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생애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
|
|
연잉군 시절 영조의 젊은 모습 (21세) [1]
|
9월 13일에 창덕궁(昌德宮)의 보경당(寶慶堂)에서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당시 숙원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는 둘째로 숙빈 최씨의 첫째 아들 영수와 셋째 아들(이름 미상)은 영아기에 일찍 죽었다. 또한 영조가 태어난 해는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하고 남인은 숙청, 서인은 복권된 갑술환국이 일어난 갑술년인데, 갑술환국의 시작은 서인 노론의 유생인 김인이 " 또 장희재가 돈으로 김해성에게 뇌물을 주어 꾀어 내어 숙빈 최씨의 숙모인 장모로 하여금 최숙원을 독살(毒殺)하려고 한다"는 고변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인현왕후의 오라비 민진원에 의하면 당시 숙원 최씨가 숙종의 마음을 서인 쪽으로 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커다란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생모인 숙빈 최씨는 무고의 옥때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고하여 몰락에 일조하였으므로 이는 더 심화되었다.
1699년, 왕자 이금은 6살의 나이로 연잉군(延仍君)으로 책봉되었다.# 숙종의 자녀들은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 연잉군은 세자였던 경종과 5살이 어린 연령군과 함께 숙종의 막대한 총애를 받았다. 숙종은 1703년 10살인 연잉군의 관례(성인식)을 치루기 위해 절목(시행규정)을 새로 만들라고 명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예전은 의전이 너무 높고 세자와 비슷한 것이 많아서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판부사 서문중이 문제를 제기하여 숙종이 일부 요소의 급을 낮추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관례가 치러진 지 두달 후인 1704년 2월, 연잉군은 혼례를 하였는데 숙종이 정한 처가의 급은 낮았으나[2] 혼례 또한 굉장히 호화로웠다고 전해진다.[3] 숙종은 연잉군과 연령군에게 궁에서 나가 살 집을 마련해줄 때나 독립시킬 때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임금의 이러한 모습을 지탄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있다. 1712년 연잉군은 사재로 나가게 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숙종은 독립할 날이 가까워질 때마다 독립할 날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겨우 출합을 허가했다고 한다.#
연잉군은 창의궁에서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시고 살며 풍류와 예술을 즐겼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숙종이 출합시킬 때 시를 써 부탁한 것처럼[4] 숙종의 병수발을 위해 궁에 자주 들렸다. 생모 숙빈 최씨의 행보와 어릴 때부터 연잉군을 돌봐준 영빈 김씨와의 연 그리고 당시 정치 지형 상 자연스레 노론과 가까웠다. 영빈 김씨의 가족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스승 또한 노론으로 분류된다.
1718년 3월에는 생모 숙빈 최씨가 사망하였으며 고작 1달 후 첫 자식이었던 화억옹주가 요절해 이들의 죽음에 괴로워하기도 했다.#또한 장례 중 숙종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5]이에 대한 마음고생이 심했다.[6]
1717년(숙종 43) 7월 19일 숙종은 당시 노론의 영수격인 좌의정 이이명에게 들어오라고 명령한 후 승지와 사관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이이명과 독대를 하는데 이를 정유독대라고 한다.숙종 43년 7월 19일 정유독대는 이후 굉장한 논란이 됐는데, 예법상 왕과 신하는 독대해서는 안된다는 예법을 어긴데다 그 날 저녁, 숙종은 노론 고위 관료들만을 모은 후 "왼쪽 안질(眼疾)이 더욱 심하여 전혀 물체를 볼 수가 없고, 오른쪽 눈은 물체를 보아도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며 왕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의사를 타진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수상쩍은 독대인지라 윤지완 등 소론은 대리청정에 대해 강한 반대의사를 표하였고 경종 또한 몇 차례 사양하였으나 결국 대리청정은 숙종의 뜻대로 실시되었다. 독대 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사관이 동석하지 않아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후 노론 측에 의하면 숙종이 "경종을 잘 보좌해주고 연잉군과 연령군을 보호해달라"고 이이명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정유독대는 당시 악화된 숙종의 몸상태와 후계 문제와 관련되어 소론이 "대리청정을 통해 노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왕세자를 바꾸려 획책할 것 같다"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으며 노론은 정유독대를 근거로 연령군과 연잉군의 보호를 자처하게 된다.
정유독대에 대한 숙종의 의도와 숙종이 후계자를 교체하려고 했다면 숙종이 마음에 둔 차기 후계자와 교체 이유는 무엇이었나에 대한 의견은 학계에서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기존 정설은 소론계 당론서인 당의통략에 근거하여[7] 소론의 주장대로 '노론과 숙종이 트집을 잡아 경종을 폐위시키려고 했다'는 것이었는데 최근 연구는 민진원의 단암만록 등을 근거로 '질환을 앓고 있는 경종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으며 당시 조정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론에게 왕실을 부탁했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병신처분 이후 당시 조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노론을 왕실의 편으로 만드려고 했다고 보기도 한다.
숙종이 염두에 둔 후계자에 대해서는 태어난 순서를 기준으로 연잉군으로 보기는 의견이 많으나 당시 연잉군이 숙빈 최씨의 장례 과정에서 숙종의 미움을 샀다는 것과 성장과정에서 인원왕후와의 밀접한 관계 등을 근거로[8] 연령군으로 보기도 한다.[9] 다만 연령군은 정유독대로부터 2년 후 사망하여 이후로는 연잉군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경종은 공은 없으나 실책도 하지 않으며 원만하게 세자 자리를 유지했다. 숙종의 병환이 갈 수록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경종이 승지(丞誌)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이 경종을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숙종에게 타박하기도 했다. 이는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했으며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결국,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경종이 왕위를 계승한다. 하지만 경종을 지지하는 남인과 소론은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희빈 장씨의 뒷배가 됐던 남인은 이미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이후 완전히 조정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소북은 그 남인 보다도 숫자가 적어 정치세력으로서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으며 소론은 병신처분 이후 정계에서 힘을 잃었으며 조정은 노론 우위로 재편된 상태였다. 노론은 학맥과 혈연 특성상[10] 서인 중에서도 기사환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희빈 장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경종을 어릴 때부터 돌봐준 연으로 노론임에도 경종에게 애틋했던 인현왕후의 오라비 민진후는 경종이 즉위할 때는 이미 병으로 사망한 상태였다.[11]왕위에 올랐으나 상당히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것이다.
당시 경종의 처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조중우라는 유생이 희빈 장씨에게 명호를 주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경종은 어머니를 높이기는 커녕 노론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린 자를 처벌해야했었다.#
게다가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종이 즉위한 해 청나라에서 온 사신이 계속해서 왕의 아우를 만나고 싶다면서 "왕의 아우를 만나보고 싶은데, 그는 어느 비빈의 소생이며 부인의 성씨는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것이다. 김창집은 연잉군은 병이 심각하여 직접 만날 수는 없다고 둘러대며 경종과 영종의 신상에 대해서만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는데 사관은 "이이명이 사신(使臣)으로 연경에 들어갈 때에 저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통 청나라 사신이 일개 종친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으므로 독대를 한 노론 대신 이이명이 청나라에 갔을 때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았나하는 의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1721년 8월 노론에 속하는 정언(正言) 이정소는 상소를 올려 경종에게 나이가 한창임에도 후사가 없으니 후계를 정하라고 청한다.# 정 6품에 불과한 사간원의 언관이 무려 왕의 후계에 대해 독단적으로 논할 리가 없으니 이는 노론의 의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또한 당시 가장 가까운 혈육은 연잉군이었으니 연잉군을 후계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상소를 본 경종은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에게 지시를 하여 이들은 다른 신하들을 불러 논의를 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노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종에게 상소가 옳다며 대비 인원왕후에게 의견을 물은 후 의사가 담긴 글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이는 노론이 자신들의 수와 직위를 이용해 경종에게 강권한 것에 가까웠다.그러자 경종은 인원왕후를 찾아가서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요?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요"라는 인원왕후의 친필을 받아온다.왕실 최고 어른인 인원왕후까지 연잉군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의사표시를 하니 연잉군의 사양과 소론의 반대에도 영조는 왕세제(王世弟)로 봉해진다.[12]
소론은 이에 대해 격하게 반발하는데 대표적으로 유봉휘는 건저가 타당하지 못하며 과정이 심히 잘못되었다는 상소를 올린다. 당시 상소내용을 요약하면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할 나이가 아닌데 치료를 먼저 받아봐야지 너무 성급하다 그리고 연잉군을 후계자로 삼는 건 그렇다 쳐도 이따위 날치기 건저가 어디있냐"는 것이다.[13] 경종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밤 늦게 "나의 병이 점점 더하여져서 아들을 얻어 선대왕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임무를 공경히 받들 가망이 없다"는 비망기를 내려 노론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노론은 유봉휘를 국문해야한다고 청하기까지 했으며 연잉군은 건저를 사양하며 유봉휘를 처벌하지 말라고 몇 차례 상소를 올려야했다.[14]
여담이지만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는 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8월 15일 숙종의 탄신일에 맞춰 숙종의 능인 명릉에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검암참에서 쉬고 있었는데, 소를 도둑질한 사람이 발참에 잡혀왔다고 한다. 영조는 이를 보고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참장 이성신으로 하여금 흉년때문에 소를 도둑질한 것이니 범인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는데 그 후 집에 돌아와보니 왕세제 책봉 소식과 함께 가마가 궁문 밖에 대기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때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것은 유교 예법상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호칭이 세자라면 경종의 후계자로서 경종의 왕통을 잇는 것이지만 호칭이 세제가 된다면 경종의 아우이자 숙종의 아들로서 숙종의 왕통을 잇는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숙종에게서 영조의 정통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경종에 대한 노론의 생각이 어땠는 지를 알 수 있다. 경종수정실록의 사관평에 저사(儲嗣)를 세울 적에 아들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어유구를 구실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종의 후계자를 아들이 아닌 동생인 연잉군으로 정한것에 대해 당대에도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론은 왕세제 책봉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연잉군이 정식 책봉례를 행한 지 보름만인 10월 10일[15], 정무 처리에 왕세제를 참석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런데 경종은 한 술 더 떠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한다. 이를 들은 언관들과 승지는 반대 의견을 표시하며 특히 최석항은 폐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폐문을 미뤄달라고 청한 후 쳐들어가 경종에게 반대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경종은 이러한 명령을 거둬들이는 듯 했지만 이내 다시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갈 수록 노론을 규탄하는 소론의 워딩이 거칠어지자 노론 대신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파 간의 극단 대립으로 바뀐다.영조는 대리청정을 취소해달라 상소하였으나 당시 경종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제가 하는 것이 옳겠는가?"라며 요지부동이었고 신하들을 만나주지 않았따. 이런 경종의 의사를 확인한 노론은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겠다는 의사가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대리청정 절목(절차)을 만드러 아뢰자고 결정했다. 반면 소론의 영수 조태구는 신하들이 왕래하는 통상적인 출입로가 아니라 창경궁의 쪽문인 선인문으로 들어가 경종을 만난다는 승부수를 띄웠고 이는 성공했다. 경종이 조태구를 만나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뒤늦게 안 노론 또한 조태구를 쫓아가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거둘 것을 요청했고 경종은 이들의 의견대로 대리청정을 철회하였다.
