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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한문역사 2025. 10. 15. 19:29
 
 
 
 
 
 
 
진산링(金山岭) 구간의 만리장성
 
 

만리장성을 오르는 관광객들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장성
1. 개요2. 역사
2.1. 전국시대2.2. 진-한 시대2.3. 명-청 시대2.4. 근현대
3. 시황제와 관련된 설화4. 보존 상태5. 축성법6. 구간
6.1. 관문6.2. 고북구 장성
7. 논란
7.1.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 포함 시도7.2. 길이7.3. 우주에서 보인다?
8. 여담9. 대중문화에서의 만리장성10. 갤러리11. 같이보기

1. 개요[편집]


▲ 만리장성의 끝부분 중 하나인 노룡두.
"不到长城非好汉。"

"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 사내 대장부(好漢)라 할 수 없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성벽으로, 흉노족이나 몽골족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10] 전국시대 건설이 시작되어 후대 왕조에 의해 확장, 보수되어 온 인류 최대의 성곽 구조물이다.

만리장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000보다 조금 더 길며[11]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장성이라고 부른다. 만리장성의 굽은 커브를 전부 펴면 그 길이는 무려 한반도를 감싸고도 남으며, 비행기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동쪽 끝은 허베이성 노룡두이며, 서쪽 끝은 간쑤성 가욕관(자위관)이다.

한국어로는 '장성'이라 발음되며, 중국어로는 '창청'으로 발음된다.

2. 역사[편집]


만리장성의 위치

2.1. 전국시대[편집]

중국 최초의 장성은 초나라가 쌓은 장성이다. 초나라는 남방에서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중원국가들의 영토를 빼앗으며 서서히 북진했다. 그렇게 얻은 영토 중에는 하남성 일대의 영토도 있었는데, 중원이라 불리는 하남성 일대는 국경으로 삼을 만한 자연경계가 없었다. 초나라가 차지한 이 영토는 삼면으로 다른 중원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초나라는 이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300km가 넘는 장성으로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장성을 건설했다. 이것을 장성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장성 건설은 전국시대 강대국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전국시대 초기, 영역국가로서 재빠르게 변법에 성공한 위나라는 서쪽의 강국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쪽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지금의 함곡관보다 훨씬 서쪽에 있으며, 지금의 서안시 동쪽에 위치한 화산 북쪽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길이는 대략 60km 정도로, 진령산맥과 진북산맥을 잇는 형태로 건설했다.

제나라는 남쪽에 장성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강국이었던 오와 월, 그리고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한나라 또한 위나라와의 접경지대에 짧은 장성을 건설했다.

한편, 조나라는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는데, 그 영토 자체가 유목과 농경의 경계지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목민족과 접촉이 많았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 또한 유목민족의 남하를 막을 만한 자연지형이 없었기에 장성 건설은 필수였다.[12]

역시 북방민족과 접해있던 연나라는 기동성이 우수한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진나라 역시 전국시대 때부터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다. 건국 초기 때부터 상대해온 오랑캐인 융적, 그리고 북방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장성 축조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자국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려던 것이다. 최초의 장성인 초나라 방성은 중원에서 획득한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한 것이다. 전국시대가 되면 기술발달과 인구의 증가, 국가 권력의 강화로 중국 내지가 충분히 개간되었기 때문에 이제 자국 영토를 개발하고 개척하는 것보다는 이미 개발된 상대국의 영토와 인구를 빼앗는 형태로 전쟁의 양상이 변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효과적인 영토와 인구의 보호가 절실했는데, 전국시대 각 국가들이 행한 이른바 변법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장성은 그 주요 방편 중 하나로 그 자체가 영토를 둘러싸 보호하기도 하지만, 적의 침입과 기동로를 제한하고 아군의 빠른 대응을 가능케 해주어 영토와 인구 보호에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목적의 장성 건설 사례는 최초의 장성 건설 국가인 초나라,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 제나라 등 중국 내지의 국가들에게서 두드러진다.

