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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가족실록)허균 집안의 비극

한문역사 2025. 11. 11. 20:21

1.‘홍길동전’ 허균 집안의 비극

- 신분제 조롱한 붓끝, 끝내 못다 핀 ‘하늘이 내린 괴물’

‘홍길동전’ 허균 집안의 비극

“나와 내 누이의 글을 챙겨 훗날을 도모해다오!” 역적 누명을 쓰고 형장으로 가는 허균(1569~1618)이 딸과 사위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다. 허균은 역사에 다시 없는 ‘괴물’로 목이 잘리고 몸이 찢어진 주검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을 딸에게 못다 한 꿈을 맡겼다.

아비가 역모 죄인이라 하더라도 시집간 딸의 경우는 목숨까지 내놓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니만큼 그 죽음 또한 혁명과 반역을 넘나들며 소설 같은 여운을 남겼다.

가족은 날개인가, 굴레인가

조선시대는 개인의 흥망성쇠가 가족과 연동되고 부모와 조상을 통해 내 존재가 설명되는, 모든 길은 가족으로 통하는 사회였다. 물론 그 내부는 적서(嫡庶) 차별로 인해 가족이 날개인 사람과 가족이 굴레인 사람으로 나뉜다. 허균은 양반의 적자이지만 서자의 설움을 알았고, 신분의 족쇄에 걸린 유능한 인재를 안타깝게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이록(利祿)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는’ 선현들을 붓끝으로 조롱하면서 특권의식에 도취된 양반을 비웃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적 특권을 누리기보다 넘어서고자 했던 그를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괴물(天生一怪物)’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허균의 표준 영정.

유교국가 조선에서 허균 집안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러한 허균의 자신감은 가족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누나 허난설헌(1563~1589)은 중국의 문사들도 열광한 천재 시인 아니던가. 가족에서 얻는 행복과 가족이기에 받는 고통이 오늘날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그의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으며 연재를 시작한다.

양반 적자임에도 특권층 비웃어 - 역모 혐의로 숨진 시대의 반항아

누이 난설헌 등 ‘허씨 5문장’ 명성 - 유·불·선 넘나드는 자유로운 가풍

붕당정치·임란에 일가 모두 희생 - 음모·조작의 연속극, 지금 우리는?

어린 기억 속의 그는 세상의 버릇없는 막내들과 다를 바 없는 부모와 형제자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석받이였다. 아버지 허엽(1517~1580)이 53세에 낳은 늦둥이에 형들과의 나이 차는 무려 스무살이 넘었다.

“열두 살 때 엄친을 여의었는데, 어머니나 형님들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만 하여 공부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좀 더 자라서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들을 따라 육경(六經)과 역사서를 두루 읽기 시작했지요.”(‘답이생서, 答李生書’)

유성룡·이순신 집안과 교류

강원도 강릉 경포호수 남쪽에 조성된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아버지 허엽은 두 번의 결혼으로 3남 3녀의 자녀를 얻는다. 전처 청주한씨와의 사이에 박순원의 아내가 된 장녀와 우성전의 아내가 된 차녀 그리고 아들 허성을 두었고, 후처 강릉김씨와의 사이에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두었다.

전처 아들 ‘성’과 후처 아들 ‘봉’이 세 살 터울인 것을 보면 3년 사이에 출산과 사별, 재혼과 출산이 이루어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가정사와는 별개로 당시 허엽은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맡아 정사(政事)에 몰두하는데, 바깥일 하는 양반은 집안일에 무심해야 하는 것이 남녀유별의 정신이고 내외지분의 법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일대에 있는 허균 일가의 무덤.

허엽과 김씨의 혼인은 당시 예조참판이던 김광철이 전도유망한 젊은 동료를 사위로 낙점함으로써 성사되었을 것이다. 정승인 그가 아이 셋 달린 자리에 딸을 시집보낸 것은 양반관료 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즉 혼인은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어린 사윗감의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이미 급제하여 보장된 재취 자리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실제로 초혼에서는 별 볼 일 없다가 재혼을 통해 더 왕성해진 가문이 셀 수도 없이 많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의 묘.