당시 경종의 태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는데, 경종이 노론을 숙청하기 위해 일부러 이러한 사건을 설계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고 경종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이런 혼란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 또한 있다.
어찌됐든 1721년 12월부터 정국은 급격하게 바뀌는데 경종은 12월 9일 소론의 영수 우의정 조태구를 불러들이고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김창집과 이건명을 면직시킨다. 이를 신축환국(1721)이라고 한다. 그 이후 임인옥사(1722)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두 사건을 합쳐 신임옥사 혹은 신임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두 사건은 정조 대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조선 대 정치사에서 큰 사건 중 하나다.[16]
1699년, 왕자 이금은 6살의 나이로 연잉군(延仍君)으로 책봉되었다.# 숙종의 자녀들은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 연잉군은 세자였던 경종과 5살이 어린 연령군과 함께 숙종의 막대한 총애를 받았다. 숙종은 1703년 10살인 연잉군의 관례(성인식)을 치루기 위해 절목(시행규정)을 새로 만들라고 명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예전은 의전이 너무 높고 세자와 비슷한 것이 많아서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판부사 서문중이 문제를 제기하여 숙종이 일부 요소의 급을 낮추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관례가 치러진 지 두달 후인 1704년 2월, 연잉군은 혼례를 하였는데 숙종이 정한 처가의 급은 낮았으나[2] 혼례 또한 굉장히 호화로웠다고 전해진다.[3] 숙종은 연잉군과 연령군에게 궁에서 나가 살 집을 마련해줄 때나 독립시킬 때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임금의 이러한 모습을 지탄하는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있다. 1712년 연잉군은 사재로 나가게 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숙종은 독립할 날이 가까워질 때마다 독립할 날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겨우 출합을 허가했다고 한다.#
연잉군은 창의궁에서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시고 살며 풍류와 예술을 즐겼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숙종이 출합시킬 때 시를 써 부탁한 것처럼[4] 숙종의 병수발을 위해 궁에 자주 들렸다. 생모 숙빈 최씨의 행보와 어릴 때부터 연잉군을 돌봐준 영빈 김씨와의 연 그리고 당시 정치 지형 상 자연스레 노론과 가까웠다. 영빈 김씨의 가족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스승 또한 노론으로 분류된다.
1718년 3월에는 생모 숙빈 최씨가 사망하였으며 고작 1달 후 첫 자식이었던 화억옹주가 요절해 이들의 죽음에 괴로워하기도 했다.#또한 장례 중 숙종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5]이에 대한 마음고생이 심했다.[6]
1717년(숙종 43) 7월 19일 숙종은 당시 노론의 영수격인 좌의정 이이명에게 들어오라고 명령한 후 승지와 사관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이이명과 독대를 하는데 이를 정유독대라고 한다.숙종 43년 7월 19일 정유독대는 이후 굉장한 논란이 됐는데, 예법상 왕과 신하는 독대해서는 안된다는 예법을 어긴데다 그 날 저녁, 숙종은 노론 고위 관료들만을 모은 후 "왼쪽 안질(眼疾)이 더욱 심하여 전혀 물체를 볼 수가 없고, 오른쪽 눈은 물체를 보아도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며 왕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의사를 타진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수상쩍은 독대인지라 윤지완 등 소론은 대리청정에 대해 강한 반대의사를 표하였고 경종 또한 몇 차례 사양하였으나 결국 대리청정은 숙종의 뜻대로 실시되었다. 독대 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사관이 동석하지 않아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후 노론 측에 의하면 숙종이 "경종을 잘 보좌해주고 연잉군과 연령군을 보호해달라"고 이이명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정유독대는 당시 악화된 숙종의 몸상태와 후계 문제와 관련되어 소론이 "대리청정을 통해 노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왕세자를 바꾸려 획책할 것 같다"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으며 노론은 정유독대를 근거로 연령군과 연잉군의 보호를 자처하게 된다.
정유독대에 대한 숙종의 의도와 숙종이 후계자를 교체하려고 했다면 숙종이 마음에 둔 차기 후계자와 교체 이유는 무엇이었나에 대한 의견은 학계에서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기존 정설은 소론계 당론서인 당의통략에 근거하여[7] 소론의 주장대로 '노론과 숙종이 트집을 잡아 경종을 폐위시키려고 했다'는 것이었는데 최근 연구는 민진원의 단암만록 등을 근거로 '질환을 앓고 있는 경종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으며 당시 조정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론에게 왕실을 부탁했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병신처분 이후 당시 조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노론을 왕실의 편으로 만드려고 했다고 보기도 한다.
숙종이 염두에 둔 후계자에 대해서는 태어난 순서를 기준으로 연잉군으로 보기는 의견이 많으나 당시 연잉군이 숙빈 최씨의 장례 과정에서 숙종의 미움을 샀다는 것과 성장과정에서 인원왕후와의 밀접한 관계 등을 근거로[8] 연령군으로 보기도 한다.[9] 다만 연령군은 정유독대로부터 2년 후 사망하여 이후로는 연잉군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경종은 공은 없으나 실책도 하지 않으며 원만하게 세자 자리를 유지했다. 숙종의 병환이 갈 수록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경종이 승지(丞誌)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이 경종을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숙종에게 타박하기도 했다. 이는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했으며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결국,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경종이 왕위를 계승한다. 하지만 경종을 지지하는 남인과 소론은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희빈 장씨의 뒷배가 됐던 남인은 이미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이후 완전히 조정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소북은 그 남인 보다도 숫자가 적어 정치세력으로서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으며 소론은 병신처분 이후 정계에서 힘을 잃었으며 조정은 노론 우위로 재편된 상태였다. 노론은 학맥과 혈연 특성상[10] 서인 중에서도 기사환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희빈 장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경종을 어릴 때부터 돌봐준 연으로 노론임에도 경종에게 애틋했던 인현왕후의 오라비 민진후는 경종이 즉위할 때는 이미 병으로 사망한 상태였다.[11]왕위에 올랐으나 상당히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것이다.