둘째는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계선 확립이다. 장성과 경보체제를 갖추면 아무래도 유목민족이 남하하기 어려워진다. 그전에는 주요 감시망을 피해서 목축 동물들을 데리고 내려와 눌러 살면 그만이었지만, 장성 축조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경계가 부족한 지역에 장성을 건설함으로써 목축민들이 내려오는 한계를 설정하고 그를 통해서 수월하게 국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장성 건설의 사례는 북방 유목민족과 접한 북쪽의 국가들, 즉, 진, 조, 연나라에서 두드러진다.

내지에 위치한 나라들은 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북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2.2. 진-한 시대[편집]

 
중국 서북 돈황의 고비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의 유적으로 한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다.[13]

전국시대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 등 세 나라가 쌓은 장성을 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결해 지은 것이 시초이다. 당시 주관자는 몽염이었다. 하지만 이 장성은 진나라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역사의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한나라 한무제가 한 번 더 대규모 공사를 해서 장성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그 길이도 진나라 시절보다 길어진다. 그 이후 후한대까지는 잘 유지되어 왔지만 후한 말 이후 사회 혼란과 분열로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서서히 무너져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현재 부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장성을 말한다. 진대와 명대 장성은 위치도 상당히 달라서 사실상 다른 장성이다. 오늘날에도 진-한 시대에 쌓은 장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진시황이 연결해서 지은 장성은 지금의 벽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 지은 토성의 형태였고 높이도 높지 않은 데다가 지켜야 할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감시도 소홀해서 사람이나 말이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곡괭이 등으로 성벽을 허문 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만리장성 아래를 개박살 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나라 다음 왕조인 전한 시기만 봐도 한 고조 유방부터 한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북방의 흉노에게 개 관광당하기에 바빴고, 삼국시대와 서진 시대를 거쳐서는 북방이 전부 5호 등의 북방민족의 손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등 숱하게 황하 이북을 북방민족에게 넘겨줬던 시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것의 효용성 자체에는 큰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도 많다. 사실 따지고 봤을 때 정말 철옹성 같은 방어를 생각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면 손 안 쓰고 떡 먹으려는 놀부심보나 다름없다. 해자, 창검벽, 외곽성벽, 이중성벽 등등 온갖 방호시설을 떡칠해둔 성일지라도 함락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달랑 성벽 한 겹 둘러놓고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 만리장성의 용도가 북방 기마민족의 남침에 대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서 교역을 하는 상단을 보호하는 가도와 역참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최소 지연시키거나 최대한 방어해내는 것으로서 만리장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해냈다. 그 역할을 할 자연적 지형이 부족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즉 만리장성의 역할은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이 아니라 경계의 구축이었다. 만리장성이 유목민의 침공을 발견하고 잠깐이라도 지연하는 동안 후방에서 방어를 위한 기동군을 편성하거나 거점의 요새화를 하는 등 실질적인 방어 준비를 할 수 있지만, 장성이 없으면 그럴 시간조차 못 버는 것이다.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성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계를 만드는 일은 만리장성 외에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이다. 가장 비슷한 사례로 이란 사산 왕조 중앙아시아 훈족 에프탈족,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북동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쌓았던 '고르간 장성'이 있는데, 이는 만리장성이 있는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견고한 장성이었다. 이외에 픽트족을 막기 위해 로마인들이 쌓았던 브리튼 섬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나 코린토스 지협에 쌓은 헥사밀리온 등이 있다.