아들 균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묘표가 부러지는 화를 당했다. 묘표 뒷면에는 균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오른쪽 묘표는 허엽의 후실이자 허균 남매의 생모 강릉김씨의 것인데 봉분이 없다.

교산 허균의 묘

허엽의 본가는 한성 건천동(현재 인현동)에 있었다. 두 아들 허성과 허봉의 동네 형으로 류성룡과 이순신이 살았다. 특히 류성룡은 허씨 가족들과 각별했는데, 그 집 사위 우성전은 벗이었고, 그 집 막내 허균은 제자였다.

훗날 류성룡은 허균이 들고 온 『난설헌시고』와 우성전의 아내 허씨가 보내 온 『계갑일록』, 그리고 허봉의 『하곡집』 등 허씨 가족들의 문집에 추천사를 쓴다. 생활 공간 건천동이 허씨 가족들에게는 역사적 무대가 된 셈이다.

아버지 허엽의 폭넓은 세계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표준 영정. 허난설헌 또한 빼어난 문인이었다.

▲ 난설헌집 목판본 1책.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허 난설헌의 사후에 중국과 일본에서 시집이 나올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편 김씨 소생의 세 남매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서울 본가에서 자랐다. 훗날 전라도를 여행하던 허균은 고부(古阜)에서 이우(李瑀)를 만나는데,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씨 어른은 율곡 선생의 아우이시다. 내게는 고향의 어른이 되는데 시와 그림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존경하는 분이다.”(‘조관기행, 漕官紀行’) 외가 강릉을 고향으로 여긴 것은 동성 촌락이 형성되기 전의 정서이다.

“형님들이나 누님의 글은 가정에서 나왔다”고 한 허균의 말을 보면 가족이 곧 교학(敎學)의 공간이었다. 유교는 물론 불교·도교와도 왕래한 허엽의 폭넓은 지식 세계는 아들과 딸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난설헌이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자유 정신을 그린 것이나 허봉과 허균이 불교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은 것에서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허균은 “중형(仲兄)이 적소(謫所)로부터 돌아와서 비로소 고문(古文)을 가르쳐 주셨고” “젊었을 때 중형의 명으로 손곡 옹에게 시를 물어 방향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

이조판서를 지낸 허성(許筬)

초당 허엽(許曄)의 아들이며,허봉(許篈)·허균(許筠)의 형이고,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다.

허봉은 당시(唐詩)의 대가 손곡 이달(李達)을 교사로 모셔올 만큼 두 동생의 교육에 지성이었다. 그는 또 시집간 누이가 시작(詩作)에 게으를까 수시로 격려하며 “두보의 명성이 내 누이에게서 다시 일어나기를” 염원한다.

세상은 그들을 ‘허씨 5문장’이라 불렀는데, 허엽과 그 자녀 성·봉·난설헌·균을 가리킨다. 게다가 두 사위 우성전과 김성립까지 여섯이 문사로 조정에 올라 서로의 수준을 높였는데, 세상에서는 허씨 파를 가장 치성한 가문으로 쳤다. (『선조수정실록』 13년(1580) 2월 1일)

즐거움도 고통도 공유한 형제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한 허씨 가족은 서로가 겪는 수난과 고통도 자기 일인 양 아파했다. 허봉은 네댓 살 먹은 누이의 아들이 죽자 극진한 슬픔을 기록으로 남겼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아이는 희윤이다. 희윤의 아버지는 성립인데, 나의 매부다. 희윤의 할아버지는 첨(瞻)인데, 내 친구다.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짓는다. 해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희윤묘지, 喜胤墓誌’)

허씨 가족은 동서 분당의 정치적 갈등과 임진왜란의 직격탄을 맞으며 쇠락해간다. 동인에 속한 허봉은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살아 돌아오는 자가 드물다는 갑산 유배에 처해졌다.

여동생 난설헌은 그 안타까움을 시에 담아 “멀리 갑산으로 귀양 가는 나그네”를 위로하고, “변방의 소식 뜸하니 이 시름 풀 길이 없는” 극한의 슬픔에 빠진다. 허봉은 2년여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3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듬해에는 난설헌이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죽이고, 또 죽이는 역사의 질곡

허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홍길동전’의 19세기 판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가족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허균은 피난길에 아내를 잃었고, 의병 간 두 자형 우성전과 김성립도 세상을 떴다. 이즈음 허균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과격한 언사를 남발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하는데, 맏형 허성이 정서적 언덕이 되어 주었다.

