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친일의 그림자와 속죄의 길이 엇갈리는 명당 자리
중앙일보 원문 기사전송 2025-09-09 00:23 최종수정 2025-09-0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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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상당산성과 친일파 민영휘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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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로 출발, 친청·친일 오가
나라 기울 게 한 권력과 부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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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 부자 등극
명당에 자신과 두 아들의 묘 마련
손자는 문화와 금융에 헌신 속죄
그늘과 빛이 한 집안 안에서 교차

상당산성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 [사진 김정탁]

상당산성 안에 있는 민영휘 아들들의 묘. 왼쪽이 동생 민천식의 묘이고, 오른쪽이 이장된 형 민대식의 묘이다. [사진 김정탁]
민영휘는 휘문고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세우지 않았으면 평생 나쁜 짓만 골라서 한 사람이라는 악평을 듣는다. 살아생전 벼슬하면서 국가를 위해서 일한 적은 없고, 벼슬을 이용해 오로지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해서다. 그는 민 황후의 먼 일족 중 하나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해서인지 벼슬에 오르자마자 부정부패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금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송아지를 고종에게 상납하자 고종의 얼굴빛이 변하면서 “전임 관찰사 남정철은 정말로 큰 도둑이다. 관서지방에 금이 이렇게 많은데 조금만 상납하고 혼자 독식했단 말인가?”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정면에서 바라본 민영휘 아들들의 묘. 중간에 있는 한옥이 재실이고, 그 뒤편에 묘가 있다. 뒤편에 보이는 산들이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 김정탁]
흥미로운 건 민영휘가 원래 친일파가 아니라 골수 친청파였다는 사실이다. 민씨 일족의 핵심이던 민영익(閔泳翊)이 고종과 위안스카이(遠世凱)에게 동시에 버림받아 영향력을 잃자 민영휘가 그를 대신해서 청나라와 밀착한 수구파의 거두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서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를 제거하고, 사대당 내각에 들어가서 전권을 휘둘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4년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이의 진압을 위해서 민씨 일족을 대리해 위안스카이에게 매달려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이것이 청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니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지 않아도 동학 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민영휘를 축출하지 않으면 몸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져도 영원히 해산하지 않겠다고 소리 높였다. 그럴 정도로 민심과 이반 된 사람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 내각에 의해 갑오경장이 실시되자 그는 탐관오리로 곧바로 지목돼 진령군과 함께 처단될 뻔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유배형에 그쳐 용케 살아남았다. 그리고 유배지인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해 청나라로 도망쳤는데 얼마 안 돼 대사면령이 내리자 대원군의 장남 이준용과 교환돼 당당히 귀국해서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전국에 축구장 8000배 땅 소유

상당산성 남문 입구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 [사진 김정탁]
해방 후에는 이 땅들이 모두 몰수됐는데 상당산성에 있는 땅만은 신탁 등록이 돼 뺏기지 않았다. 민영휘는 어째서 이 땅을 신탁 등록했을까?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중 명당이어서라고 본다. 좌청룡 우백호가 겹으로 형성돼 학이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인 데다 양쪽으로 개천이 구불구불 흐르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풍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명당자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민영휘의 둘째 아들 민천식이 자손을 보지 못하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자 여기에 묻혔다.
그러자 민대식의 둘째 아들 민병도(閔丙燾)가 민천식의 양자로 입양됐다. 민병도는 할아버지 민영휘와 달리 좋은 일을 많이 했다. 1962년부터 1년간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는데 5·16 군사정부의 갑작스러운 통화개혁과 증권파동으로 생겨난 문제점들을 잘 수습했다. 또 어업차관의 무리한 도입에 따른 정권의 압력과 재무부의 은행감독원 장악 시도에 반발해서 총재직을 사직해 중앙은행 독립정신의 표본이란 평을 들었다.
조부와는 다른 길 걸은 손자 민병도

상당산성에서 내려다 본 청주 시내. [사진 김정탁]
또 만주에서 활약하던 지휘자 임원식이 해방 후 귀국하자 민병도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뜻을 받들어서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했다. 그 맥은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계승되었다. 그 후 임원식이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설립하자 이 학교를 꾸준히 후원했다. 또 비가 오면 반쯤 물에 잠겨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남이섬을 1965년에 인수했다. 그리고 수천 그루의 나무를 여기에 심어 한류 문화의 본거지로 지금의 남이섬을 조성했다. 1975년에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민병도가 이렇게 헌신했어도 할아버지가 저지른 죄로부터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용서받기에는 민영휘가 저지른 죄가 너무 크지 않은가. 그래도 친일 인사의 다른 후손들과 달리 할아버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평생 애쓴 게 사실이다.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후손 중에 민병도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친일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민병도 같은 사람을 품을 때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정인보도 그런 관점에서 민병도에게 출판사 설립을 권한 거라고 본다.

서울대병원 입구에 있는 지석영 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에서 내려 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사진 김정탁]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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