중국은 의외로 평야인 지역이 아주 많다. 특정 방어 거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만 뚫으면 중국은 영토 자체가 워낙 거대하여 허허벌판[14]인 경우가 대다수다.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화북은 유목민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 즉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화북과 몽골고원에는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어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삼아서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을 구분해둔 것이다.[15] 비록 마음만 먹으면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는 용이했으나, 대군이 통과할 길목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만리장성은 마치 강과 같은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강가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서 무적의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작전 지역을 우회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므로 방어의 효과는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명청교체기때 청나라는 이미 만리장성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만리장성을 돌파한 다음에는 보급선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침공하기가 어려웠다. 보급선이 끊기면 작전기한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의 침공은 산해관을 통과한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16]
 
만리장성의 다큐멘터리

2.3. 명-청 시대[편집]

 

명나라대에 이르러 제11대 세종 가정제 때 몽골족의 알탄 칸에게 베이징이 포위되는 사건(경술의 변)이 일어난 후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12대 목종 융경제 가 되어서야 현재와 같은 벽돌을 이용한 장성의 형태로 굳어졌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이 기존 한나라의 영역보다 상당히 남쪽으로 축소되었으므로, 사실상 장성을 신축해야 하는 데다가 공법의 변화까지 겹쳐서 장성의 재건설은 장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지속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수축은 베이징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역 지휘관의 재량에 따른 판단으로 임의적으로 수축된 것이었고, 그래서 성벽의 재료도 지역마다 달랐다. 벽돌로 지은 곳도 있고, 바위로 쌓은 곳, 흙벽돌로 쌓은 곳 등등. 일부 구간은 결국 명나라 이자성의 농민 반란으로 멸망당하는 시점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구간은 완성되어서 상당한 방어력을 부여받았으며, 대표적인 곳이 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이었다. 실제로 명대 만리장성은 만주족인 청군이 돌파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멸망한 사실을 안 명장 오삼계가 반란군을 토벌할 때 지원군으로 도르곤의 청군을 사용하기 위해 협약을 맺고, 그냥 문을 열어줘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대쯤 되면 공성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었으므로 설령 만리장성이 석조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양상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해관 같은 강력한 점방어가 가능한 몇몇 지역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성벽 한 겹인지라 대군으로 밀고오면 뚫렸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북방의 몽골까지 지배하는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만리장성의 효용가치가 없어서 베이징 근처의 일부 구간만 약간 보수하는 선에 그쳤다.

2.4. 근현대[편집]

만리장성이 마지막으로 군사적인 목적하에 사용된 것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열하사변 때이다. 베이징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방어하려는 중국군이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산해관에서 격전을 벌인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산해관이 함락되고, 만리장성이 돌파되면서 베이징이 함락되었다. 전후 국공내전 당시에는 개전 당시에 화북 지역 상당 부분이 공산군 수중에 있었기에 만리장성에서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국부천대  장제스가 중화민국 해군력 우위를 강조하며 '바다의 만리장성'[17]은 반드시 유지될 것이라 선언한 바가 있다.

3. 시황제와 관련된 설화[편집]

언급되었듯이 만리장성은 단순히 한 사람, 한 왕조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건축 시도 끝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진시황의 폭정을 언급할 때 '만리장성을 무리하게 축조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넣기 때문에 진시황에 의한 축조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나 그중에서 《초한지》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로 '망진자호'(亡秦者胡)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시황제는 말년에 늙지 않고 죽지 않게 만드는 불로장생초를 얻기 위해 온갖 미신을 믿고 다녔는데, 황해를 넘은 땅에는 삼신산이 있어 수많은 선인들이 칩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로장생의 영약이 숨겨져있다는 방술사(方術士)들의 말을 들은 진시황은 그중 한 명인 서복(徐福)에게 그 영약을 찾아올 것을 명령했다. 서복은 영약을 위해서는 남녀 동자 500명과 금은보화가 필요하다고 했고, 시황제는 흔쾌히 수락했는데, 서복은 그 길로 불로장생초를 구하기 위해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사라진 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시황제는 불안하여 노생(盧生)이라는 다른 방술사를 보내어 서복을 찾게 했는데, 노생은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에서 선문고(羨門高)라는 선인을 만나
'이 책에 담긴 뜻을 해석해내면 능히 불로장생의 비결을 얻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천록비결》(天簏秘訣)이라는 책을 건네받았다. 노생은 《천록비결》을 진시황에게 바쳤으나 《천록비결》은 수많은 은어로 이루어져 도저히 읽을 수 없었고, 시황은 수많은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천록비결》을 해독하고자 했다. 그 뜻을 해독해내는 데는 결국 실패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망진자호'(亡秦者胡)라는 한 글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황제는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오랑캐(胡)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만리장성으로 북방의 오랑캐를 막고자 했으나, 胡는 오랑캐가 아니라 이세황제 호해(胡亥)를 뜻하는 것이었고, 진나라는 호해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야사이므로 실제로 이런 일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며 바리에이션도 꽤 있다. 신선이 건네준 책에서 비롯된 글귀가 아니라 단순히 점쟁이가 내려준 글귀였다는 설도 있으며, 정치적 문제를 덮을 목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당시 진나라의 상황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4. 보존 상태[편집]