허균은 “헤어진 지 3년 만에 형님을 만나 너무 기뻤고 한 이불을 덮고 잤다”며 자랑하는가 하면, “형님이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다”며 좋아한다. 각자가 남긴 기록의 조각을 모아보면 허균의 형제자매들은 적어도 장유유서의 엄격함이나 가문의 외형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족애를 바탕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지만 역적이 된 허균으로 인해 아버지는 무덤이 훼손되고 형과 누이는 역사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조작과 음모로 죄가 만들어지고 상하좌우 모든 가족을 죽이고 다시 죽이는, 이런 형태는 물리고 싶은 역사이다.

공초(供招) 기록을 보면, 허균 사건은 영의정 기자헌이 폐모 문제로 위기에 몰리자 그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임금을 해칠 모의를 한다”는 고변에서 시작된다. 허균에게 글을 배울 때 역모의 조짐을 보았다는 것이다.

치열한 공방 끝에 허균 가족은 결국 역적의 씨를 배태한 “본래 패려궂은 집안”으로 단죄된다. 그런데 승리한 기씨 부자가 “본디 흉악하고 음흉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1.신분제 조롱한 붓끝, 끝내 못다 핀 ‘하늘이 내린 괴물’/ 중앙일보, 2023, 1 . 6.

2.호남 유학의 큰 기둥, 기대승(奇大升) 집안

- 퇴계와 겨룬 대학자, 그를 키운 ‘아버지의 모성’

1534년 전라도 광주에 사는 한 남자가 백일 아기를 안고 황망해 한다. 아내가 아기를 남겨둔 채 숨을 거둔 것이다. 위로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 셋이 더 있어 모두 네 명의 생존이 아버지인 그에게 달려 있다.

양반이라면 다 하는 재혼은 물론 첩도 없이 오로지 아이들의 양육에 전력을 다한 이 남자, 바로 호남 유학의 큰 기둥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奇進·1487~1555)이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은 퇴계 이황과 12년에 걸친 왕복 서신으로 사칠이기논변(四七理氣論辯)을 전개하여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도학이 발흥하던 16세기의 사상계가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견제한 것으로 평가되는 기대승.

그의 배후에는 생후 3개월 된 갓난이를 성년으로 서게 한 아버지의 ‘모성(母性)’이 있었다.

아내 잃은 부친, 세 아들 30년 양육 - 재혼 안 하고 “너를 찾아라” 가르침

퇴계와 12년 ‘서신논쟁’ 빛난 자취 - 외가 여성들 지극한 사랑도 큰 힘

학문·정치·가정 모두 봄바람처럼 - 형식·권위 넘어선 유학의 새 얼굴

중앙 정치서 물러나 광주에 은거

조선시대 호남 유학을 일군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 빙월당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다.

월봉서원의 강당인 빙월당

빙월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월봉서원 중심에 위치한 강당이다. 빙월당이란 명칭은 정조가 고봉선생을 빙심설월(氷心雪月)과 같다고 평가한데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경기 덕양을 본거지로 한 행주 기씨 집안의 기진이 낙남(落南)하여 광주에 터를 잡은 것은 폭력 정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은거의 의미가 컸다. 소년등과로 청현직을 거치며 장래가 촉망되던 아우 기준(奇遵·1492~1521)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혹하게 죽자 형인 그는 세상을 등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기진은 광주에 머물고 이복형 기원(奇遠)은 장성에 터를 잡는데, 그들이 전라도로 향한 것은 자신들을 품어줄 곳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상의 음덕이 서린 곳이라는 표현이 적절한데, 증조 기건(奇虔·1390~1460)이 세종조에 전라도 관찰사 및 전주부윤을 지낸 것이다.

