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이 분명하게 나뉘는 세계

12·3 계엄의 밤에 가장 극적인 두 장면을 꼽는다면 계엄 해제 결의를 하기 위해서
국회 담장을 넘던 우원식 국회의장의 모습,
그리고 계엄군의 총열을 잡고 몸싸움을 벌이던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의 모습일 것이다.
체포의 위험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러 나서는 용기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장면은 또한 불길한 조짐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터무니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보낸 대통령과 맨손으로 막기 위해 나선 두 사람의 모습이 그야말로
절대악과 절대선의 대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나눠보는 사람들에게
그 장면은 자신들의 주장이 맞는다는 증명을 해주는 일종의 계시였을 것이다.

■
「 계엄 전 정치 실종, 여야 모두 잘못
절대악 계엄으로 진보엔 ‘비판 면제’
윤 정부 옹호 세력, 스스로 물러나야
절대악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어
」
계엄 전까지 우리는 정치의 실종을 보고 있었다. 가장 큰 책임은 물론 윤석열 대통령의 몫이다.
야당 대표를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2년간 만남조차 거부한 고집과 오만은
상대를 극단적인 투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정권교체 직후부터 탄핵을 입에 올리면서
촛불 집회를 열고 총선 때는 헌법상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을 향해 “3년은 너무 길다”라는
구호를 외친 야권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에 대해
수십 회 거부권을 행사하고, 야당은 헌법상 최후의 보충적 수단이어야 할 탄핵소추안을 남발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삶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도한 비상계엄 선포는 이런 상황을 일시에 뒤집어 버렸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군 헬기가 국회에 착륙하고 특수부대원들이 뛰어내리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야당도 줄 탄핵을 한 것은 잘못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비역 군인의 수첩에서
체포할 정치인 명단이 발견되는데 양비론을 펴고 있다가는 현실 파악도 못 하느냐는 핀잔을 피할 수 없다.
절대악의 출현이 반대편에 무한한 ‘까방권’ (비판을 면제받는 권리) 을 안긴 것이다.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민주당 혹은 진보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흔히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을 해서 보수를 망쳤다고들 한다. 현실 정치만 놓고 본다면 맞는 말이다.
대선에 패배하고 수사와 재판을 받으러 다니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이 됐다.
국민의힘은 소속 대통령이 두 번이나 탄핵당하는 치욕을 겪고 조롱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지방선거 승리는커녕 경기도와 같은 주요 광역단체장 후보 구인난을 겪는 처지다.
그러나 진보도 제 모습을 잃었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임무를 ‘내란청산’이라는 절대선의 실현으로 보기 때문에 권력분립이나 사법부의 독립 같은 중요한 헌법 원칙도 편의상 구부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윤석열에 대해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어차피 집행은 안 할 것이지만 경고의 의미로 혹은 상징적으로 사형을 선고했어야 한다”라며 재판부를 비난하는 모습에서는 독선이 사람들을 얼마나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우리가 전직 대통령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집행은 안 할 것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들릴지 모르는 걸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인권을 중시하는 진보를 자처하면서 생명을 경고의 수단으로 쓴다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안 느껴질까.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친일파/기득권/재벌의 탓으로 돌리는 우리 진보의 오래된 습관도 다시금 튀어나오고 있다.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뉜 세계에서 건강한 비판은 설 자리가 없다. 악의 편을 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이 없으면 진보든 보수든 활력을 잃고 퇴행한다. 우리가 여전히 겪고 있는 정치의 실종이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 하면 이해관계의 조정이 왜곡되고 결국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
어떻게 해법을 찾아야 할까. 민주당에 기대기는 어렵다. 해결할 가능성을 만들어내려면 어쨌든 큰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 선악이 선명하게 나뉘어서 비판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악으로 여겨지는 쪽에서 “어느 쪽이든 항상 옳거나 틀릴 수는 없다. 잘못을 저지른 쪽도 고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어떻게? 스스로 뛰어내리는 희생을 통해서.
윤석열 정부의 참사적 실패에 이르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거나 옹호한 사람, 혹은 막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이 절대악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자기 당 소속 대통령이 연속해서 탄핵을 당했는데도 국민의힘에서 물러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잘못한 쪽에서 그런 행동을 먼저 하지 않으면 여당과 대통령에 대해 아무리 정당한 비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치는 계속 실종 상태로 있을 것이다.
금태섭 전 국회의원
'새 카테고리2'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름없는 유골들의 멀고 먼 귀향길 (0) | 2026.02.23 |
|---|---|
| 중앙일보.시시각각).보수 망치는 벼락출세 (0) | 2026.02.23 |
| 폭설로 연기된 유승은 :멀티 메달: 도전 오늘 밤 열린다. (0) | 2026.02.18 |
| 남기고 가지고 (0) | 2026.02.17 |
| 夫君의 古稀 祝詩(사모정에서 抄하다) (0) | 2026.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