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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중반기 재임시절

한문역사 2025. 7. 13. 14:04

대통령직 재임 시절

5·16 군사정변

 이 부분의 본문은 5·16 군사정변입니다.

주한 미군 총사령부를 방문, 멜로이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1961년 8월 21일)

5월 20일, 장도영과 함께 중앙청 광장에서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106]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초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대통령 윤보선
민주당 신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던 그는 군사 정변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묵인한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오며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107]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107]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 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구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외 폭력배들

또한, 정변이 발생하자마자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최무룡, 김지미 등 연예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던 폭력배 임화수, 꿀돼지라는 이름으로 폭력배들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정식,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을 두둔한 책임을 지게 된 최인규, 그리고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데다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못된 짓을 저지르며 특히 4·19 혁명 때 민간인에게 발포 명령을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한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는데 박정희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구악 일소, 즉 과거의 잘못된 점을 모두 없앤다는 명분으로 조리돌림을 실시한 후 이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108] 또한 정변 한 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쿠데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쿠데타는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109]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했다.[110]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110]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110]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111]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111]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112]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1961~1962)

계엄사령관이자 초대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지어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해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17]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에게는 50만 환, 의친왕비(妃) 김 씨에게는 30만 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 씨와 삼축당 귀인 김 씨에게는 각각 10만 환 등 모두 100만 환을 지급하였다.[113]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영친왕)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114]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115]

1961년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

1961년 미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만나주는 조건으로 일본 이케다 총리와 만나라는 지령을 내렸다. 10월 10일 당시 일본 도쿄에서 6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고 있던 배의환 회담 수석대표와 정일영 당시 서울대 교수에게는 '급거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곧바로 서울에서 박 의장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박정희 의장과 김종필 정보부장과 만나 예상 회담의제와 일본의 반응에 대해 준비했다. 정 교수는 박 의장에게 일본이 현찰로 달러를 주지는 않으려고 할 것이며 대신 물자나 산업 노하우를 가져올 것이며, "그 경우 우리 산업 및 경제가 일본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미리 설명해줬다.[116]

1961년 11월 12일 회담에서 이케다 총리는 예상대로 현금이 아닌 산업 건설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 명목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박 의장은 청구권 문제에 대해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청구권"이라면서 "상당한 액수의 청구권을 한국이 갖고 있는데 일본이 5천만달러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116]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은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117]

한편 12월 학사 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 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7]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1963)

1963년 대장 예편한 박정희

박정희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그해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舊)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17] 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118][119]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근혜) 전 대표만 (정수장학회 반환과 관련한)결단을 내린다면 ‘자명(김지태의 호)·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120]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121]

1962년 12월 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하나로 전두환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 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일축했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122]

통화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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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123]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 축재자들의 자금 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연이은 연계 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돈을 일정 비율에 따라 증권으로 강제 전환함에 따라 중공업 육성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124]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화교 5,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 명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금융 상업적 경제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통화 개혁 정책은 예금 동결 조치를 불러왔고, 전체 공장의 45%는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125]

그러나, 예상보다 검은 돈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은 미국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철회를 강요받았으며, 자금 융통이 제약을 받아 중소기업 가동률이 50%로 떨어지는 등 경제난까지 야기하여 거두어 들이고 실패하게 된다.[126]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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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대통령 후보자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127]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128] 김희덕(金熙德)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柳陽洙)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128]

같은 해 4월 8일에는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했다.[129]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군탄리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 허정, 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 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사상 검증 의혹

1963년 10월 13일 윤보선이 박정희가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해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폭로한 것이 호외에 실렸다.

이후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있었고[130], 민주당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한 바 있다.

선거 유세 당시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李萬燮)을 비롯하여 민관식(閔寬植), 백남억 등이 참여하였다.[131] 대구 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고 하였다.[132]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한 바 있었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133]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그는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133] 고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134]'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134]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135]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133]

10월 자유민주당 김준연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136]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간첩 황태성은 박정희씨의 친형인 박상희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씨는 대구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 때 박정희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136]

윤보선, 김준연 등의 사상 공세에 수세로 밀린 그는 한민당은 부패한 부자들과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집단이라며 맹비난을 가한다. 그는 두 사람이 한민당 출신임을 강조하고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론으로 대응했다.