당시 기건은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 한 공감의 목민관이었고(세조실록 6년), 이후 호남 유생들에게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그런 조상의 존재는 참혹한 세상에 내쳐진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2022년 11월 17일 고봉 타계 450주기를 기념해 열린 고유제. [사진 월봉서원]

한편 36세의 남편 기진을 따라 남하하던 온양 방씨는 청주 인근에서 숨을 거두는데, 소생은 없었다. 먼 훗날 고봉은 조정을 오르내릴 때마다 전모(前母)의 묘소에 성묘한다. 광주에 정착한 기진은 14살 아래의 진주 강씨(1501~

1534)와 재혼하여 40세에 첫아들 대림(大臨)을, 41세에 둘째 대승(大升)을, 다음으로을 얻었고, 쉰이 다 되어 막내 대절(大節)를 얻는다.

처가는 아내의 조부 강학손(1456~1523)이 유배를 계기로 영광에 정착한 집안이었다. 기대승은 ‘자경설(自警說)’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후에 여동생이 역질에 걸려 죽은 슬픈 가족사를 기억하며, 당시 아버지는 딸을 잃은 충격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절(寺)로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벼슬보다 인간의 가치가 중요

태극 무늬가 선명한 빙월당 정문 정안문에서 본 숭덕사.

월봉서원의 사당 숭덕사

고봉의 형제들은 오로지 아버지의 양육과 교육에 의지하여 성장한다. 기진이 아들들에게 행한 교육은 고봉의 ‘과정기훈(過庭記訓)’에 소상한데, 공부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세상을 사는 법 등을 담고 있다.

그는 아들들이 벼슬과 녹봉을 구하는 데 진을 빼기보다 일상의 인간적 가치에 의미를 두길 바랐고, 사람들과 행동을 너무 다르게 하지 말되 마음에 부끄러움은 없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나를 찾아가는 학문(爲己之學)을 주문하면서 “벼슬길의 풍파는 매우 두려운 것임”을 상기시킨다.

고봉 기대승의 문집 목판. [사진 문화재청]

기진은 지나친 자신감에 상대를 쉽게 보는 데서 화(禍)가 초래한다고 보는데, 아우 기준이 그러했다.

“기준은 강개하여 일을 논할 때면 고려하는 바가 없었고, 늘 임금 앞에서 곧은 말과 격렬한 논의로 듣는 사람들의 귀를 떠들썩하게 했다. 대신들은 대체로 그를 미워했다.”(중종실록 12년)

기준이 남긴 상처는 남은 가족들을 위축시킬 수도 있지만, 더 적극적인 힘이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 기진이 자식들에게 “자신에게 떳떳하면서 타인과 어울리라”고 한 것은 경험에서 얻은 지혜이다.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 [사진 문화재청]

고봉 형제들의 곁에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외가 여성들이 있었다. 증조가 강희맹(1424~1483)인 어머니 강씨는 조부 대에 전라도에 정착하는데,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20대 초반에 기진과 혼인한다.

고봉은 “외조부의 첩인 외조모께서는 가문의 어른으로서 우리를 돌보시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며 나를 격려하셨다”고 했다. 또 외종조모가 돌아가시자 “내가 출세하기를 바랐다면 그것은 외종조모의 봉양을 위해서다.”(『고봉선생연보』) 라며 그가 베푼 사랑을 잊지 않았다.

외가 여성 가족들이 합심하여 고봉 형제들을 돌본 것은 재혼을 하지 않은 채 자녀 양육에 동분서주하는 사위를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작은아버지 기준의 슬픈 최후

기대승의 작은아버지 기준의 묘소.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에 있다. [사진 고양시청]

고봉의 아버지 기진과 계부(季父) 기준은 기찬(奇襸·1444~1492)의 재취 김씨 소생이다. 김씨는 기준을 낳고 한 달여 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 아이들을 길러내는데, 모자가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준이 조광조를 종유하며 뜻을 같이하다 “과격한 논의에 부화뇌동한” 죄목으로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기준“뜻이 같은 선비와 옛 성현의 도를 강구하여, 선한 자는 인정해주고 선하지 못한 자는 미워한 일밖에 없었다”(중종실록 14년 11월 16일)며 항변하지만, 왕은 늘 옳은 말만 하며 자신을 가르치려 들던 기준이 그냥 싫었다.