 
 
 
미복원 상태의 만리장성 구간


현재 전체 장성 중, 50%는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 파괴되었다고 한다. 유지•보수의 중단 및 지역주민들이 집 지을 돌을 마련하느라, 혹은 관광객에게 팔려고 만리장성의 돌을 빼갔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직도 각종 개발사업으로 파괴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동양 국가 역시 문화유산이니 보존하고 관광용으로 개발하자는 의식 자체가 생긴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재 진행형이라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하지만 장성 관리하는데 군인이나 관리인을 각 구간마다 전부 두는 것이 효율성도 떨어지고, 돈이 한두푼 드는 일도 아닌지라 관리가 잘 안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심지어 일부 지역의 장성은 댐 공사 때문에 수몰된 장성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산맥을 따라 성곽을 쌓더라도 강 주변이나 주요 평야지역을 지나가려면 장성의 위치도 낮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러니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중국인들은 이를 수장성이라고 부른다.

현재 예전 명•청 시기의 장성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20%에 불과하다고 하며, 현재 만리장성 중 관광지가 된 구역은 상당수 마오쩌둥이 복구 공사를 진두지휘한 곳이다. 그래서 일부 베이징에 가까워서 관광지로 개발된 '포인트' 부분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조금만 멀리 나가면 관리가 별로 안 되어 바스러져 가는 구간이 많다. 당연히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만리장성의 특성상 쭈욱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장성을 따라 수십 km를 걸어다니는 걷기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금지지만 만리장성 외곽지역의 인적이 드문 성벽 위에서 텐트치고 야영하면서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구간은 복구를 해도, 하필 시멘트로 복원하여 논란이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만리장성 바로 밑에 고속철도 역을 건설하기로 해 논란이 예상된다. #

5. 축성법[편집]


가장 유명한 팔달령 장성 구간. 바위를 자연 성벽으로 삼은 점이 인상적이다.

석축과 전돌이 혼합된 장성 구간

만리장성이 바다와 만나는 노룡두

만리장성이 하천을 지나는 구문구 구간의 수문

서부 간쑤성 구간의 장성

자위관 서남쪽으로 뻗은 끝자락의 장성

만리장성은 건축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동서 6천 km에 이르는 구간을 지나는 동안 장성에는 각 지형에 맞는 건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평지를 지날 경우 성벽은 방어력 강화를 위해 더 두껍고 높아지게 되고, 산간 지방을 지날 때에는 낮아지는 대신 재해에 견디기 위해 더욱 견고해지며, 물 위를 지날 때에는 홍예 수문이 설치된다. 또한 기후적으로도 온대 기후에서는 일반 벽돌이나 돌을 사용하지만, 건조 기후에서는 진흙을 덧바른 진흙 벽돌을 사용한다. 후자는 부하라, 히바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성벽 혹은 사마라, 페스와 같은 중동 지역의 성벽과 유사한 공법이다.

6. 구간[편집]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만리장성에 대해 중국 정부는 각각의 구간을 두어 관리한다. 그중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널리 알려진 곳들을 꼽으라면 베이징 근처의 바다링(八达岭), 구베이커우 (古北口,), 스마타이 (司马台), 쥐융관(居庸关), 진산링(金山岭), 황화청 (黄花城), 젠커우(箭扣), 무톈위 (慕田峪) 장성 등이 유명하다. 그외에 수관장성이라고도 불리는 후루다오의 주먼커우(九门口), 친황다오의 자오산(角山), 논란이 많은 후산 (虎山) 장성 등이 있다.