강원룡은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137]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107]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138],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137]

원용덕의 반론
 원용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원용덕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 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 밑 문주리 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 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39]

제3공화국 초기(1963~1964)

1964년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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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17] 12월 6일 비행기편으로 서독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독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 때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1963년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140]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140]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 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141]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여촌야도)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142]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143]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144]

베트남 전쟁 파병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196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3번째)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17] (→한월 관계)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을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17]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145]

한일협정 전후(1965~1966)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146]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146]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146]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146]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147]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147]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147]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다.[147]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147]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은“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148]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149][150]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151]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152][15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 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154]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155]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156]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156]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156]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156] 1967년 9월 20일 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110]

포항제철 건설

군사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기 위해서 막대한 개발자금을 필요로 하였으나 국내자본 축적이 미흡하고 외자도입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유무상차관도입을 전제로 하는 대일청구권자금 협상과 연계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기간 이끌어온 협상을 마무리하고 1964년 12월 18일에 양국간에「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관한 비준서를 교환하고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 등 25개 협정을 정식으로 조인하였다. 일본 측과 협의하여 청구권 사용방안중 제1차년도 실시계획을 1966년 4월 20일 결정짓고 그것이 국회의 동의를 거쳐 4월 27일 공고됨에 따라 5월부터 청구권자금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157]

1969년 1월 31일,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은 통역담당 최주선 부장과 함께 피츠버그로 건너가 KISA 대표인 포이(F.Foy) 회장을 만났으며, KISA 회원사들을 따로따로 만나 한국의 경제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IBRD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하였다. KISA와의 기본협정에 따르면 1972년까지는 제철소가 완공돼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늦어도 1969년 초부터는 건설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건설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제차관 도입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158]

박태준 사장은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159]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요.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오.
 
— 청암 박태준[158]

대일청구권자금 3억 달러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균등분할로 무상지급하게 돼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으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이자 말하자면 ‘민족의 피맺힌 돈’이었다. 이 돈은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양국 정부간에 합의가 끝나 이미 국회 비준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에 전용할 수 있다면 ‘피맺힌 돈’의 가치를 가장 알차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이었다.[158]

1969년 5월 7일, 박충훈 부총리가 '종합제철 프로젝트 재검토' 발언을 했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의 협상을 위해 외국까지 나갔지만 빚도 얻지 못하고 홀대를 당한 데 대한 하소연이나 다름없었다. 이튿날 신문에는 "차라리 제철소를 짓지 말고 철을 수입하라"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진노했고, 결국 6월 2일 박 부총리를 경질했다. 정부는 박충훈 해임 뒤 김학렬 경제수석비서관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건설전담반’을 설치했다. 또한 1969년 8월 하순에 열리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청구권 자금 전용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158]

1969년 여름 박태준 사장은 도쿄에서 많은 정.재계 거물들을 만났다. 우선 일본철강연맹의 기술지원 약속, 특히 3대 철강회사(야와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의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이끌어내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외무상 아이치, 대장상 후쿠다, 통산상 오히라 등도 포함됐다. 야스오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많은 우군을 만들 수 있었다. 결국 1969년 8월 28일 양국 정부는 각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 정부는 포항제철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며, 서울에 대표단을 파견해 최종합의서를 마무리짓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158]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1971)

1967년 1월 제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의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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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160]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160]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160],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160]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160]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17]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161]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162]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17]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17]

1971년 4월 서울 지하철 건설 착공식의 박정희 대통령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규모의 땅을 구매하였는데 이 땅에 신원 조사 등 갖가지 심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여름이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울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박정희가 구매한 땅 중에는 소금기가 많은 땅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결국 박정희의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며 박정희가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지만 해마다 관리비 명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에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거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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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163]

김신조사건 1.21 사태 (1968)

 1·21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반공의식이 급속하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 문화 정책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17]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17]

국민교육의 양적 향상을 위해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2년-1967년),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7~1971년) 등을 수립 및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확립하였다.[17]

그런가 하면 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17]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17]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노동자에 대한 교육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17]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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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직후 (1972 ~ 1973)

 이 부분의 본문은 10월 유신입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17]