당시 경종의 처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조중우라는 유생이 희빈 장씨에게 명호를 주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경종은 어머니를 높이기는 커녕 노론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린 자를 처벌해야했었다.#
게다가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종이 즉위한 해 청나라에서 온 사신이 계속해서 왕의 아우를 만나고 싶다면서 "왕의 아우를 만나보고 싶은데, 그는 어느 비빈의 소생이며 부인의 성씨는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것이다. 김창집은 연잉군은 병이 심각하여 직접 만날 수는 없다고 둘러대며 경종과 영종의 신상에 대해서만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는데 사관은 "이이명이 사신(使臣)으로 연경에 들어갈 때에 저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통 청나라 사신이 일개 종친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으므로 독대를 한 노론 대신 이이명이 청나라에 갔을 때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았나하는 의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1721년 8월 노론에 속하는 정언(正言) 이정소는 상소를 올려 경종에게 나이가 한창임에도 후사가 없으니 후계를 정하라고 청한다.# 정 6품에 불과한 사간원의 언관이 무려 왕의 후계에 대해 독단적으로 논할 리가 없으니 이는 노론의 의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또한 당시 가장 가까운 혈육은 연잉군이었으니 연잉군을 후계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상소를 본 경종은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에게 지시를 하여 이들은 다른 신하들을 불러 논의를 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노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경종에게 상소가 옳다며 대비 인원왕후에게 의견을 물은 후 의사가 담긴 글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이는 노론이 자신들의 수와 직위를 이용해 경종에게 강권한 것에 가까웠다.그러자 경종은 인원왕후를 찾아가서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요?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요"라는 인원왕후의 친필을 받아온다.왕실 최고 어른인 인원왕후까지 연잉군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옳다고 의사표시를 하니 연잉군의 사양과 소론의 반대에도 영조는 왕세제(王世弟)로 봉해진다.[12]
소론은 이에 대해 격하게 반발하는데 대표적으로 유봉휘는 건저가 타당하지 못하며 과정이 심히 잘못되었다는 상소를 올린다. 당시 상소내용을 요약하면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할 나이가 아닌데 치료를 먼저 받아봐야지 너무 성급하다 그리고 연잉군을 후계자로 삼는 건 그렇다 쳐도 이따위 날치기 건저가 어디있냐"는 것이다.[13] 경종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밤 늦게 "나의 병이 점점 더하여져서 아들을 얻어 선대왕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임무를 공경히 받들 가망이 없다"는 비망기를 내려 노론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노론은 유봉휘를 국문해야한다고 청하기까지 했으며 연잉군은 건저를 사양하며 유봉휘를 처벌하지 말라고 몇 차례 상소를 올려야했다.[14]
여담이지만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는 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8월 15일 숙종의 탄신일에 맞춰 숙종의 능인 명릉에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검암참에서 쉬고 있었는데, 소를 도둑질한 사람이 발참에 잡혀왔다고 한다. 영조는 이를 보고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참장 이성신으로 하여금 흉년때문에 소를 도둑질한 것이니 범인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지시했는데 그 후 집에 돌아와보니 왕세제 책봉 소식과 함께 가마가 궁문 밖에 대기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때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것은 유교 예법상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호칭이 세자라면 경종의 후계자로서 경종의 왕통을 잇는 것이지만 호칭이 세제가 된다면 경종의 아우이자 숙종의 아들로서 숙종의 왕통을 잇는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숙종에게서 영조의 정통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경종에 대한 노론의 생각이 어땠는 지를 알 수 있다. 경종수정실록의 사관평에 저사(儲嗣)를 세울 적에 아들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어유구를 구실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종의 후계자를 아들이 아닌 동생인 연잉군으로 정한것에 대해 당대에도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론은 왕세제 책봉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연잉군이 정식 책봉례를 행한 지 보름만인 10월 10일[15], 정무 처리에 왕세제를 참석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런데 경종은 한 술 더 떠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한다. 이를 들은 언관들과 승지는 반대 의견을 표시하며 특히 최석항은 폐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폐문을 미뤄달라고 청한 후 쳐들어가 경종에게 반대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경종은 이러한 명령을 거둬들이는 듯 했지만 이내 다시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갈 수록 노론을 규탄하는 소론의 워딩이 거칠어지자 노론 대신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파 간의 극단 대립으로 바뀐다.영조는 대리청정을 취소해달라 상소하였으나 당시 경종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옳겠는가? 세제가 하는 것이 옳겠는가?"라며 요지부동이었고 신하들을 만나주지 않았따. 이런 경종의 의사를 확인한 노론은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겠다는 의사가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대리청정 절목(절차)을 만드러 아뢰자고 결정했다. 반면 소론의 영수 조태구는 신하들이 왕래하는 통상적인 출입로가 아니라 창경궁의 쪽문인 선인문으로 들어가 경종을 만난다는 승부수를 띄웠고 이는 성공했다. 경종이 조태구를 만나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뒤늦게 안 노론 또한 조태구를 쫓아가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거둘 것을 요청했고 경종은 이들의 의견대로 대리청정을 철회하였다.
당시 경종의 태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는데, 경종이 노론을 숙청하기 위해 일부러 이러한 사건을 설계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고 경종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이런 혼란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 또한 있다.
어찌됐든 1721년 12월부터 정국은 급격하게 바뀌는데 경종은 12월 9일 소론의 영수 우의정 조태구를 불러들이고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김창집과 이건명을 면직시킨다. 이를 신축환국(1721)이라고 한다. 그 이후 임인옥사(1722)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두 사건을 합쳐 신임옥사 혹은 신임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두 사건은 정조 대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조선 대 정치사에서 큰 사건 중 하나다.[16]
왕세제였던 영조는 는 이 시기 여러번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불안에 떨어야했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영조의 강박증을 기록하기 앞서 꺼리며 걱정하던 일로 병환이 되신 듯 하다고 서술했는데, 이는 왕세제 시절과 재위 초반기에 목숨을 위협받는 사건이 반복되면서 영조에게는 극심한 PTSD와 강박증이 생겼다는 뜻이다. 말년에 특히 도드라지는 괴팍한 면모의 대부분이 여기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신축환국 직후인 1721년 12월 23일 '박상검의 옥'이 터졌다. 왕세제는 세자 시강원과 세자익위사 관원들을 불러 "환관들이 나를 죽이려 했다. 대비께서는 이 일을 경종에게 알리라고 하여 내가 울며 경종께 알렸다. 그러나 경종께서는 처음에는 이들을 잡아들이라고 하였으나 곧 그 명을 거두셨다. 사건이 일어난 만큼 임금 측근에 있는 악한 무리를 제거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해 다시 아뢰니 감히 아뢸 수 없는 하교[17]를 내렸다. 나는 왕세제의 직위를 사퇴하고 석고대죄를 해서 처벌을 기다리겠다"라는 폭탄 선언을 했다.
이를 들은 세제의 측근들[18]은 놀라서 왕세제를 계속해서 말리다가 조정의 고위신료들에게 알려 처벌을 청하게 할 테니 그렇게 되면 왕세제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청했다. 이를 전해 들은 대신들은 경종을 찾아가 지목된 궁인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였으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경종은 소론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조태구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청하자 처벌을 허락하였다. 인원왕후는 손수 왕세제 시해에 가담한 궁인들의 이름까지 특정하며 이를 도왔다.경종 1년 12월 22일
박상검은 경종의 측근으로 박상검의 배후에는 경종의 국구인 어유구 그리고 소론 급론의 대표인물인 김일경이 있다는 게 실록 등에 기록되어있는 후대의 정설이다.[19]
상술된 노론의 행보에 대해 '경종을 업신여긴 무리한 행보'라고만 평가하기도 하나 인현왕후의 왕비로 외척이었던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 박상검의 옥 및 건저를 한 계기에 대해 흥미로운 서술이 있다. 노론이 무리수를 둬가면서 건저를 서두른 계기는 경종이 질환이 있어 후사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선의왕후가 종친 가운데에서 어린아이를 입양하여 경종의 후사로 삼으려는 소론의 계획에 동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0] [21]
효종의 가계의 남자 후손은 경종을 제외하면 연잉군과 그의 아들[22]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선의왕후가 입양대상으로 고려한 것은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로 추정된다. 이를 인원왕후[23]와 척신을 중심으로 한 노론 대신들이 알아채고 연잉군의 보호 및 삼종의 혈맥[24]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왕세제 책봉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즉,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시 정국은 소론 및 경종의 척신(선의왕후와 그 일가)과 노론 및 숙종의 척신(숙종의 비들인 인원왕후, 인현왕후, 인경왕후 집안 등)의 대결구도였다.
민진원은 선의왕후가 경종이 잠든 사이 인원왕후에게서 받아 온 언문 교지 두 장을 찢어버려 인원왕후가 교지를 다시 써 경종에게 주어야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선의왕후와 소론의 양자 계획은 인원왕후와 노론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경종 또한 이들의 편을 들어 연잉군의 왕세제가 되면서 실패했으며 이에 분개한 선의왕후와 어유구가 내관 박상검 등을 수족으로 부리며 경종과 왕세제를 이간질시키고 왕세제가 문안드릴 때 통과하는 문을 폐쇄시켜 경종과의 왕래도 막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경종의 측근이라지만 일개 궁인들이 왕세제를 건드리는 간 큰 짓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비와 왕의 장인이 뒷배로 있었던 것이다. 어유구는 당시 어영대장으로 왕실의 군권 또한 가지고 있었다. 왕세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유구를 설득하여 자신의 편에 서게 했으며 이들의 수족이 되어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궁인들을 처분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영조는 신임사화로 화를 입은 노론 집안들의 집요한 규탄에도 불구하고 어유구를 보호했으며 최근에는 영조가 왕세제 시절 어유구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최근 발견되기도 했다.#
관련 논문에서는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경종은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되나 경종 또한 삼종의 혈맥을 이은 왕으로서 소현세자의 후손을 자신의 후계로 삼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소현세자의 가계로 왕위가 넘어간다는 것 자체가 가계의 정통성을 흔드는 일으로 본인의 정통성 뿐 아니라 조상에 대한 불효로 여겨질 수 때문이다.[25] 게다가 이복 형제지만 어릴 때부터 이따금 함께 놀고 부친의 병수발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연잉군과 달리 소현세자의 자손은 이미 8촌이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다.
1722년(경종 2) 3월, 서얼인 목호룡은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이 세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삼급수를 이용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삼급수는 대급수, 소급수, 평급수를 칭한 것인데 대급수는 김용택이 검사 백망에게 검을 주어 숙종의 국상 때 경종을 시해하게 사주했다는 것이고, 소급수란 노론 자제들이 궁녀들을 사주해 경종에게 독을 먹이려고 했다는 것이며 평지수란 숙종의 국상 때 소론의 입궐을 막고 경종을 폐위한다는 거짓교지를 발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목호룡은 연잉군이 이에 관련되어있음을 암시하는 말을 덧붙였는데 [26]이 사건이 곧 임인옥사(1722)이다. 대급수에 연루된 검사 백망은 영조의 호위무사였고, 소급수에 연루된 환관 장세상은 영조의 측근이었다. 또한 소급수에 연루된 서덕수는 정성왕후의 조카 즉 왕세제의 인척이었다. 왕세제 시절 가장 심각하게 영조의 목숨을 위협한 사건이었다.
(경종이) 비답하기를 "나인(內人)을 조사해 내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나, 노론(老論)을 타도(打倒)하려는 계책(計策)은 더욱 지극히 근거가 없으니, 이 뒤로 이와 같은 문자(文字)는 써서 들이지 말라."
