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테고리2

扶安三絶 李梅窓과 劉希慶의 梨花雨 사랑이야기

한문역사 2026. 3. 3. 06:38

이매창과 유희경 이화우(梨花雨) 사랑

扶安三絶:  李梅窓,劉希慶,直沼瀑布(직소폭포)

松都三絶:  黃眞伊,徐敬德,朴淵瀑布(박연폭포)

(松都=開城)


매창과 유희경 천년 사랑

 

 
 
이매창과 유희경 이화우(梨花雨) 사랑

조선조 시대에는 일반인들의 생각밖으로 여류(女流)시인들이 많았다.
규방(閨房)속의 여인들이나 기생들을 불문하고--
참고로 필자가 기억하는 이름만도 아래와 같다.

금원김씨(錦園金氏), 운초(雲楚)김부용(金芙蓉),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삼의당김씨(三宜堂金氏), 의유당(意幽堂), 계생(桂生)
이매창(李梅窓), 이옥봉(玉峰李氏), 정일당강씨(靜一堂姜氏), 죽서박씨(竹西朴氏) 최송설당(崔松雪堂), 허난설헌(許蘭雪軒), 호연재김씨(浩然齋 金氏), 홍랑(洪娘), 홍원주(洪原周), 홍장(紅粧), 황진이(黃眞伊)---

이외에도 많은 여류 문인들이 있지만 모두 지면관계로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오늘은 이중 부안기생 계생(桂生) 이매창(李梅窓)의 묘를 답사한 이야기다.
이매창(李梅窓)은 김부용(金芙蓉),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기생 시인(詩妓) 중의 한사람이다.

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閨秀)시인으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을 꼽는다면, 기녀(妓女)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창(梅窓)은 1573년(선조 6) 당시 부안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생(癸生, 桂生) 또는 계랑(癸 )이라 하였으며, 호는 매창(梅窓)이다.

매창(梅窓)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 같은 고관이나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같은 시인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 부안에 내려와 2년 동안 촌은과 매창간의 애정이 원앙처럼 무르익던 시기다.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
고 표현하였다.

이매창은 비록 신분이 기생이었지만 아무에게나 몸을 맞끼지 않았다.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희롱을 하면서 집적대면 시를 지어 손님을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아래의 증취객(贈醉客)이란 시는 술 취한 손님에게 주는 유명한 글이다.
증취객(贈醉客)
醉客執羅衫(취객집나)-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지네.
不惜一羅衫(부석일나삼)-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 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두려워라
매창(梅窓)

유희경과 매창이 만날때는 매창(梅窓)의 나이가 20세, 유희경(劉希慶)이 48세 였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불우한 신분적 환경을 이해하며 시문학을 통하여 정신적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졌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강화(江華) 사람으로 천민(賤民) 신분이었으나 본래 성품이 소박하고 깨끗하여 시문학을 좋아했다.
비천한 신분이지만 오히려 양반 계층의 문인들과 어울려 교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빼어난 문학적 소양 덕분이라 할 수이었다.

천민(賤民)과 중인(中人) 신분으로 시문학을 하면서 일정한 정처(定處)를 두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떠돌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사람을 여항시인(閭巷詩人)이라 하였다.

소설 홍길동을 쓴 교산(蛟山) 허균(許筠)은 유희경(劉希慶)을 가리켜
“당대의 문진(文陣)들이 극찬한 대문장가”라고 평했고

조선 최초로 서양과 천주교를 소개한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지봉(芝蜂) 이수광(李睟光1563~1628)은 “그의 시가 댓잎같이 청결하고 성숙되어 있다.”고 칭찬했다.

유희경의 집은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 낙산(駱山)에 있는 청룡사(靑龍寺 단종비 정순왕후가 살던곳)에 있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아래 시냇가에 있으면서 문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이 맑고 시원하여 물가에 있는 바위로 대(臺)를 삼아 이를 침류대(枕流臺)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 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교류하였다.