국군의 날 행사 때 박정희 초상을 나타낸 카드섹션.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164]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17]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17]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육영수 저격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 박정희가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던중에, 청중석에 있던 문세광이 연단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연설대 아래로 피해 무사했으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머리에 총을 맞았다. 육영수는 사건 발생 9분 만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후 뇌수술을 받았다.[165] 하지만 이날 오후 7시 경 향년 49세로 사망했다.[166] 범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된후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문세광은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한 권총을 사용했고, 위조 여권을 소지하고 밀입국했으며 일본인 공범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국은 일본정부에 강력히 항의 했으며 양국관계는 냉각되었다. 9월에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사과방한 한후 양국관계는 정상으로 회복되었다.[167]

새마을 운동

 새마을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7년 12월 1일에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17]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168]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168]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168]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17]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168]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 원, 72년 33억 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원, 1974년 308억 원, 1979년에는 4252억 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 원에서 1979년 2032억 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169] 비슷한 것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도 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169]

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새마을 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170][171] 또한 새마을 운동은 미신타파를 명분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탄압도 자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172]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이용해 농촌 가옥을 개량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받는다.[173]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1978)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174]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75]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176]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177]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앉은자리 밟던자국 모래마다 밟던자국 / 저도섬 백사장에 체온마저 따스해라
파도소리 예와같네 짝을 잃은 저기러기 / 나와함께 놀다가렴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 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1973년 제 25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행진에 참가한 박정희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178]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17]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17]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179][180]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

저도 앞바다에서 휴양 중인 박정희(1976년 7월)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181]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182]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83]

코리아 게이트 사건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184]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184]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184]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파동

 YH 사건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185]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186]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8월 11일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187]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188]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189]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190]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191][192]

 김영삼 § 김영삼 초산테러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국 하원 청문회 증인이었던 김형욱 전 안기부장의 암살 사건에 실무자였다고 증언하는 비선 공작팀장에게 1979년 초에 술을 직접 따라주었다는 언론 보도도 존재한다.[193] 이 사건 관련 기록도 중앙정보부에는 없으며 이 요원의 상급자도 파리 침투 사실을 몰랐다고 증언한다.[193]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며[194]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195]

사망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건입니다.
 부마 항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196],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197]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군 삽교방조제 준공식에 이어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61세로 사망하였다.

최초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에서는 부상당한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곧바로 옮겼다고 알려져 왔었으나, 2016년 재미언론인 안치용의 기고에서 공개된 미국무부 해제 비밀문서들에 의하면 처음 김재규가 권총을 발포 한 7시 41분 이후 부상당한 박정희는 9분 뒤 7시 55분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먼저 도착했다고 밝혀졌다.[198]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근무하던 청와대 의무실장 김병수가 박정희의 총상 입은 사체를 보게 된 것은 사건이 일어나고 2시간이 지나서였다.[199]

사건 이후 미국의 개입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200] 또한 2016년에 김재규가 사건 당일날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오후 2시경에 만났었다는 사실이 발견되며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201]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하며,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200]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200]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200] 소설가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200]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200]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202][203][204]

최규하 추도사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장 당시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암살 배후 의혹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과 CIA가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미국 등의 개입에 대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05]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205]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사건 당일날 오후 2시경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기 앞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먼저 만났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201]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던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206] 글라이스틴 대사가 왜 박대통령 암살 당일날 김재규를 만났던 사실을 평생동안 비밀로 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사건 당시 박정희를 청와대 의무실장이 아닌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검진했다는 사실[198]을 정부에서 왜 비밀시 했는지도 불확실하다.

김재규는 재판 도중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했었다.[207] 또한 조사 과정에서 '혹시 미국 측에서 무슨 연락이 없느냐'고 수사관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208][209]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210]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210] 박정희는 미국의 경고에도 1978년 이후로도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계속 증폭되었고, 이는 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장례식

10월 27일 새벽 국무총리 최규하는 긴급히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 유고 문제를 물었고 27일 아침에야 박정희가 서거하였다는 사실이 공식 보도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장례식은 9일장으로 결정되었고 국장으로 치러졌다.