결국 기준은 아산으로 귀양을 가는데, 이때 잠시 어머니를 보려고 유배지를 이탈한 것이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 다시 의금부에 갇힌다. 그의 옥중 상소가 『기묘록보유』에 실려 있다.

고봉 기대승

“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달(月)을 넘기자 아비가 죽었습니다. 오직 편모에 의지해 양육되어 모자가 서로 보전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이 귀양 간 것을 안 어미는 밤낮으로 울부짖다 병까지 겹쳐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미를 만나보고 싶었으나 국법이 지중하여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배소를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한 번이라도 보고 영결하고 싶었습니다. 모자 사이의 절박한 정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기준전·奇遵傳’)

선처를 바라는 상소에도 기준은 적소 이탈죄가 추가되어 북쪽 변경 온성에 위리안치된다. 산무덤 같은 외딴집의 절대 고독 속에서 그는 어머니와 형, 아내와 아들을 그리워하는 ‘옥중사가(獄中四歌)’를 남기는데,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한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기도’를 올린다.

“아들이여, 아들이여! 강보에 싸인 너! 아비 어미 못 가려도 영리하고 총명하여/

밝은 구슬 빛이 나듯 절로 보배 될 것이니, 성취할 그 날 참으로 아득하구나/

시서(詩書) 천 권 너에게 남겨 주니, 가족 사랑 남은 힘은 모름지기 호학(好學) 하렴.”

아내와의 행복한 노후 꿈꿨지만…

기준은 왕명으로 교사(絞死)에 처해지는데,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그의 아들 기대항(1519~1564)은 성장하여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한성부판윤(정2품)에 이르렀다. 기대항은 평소 “너그러움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고 세세히 살피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한성부판윤기공행장’)

아버지의 단처(短處)를 깊이 새겨 갈고 닦은 것이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이어져 오던 행주 기씨 기준의 계보는 증손 기자헌과 현손 기준격이 무고와 암투를 주도한 대가를 치르며, 거의 모든 핏줄이 사사되어 사실상 멸문으로 막을 내린다.

한편 아우 기준을 잃고 속세를 떠났던 형 기진은 다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후반의 인생 30년을 바친다. 가족이라는 시공간을 자원으로 성장한 아들 고봉은 학문과 정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가족생활도 봄바람처럼 훈훈했다.

고봉은 “밤이 되면 등잔불 아래에서 그대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 나눌 만년의 여유를 기약하오”(‘취증세군·醉贈細君’)라며 아내와의 행복한 노후를 꿈꾸었다. 하지만 한창나이 46세에 병이 나 대사간(정3품) 벼슬을 내려놓고 광주 집으로 가던 도중에 운명하고 만다.

태인(泰仁)에 이르러 사태를 직감한 그는 “며느리 집도 내 집”이라며 인근에 있던 사돈 김점(金坫)의 집에서 죽기를 원해 그곳에서 수십 명 문인의 배웅을 받으며 짧지만 굵은 삶을 마감한다.

고봉 선생과 부인 함흥이씨의 묘 - 월봉서원 뒤 백암산오르는 길에 있다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1.신분제 조롱한 붓끝, 끝내 못다 핀 ‘하늘이 내린 괴물’/ 중앙일보, 2023, 1 . 6.

3.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가족’ - 피로 얼룩진 60년 골육상쟁, 끝내 사죄 안 하다

사노(私奴) 송익필 형제를 체포하라!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숨은 죄인을 당장 잡아들이라는 왕의 전교는 나라가 내린 판결을 뭉개고 있는 송씨 형제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때는 1589년(선조 22) 12월, 3년 전에 송씨 가족 모두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還賤)한다는 판결이 있었다.

60년이 넘도록 양반으로 살아온 송가(宋家), 갑자기 사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죽자사자 도망쳐 숨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독이 오른 안가(安家)는 추노를 고용하여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 원고와 피고로 갈라진 두 집안은 표면적으로는 노비 소유권 문제지만 실제는 3대에 걸친 안씨 가문의 복수극이다.