부안출신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매창은 어느날 이웃 고을 김제부사 이귀에게서 전갈을 받는다.
서울에서 촌은 유희경이 부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소문만 듣고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던 유희경이 아니었던가.
매창은 전갈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매창은 이귀에게 곧 가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마음을 시로 읊었다
含情還不語(함정환불어)-가슴에 품은 정은 말도 하지 못하더니
如夢復如痴(여몽복여치)-꿈같고 생시 같고 어리석은 이 내 마음
綠徛江南曲(록의강남곡)-애타는 이 마음을 강남곡에 실어보나
無人問所思(무인문소사)-내 심정 묻는 이는 한사람도 없구려!
매창(梅窓)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녀에게 거문고를 부탁한다.
매창은 숨을 고르고 거문고를 끌어 당겨 장진주(獎進酒)노래한다.
눈을 감고 듣고 있던 유희경은 즉석에서 시한수를 다음과 같이 짓는다.
장진주(獎進酒)란 술을 권하는 “권주가”를 말한다. 이백의 장진주가 유명하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낭명)-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我有一仙藥(아유일선약)-나에겐 신기로운 선약(仙藥)이 있어
能醫玉頰瀕(능의옥협빈)-찡그린 얼굴도 고칠 수 있다네.
深藏錦囊裡(심장금낭리)-금낭 속 깊이깊이 간직한 약을
欲與有情人(욕여유정인)-사랑하는 너에겐 아낌없이 주리라.
유희경(劉希慶)

어두운 마음, 찡그렸던 얼굴을 미소짓게 하는 선약(仙藥).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묘약이 아니겠는가.
사랑이란 말을 직선적으로 쓰지 않고 선약(仙藥)에 비유해 가며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매창 또한 유희경에 아래와 같이 화답하는 시를 짓는다.
我有古奏箏(아유고주쟁)-내게는 옛날의 거문고 있어
一彈百感生(일탄백감생)-한번 타면 온갖 정감이 다투어 생긴다오.
世無知此曲(세무지차곡)-세상 사람이 곡을 못 알아주니
遙和구山笙(요화구산생)-님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본다오.
매창(梅窓)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만나 그날 밤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면서 밤이 깊어 원앙침에 들어간다.
열아홉 터질 듯한 매창의 몸이 중년의 유희경 품속에서 무르익어 갔다.
50평생 유희경 선비의 지조가 매창으로 인하여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2년쯤 지나 회자정리(會者定離)일까
두 사람은 헤어져야할 사건이 생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유희경은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면서 지은 이 시조는 조선 후기 옛 시가집(詩歌集)인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다고 한다.

이화우(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져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은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梅窓)

배꽃이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이별의 시간과 공간이 천리를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의 깊은 마음은 하루도 유희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래의 이매창의 시는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으로 점철되고 있다.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매창(梅窓)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래의 시로 전한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부상견)-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유희경(劉希慶)

이매창(李梅窓)의 유희경에 대한 사랑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松柏芳盟日(송백방맹일)-푸른 솔 앞에 두고 맹세하던 날,
恩情與海深(은정여해심)-사랑은 바다보다 깊었네라.
江南靑鳥斷(강남청조단)-강남에선 파랑새도 오지 않으니
中夜獨傷心(중야독상심)-외로운 이 한밤을 어이하리냐.
매창집(梅窓集)

유희경이 떠난지 2년이 되어도 소식 없어 매창의 안타까운 마음은 계속된다
閨怨(규원) 규방의 원한
離懷消消掩中門(이회소소엄중문)-이별 회포 너무 서러워 중문 걸고 들앉으니
羅袖無香滴淚痕(나수무향적루흔)-비단옷 소매엔 향기 없고 눈물 흔적뿐이네.
獨處深閨人寂寂(독처심규인적적)-홀로 거처하는 깊은 규방엔 사람 적적한데
一庭微雨銷黃昏(일정미우소황혼)-뜰 가득 가랑비에 황혼이 녹는다.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말 못하는 가운데 그리움만 남아 있어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하룻밤 시름으로 흰 머리 반이로다.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이 첩의 괴로운 그리움 알고 싶다면
須試金環滅舊圓(수시금환멸구원)-금가락지 맞지 않는 여윈 손가락 보소.
매창(梅窓)

유희경이 떠난 지 1년이 지난 때에 인편에 편지가 왔다.
편지의 사연은 간략했다.
의병을 모아 왜구와 싸우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과. 한 편의 시가 동봉되었다.

一別佳人隔楚雲(일별가인격초운)-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어
客中心緖轉紛紛(객중심서전분분)-나그네는 시름에 잠 못 이루네.
靑烏不來音信斷(청오불래음신단)-소식조차 끊어져 애가 타는데
碧梧凉雨不堪斷(벽오량우불감단)-오동잎 찬 빗소리 차마 못 들어.
유희경(劉希慶)

매창은 유희경의 편지와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을 잊고 않은 유희경이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유희경의 마지막 편지가 오고 매창이 홀로 있는지 10여 년 동안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1550년 매창은 아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은 한이 되어 죽어갔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結約挑園洞裏仙(결약도원동이선)-도원에 맹세할 땐 신선같던 이 몸이
豈知今日事凄然(기지금일사처연)-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坐懷暗恨五絃曲(좌회암한오현곡)-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러 볼까
萬意千事賦一篇(만의천사부일편)-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塵世是非多苦海(진세시비다고해)-풍진 세상 고해에는 말썽도 많아
深閨永夜苦如年(심규영야고여년)-홀로 새는 이 밤이 몇 해인 듯 길구나.
藍橋欲暮重回首(남교욕모중회수)-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보니
靑疊雲山隔眼前(청첩운산격안전)-구름 속에 첩첩청산눈앞을 가리우네.
매창(梅窓)의 유작시(遺作詩 마지막 작품)