경종실록,경종 2년 8월 18일#
윤서교(尹恕敎)는 상소에서 ‘이 역적이 선조(先朝) 때부터 공봉(供奉)해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사랑하는 것이라면 역시 사랑하였는지라, 전하의 효심(孝心)에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이처럼 멈칫거리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는가 하면, 또 효종 때 조 서인(趙庶人)을 목벤 고사를 끌어대었으니, 그 의도는 선조(先朝)의 후궁 영빈 김씨(寧嬪 金氏)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경종수정실록, 경종 4년 4월 24일#
이들은 인정하지 않고 고문을 받다 죽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 진술을 하기도 했는데 세제의 처조카인 서덕수는 "경종 독살시도를 하기 전 독을 실험하기 위해 궁인들을 시켜 영조의 첩 소훈 이씨의 음식에 독을 타 소훈 이씨를 죽였다.[27]"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환관 장세상은 "김씨 성의 궁인에게 수라에 약을 타게 하여 경종이 누런 물을 토한 일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이로 인해 소론 강경파들은 김씨 궁인이 누군지 색출한 후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은 김성 궁인으로 노론 4대신의 혈족이자 숙종의 후궁이었던 영빈 김씨를 대놓고 지목하였다. 이러한 처벌 주장은 경종이 승하한 해까지 계속된다. 경종은 누런 물을 토한 적이 있다고는 수긍했으나 그런 궁인은 없다고 거부하여 영빈 김씨가 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나 영빈 김씨와 왕세제는 매우 사이가 가까웠고 소론 강경파가 영빈 김씨가 경종을 독살해서 왕위에 올리려고 했을 것이라고 지목한 사람 또한 왕세제였기 때문에 이는 큰 위협이었다.
왕세제는 사건이 터지고 불안에 떨며 직위를 내려놓으려고 하였으나 소론의 영수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 등 조정의 고위 대신들이 이를 만류하고 왕세제를 보호하겠다며 왕세제를 안정시켰다. 일부 강경파를 제외한 소론은 관련된 노론 대신들은 처형하더라도 왕의 유일한 후계자인 왕세제를 죽여 종사를 불안정하게 할 의사가 없었다. 소론은 오히려 왕세제를 보호해 노론을 끊어내고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경종 또한 왕세제 부부에게 종묘에 제사를 지낼 것을 지시하는 등 영조를 보호한다.[28]
이 신임옥사에 연루되어 사망하거나 처벌받은 사람은 400여명에 이른다. 사건 자체는 영조가 훗날 노론 4대신의 자제들에게서 "저하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 것[29]을 볼 때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이 어떤 활동 자체는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이것이 경종을 해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노론의 주장대로 왕세제를 보호하자고 맹세하고 모종의 활동을 한 것이 역모라는 누명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30] 다만 노론 내에서도 “젊은 치기에 공명심에 불타 쓸데없는 계획을 세워 영조의 왕위 계승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며 소론 준론 및 완론이 쓴 경종실록과 노론이 쓴 경종수정실록은 공통적으로 목호룡과 김일경이 영조를 모함했다는 입장과 노론 4대신이 모두 사사된 것은 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1]
이러한 사건들을 거치며 소론은 본격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는데, 왕세제와 노론을 모두 적대하는 소론 급론과 노론을 적대하되[32] 왕세제를 보호하려는 소론 준론 그리고 노론을 적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왕세제의 편을 든 소론 완론으로 나뉘었다.
소론 급론은 영조 즉위 후 정계에 배제당한 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는 부류들이며 당시 조정의 고위 신하들 대다수는 소론 준론에 해당한다. 이들은 경종의 뜻을 받들어 왕세제를 보호했다. 소론 완론은 대체로 영조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측근들로 이후 소론 탕평파가 된다. 왕세제는 소론 준론 및 완론과 결탁해 자신의 안위를 보전한다.
또한 이는 기존 지지세력인 노론 뿐 아니라 소론 또한 등용한다는 탕평책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영조에게 노론의 이미지가 강해 소론과는 적대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왕세제때 영조는 소론과 교류가 활발했으며[33] 균역법 등을 주도해 영조의 최측근으로 손꼽히는 조현명, 송인명[34]그리고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소론으로 영조와 왕세제시절부터 연을 맺었다.
1724년 경종이 5년이라는 짧은 재위 끝에 승하하면서 왕세제인 영조는 2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조그만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일절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 때 사용된 음식이 생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1755년에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35]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36][37]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리는 다 안다!" 등 대놓고 개겼다.[38]
경종은 1달정도 앓아누운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게장과 감을 먹었다.[39][40]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41][42]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43]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직접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기는 하다. 경종 독살설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 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44] 영조는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 것이 많았는지 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께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45]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세제였던 영조는 신임옥사로 인해서 이복형 경종을 죽일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단 몇 해 전에 그나마 자신의 지지 세력이였던 노론들이 대거 죽거나 쫓겨났으며 출생에서부터 천출이라는 차별[46][47]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비록 '왕세제(王世弟)'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직전 중용된 많은 소론계 중신들은 신임옥사 당시 노론을 쫓아낸 사람들이였으며 경종 사망의 진상을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약 경종이 독살되었다면 이들이 영조에게 신하로서 충성했었을리가 없다.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 때 사용된 음식이 생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1755년에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35]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36][37]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리는 다 안다!" 등 대놓고 개겼다.[38]
경종은 1달정도 앓아누운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게장과 감을 먹었다.[39][40]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41][42]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43]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직접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기는 하다. 경종 독살설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 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44] 영조는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 것이 많았는지 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께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45]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세제였던 영조는 신임옥사로 인해서 이복형 경종을 죽일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단 몇 해 전에 그나마 자신의 지지 세력이였던 노론들이 대거 죽거나 쫓겨났으며 출생에서부터 천출이라는 차별[46][47]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비록 '왕세제(王世弟)'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직전 중용된 많은 소론계 중신들은 신임옥사 당시 노론을 쫓아낸 사람들이였으며 경종 사망의 진상을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약 경종이 독살되었다면 이들이 영조에게 신하로서 충성했었을리가 없다.
|
|
|
20대와 50대 시절의 초상의 얼굴 부분 확대 비교. 눈꼬리가 더 올라간 게 포인트. 매부리코 등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
형 경종을 제치고 영조를 등극시키려 했던 것은 원래 노론이다. 그러나 노론이 경종 즉위 당시 신임옥사로 죄다 떨려나가면서 영조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너무나 위태로웠다. 이복형 경종이 4년 만에 죽음을 맞으면서 당시 세제가 어렵게 보위에 올랐지만 당시 집권 중이던 소론을 어쩌기는 어려웠다. 왕이 된 영조가 가장 먼저 회를 치기 시작한 것은 소론, 그 중에서도 자신을 죽이려 든 소론의 강경파였다. 이 때 영조는 소론의 거두 김일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계기로 소론(준론)을 일부 숙청한다.
갖은 핑계로 김일경과 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자비없이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론을 재집권시켰지만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첨해서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만큼 영조는 그들의 속셈을 알고 있어 탕평책이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일례로 즉위 초 사면 복권으로 기가 오른 노론들이 정치 보복을 하려할 때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오히려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정권을 뺏고는 소론(완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한편 이인좌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출사길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이 억울하다며 상소를 연달아 써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 숙종을 본받아 환국을 써먹은 적이 있을 뿐더러 이복형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영조의 탕평은 시작부터 자기 모순이 됐다. 모든 당파에서 두루 인재를 뽑겠다는 영조의 구상은 강경파를 배제하고 각 당파의 온건파들만 모인 탕평당의 독차지로 변해 그나마 붕당 정치가 쇠퇴하게 되는 원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런데 윤휴의 손자 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강경파와 남인 소북을 규합하여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48] 아래 초거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탕평파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잠시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어그로[49]가 잔뜩 올라 있던 소론 강경파와 남인 소북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 진압되었다.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박살났으며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감사 정사효[50]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서는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서는 근왕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조선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소론 탕평파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책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준론+남인)까지 진압하고 조선 조 마지막 공신 지정인 '분무공신(奮武公臣)'을 지정했다.
갖은 핑계로 김일경과 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
일례로 즉위 초 사면 복권으로 기가 오른 노론들이 정치 보복을 하려할 때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오히려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정권을 뺏고는 소론(완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한편 이인좌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출사길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이 억울하다며 상소를 연달아 써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 숙종을 본받아 환국을 써먹은 적이 있을 뿐더러 이복형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영조의 탕평은 시작부터 자기 모순이 됐다. 모든 당파에서 두루 인재를 뽑겠다는 영조의 구상은 강경파를 배제하고 각 당파의 온건파들만 모인 탕평당의 독차지로 변해 그나마 붕당 정치가 쇠퇴하게 되는 원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런데 윤휴의 손자 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강경파와 남인 소북을 규합하여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48] 아래 초거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탕평파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잠시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어그로[49]가 잔뜩 올라 있던 소론 강경파와 남인 소북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 진압되었다.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박살났으며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감사 정사효[50]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서는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서는 근왕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조선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소론 탕평파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책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준론+남인)까지 진압하고 조선 조 마지막 공신 지정인 '분무공신(奮武公臣)'을 지정했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이 정리되고 영조가 탕평을 이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였음에도 이미 적대감이 커질대로 커진 신하들 사이의 정쟁은 그치지 않았다. 노론 측에서 탕평파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광좌를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대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고 그 외에도 크고작은 분쟁이 잦게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탕평을 지키려는 영조마저 남인과 소론 강경파에서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자 이들을 계속 처형하며 두 파벌을 약화시키는등 별 수 없었다곤 해도 탕평을 어긋나게 하는데 한 손 보태게 되었다.[51] 이로서 소론 세력은 온건파를 지향했던 일부만 겨우 잔존하면서 명맥을 간신히 지키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소론이 쓸려나가는 한편, 노론과도 다소 분쟁이 있었는데, 바로 신임옥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과정에서 노론 측과 영조 측이 동상이몽을 꿧던게 그 이유였다. 영조 또한 해당 사건에서 역안(逆案)에 써진 마당이었기 때문에 이를 신원하고자하는 노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긴 했으나, 영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 시절 역적으로 몰릴뻔했던 본인의 죄를 사하는게 목적이었을 뿐, 안그래도 소론이 대폭 약화된 상태에서 노론이 힘을 키우는걸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이 즈음 조정은 이미 파벌 불문 강경파들은 다 떨어져나가고 영합에 맞추는 온건파들만이 남은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당파색은 남아있었는지 소론의 약화에 자신감을 얻은 노론이 마음껏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영조에게 분노를 샀던 적도 있었다.[52] 결국 이 사건은 노론 측에서 싹싹빌면서 다시는 안 까불겠다는 맹세를 하고 영조도 이에 큰 터치 없이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53]
한편 영조는 선조 시절부터 붕당을 주도하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림 세력들에 대한 정리를 시작하였고 이를 위해 사림과 붕당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서원을 감소시키는 한편, 사림 출신의 관직 등용을 줄였다. 그 바람에 숙종 시절만 해도 영향력이 강했던 전통적인 사림들은 순식간에 설 자리를 잃었다. 그 덕분에 지방 사림 출신들이 줄어나가는 반면, 서울(한성)과 경기 출신에게 관직이 많이 주어져서 이시점 이후부터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한 관직 독주가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 온건파만 남긴데다가 그런 온건파에 남은 불만마저 반강제로 찍어누르는데 성공한 영조는 이후 자신의 영합을 위한 정치에 맛을 들였고, 이 과정에서 외척이지만 한미한 세력이면서 나름 똑똑한 이들이 다수 있는 노론 소속 가문인 풍산 홍씨를 중용했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은[54] 종9품 말직에서 7년만에 종2품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으로 진급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되었다.[55]
영조 15년(1739년) 즈음엔 소론을 중심으로 파벌 상당수가 이레저래 정리되면서 붕당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탕평당의 1당 독재나 다름없게 되면서[56] 탕평을 위해 시행하던 쌍거호대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래도 영조의 탕평 의지는 강했기에 탕평의 의의가 없지는 않았다 영조는 즉위 16년(1740년)부터 노론과 소론 뿐만이 아니라 남인과 소북 역시 등용해야 한다는 원경하의 대탕평(大蕩平)을 지향하여 남인과 소북내에서도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남인 이맹휴(李孟休)의 등용은 나름 파격적이었는데. 이맹휴는 이잠(李潛)의 조카이자 이익(李瀷)의 아들로 이잠은 1706년(숙종 31) 김춘택(金春澤)과 이이명(李頤命)이 세자를 비방했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을 맞아 죽은 인물이다.