‘서인의 대부’ 당대 지식사회 리더 - 외척 안씨 집안과 3대에 걸친 송사

부친이 안씨 일가에 ‘역모죄’ 씌워 - 안가의 대반격 “우리집 노비 출신”

‘선대의 악업’ 부인하며 변명 일관 - 시대의 제갈량인가, 모사꾼인가

“노비 소생 아닌가, 양인 절차 밟았나”

동양화가 신영훈이 그린 송익필 수묵화.

단행본 『조선의 2인자들: 그들은 어떻게 권력자가 되었는가』에 실렸다. [사진 책비]

다툼의 사안은 노비 감정(甘丁)이 양인(良人)이 되는 절차를 밟았는가 아닌가에 있었다. 감정(1467~1537)은 안가의 증조 안돈후(1421~1483)와 여종 중금(重今)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는 안씨 집안의 주선으로 양인 송린과 혼인하여 송사련(1496~1575)을 낳았다. 종모법에 따르면 감정은 안가 소유의 노비가 되는데, 그 소생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버지가 벼슬아치인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양인이 될 수도 있다. ‘공·사 노비를 아내나 첩으로 삼아 낳은 자녀는 그 아버지가 장예원(掌隷院)에 신고하면 사실을 확인하여 기록하고(『경국대전』)

병조(兵曹) 관할의 보충대에 입속시켜 일정한 기간을 채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고 안가(安家)의 입장은 감정은 이 절차를 거친 적이 없기에 그 소생은 자신들의 노비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의 독자 송사련은 송익필 등 5남 1녀를 낳아 소송 당시 감정의 자손은 7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피고 송가(宋家)는 할머니 감정이 105년 전에 이미 양인이 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1481년 장예원 입안’ 문서를 제시한다. 원고 안가는 ‘감정이 비(婢)지만 재산을 나눌 때 노비 한두 구(口)를 주어 물긷는 노고를 면케 하라’는 증조 안돈후의 유서를 내놓는다.

원고와 피고로 만난 ‘6촌지간 원수’

충남 당진시 원당리에 있는 송익필 묘역과 그의 위패를 모신 입한재(立限齋). [중앙포토]

송익필 묘역

충남 당진시 원당리에 있는 송익필의 위패를 모신 입한재(立限齋).

원고와 피고는 적서로 처지는 다르지만 촌수로는 6촌이다. 원고는 안돈후의 자손 28명이고, 피고는 감정의 모든 자손 68명이 대상이었다. 참고로 감정은 50년 전에, 그 아들 송사련은 11년 전에 죽었다. 양측은 문서의 진정성과 소멸시효, 골육상잔법(骨肉相殘法) 등을 따지며 정교한 법적 논증을 펼쳐갔다.

삼현수간(三賢手簡), 보물 제 1415호.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중기, 150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 세 사람 사이에 왕래한 편지를 송익필의 아들 송취대가 모아 후대에 엮은 책.

송익필이 이이·성혼과 35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三賢手簡)』.

오른쪽이 송익필 글씨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한 인물이 있는데, 당대에 이미 명성을 떨친 송익필(1534~1599)이다. 구봉(龜峯) 선생으로 불리는 그는 고양 구봉산(현재 심학산) 아래에 터를 잡고 학숙을 열어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타난 13세의 김장생을 비롯하여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다. 한 살 아래의 우계 성혼과 두 살 아래의 율곡 이이와는 너나들이하며 학문을 논하고 인생을 논했는데,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 『삼현수간(三賢手簡)』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송익필서인(西人)의 대부이자 학술계의 리더이며 정계의 멘토였다. 게다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난 30여년 모두가 우러러보던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던 그가 예순 가까이에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선대(先代)의 악업(惡業)이라고 했다.

