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국밥 이야기
- 기자명 최미화 기자
- 입력 2026.02.04 09:49

몇 년 전 봄날이다. 상주로 가는 길에 선산(善山)에 들렀다. 그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장터란 게 지정된 곳도 있지만, 장터 이외에 이면 도로나 골목에도 장이 선다.
그곳에는 떠돌이 장꾼이거나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가져온 곡식, 들나물, 채소,
과일, 민물고기, 약재 등을 거래하는 또 다른 장터이다.
이곳에는 물건을 사고팔 때 인정이 넘친다. 덤이 오고 가고,
가격을 흥정하지만 야박하지 않다. 물건을 사지 않아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날 아내는 달래, 냉이, 쑥과 콩을 샀다. 장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우리는 장터 인근에 있는 소박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백반과 다른 몇 가지 차림이 있었지만,
주된 메뉴는 소고기국밥이었다. 주방 한쪽 솥단지에는 국이 설설 끓고 있었다.
우리는 국밥을 먹기로 했다. 봄날이지만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어 몸이 으슬으슬했기 때문이다.
문득 소년 시절 염매시장에서 먹은 돼지국밥 생각이 났다.
1950년대 후반,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해가 지났지만,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없어 굶기 일쑤였다.
초등학교에서는 미국의 원조로 들어온 옥분(玉粉:옥수수 가루) 죽을 쑤어 결식아동에게 먹였다.
당시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아 을씨년스럽고 피폐했다.한파가 몰려온 어느 겨울날이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염매시장을 지나는데 우연히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그는 추위와 일상에 지친 나를 보고 돼지국밥을 먹자고 했다.
잠시 후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돼지 삶은 희멀건 물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비계가 몇 점 들어 있는 국밥이었다. 우리는 그런 국밥이지만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날 이후 그와 나는 지금도 절친하게 지내고 있다.
옛 생각에 잠겨있는데 국밥이 나왔다. 투박한 질그릇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에는
붉은 기름이 둥둥 떠 있고 몇 점의 고기와 대파, 시래기, 콩나물, 무 등이 섞여 있었다.
뜨듯한 국밥을 몇 술 떠서 넘기니 뱃속이 데워졌다. 허기가 가시고 차가웠던 몸이 풀리니
식당을 둘러보는 여유가 생겼다. 몇 자리 건너 맞은 편에 젊은 부부가 국밥을 먹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청년 농부 같았다. 왠지 자주 눈길이 갔다. 그들은 국밥 먹기에 진심이었다.
허기가 졌는지 얼굴을 국그릇에 바짝 대고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나는 국밥을 먹으면서 가끔 그들을 쳐다보다 그만 가슴이 저릿했다.
젊은 새댁이 국밥을 뜨다가 살코기가 걸리면 남편의 국그릇에 슬쩍 넣어주었다.
남편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고기를 먹었다. 한참 후 남편은 자기 국그릇의 살코기를 건져
아내의 국그릇에 무심한 듯 넣어주었다. 그는 아내에게 어서 먹으라는 듯 눈짓을 하였다.
이 모습을 주방에서 보던 중년의 국밥집 여주인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부부가 국밥을 거의 비워갈 때 여주인은 젊은 부부에게 다가가 살코기가 담긴 국 한 그릇을
식탁 위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네요. 뜨거운 국 더 드세요. 서비스입니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며 국밥의 온기보다 사람의 온기가 더욱 따듯함을 느꼈다.
젊은 부부의 사랑과 주인의 배려 이것은 국밥에 담긴 우리의 정이며 삶의 훈기이다.
막스 뮐러(Max Müller)의 유일한 소설인 『독일인의 사랑』에서
‘아무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우리의 생명과 같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 내가 본 국밥은 단순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생득(生得=先天)적인 사랑의 발현이다.
아직 봄이 오기는 멀었다. 오늘은 한국인의 ‘솔(soul) 푸드’인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을 먹어야겠다.
하청호(대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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