국장 장례식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최규하에 의해 진행되고 11월 3일까지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시신은 석관에 안치되어 운구차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육영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주요 정책

경제 정책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 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 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金翰壽)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부동산 정책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있었지만 시장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211]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1979~1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212]

외교관계

박정희 대통령과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

통일관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先) 개발 후(後)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13]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214]

자주국방

 율곡 사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0년대부터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주한 미군의 철수,중국의 유엔가입 등으로 국제정세가 한국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었고,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목표는 유사시 북한이 단독으로 벌인전면적 도발만큼은 미군의 도움없이 독자적 방위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위한 실천노력으로, 첫째 독자적인 무기체계 개발에 따른 방위산업육성, 둘째 독자적인 전략과 전술개발에 따른 한반도 작전계획 수립,셋째 군사제도의 개혁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사상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른 한국의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제시하였다.[215]

핵개발 추진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괌(Guam)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216][217]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216][217]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216][217][218][219][220]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에 핵의지를 심은 건 미군의 일방적 철수였다. 70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철군 예정통보(71년 3월 2만2000명 철수→75년까지 완전 철수)가 있은 뒤 대통령은 내게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원자폭탄을 연구해 보자. 핵무기를 개발하다 미국이 방해해 못 만들게 되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라도 갖춰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김종필 증언록 - 2015년 7월 10일, 중앙일보[215]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 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WEC)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184][221]

1970년초 닉슨 대통령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 고정하였다.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멸망의 길을 걷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184][222]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184]

비밀 플루토늄 도입 기도

박정희 정부가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184][221]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184][221]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184][223]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 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224] 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225]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184][223] 1978년 11월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184][223]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184][223]

미국과의 갈등

1975년 가을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함병춘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226]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227]

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227]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184]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 스웨덴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227]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227]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227],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184]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227]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27]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자주 국방이 나중에 민족 자주권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225]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 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 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225] 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225]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는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 당국자들이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184][228]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핵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해 10월에 암살당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229] 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230]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230]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231]

사상과 신념

종교적 편력

국가기록원의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주장하기를, 박정희는 종교가 없으며, 외부에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여서라는 주장도 있다.[232]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을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 기독교계를 비판하며[233]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 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233] 1974년 12월 11일 박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계기로 천주교 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후 신부들을 연행과 구속이 되는 일이 있었다.)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234][235][236]

남조선로동당 활동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직급을 박탈당하였다가 복귀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진실된 전향이었는지에 대해 정치계로부터 평생 의심을 받았다. 1946년 10.1 대구 사건때 형 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했다.[137]

목사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137]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107]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을 진두지휘하여 여수·순천 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감행했다는 주장이 존재하나[138]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은 제14여대의 홍순석, 김지회, 지창수 제주도 진압 명령을 반대하며 남로당의 지령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으켰던 반란이다. 박정희는 사건 당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237]

현재 여수시에서는 1948년 사건들이 공통적으로 남북협상의 실패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 이승만 김성수 타도라는 같은 목적을 가졌던 점, 그리고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흥사단 출신의 최능진, 백범 김구, 김규식, 서세충, 오동기 같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사건의 주종자들이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좌파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 반란이였다기 보다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단독 정부 추진을 반대하는 투쟁, 즉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연장선에 더 가까웠다고 결론 짓는다.[238]

1948년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하기 위하여[239] 1월 9일 처음으로 서울에 입국한 이후 다음달인 2월 7일 2.7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4월 3일 일어난 제주 4.3 사건, 4월 19일 결성되었던 남북협상 연석회의, 10월 1일 혁명의용군 사건, 그리고 10월 19일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까지 모두 1948년 한 해에 남한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다.[240]

사후 영향력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241] 국가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242]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 등으로 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243]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이라는 명칭으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시민의 권익증진을 우선하는 정책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환경보전 정책은 더욱 후퇴되었고 무분별한 개발로 농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244]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육군 소장인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박정희와 차별을 두었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245]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 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246]

구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중 일부는 부정축재혐의로 제거되었으나, 일부 정치금지법에 제한되지 않은 구 공화당 유정회 인사들은 1981년 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정치적 유산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갔다.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한 국민당은 몰락했으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였던 일부 공화당계 인사들이 풀려나면서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한 인사들은,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고 일부는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이후 친박연대를 창당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박정희의 셋째 딸인 박근령 역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8년부터 한나라당 충북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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