영조는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64세에 사망한 후에도 생존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새 장가를 들어야 했다.[57]이 때 계비로 들어온 사람이 정순왕후 김씨. 영조는 조강지처 정성왕후의 친족인 대구 서씨 일족은 본체 만체 했지만, 정순왕후의 일족인 경주 김씨 처족들을 중용했다. 이에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 등 그 일파가 왕의 지지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해지긴 했으나, 분위기에 너무 취한 나머지 실세인 홍봉한의 목을 치려는등 무리수를 두다 실패하여 영조의 분노를 사 함경도 이원으로 유배간 일도 있었다. 그래도 아예 정계에서 축출되지는 않았기에 유배가 풀린 후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 등과 연합한 홍봉한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수 등과 함께 청명당을 이뤄 맞서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탕평을 지키려는 영조마저 남인과 소론 강경파에서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자 이들을 계속 처형하며 두 파벌을 약화시키는등 별 수 없었다곤 해도 탕평을 어긋나게 하는데 한 손 보태게 되었다.[51] 이로서 소론 세력은 온건파를 지향했던 일부만 겨우 잔존하면서 명맥을 간신히 지키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소론이 쓸려나가는 한편, 노론과도 다소 분쟁이 있었는데, 바로 신임옥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과정에서 노론 측과 영조 측이 동상이몽을 꿧던게 그 이유였다. 영조 또한 해당 사건에서 역안(逆案)에 써진 마당이었기 때문에 이를 신원하고자하는 노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긴 했으나, 영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 시절 역적으로 몰릴뻔했던 본인의 죄를 사하는게 목적이었을 뿐, 안그래도 소론이 대폭 약화된 상태에서 노론이 힘을 키우는걸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이 즈음 조정은 이미 파벌 불문 강경파들은 다 떨어져나가고 영합에 맞추는 온건파들만이 남은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당파색은 남아있었는지 소론의 약화에 자신감을 얻은 노론이 마음껏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영조에게 분노를 샀던 적도 있었다.[52] 결국 이 사건은 노론 측에서 싹싹빌면서 다시는 안 까불겠다는 맹세를 하고 영조도 이에 큰 터치 없이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53]
한편 영조는 선조 시절부터 붕당을 주도하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림 세력들에 대한 정리를 시작하였고 이를 위해 사림과 붕당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서원을 감소시키는 한편, 사림 출신의 관직 등용을 줄였다. 그 바람에 숙종 시절만 해도 영향력이 강했던 전통적인 사림들은 순식간에 설 자리를 잃었다. 그 덕분에 지방 사림 출신들이 줄어나가는 반면, 서울(한성)과 경기 출신에게 관직이 많이 주어져서 이시점 이후부터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한 관직 독주가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 온건파만 남긴데다가 그런 온건파에 남은 불만마저 반강제로 찍어누르는데 성공한 영조는 이후 자신의 영합을 위한 정치에 맛을 들였고, 이 과정에서 외척이지만 한미한 세력이면서 나름 똑똑한 이들이 다수 있는 노론 소속 가문인 풍산 홍씨를 중용했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은[54] 종9품 말직에서 7년만에 종2품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으로 진급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되었다.[55]
영조 15년(1739년) 즈음엔 소론을 중심으로 파벌 상당수가 이레저래 정리되면서 붕당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탕평당의 1당 독재나 다름없게 되면서[56] 탕평을 위해 시행하던 쌍거호대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래도 영조의 탕평 의지는 강했기에 탕평의 의의가 없지는 않았다 영조는 즉위 16년(1740년)부터 노론과 소론 뿐만이 아니라 남인과 소북 역시 등용해야 한다는 원경하의 대탕평(大蕩平)을 지향하여 남인과 소북내에서도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남인 이맹휴(李孟休)의 등용은 나름 파격적이었는데. 이맹휴는 이잠(李潛)의 조카이자 이익(李瀷)의 아들로 이잠은 1706년(숙종 31) 김춘택(金春澤)과 이이명(李頤命)이 세자를 비방했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을 맞아 죽은 인물이다.
영조는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64세에 사망한 후에도 생존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새 장가를 들어야 했다.[57]이 때 계비로 들어온 사람이 정순왕후 김씨. 영조는 조강지처 정성왕후의 친족인 대구 서씨 일족은 본체 만체 했지만, 정순왕후의 일족인 경주 김씨 처족들을 중용했다. 이에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 등 그 일파가 왕의 지지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해지긴 했으나, 분위기에 너무 취한 나머지 실세인 홍봉한의 목을 치려는등 무리수를 두다 실패하여 영조의 분노를 사 함경도 이원으로 유배간 일도 있었다. 그래도 아예 정계에서 축출되지는 않았기에 유배가 풀린 후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 등과 연합한 홍봉한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수 등과 함께 청명당을 이뤄 맞서기도 했다.
|
|
|
임오화변을 다룬 KBS 〈한국사전〉 방송 영상
|
영조는 긴 즉위기간에 걸맞게 왕권을 강화시키고 탕평을 밀어붙이는등 여러 업적을 이뤘으나, 노년이 될때까지도 책봉 이전부터 따라붙던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격지심, 이로 인한 인간적 결함을 떨쳐내지 못했고 오히려 가면 갈수록 치매끼와 함께 이런 면모가 두드러졌다. 특히나 가정을 다스리는데에 있어선 영 좋지 못했는데, 왕으로서 정계를 강하게 휘어잡는데 성공하면서 이런 방식에 맛들렸는지 가장으로서의 영조는 가히 최악에 가까웠다.
정비인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버린 뒤 거의 찾아가지 않았고 심지어 일단은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환갑 잔치조차 제대로 치뤄주지 않고 심지어 정성왕후와 화완옹주의 남편(영조의 사위)인 정치달이 같은 날 사망하자 아내의 장례보다 사위의 문상을 먼저 챙기는등 예스맨만 남은 수준인 당시의 조정관료마저 경악할 정도로 영조는 지독하리만치 정성왕후를 홀대했다.
심지어 이후 정성왕후의 홀대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한반도 역사상 손꼽히는 비극중 하나인 사도세자 뒤주사건, 일명 임오화변을 일으킨다.[58]
상술한대로 영조는 무수리 출신 후궁 소생이란 면에서 정통성이 매우 부실한 왕이었다.[59] 이 때문인지 영조는 유일한 적통이자 후계자인 아들 사도세자를 대함에 있어 지나치게 스파르타식으로 대했다. 교육열이 강한 정도를 넘어 과장을 보태면 학대할 명분을 찾기 위해 그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압적이고 빡빡한 지시를 내렸고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신하들 앞에서도 "너는 왜 이 정도도 제대로 못하냐"는 식으로 닥달하고 핀잔을 주기를 서슴치 않았다. 빡빡한 일정과 부군의 구박에 사도세자는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고 그런 와중 대리청정을 하겠다며 사도세자를 앞세워 정사를 맡기면서도 신하들과 조금이라도 부딪히거나 무시당한다 싶으면 바로 양위하겠다고 난리를 치느라 사도세자와 신하들은 언제나 이런 영조의 호통에 노출된채 살아야 했다.[60] 이러면서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간섭과 질책을 멈추긴 커녕 그 수위가 더욱 높아져서 나중가면 이게 자식겸 세자를 대하는건지 아니면 눈 밖에 난 신하를 대하는건지 구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게 어느정도였냐면 임오화변 초기에 버티다 못한 사도세자가 칼을 뽑아들고 자결을 시도하느라 신하들이 달려들어 겨우 말렸고, 영조의 과격한 대우를 보다 못한 서연관 스승들과 신하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61] 제발 세자에게 좀 상냥하게 대해주면 안되겠냐며, 뭐가 문젠지 모르지만 제발 좀 세자에게 화 좀 풀라며 간청하고 읍소하는 일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영조는 세자나 신하가 뭐라 하든 들은 척도 안하고 오히려 세자를 핍박하길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로 따지면 2010년까지 있었던 입시 위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아빠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사도세자는 끝내 미쳐버려서 대낮에 내관과 종들을 죽이거나 궁녀들을 겁탈하며, 세자로서 절대 보여서는 안될 온갖 패륜 범죄와 사고를 치기에 이르렀다. 사도세자의 이런 범죄 행각을 알고 격분한 영조는 끝내 정신병자가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포기하고, 후계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세손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감금시켜 죽이고 만다.
