릴 때 기용이가

하염없이 창밖을 보다 문득: 아버지 저기 신용이...: :하고 외친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환자 차에 얻어타기도 했으려니와 차를 세운다면 피난민들이 몰려 와 

너도 나도 태워달라고 간청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며칠간 당신과 아이들은 걸어서 남하하다가 중공군이 앞질러 

가는 바람에 울며 평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나중에 목격자들 한테

들었습니다.  다 내 불찰입니다.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 않았다면...또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

당신도 기억하지요.

전쟁의 책임을 ,또 역사의 심판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까?

1945년 소련군이 진주하고도 5년간을 당신과 나 우리가족은 평양에 살았지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의 신앙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유물사관을 심어주겠다고 

별렀지만 실패한 것을 당신은 똑똑히 기억하겠지요 

당시 내가 김일성대학 의대교수로 있었고  또 김일성의 맹장수술도 해 

주었다는 허황된 소문도 나돌았지만 나는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소 .김일성대학 부총장 박일, 부속병원장 최응석등이 

:1년 후면 장선생을 꼭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드리리다: 고 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무었이었습니까

여보, 평화통일에의 꿈은 40년 전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지금이나

북과 남의 우리민족 모두의 염원일 것이요, 특히 북녘에 부모,처자를 

두고 와 불효자, 불민한 남편, 그리고 제 도리를 못한 아버지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에게는 민족사랑에 의한 평화통일을 보는 것만이 

여생의 마지막 소망이기도 하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들이 속속 통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슨일이 있어도

무력에 의한 통일은 반대합니다. 

당신과 가족이 보고싶다고 다시 수천수만의 피를 흘리는 댓가로 

우리가 재회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택용 어머니. 

나는 요즘도 이따금  당신과 아이들의 꿈을 꿉니다.

1950년 월남 후 부산에 내려와 세운 무료병원,복음병원 앞에 당신과

내가 서 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당신을 삼켜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놀라 일어나보면 텅 빈 방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 

당신에 대한  나의 깊은 사랑을  다시 느낍니다.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준 노래를 나직이 불러봅니다.

:단풍잎은 떨어져서 뜰 앞을 쓸고 나간다. 

누런 국화향내는 바람을 떠나 살더니 

처량한 가을이여,......

붉은 물 풀어놓은 것 같이 

찬란하다 낙조:

내가 지금 인생의 낙조에 들어섰으니 이제와서 부르라고 당신이 

가르쳐준 것이었을까요.

40년을 남한에 살며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나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 아니다. 

이 사랑은 육(肉)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나있을  때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  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追記: 장기려 박사는 1950년  한국전쟁때 고향 평양에 부모와  아내,

그리고 다섯  아들을 남겨둔 채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둘째아들

:기용:이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날부터 어느 하루도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날이 없었다. 하루를 3년만큼 이나 고향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날은 돌아오지 않고 가족을 두고 온 뉘우침과 아픔은 쌓여만 갔다

장박사는 재혼도 하지 않고 부산에 두 개의 병원을 지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 80세인 박사는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아내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아내와 헤어진 지 40년만에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로 한다 

1990년 6월 25일자로 된 이 편지는 마땅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한 의사가 

분단의 비극때문에 통곡의 세월을 넘어서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순애보이다. 

2023. 10.1 밤 7시 20분 넘넘 콧등 찡하게 읽어 본 편지라 여기에 抄해본다.본훈 .

 장기려박사

(1911년 8.14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95년 12.25. 부산에서 85세로 歸天하시다.

일본 나고야 대학교 의학박사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름

'그외 인용문 2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고 또 읽어도 참 좋은 글 .  (1) 2023.10.11
새해엔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0) 2023.10.04
憶月庭(월정을 추억하면서)  (0) 2023.09.30
추석달  (0) 2023.09.29
仲秋斷想  (0) 2023.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