서얼 신분에 당상관 된 부친의 영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산남리에 있는 송익필 유허비(遺墟碑). [사진 구봉문화학술원]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서얼 신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정3품 당상관이 되는데,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그의 출세는 외사촌 안처겸(1486~1521) 형제와 외숙 안당(1460~1521)을 역모죄로 고발하고 얻은 대가였다.(『중종실록』 16년)

안돈후의 아들인 좌의정 안당은 기묘사화(1519) 때 사림을 보호한 죄로 관직이 삭탈되었고, 현량과로 입격한 세 아들 또한 파직되는 등 가문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환갑에 든 노련한 정치가 안당과는 달리 젊은 아들들은 사화(士禍)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을 제거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며 떠들어댔다. 장남 안처겸이 무협지를 쓰듯 선을 넘는 말들을 하자 안당은 그 화를 잠재우고 일도 시킬 겸 아들을 음성의 농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때 송사련은 한강나루까지 따라가 외숙 일행과 ‘울며 작별’하고는 곧바로 처남 정상(鄭瑺)을 대동하고 대궐로 들어가 안처겸을 고발한다. 적서를 크게 따지지 않은 안당 부자는 피를 나눈 얼조카 송사련을 ‘내 가족’으로 챙겼고, 일 처리에 밝은 송사련은 안가를 드나들며 집안일을 도맡아 왔기에 그의 고변은 설득력을 얻었다.

증거로 제시된 문건은 안처겸의 모친상 조객록과 장사 때 묘역 조성을 도운 광주의 양천(良賤) 역부 60명이 적힌 명부였다. 송사련의 고변이 있은 지 닷새 만에 안처겸 형제 등 10여 명은 능지처사되고 안당은 교사되었으며, 문건 속의 사람들 103명이 형벌을 받고 죽거나 유배되었다. 이른바 신사무옥(辛巳誣獄)이다.

묻거나 따지는 과정도 없이 조작과 음모의 냄새가 짙은 이 사건은 기묘사화처럼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의 불안한 심리가 큰 몫을 한 것이다. 고발자 송사련은 네 임금을 거치며 40년간 당상관을 지키다가 천수를 다하고 80세로 세상을 떴다.

“사주 대가로 얻은 관직과 재물”

KBS 사극 ‘징비록’에서 송익필로 나오는 배우 박지일. [사진 유튜브 캡처]

송사련에 대한 당시 언론은 “통탄스러운 일에 격분하여 한 말을 무고자가 재앙을 꾸며서 옥사를 얽은 것”이라고 한 신잠(申潛)을 비롯 “남곤과 심정이 송사련을 사주하여 꾸민 사건”이고 “그 대가로 송사련이 얻은 것은 관직과 재물”로 요약된다.

율곡은 송사련의 장사 때 신주를 써준 일로 우계의 질타를 받자, 상주들의 간절함에 어찌 못해 응한 것임을 고백한다.(『율곡전서』 32) 구봉의 친구라는 율곡과 우계마저도 송사련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 것이다.

아버지 송사련의 권세와 재물에 힘입은 송가의 여섯 남매는 소위 고급 교육을 받고 양반의 사위가 되고 종실의 며느리가 되었다. 멸문의 화를 당한 안씨 가족들은 고통과 울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던 안가와 송가는 할머니 감정을 사이에 두고 6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안가 사람들은 조부와 부친과 숙부에게 역모죄를 걸어 죽이고 멸문의 화를 입힌 원수를 응징하는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소를 제기할 당시 이미 고령이던 안당의 손자이자 안처겸의 아들인 안로는 재판 직전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 아내 윤씨가 바통을 넘겨받아 승소를 끌어냈다. 안씨 자손들은 68명의 노비를 원한 것이기보다 선조의 억울함을 공식화하고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한 것이다.

소장이 접수되던 날 가족 대표로 법정에 선 송익필은 소멸시효 등의 국법을 거론하며 조목조목 변론을 한다. 8, 9세에 이미 천재로 소문나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지식을 꿰뚫고 있는 그가 행한 변론은 얼마나 화려했을까.

그런데도 재판관은 “순리를 거역한다(理順拒逆)”며 56세의 ‘대학자’에게 곤장을 매우 쳐서 내보낸다.(‘안가노안·安家奴案’)

“순리에 어긋난다” 곤장 맞은 대학자

조선시대 노예에서 해방됐음을 증명하는 속량문기.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판관의 입에서 법리가 아닌 순리가 나온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피해자 가족에게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원수로 삼아 공격하는 송익필을 제대로 본 것이다. 곤장을 맞고 내쳐진 그는 6개월간의 법정에 몸을 드러내는 대신 막후에서 소송을 지휘한다. 서인 측에서 제갈량이라 부르는 그를 동인 측에서는 모사꾼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환천(還賤) 명단이 나오자 도망가는 송가 사람들.