당연하지만 이 일은 단적으로 지가 아들을 정신병자로 만들어놓고 그걸 빌미로 폐위시키고 죽이기까지 한 사건인데다가 과거 영조의 이런 과격한 행보는 안그래도 이래저래 시달리고 눌려오던 신하들이 폐비 윤씨와 관련된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상기하면서 보복을 두려워하며 적대하게 만들었다.[62]
실제로 정조는 정통성으로 보나[63] 자질로 보나[64] 왕위를 물려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고 연산군마냥 즉위 이후 정조가 부친의 참극을 빌미로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몰랐기에 '자신들이 숙청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나야 한다.'며 일을 벌인 것이다.
이는 그렇게 아꼈던 손자 정조에게도 아들처럼 스파르타식으로 대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65]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정국 운영에서 사도세자 사건 관련 조금의 문제 제기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강경하게 대했고, 이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친국[66]하고 죽이느라 당파 몇이 날아갈 정도로 강경하게 무서운 태도를 보였다. 임오화변은 훗날 정조가 본의 아니게 세도정치의 씨앗을 남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정비인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버린 뒤 거의 찾아가지 않았고 심지어 일단은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환갑 잔치조차 제대로 치뤄주지 않고 심지어 정성왕후와 화완옹주의 남편(영조의 사위)인 정치달이 같은 날 사망하자 아내의 장례보다 사위의 문상을 먼저 챙기는등 예스맨만 남은 수준인 당시의 조정관료마저 경악할 정도로 영조는 지독하리만치 정성왕후를 홀대했다.
심지어 이후 정성왕후의 홀대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한반도 역사상 손꼽히는 비극중 하나인 사도세자 뒤주사건, 일명 임오화변을 일으킨다.[58]
상술한대로 영조는 무수리 출신 후궁 소생이란 면에서 정통성이 매우 부실한 왕이었다.[59] 이 때문인지 영조는 유일한 적통이자 후계자인 아들 사도세자를 대함에 있어 지나치게 스파르타식으로 대했다. 교육열이 강한 정도를 넘어 과장을 보태면 학대할 명분을 찾기 위해 그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압적이고 빡빡한 지시를 내렸고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신하들 앞에서도 "너는 왜 이 정도도 제대로 못하냐"는 식으로 닥달하고 핀잔을 주기를 서슴치 않았다. 빡빡한 일정과 부군의 구박에 사도세자는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고 그런 와중 대리청정을 하겠다며 사도세자를 앞세워 정사를 맡기면서도 신하들과 조금이라도 부딪히거나 무시당한다 싶으면 바로 양위하겠다고 난리를 치느라 사도세자와 신하들은 언제나 이런 영조의 호통에 노출된채 살아야 했다.[60] 이러면서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간섭과 질책을 멈추긴 커녕 그 수위가 더욱 높아져서 나중가면 이게 자식겸 세자를 대하는건지 아니면 눈 밖에 난 신하를 대하는건지 구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게 어느정도였냐면 임오화변 초기에 버티다 못한 사도세자가 칼을 뽑아들고 자결을 시도하느라 신하들이 달려들어 겨우 말렸고, 영조의 과격한 대우를 보다 못한 서연관 스승들과 신하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61] 제발 세자에게 좀 상냥하게 대해주면 안되겠냐며, 뭐가 문젠지 모르지만 제발 좀 세자에게 화 좀 풀라며 간청하고 읍소하는 일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영조는 세자나 신하가 뭐라 하든 들은 척도 안하고 오히려 세자를 핍박하길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로 따지면 2010년까지 있었던 입시 위주 교육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아빠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사도세자는 끝내 미쳐버려서 대낮에 내관과 종들을 죽이거나 궁녀들을 겁탈하며, 세자로서 절대 보여서는 안될 온갖 패륜 범죄와 사고를 치기에 이르렀다. 사도세자의 이런 범죄 행각을 알고 격분한 영조는 끝내 정신병자가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포기하고, 후계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세손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감금시켜 죽이고 만다.
당연하지만 이 일은 단적으로 지가 아들을 정신병자로 만들어놓고 그걸 빌미로 폐위시키고 죽이기까지 한 사건인데다가 과거 영조의 이런 과격한 행보는 안그래도 이래저래 시달리고 눌려오던 신하들이 폐비 윤씨와 관련된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상기하면서 보복을 두려워하며 적대하게 만들었다.[62]
실제로 정조는 정통성으로 보나[63] 자질로 보나[64] 왕위를 물려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고 연산군마냥 즉위 이후 정조가 부친의 참극을 빌미로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몰랐기에 '자신들이 숙청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나야 한다.'며 일을 벌인 것이다.
이는 그렇게 아꼈던 손자 정조에게도 아들처럼 스파르타식으로 대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65]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정국 운영에서 사도세자 사건 관련 조금의 문제 제기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강경하게 대했고, 이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친국[66]하고 죽이느라 당파 몇이 날아갈 정도로 강경하게 무서운 태도를 보였다. 임오화변은 훗날 정조가 본의 아니게 세도정치의 씨앗을 남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세손(정조)을 정식 동궁(東宮, 세자/세손 등 차기 왕위계승자)으로 삼았고 그를 후계자로 보호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말년에는 특히 영조 48년(1772년)에는 일명 김치인 사건이라고 해서 몇 주마다 아니 심지어는 몇 일마다 영의정을 갈아치우는 등[67] 더 외골수적이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자주 보였으며 동시에 수천 명의 백성을 만나보는(격쟁) 등 여러 가지 행보를 이어갔으나 영조 46년(1770년) 사돈인 홍봉한이 지휘한 《동국문헌비고》 편찬사업을 제외하면 영조의 뚜렷한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홍봉한이 영조외 비위를 잘 맞추기는 했었던 모양인데 이것도 한계가 있었는지 영조에게 인사추천 문제로 슬슬 미움받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문헌비고 편찬사업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홍봉한은 청주유생 한유에게 탄핵받았고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홍봉한을 짤라버린다.
전말을 조금 더 상술하자면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소위 청명당(淸明黨)이란 그룹을 이뤄 성리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 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는 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해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三王孫)[68]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마누라가 어질어서 안 된다."[69]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1770년(영조 46년)에 십수 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화난 홍봉한(북당)과 김귀주(남당)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왕손들(은언군, 은신군)이 유배를 가는 등 정국은 혼란해졌다. 그러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저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간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싹다 유배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이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1768년(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1760년대 후반이면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 중반으로 역사상 국력이 최정점을 찍었던 시절이다. 혹여 칭제(稱帝, 황제국가로 호칭)한 것이 들켰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은 호란 시즌3가 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것도 대국인 청나라가 아편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으로 국제적 위상이 저 밑,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전말을 조금 더 상술하자면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소위 청명당(淸明黨)이란 그룹을 이뤄 성리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 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는 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해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三王孫)[68]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마누라가 어질어서 안 된다."[69]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1770년(영조 46년)에 십수 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화난 홍봉한(북당)과 김귀주(남당)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왕손들(은언군, 은신군)이 유배를 가는 등 정국은 혼란해졌다. 그러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저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간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싹다 유배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이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1768년(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1760년대 후반이면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 중반으로 역사상 국력이 최정점을 찍었던 시절이다. 혹여 칭제(稱帝, 황제국가로 호칭)한 것이 들켰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은 호란 시즌3가 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것도 대국인 청나라가 아편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으로 국제적 위상이 저 밑,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우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上)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公效)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1770년(영조 46년, 경인) 음4월 5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태양의 흑점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에 대해 관상감 관원에게 물어보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저 사건에 대해 《승정원일기》에서는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서 부쉈다는 말도 함께 나와 규일경을 부순게 천체 관측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한 일인지 아니면 성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일인지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영조 본인 스스로가 즉위 49년, 80세 때 본인의 치적을 정리한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는 시가 전한다. 이 시에 따르면 본인이 생각한 여섯 가지 치적은 다음과 같다.
영조 본인 스스로가 즉위 49년, 80세 때 본인의 치적을 정리한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는 시가 전한다. 이 시에 따르면 본인이 생각한 여섯 가지 치적은 다음과 같다.
어제문업 전문
한편 영조는 즉위 51년 쯤인 1775년(영조 51년)경에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자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으나 정조의 반대파인 홍인한이 반대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때 상(上)의 연세가 이미 대질(大耋)에 올라 몸에 병이 해마다 더 많아지니[74] 조용히 조섭을 하는 중에 늘 군국(軍國)의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였다. 이해 10월 7일에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담후(痰候)가 매우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일을 아뢰지 못하고, 임금은 곧 대궐로 돌아와서 왕세손에게 하교하기를,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攝行, 섭정)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勤力)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前然) 없다. 어린 세손이 숙성(熟成)하여 나를 지성(智誠)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니, 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집경당에서 입시(入視, 임종을 들어가 지켜 봄)하였는데, 상(上)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疲怒)하여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75]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下敎)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황형(皇兄)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76]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卿)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東宮)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卿)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入視)를 명하고, 상(上)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77]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膽)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卿)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과인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동궁(東宮)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事業)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 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성상(聖上)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 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78]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영조)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하여 그 말이 비할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稗惡)하여 신하의 례(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한달이 좀 지나는 시간)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씨가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상(上)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성상(聖上)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下敎)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성상(聖上)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入視)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성상(聖上)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事實)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自取)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1775년) 11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이들은 영조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승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순왕후 김씨가 오히려 세손을 지원 사격하고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등의 정조의 측근들이 홍인한을 탄핵했다.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조에게 임명권과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을 직접 넘겨주었고 정조는 무사히 대리청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정조는 죄인의 아들[79]이었어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탈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달 후인 1776년(영조 52년) 음3월 5일 묘시(아침 6시경) 영조는 경희궁 집경당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 피가 섞인 가래침과 구토를 자주했다는 증상으로 보아 일종의 폐렴으로 인한 사망인 듯 하다.
