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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科 甲科 1等 壯元及第한 高敬命(1533~1592)

한문역사 2025. 9. 15. 10:15

고경명
말을 탈 줄 모르는 의병장, 마상격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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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선조수정실록』에는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湖西(충청도)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광주에 살던 전 동래부사 고경명은 적이 한양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듣고, 유팽로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일을 도모한다. 그는 격문을 써서 전라도 백성들에게 배포한다'고 적혀있다.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썼다는 격문, 적이 국토를 짓밟고 백성을 도륙한다는 소식에 가슴을 치던 선비들을 구국의 깃발 아래로 모이게 한 격문, 말을 제대로 탈 줄 모르던 노선비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쓴 격문, 바로 고경명의 『마상격문』이다.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우리 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의 국방이 튼튼하지 못한 틈을 타서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중략)
소생은 비록 늙은 선비이지만, 나라에 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류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중략)
아! 각 고을 수령들과 백성, 군인들이여! 어찌 나라를 잊어버리랴. 마땅히 목숨을 저버릴 것이다. 혹은 무기를 제공하고, 혹은 군량으로 도와주며, 혹은 말을 달려 선봉에 나서고, 혹은 쟁기를 버리고 논밭에서 떨쳐 일어서라! 힘 닿는대로 모두 다 정의를 위해 나선다면 우리나라를 위험에서 구해 낼 것인바,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고경명이 『마상격문』을 써서 의병으로 나선 나이는 60세였다. 사양할 이유가 많을 수 있는 나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피 끓는 그의 마상격문을 읽은 수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구름떼같이 모여들었다. 그의 깃발 아래 군사 6,000여 명이 집결했다.
 
거병 한 달 만에 두 아들과 전사
그렇게 뜨거운 민의를 담아 의병장으로 나섰던 고경명에 관한 기록은 한 달 뒤 다시 기록된다.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에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다. 고경명이 '의병군 6,000~7,000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여산礪山(전북 익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적이 호남 지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했다. 고경명은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금산군 진산면)으로 옮겼다'고 적혀있다.
고경명의 전사 장면은 참으로 아프다. 권율에게 대패한 왜적이 금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경명의 의병들이 이들과 전투를 벌인다. 관군이 왜적과 먼저 싸움을 했고, 관군의 선봉장은 영암군수 김성헌이었다. 하지만 선봉장과 관군들은 모두 도망을 쳤다. 관군의 항전을 예상했던 고경명 부대는 순식간에 밀어닥친 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어야했다. 이 와중에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진다.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신의 말을 고경명에게 양보하고 자신이 걸었다.
종사관 유팽로는 의병장이 보이지 않자 의병장을 찾아 되돌아온다. 고경명은 유팽로에게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고 명한다. 하지만 유팽로는 어찌 의병장을 두고 살겠냐며 고경명 곁을 지킨다. 종사관 안영과 유팽로 모두 전사를 한다.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도 같은 날, 전투 중에 사망한다.
『선조수정실록』은 '고경명은 문학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경명의 죽음을 전해들은 장남 고종후는 아버지와 아우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른 뒤 '어버이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였으니 어찌 살겠는가. 분명하게 죽기를 바랄 뿐'이라며 남은 병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상복을 입은 채로 왜적과 싸웠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의병장 김천일은 고종후에게 성 밖으로 나가 목숨을 보전하라 권했다. 하지만 고종후와 고종후의 이복동생 고경형도 촉석루 아래서 죽음으로 항거한다.
 
고경명은 누구인가
고경명은 정3품 대사간을 역임한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26세에 문과 갑과 장원을 한다. 사가독서를 거쳐 29세에 홍문관이 되는 등 명종의 총애를 받는다. 특히 시문에 능했다.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과 부교리 등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다 명종 18년, 불미스런 일에 휘말리며 중앙관직에서 밀려 울산군수로 좌천이 된다.
하지만 곧 울산군수에서도 파직돼 고향인 광주로 낙향한다. 이후 호남가단을 이끌던 송순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광주목사 임훈과 무등산을 유람하고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긴다.
19년의 은거생활 끝에 선조 14년, 영암군수로 다시 벼슬길에 나선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어 서산군수와 한성부윤, 종부시 첨정 등을 거쳐 선조 23년에는 동래부사로 부임한다. 하지만 정철이 파직되자 그의 추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이 되어 귀향을 한다. 낙향하고 얼마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의병장이 되어 싸우다 아들들과 함께 전사한다.
 
의병장 고경명은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제봉 고경명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하지만 의병장으로 최후를 맞아서 시문에 능했고 뛰어난 문필가였던 그의 명성이 오히려 가려져 있었다. 첫 벼슬길에서 물러나있던 19년 동안 그는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서하 김성원과 함께 '성산 사선星山 四仙'으로 불렸다.
특히 스승인 송순의 정자 '면앙정'의 절경을 노래한 「면앙정 삼십영」을 하서 김인후와 석천 임억령 등과 함께 지었다.
 

포충사 영당
호남 유생들은 고경명 사후 남구 제봉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다. 
1603년 박지효 등 문인과 후곤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 이란 액호를 받았다. 
포충사는 서원철폐때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다.
 
황백국黃白菊
본래 색으로는 황색을 귀히 여기고
천품은 백색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 관점이 비록 달라도
서리를 이기고 살아있는 가지는 같도다
 
훗날 백사 이항복은 고경명을 두고 '`호남에 시인이 많다고들 하지만 그 가운데 제봉이 가장 뛰어나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세계전쟁사에 없는 3부자, 포충사에 모셔지다


시인이자 의인이었던 고경명. 그의 『마상격문馬上檄文』은 최치원이 쓴 『황소격문黃巢檄文』과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 더불어 3대 격문으로 평가받는다.
 

포충사 구 사당
포충사는 새로운 사당을 지으며 옛 사당을 보수했는데 이때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은 철거했다.
그러나 옛 사당과 동재와 서재는 본래 위치에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채 남아있다.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광주에 포충사를 짓고 봄, 가을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또한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세금과 잡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어 마을 이름이 복촌福村으로 바뀌었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는 시문을 수록한 『제봉집霽峰集』과 무등산 기행문을 실은 『유서석록遊瑞石錄』, 격문과 통문, 기문을 담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포충사에는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등 3명의 불천위가 함께 모셔져있다. 3부자가 한 전쟁에서 전사한 예는 세계 전쟁사에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경명의 장녀도 남편이 왜적과 맞서다 전사하자 자결한 충절의 집안이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전쟁터로 나가려던 15살 막내만이 고경명 장군의 명에 따라 어머니를 모시다가 아버지의 시문과 격문을 간직해 유고문집을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