6.1. 관문[편집]


내성의 일부인 옌먼관(雁门关)

만리장성은 초원과 중원의 경계였지만 무조건 교류를 차단할 수는 없는법, 여러 개의 관문을 두어 상호 소통하거나 군사 원정에 활용하였다. 가욕관, 거용관, 산해관의 3대 관문 외에도 안문관, 평형관 등이 있었다.

6.2. 고북구 장성[편집]




구베이커우 장성의 장엄한 풍경

명나라 대의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산세를 휘감는 모습이 용과 같다 하여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팔달령과 달리 관광지화는 되어 있지 않아 찾아가려면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7. 논란[편집]

7.1.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 포함 시도[편집]

 
고구려 천리장성이 만리장성이 된 경우를 다룬 KBS 역사스페셜의 영상

흉노족을 튀르크의 옛 조상들 중 하나라고 보는 터키에서는 만리장성이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보고 있다.[18] 몇몇 터키의 극우 성향의 사학자들은 흉노를 매우 강하게 과장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의 위치나 길이를 왜곡하는데, 심할 경우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연해주로 왜곡하기도 한다.

몇몇 자료에서는 진-한대의 장성에 이어 고구려 성을 장성으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박작성 유적을 만리장성 동쪽 부분의 시작 지점으로 삼겠다는 몇몇 사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허베이성 끝에 위치한 산해관이었으며,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호산산성은 장성의 동단 기점이 아니었다. 물론 고지도에는 현 요동 반도 지역에 벽돌로 쌓은 장성 대신 목책과 보를 표시하고 있어서 이를 장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중국에서 펴낸 장성에 관련된 연구 서적을 살펴 보면 '목책은 장성으로 볼 수 없다.'고 당당히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책과 보를 중심으로 쌓은 것을 장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성의 정의를 방어 목적으로 길게 이어 쌓은 성이라 말하는데도 요동의 목책은 장성처럼 길게 이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주요 군사 지역 주변에 드문드문 설치한 것이라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이 주장의 요지는 여러 고지도에서도 표시되지 않는데도 '장성의 석축'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관련 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보고서가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박작성이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것으로 보인다. # #
 
사실 한반도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다룬 비디오머그의 영상

또한 중국은 한반도 북부[19]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영상에서도 나오듯, 이는 북한을 합병하기 위해서 북한 유사시 중공군이 빠르게 밀고 내려와 북한을 점령한 뒤, 한반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걸 주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뉴욕 메트뮤지엄 '중국관' 역사날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 지도' 오류 투성이 '평양까지 뻗은 만리장성' 中 동북공정이 왜곡한 세계지도 반크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뻗어 있는 지도를 두고 '만리장성이 고무줄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SNS에서 배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왜곡 행위를 바로 잡아줄 것을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에 요청한다고 밝혔다.# 유네스코등재란에 만리장성에 길림성과 요령성도 포함되어 올라가있어 문제가 많다. 다만 현재도 변한게 없고 중뽕들이 이걸이용해 조롱하기도한다.

7.2. 길이[편집]

2012년에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기존의 두 배 이상 늘어난 21196.18km라고 발표했다. 4만리장성 21196.2km이면 서울에서 시카고 토론토까지의 거리의 두 배, 서울에서 지구 반대편의 우루과이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서울에서 시카고는 10500km, 토론토는 10700km,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는 19400km, 몬테비디오까지는 19600km다.[20] 기사를 살펴 보면 중국의 발표는 고구려나 발해 성을 장성의 일부로 왜곡한 것도 있지만 주된 것은 진나라 및 한나라, 명나라의 장성 유적뿐만 아니라 그외 기타 왕조에서 건설된 다양한 장성을 조사한 것으로 그것을 모두 합산하여 만리장성의 길이가 연장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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