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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서화)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니

한문역사 2025. 8. 19. 18:06

東語西話]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니

입력 2025.08.1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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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헌 가방(왼쪽)과 새 가방. 헌 가방 위에는 가방에게 주는 '노잣돈'과 가방을 치우시는 미화원에게 드리는 팁을 겸한 지폐 2달러가 올려져 있다. /원철스님 제공

오래전부터 벼르던 중국 장강 여행을 8월 초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비로소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여행 가방이 말썽이다. 공항에서 추가로 물건을 넣으려는데 지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다시 잠그려고 해도 여전히 위아래가 갈라지면서 거친 톱날 같은 이빨을 그대로 드러낸다. 예전에도 가끔 그랬다. 지난번 여행 때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나오는 가방은 실금으로 갈라진 수박처럼 속이 훤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미 안전용 삼색 띠로 바깥 면을 둘러놓았고 안의 모든 짐도 세분하여 작은 파우치에 나누어 넣어 둔 덕분에 분실한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벌어진 것을 다시 잠그고자 할 때마다 제대로 잠겼던 지난날의 경험치를 믿고서 이번에도 거듭 애를 썼다. 곁에서 보다 못한 길동무 D 스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 기회에 바꾸는 게 어떠냐고 말이다.

이래저래 사연 많은 가방이다. 20여 년 전 갑자기 출장 갈 일이 생겼다. 기존의 여행 가방은 지방에 둔 상태였다. 함께 가는 직원에게 혹시 여분의 가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총각 시절에는 사용했으나 결혼 이후에는 쓸 일이 없어진 것이 있다고 했다. 부직포로 만들어진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크기도 적당하고 색깔도 무난했다. 다녀온 뒤 ‘마음에 들면 가지라’고 했다. 그 후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끌고 다녔다.

바꾸라는 말을 듣고도 계속 멈칫거리자 팔목을 당기면서 가방 면세점으로 데리고 갔다. 성격으로 보건대 강제하지 않으면 또 그냥 지나칠 것 같다면서 떠밀다시피 했다. 나름 유명 브랜드 캐리어 가게에서 좋은 제품 세일 기간이라고 바람을 잡는다. 덕분에 두 바퀴가 달린 늘어진 듯한 낡은 가방은 네 바퀴가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굴러가는 단단한 새 가방으로 바뀌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노룩 패스’ 놀이를 했다. 어떤 정치인이 공항 입국장 문을 들어서면서 보좌관과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캐리어를 던지듯이 밀어버린 명장면이다. 이것을 용케도 포착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갖가지 패러디가 뒤따랐다. 우리도 한갓진 방향을 향하여 살짝 밀었다. 받아줄 사람이 없는 탓에 홀로 움직이긴 하지만 새것답게 엄청 멀리 부드럽게 잘 굴러간다.

새 가방에 여행용품을 옮겨 담은 뒤에도 헌 가방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다. 스무 해를 넘게 사용했으니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때가 묻은 오래된 물건에는 신령함이 깃든다고 했다. 선인들은 닳아서 못 쓰는 붓일지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깨끗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땅에 묻고는 필총(筆冢)을 조성했다. 수명이 다한 다선(茶筅·말차 솔) 역시 일정한 분량이 모이면 선총(筅冢)을 만들었다. 일본에서 필총·선총 표지석을 만난 기억까지 선연히 되살아난다. 장강 여행 시작점인 충칭에서 비로소 헌 가방과 이별식을 치렀다. 고별문을 낭독하면서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헌 가방은 보내고 새 가방으로 교체한 뒤 배에 오르면서 장강과 관련된 명언을 되뇐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구나.

장강의 물결뿐이라. 여행 가방도 그랬다. 어디 여행 가방뿐이랴.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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