영조 사후 정조의 왕위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홍인한, 정후겸은 즉위 이후 처형당했고, 김관주는 순조 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우의정에 올라 신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려다 실패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가다가 사망했다. 홍봉한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덕에 실각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했다. 잠시 풍산 홍씨 세도 정치를 기획, 획책한 홍국영 역시 정조에게 숙청당하며 척신 정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나 싶던 찰나에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신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른다.[80][81]
태조(조선)와 같이 장수한 왕이다.
본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6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묘호, '영조(英祖)'로 고쳤다. 때문에 《영조실록》의 표지엔 '영종대왕실록(英宗大王實錄)'이라 적혀있다.(선종 → 선조와 마찬가지) 참고로 영종의 "영"(英)은 생전에 영조 본인이 골라 둔 묘호이다.[82]
수명과 재위 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신기록이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83]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요(堯)와 순(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수명과 재위 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신기록이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83]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요(堯)와 순(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
|
|
원릉
|
영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의 원릉(元陵)이다. 늘그막에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덧붙여 영조의 첫 왕비인 정성왕후는 영조와 완전 반대쪽인 서오릉에 묻혀 있다.[84]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역시 고양 서오릉에 묻혀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를 증오해서 일부러 파묘자리에 묻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짜맞추기식 음모론이다. 효종의 파묘자리인 것은 사실이나[85] 실록[86]을 보면 관련 논의에 대한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당시 사료를 확인한 논문에서는 '영조가 생전에 고른 묫자리가 '장년갑피지법'상 쓸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정조가 뒤늦게 알았고 (분노한 정조는 담당자를 처벌했다.[87])다른 후보지를 급히 찾았으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조가 승하한 지 이미 1개월이 지난 상황이었고, 계속해서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지관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정조는 지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가장 나은 대안을 찾은 것이다.정조가 후보지로 고려한 곳으로는 영조의 생모(生母)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를 증오해서 일부러 파묘자리에 묻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짜맞추기식 음모론이다. 효종의 파묘자리인 것은 사실이나[85] 실록[86]을 보면 관련 논의에 대한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당시 사료를 확인한 논문에서는 '영조가 생전에 고른 묫자리가 '장년갑피지법'상 쓸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정조가 뒤늦게 알았고 (분노한 정조는 담당자를 처벌했다.[87])다른 후보지를 급히 찾았으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조가 승하한 지 이미 1개월이 지난 상황이었고, 계속해서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지관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정조는 지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가장 나은 대안을 찾은 것이다.정조가 후보지로 고려한 곳으로는 영조의 생모(生母)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1] 오른쪽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에 불에 탔기 때문이다.[2] 정성왕후 서씨의 부친인 서종제는 당시 고작 진사였다.[3] 여담이지만 연잉군의 혼례와 관련하여, 첫날 밤 정성왕후가 "반가에서 자라서 물일을 하지 않아서 손이 곱다"고 했다는 이유로 영조에게 소박을 맞았다는 야사가 전해져오는데 야사가 사실이라면 당시 영조는 11살이었다(...)[4] 창의궁은 원래 숙휘공주의 사저였는데, 숙종은 시에 자신이 고모 숙휘공주의 병문안을 갔던 일화를 언급하며 연잉군에게 먼 거리가 아니니 궁에 자주 들릴 것을 권했다.[5] 숙빈 최씨의 장례에서 예법과 의사소통 오류로 적모가 아님에도 머리를 풀었는데 이때문에 숙종에게 꾸짖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인지 숙종은 숙빈 최씨의 장지에 대해 계속해서 퇴짜를 놓고 장례가 끝내자마자 자신의 병간호를 하라며 예법을 확인한 후 상복을 벗겼다.#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어머니와 화억옹주가 연달아 죽으면서 힘들어하는 연잉군의 마음을 신경 쓰는 처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민진원의 단암만록에 의하면 장례 중에 첩인 소훈 이씨가 효장세자를 가지자 연잉군의 품행이 방정맞다고 좋지 않게 봤다고 한다.[6] 참고도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이영춘, 한국학 중앙연구원)[7] 일제강점기부터 많이 유포되어 90년대까지만 해도 기존 사학계의 다수 설이 당의통략에 기반하여 나왔다.[8] 대비가 되어 왕을 서포트해줄 인원왕후는 연잉군과는 7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친모인 숙빈 최씨와 관계가 밀접했던 영빈 김씨가 살아있었다.[9] 관련 논문: 숙종 후반 연령의 위상과 후계구도 모색 - 경종대 영잉군(영조) 세제 책봉논의의 배경 -[10] 노론은 송시열의 학맥이 중심이 되었는데 송시열은 경종의 원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사사되었다.[11] 숙종실록은 소론이 썼는데 민진후의 졸기에 악담을 늘어놓으면서도 경종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해 그가 살아있었다면 노론이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적어놓았다.#[12] 영조는 조선 역사상 공식적인 유일한 왕세제이다. 선례로 태종이방원이 있지만 이방원은 조선 2대왕 정종의 양아들로 입적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그러하여 영조는 조선 유일한 왕세제가 된다.[13] 당시 청나라도 이를 상당히 황당하게 여겼는데 책봉 교서를 가지고 온 사신은 "일단 해달라 요청하니 책봉은 해주겠는데 만약 아들이 생기면 알려달라"고 말했다.#게다가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신으로 간 이건명은 이 상황을 변명하겠다고 경종이 고자라는 뉘앙스로 발언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신하로서는(...)[14] 유봉휘 또한 노론의 태도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지 왕세제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렸다.[15] 건저할 것을 상소한 시점이 8월 말이었으니 건저상소를 올린 지 2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16] 정파가 첨예하게 부딪히기 때문에 경종의 재위기를 다룬 실록은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2권이 있을 정도다. 경종실록은 영조 초기 정권을 잡고 있던 소론 준론과 완론의 시각이 반영되었으며 경종수정실록은 정조 때 발행된 실록으로 정조의 초기 핵심 지지세력인 노론 청명파의 시각으로 작성되었다.[17] 이는 대체로 왕이 부적절한 발언, 주로 쌍욕을 했을 때 쓰는 일종의 필터링이다.[18] 신축환국 이후므로 주로 소론이다.[19] 물론 노론의 시각이 강하지만 소론 준소의 대표주자로 한 대 김일경과 협력하기도 한 조태억의 손자인 조한규 또한 어유구가 뒤에 있었다고 지목하고 있다. 당대 관련자 및 후손들이 동일한 시각인 셈. 영조는 정조에게 어유구 일가를 잘 돌봐주라고 부탁하였고 정조도 조부의 유지를 따랐으나 김종수가 어유구가 배후라는 걸 모두가 안다는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했다.[20] 관련 논문: 경종대 신임옥사와 충․역 의리의 귀결(최성환)[21] 당시 상황은 매우 복잡했는데 선의왕후의 집안은 노론이며 인원왕후의 집안은 노론의 영수 김창집과 혼맥이 있는 소론이었다. 서인이 분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때문에 이 시기를 당파로만 해석하면 이해하기 힘든 요소들이 많다.[22] 훗날 효장세자[23] 관련 논문에서는 인원왕후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 또한 왕실의 윗어른이자 숙종의 비로서 남편의 가계 및 유지를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노론에게 연잉군을 부탁했는데, 인원왕후에게 부탁하지 않았을리 없었기때문이다.[24] 효종-현종-숙종의 가계를 말한다.[25] 인조는 둘째 아들인 효종을 적장자인 소현세자의 아들 대신 후계자로 삼기 위해 상당한 무리수를 감수해야만 했고 이는 효종을 비롯한 그의 가계에도 일종의 컴플렉스로 남았다.[26] 다만 이를 담당한 관료들이 왕세제를 보호하기 위해 이 대목을 삭제해버렸다.[27] 고변 약 3개월 전에 사망했다. 다만 영조는 즉위한 후 이러한 주장을 부정했다. 혹자는 정성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 정빈 이씨는 어릴 때 부터 교분이 있던 영조의 첫 사랑이었다.[28] 제사는 보통 가문을 이을 사람이 지낸다 즉 이런 사건이 있어도 왕세제를 여전히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신임의 표시다.[29] 당시 노론에게 밀리던 소론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정통성에 손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발언했다.[30] 당장 학계에서도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른 경우도 있다.[31] 관련 논문:『경종실록』의 편찬과 수정(오항녕)[32] 다만 소론 급론에 비해서는 노론을 적대하더라도 덜 강경했다.[33] 노론이 쓸려나갔으니 사부가 되는 대신들과 세자 시강원 관원 등이 모두 소론이었다.[34] 야사에 의하면 박상검의 옥에서 영조와 정성왕후를 도피시켜준 장본인이다.[35] 경종이 죽은 해인 1724년.[36] 1755년 신치운의 심문 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1725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37] 영화 <사도>에서 잘 구현해냈는데 국문에 끌려온 죄인 하나가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라며 소리치자 영조가 "25년이나 지났는데 지겹지도 않냐"라며 죄인 2명의 입을 찢으라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문이 끝난 후에 영조가 귀를 물로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형을 꺼렸던 영조가 입까지 찢으라 했으니 본인도 정통성 문제만큼은 어지간히 스트레스 받았던 모양이다.[38]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을 빼면 《세조실록》에 따르면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를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칭하면서 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39] 《영조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식욕이 돋아 잘 먹었다고 한다.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 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40]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질,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 중인 환자에게 먹일만한 음식은 아니다.[41] 삼부탕 자체는 왕실에서 자주 쓰이는 처방이다.