위의 시는 유희경이 매창의 무덤에 성묘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보니,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에 의해 궤연(几筵)이 모셔져 있고 궤연(几筵) 옆에는 거문고와 매창의 마지막 작품인 위의 절필(絶筆) 유작시(遺作詩) 가 놓여 있었다.

궤연(几筵)-죽은 이의 혼령(魂靈)을 위(爲)하여 차려 놓은 영궤(靈几)와, 영궤에 딸린 모든 물건(物件) 이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희경은 절명시를 쓰가면서 죽어간 이매창을 생각했다.

그토록 뜨거웠던 한 여인의 진실한 사랑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그리고 고결하게 슬기로웠던 이매창--

유희경은 붓을 들어 탄식과 후회가 가슴을 후비는 아픔으로 아래의 시를 썼다
明眸皓齒翠眉娘(명모호치취미낭)-맑은 눈 하얀이 푸른눈섭 계랑아
忽逐浮雲入杳茫(홀축부운입묘망)-홀연히 뜬구름 따라 간 곳이 아득하구나
縱是芳魂歸浿色(종시방혼귀패색)-꽃다운 넋은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誰將玉骨葬家鄕(수장옥골장가향)-그 누구가 너의 옥골을 고향에 묻어주랴
유희경(劉希慶)

이매창의 주위에는 조선의 역사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들과 교류를 많이했다.
당시에 뛰어난 시인이라고 평가받던 권필도 그중 한사람이다
이매창의 이야기에 또 한사람 남자 허균이 등장한다.

허균은 이매창과 동시대인 임진왜란 전후에 산 인물이다.
허균은 자유분망한 시인의 감수성으로 거칠 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허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혁명, 이단아, 의 명칭이다.

“천하의 둘도 없는 괴물 허균”이란 험한 욕을 들으면서 산 사람이다.
이런 이미지의 허균이 당시 조선최고 감성 여류시인 이매창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허균은 재주가 출중해서 여러 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했지만
굽힐 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과 사회의 비판 탓에 다섯 차례나 관직에서 파직을 당했다.

허균의 집은 서울이고 외가는 강릉이지만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대부분 호남에서 보냈다고 한다.
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홍길동전”을 집필한 곳도
부안 우반동 선계안골에 있는 정사암이라고 전하고 있다.
호남은 조선왕조의 성리학적인 봉건질서에 항거하는 개혁세력의 요람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허균이 이매창을 알게 된것은
그의 큰형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601년에
허균은 충청,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으로
호남지방을 자주 순시하면서 부안의 명기이자 시인인 매창을 알게 되었고
시문학을 통하여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때가 허균이 33살, 매창이 29살 로 전한다.
그때를 허균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1601(선조34)년 벼슬을 내놓고 부안에 욌는데
비가 쏟아져서 그곳에 머물렀고 그때 매창을 만나 시(詩), 가(歌)를 주고받으며 즐길기었다.

허균은 여자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도덕적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한다.

허균은 매창과 교유하면서도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매창에 대하여 말하기를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인격을 대우하고 그의 시를 좋아할 뿐이다.
매창의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情誼)가 막역하여 농담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도 마흔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허균은 기유년(1610)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묘구토심금금)-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유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수과설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허균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부안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부안읍 봉덕리에 있는 매창의 묘(지방기념물 제65호)가 있다.

이매창의 묘를 답사하고 이글을 정리하면서 느끼는 소감은 비록 역사와 세월이 흐르고 한줌 흙과 가을 잔디에 말없이 덮여 있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여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면면이 이어져와 오늘 나그네의 메마른 감정을 채워 주고 있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치 자판기 커피보다 더 쉽게 사용하고 조건과 신분에 따라서 사랑을 만들고 헤어지는 오늘의 세태에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짜 사랑이다

다만 매장의 주위에 등장하는 많은 문인 명사들의 아름다운 인간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다 정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다름이다.

농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매창의 묘 옆에는 이중선(李中仙)이라는 묘가 한기 있다.
이묘의 주인공은 한국 최고의 여류명창이었던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의 동생으로 역시 판소리의 명창이었다고 한다. 이화중선은 1943년 재일교포 위문차 일본에 다녀오다가 풍랑을 만나 객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