“우리는 군부(君父)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법을 잘못 적용한 사람에게서 도피하여 숨은 것이다. 원수를 피해 숨어서 보전하는 것은 천명에 부합하고, 잘못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천명에 부합하지 않는다.”

(『구봉집』 3, 답인설·答人說)

천명(天命)이라는 당대 학술의 최고 개념을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삼은 송익필,

“그의 처신이나 행적을 보면 재주나 기예는 월등하지만 학문은 그저 고담준론을 늘어놓는 데 불과하다”

(『택당별집』 15)는 당대의 평가에 수긍이 간다.

변명으로 일관할 게 아니라 부친의 악업에 엎드려 사죄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송익필과 그의 학문은 빛나는 업적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출처]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 3.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가족 - 피로 얼룩진 60년 골육상쟁, 끝내 사죄 안 하다’/ 중앙일보, 2023, 3 . 3.


삼현수간(보물 : 三賢手簡), 유학자 송익필, 성혼, 이이가 주고 받은 편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삼현수간(三賢手簡, 보물)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송익필, 성혼, 이이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를 후손들이 편집하여 제작한 것이다. 이들은 16세기 성리학을 이끌었던 인물들로 조선후기 주도 세력인 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인물들이다.

편지에는 성리학의 주요 내용을 토론하고 논의한 내요들도 포함되어있는데 그들의 문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그들 친필 편지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그중 율곡 이이의 친필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형권 제20~21면, 1580년>,
<송익필이 성혼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형권 제20면, 조선1580년 7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형권 제20~21면, 1580년
“오미자를 조금 보냅니다. 집에서 차마시는 용도로 두시기 바랍니다. 삼가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여쭙니다.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어 멀리 있는 저의 마음이 위로되었으면 합니다. … 육포 세 덩어리를 아울러 보내드립니다. 평상시대로 드십시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송익필이 성혼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형권 제20면, 조서너 1580년 7월
“제가 지은 <소학집주발>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는데 말과 뜻이 한결 부드러워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학>의 발문이고, <집주>에 대한 뜻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마디 말을 엮어 <집주>를 지은 본래의 뜻과 일치하게끔 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송익필이 성혼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정권 제40면, 조선 1592년 이후 추정>,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정권 제39면, 조선 1589년>

송익필이 성혼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정권 제40면, 조선 1592년 이후 추정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는데 어느덧 가을이 되었습니다. 간절한 그리움이 쇠약한 늙은이에게 더욱 간절합니다. … (편찬중인) <율곡문집>은 조금도 진척이 없습니다. 길도 제법 가까운데 어찌 형께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초고본이 완성되지 못해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정권 제39면, 조선 1589년
“저는 비록 대단치 않은 사람이지만 형과 율곡과 더불어 말석이나마 끼게 되었습니다. 노둔한 성정을 채찍질하여 마음을 한가지로 하였고 주위의 환경이나 욕망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리권 제20면, 조선 1581년 이후>,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리권 제19면, 조선 1582년 가을>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리권 제20면, 조선 1581년 이후
“형께서 문형(대제학)에 임명되고 또 앞으로는 재상이 될 것이라고 들었습다. … 후대의 유자를 살펴본다면 가만히 있을 때는 도를 논하고 의리를 지키다가, 한번 움직이면 초심을 곧 잃어버립니다. 감히 천박한 의견을 말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내는 편지, 삼현수간첩 리권 제19면, 조선 1582년 가을
“항상 형께서 몸에 질병이 없고 기력이 건강하여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인의에 침참하는 모습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부럽고 감탄이 이어집니다. 제가 지금 오는 것은 오로지 형을 만나고자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왕림해줏서 며칠간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삼현 수간첩(三賢 手簡帖), 송취대 편집 1599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도서관, 보물
유학자 송익필, 성혼, 이이가 30년 넘게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첩이다. 송익필의 아들이 가문에 남아 있던 편지들을 첩으로 편집했다. 세 학자는 편지로 성리학을 토론하거나 재상에 임명된 친구에게 국가 경영의 주의 사항을 일러주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보물 삼현수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