[42] 부자는 잘만 쓰면 좋은 약이지만 흔히 사약의 원료로 추정되는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다. 지금도 해마다 제대로 처방없이 부자를 달여먹다가 죽는 사람이 간혹 나온다. 물론 임금에게 올려야 하니 당연히 어의들도 정성스레 추출하고 정제를 했겠다만 그 특유의 독 이미지 때문에 독살설 지지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 것은 자명한 일. 사약을 넣을 때 인삼을 넣었다는데 부자는 열을 받아야 최고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43]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인삼과 부자를 복용한 일시적인 효과일 뿐, 당장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보다 더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44] 심지어 울다 지쳐 나가 떨어져서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못한 바람에 소론과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영조실록》에 적혔다.[45] 《천의소감》은 영조가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즉위할 때부터 나주 괘서 사건까지 정치적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책의 집필 목적이 영조의 정통성을 밝혀서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경종 독살설을 변론하기 위한 변명 가득한 책이다.[46] 그나마 숙종의 살아있는 아들이 연령군이야 일찍 죽었고 당시 경종과 영조가 유일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적서에 대한 차별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무수리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47] 조선시대에는 후궁들도 양반 가문에서 선발하였고 궁인 중에서 되더라도 상궁-나인들은 상민 이상 계층에서 선발된다. 궁인의 잡역을 위해 고용된 무수리가 후궁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48]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숙빈 최씨는 과부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 사항이 없는 게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 일부 반대 세력들은 영조가 사실 숙종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마저 제기했다.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49] 이인좌의 난 명목 중 큰 것이 바로 '당시 세제였던 주상(영조)이 선왕인 경종대왕께서 돌아가기 전에(한의학적으로 서로 상극이라 병자가 먹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상극이었던 생감과 간장게장을 진상해 올린 일이다. 그거 먹고 바로 돌아가셨다는 것에 의혹을 품고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50] 정사효는 경북 상주목사, 제주목사, 사헌부 지평, 경기도 도사, 강원도 관찰사, 승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로 상주목사 시절에는 우수 수령으로 뽑히기도 하였고 경기도에는 그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51] 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선이 바로 1755년(영조 31년)에 벌어진 나주 괘서 사건으로, 여기서 소론 강경파 잔당들이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다가 살아남은 소론 강경파는 반역 전문 집단쯤으로 몰려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열받은 영조조차 조태구, 유봉휘를 역률로 추죄하고 조태억, 최석항, 이광좌도 관직을 추탈당한다.[52] 영조는 이에 대해 "이 미친 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라는 일갈을 했다.[53] 애초에 영조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편찬한 것도 경종조의 역모에 연루된 자신을 신원하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일종의 의리명변용으로 편찬한 것인데 노론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천의소감을 자파의 의리를 세우는데 정치적으로 써먹으려하니 더욱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54] 사도세자의 장인어른이자 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즉, 영조의 사돈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55] 이것이 정조 즉위 후 홍국영 등의 집권 배경이 됐으며 세도정치의 물꼬를 터서 조선이 멸망 테크를 제대로 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56] 당시에도 여전히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소속의 정체성이 없진 않았으나 이들 대부분이 사실상 '탕평당'이라는 새로운 당에 이중소속된거나 다름없는 꼴에 그게 아니더라도 왕의 의견에 따르고 아부하는 예스맨과 다름없게 되면서 이전처럼 당파를 통한 정치색이나 의견을 내세우는 일은 확연히 줄어들었다.[57] 문종의 왕비였던 현덕왕후가 남편보다 일찍 죽은 이후 문종이 새 장가를 들지 않아, 단종 즉위 이후 12세에 불과했던 왕을 보호하고 수렴청정할 이가 없어 김종서 등 대신들에 의한 황표정사에 위태롭게 의지하다 세조의 쿠데타가 일어났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차기 군주인 왕세자를 보호하고 궁 내부에서 기강을 세워야 할 왕비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꺼려졌으므로 영조조차도 당시 예순을 넘긴 고령이었음에도 이런 사회적 기조탓에 새 장가를 들었던 것.[58] 여담으로 이때부터 영조는 치매 증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오락가락 하는 행태가 보이기 시작했다.[59] 이에 대해서 '선조의 예를 들면서 방계출신이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영조의 왕위 콤플렉스는 선조와는 상당히 달랐다. 선조는 방계 출신이라 해도 명종이 생전에 직접 선정한 후계자였으며 종법상으로도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그를 후계로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이준경이 원임 정승으로 즉위 과정을 적극 보호하는 등 주위의 저항이 없었다. 반면에 영조는 이미 세제 시절부터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고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의혹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것을 명분으로 이인좌의 난이 벌어지는등 지지기반이 너무나 빈약하고 위태로웠다. 그러다보니 예민함을 넘어서 집착 수준으로 매사에 편집증적일 수밖에 없었다.[60] 실제로 영조가 양위 운운할 때마다 사도세자는 잘못한 것도 없이 영조의 침전 앞에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며 엎드린 채 석고대죄를 반복해야 했다.[61] 실록에 기술된 내용에서도 말 그대로 노론, 소론, 남인같은 당파 구분 없이 조정의 거의 모든 대소신료들이 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며 영조의 학대에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62] 이 견제로 인해 정조는 즉위 후 1년도 채 안 되어 암살 위협도 받아야 했다. 정조 항목의 존현각 암살 미수 사건 참조.[63] 사도세자의 아들들 중 세자빈 혜경궁 홍씨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영조의 친손자들 가운데서도 유일한 적손자였다. 영조대에 이르러 조선 왕실에서는 정비 소생은커녕 후궁 소생의 왕자도 별로 없을 정도로, 갈수록 남계 후손이 귀해졌다는 걸 생각하면 오랜만에 정실 소생으로 태어난 정조는 정말 금지옥엽이었다.[64] 어렸을 때부터 취미가 공부였을 정도로 문무를 모두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호랑이 할아버지 영조마저 크게 만족시켰다. 실제로 단순히 세손으로서 잘 대해준걸 넘어 자신의 유일한 후계라 천명하거나 아예 자신이 왕세자 책봉 당시 입었던 옷을 친히 입혀주는등 세자와는 다르게 세손을 매우 아꼈다.[65] 실제로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친히 편액까지 써서 달고, 무덤의 호칭도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시키고, 하루가 멀다하고 성묘를 하며 통곡하면서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66] 親鞫, 임금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일. 말이 심문이지 사실상 고문이다.[67] 1년에 세 명을 10번이나 영의정에 제수했다. 조선 주요 인물 정승 재임기간 다만 김상복, 신회는 말기에 재임할 때에는 1년 이상 재임했다.[68]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으로 당시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아닌 사도세자의 후궁에게서 난 자식들을 말한다.[69] 경주 김씨 일파를 등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척을 중용하는 것이라며 정순왕후 김씨가 직접 반대했다.[70] 영조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자 했던 사업이기도 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71] 옛 제도를 회복함[72] 서얼들을 중용함[73] 예전의 법[74] 박시백은 영조가 정국의 안정을 생각했다면 적어도 세손의 나이 스물에는 전위(傳位)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어야 했다며 "다 늙어서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권력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며 깠다. 영조: 니들도 권력 한 번 잡아봐라 그게 얼마나 놓기 힘든데[75] 종묘와 사직.[76] 대개 전선(傳禪) 2자를 가리킨다.[77] 이 병이 바로 영조가 할머니 명성왕후에서 기인한 다혈질적인 화병인 산증(酸症) 증세이다.[78] 종묘와 사직.[79] 逆敵之子 不爲君王 / 역적지자 불위군왕,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80] 다만 영조는 다른 왕들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재위한지 30년이나 되는데도 역모가 일어났으니 더욱 권력에 대한 집착이 커질만도 했다.[81] 다만 정조에게도 김조순에게도 다소 억울할 것이 김조순까지는 정말 무난하게 능력있는 신하 였지만 김조순이 물러난뒤 효명세자가 단명하고 뒤이어 헌종까지 급사하면서 왕권은 흔들리는데 신하들을 제어할 수단이 없어진 상황에서 세도정치가 극심해진 부분은 감안해야 한다.[82] 일성록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2일[83] 추존 왕까지 포함하면 그의 현손자인 효명세자가 정말 가장 길다. 왜냐하면 고종과 물론 무려 17촌까지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양자 입적 과정을 통해서 즉위하기 전에는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 계열의 혈통으로 입적되어 있었는데 효명세자, 익종의 비인 조 대비가 흥선군과의 밀약을 통해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사위(嗣位)로 올려 계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법적으로 아버지인 익종(翼宗大王)을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文祖翼皇帝)로 다시 재추존하다 보니 법적으로 6대조 할아버지 영조보다 정식 시호가 더 길어진 것이다.[84] 사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묘를 만들 때 자신이 들어갈 자리도 만들어 뒀으나,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를 생각하여 따로 묻히게 하였다.[85] 현종때 침수의심징후가 보여 파묘하였으나 사실이 아니었다.원인은 부실공사였던 것으로 보인다.[86]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004011_001
'새 카테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산서원 惡臭 쉬쉬할 일이 아나다. (0) | 2026.01.09 |
|---|---|
| 뉴스로 보는 고사성어)小人 무리,大人 행열 (1) | 2026.01.09 |
| 조선 박종인의 땅의 역사(144)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등극 40주년 기념식 (1) | 2026.01.08 |
|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285) 중국에 바친 여자,貢女 (2) | 2026.01.08 |
| 천년의생명 태실)(5)무참히 깨진 마지막 희망 (0) | 2026.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