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위의 산당에 몇 그루의 매화나무 湖上山堂幾樹梅 (호상산당기수매 )
봄을 만나 몹시도 주인 오기 기다리니 逢春延佇主人來 (봉춘연저주인래 )
지난 해도 황국 필 때 가지 못해 아쉬운데 去年已負黃花節 (거년이부황화절 )
아름다운 그 기약을 어찌 차마 또 버리랴 ! 那忍佳期又負回 (나인가절우부회 )
퇴계 (退溪 ) 이황 (李滉 , 1501~1570)은 마지막 유언으로 “매화에 물을 주라 ”고 할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고 , 친필로 된 단행본인 『매화시첩 (梅花詩帖 )』을 남기기도 하였다 . 퇴계의 매화수는 110 수 정도 되는데 , 『매화시첩 』에 91 수가 수록되어 있다 . 도산서원에 『매화시첩 』 목판본이 남아 있다 .
도산서원에는 몇 그루의 매화나무가 서 있는데 , 봄을 만나 주인이 돌아오기를 몹시 기다리고 있다 (延佇 ). 지난 해 노란 국화가 필 때 돌아가지 못해 아쉬웠는데 , 봄이 되어 매화가 피었는 데도 가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
퇴계는 타고난 성정 (性情 )이 출세보다는 학문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 주자 (朱子 )의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동방의 주자로 받들어졌다 . 60 이 넘어 이기 (理氣 )철학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뒤에 , 이를 우리말 노래인 시조에 담아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 )으로 노래하였다 .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학문과 수양은 푸른 산처럼 변함없이 ,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 퇴계는 누구보다도 매화를 좋아하였다 . 예로부터 매란국죽 (梅蘭菊竹 )은 군자화 (君子花 )로 선비들이 가까이 하였는데 , 이 가운데 매화는 추운 겨울 온갖 시련을 겪고도 봄이 되면 먼저 하얀 꽃을 피우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였던 것 같다 .
퇴계는 자신의 자라온 환경과 선천적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매화의 생태와 영합했기 때문에 매화를 사랑하였던 것 같다 . 퇴계는 어린 시절 불우하였다 . 7 남 1 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는데 , 태어난 지 7 개월 만에 아버지가 별세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자같은 형을 잃었다 . 48 세 되던 해에 단양군수로 부임할 때는 첫 째 부인에 이어 두번 째 부인도 사별하고 둘째 아들까지 죽어 심신이 쇠약해졌다 .
이 때 만난 여인이 관기 (官妓 ) 두향 (杜香 )이었다 . 두향은 단양에서 이름난 기생이었다 . 사대부의 후손이었는데 , 집안이 몰락하여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 두향은 아름답고 거문고 연주도 잘 하고 시도 잘 지었다고 한다 . 그리고 난 (蘭 )과 매화 (梅花 )를 기르는 분매 (盆梅 ) 솜씨가 뛰어났다 .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를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 두향은 사별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애지중지하던 매화 화분을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 퇴계는 두향이 갖다놓은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 곧 매화 분 (盆 )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주라 명하였다 . 군수가 백성으로부터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두향의 청에 의하여 매화 한 그루를 차마 물리칠 수가 없었다 . 이때부터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져 사랑을 나누었다 . 그러나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9 개월 만에 단양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다 . 퇴계의 친형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 퇴계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를 풍기군수로 임명하였다 . 퇴계는 풍기 군수로 가면서 두향으로부터 받은 청매 (靑梅 ) 한 그루도 함께 가져갔다 .
이별하는 날 밤 두향은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 .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들고 슬피 울제
어느덧 술이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
퇴계가 떠난 뒤 두향은 관기 생활을 정리한 후 평생을 수절하면서 퇴계를 그리워하였다 .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 거닐며 외롭게 살아갔다 . 20 여년이 지나 퇴계는 70 이 되어 임종하기 전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퇴계의 임종 소식을 들은 두향은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 두향은 퇴계와 함께 거닐던 강가 강선대 (降仙臺 ) 아래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 충주댐이 생기면서 두향의 무덤이 물에 잠기게 되자 , 퇴계의 후손들이 두향의 묘를 단양팔경의 하나인 옥순봉 (玉筍峰 ) 맞은편 제비봉 기슭에 이장하고 , 두향지묘 (杜香之墓 )라는 묘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
조선 영조 때의 월암 (月巖 ) 이광려 (李匡呂 )는 두향의 묘앞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와론 무덤 큰 길 가에 자리 잡아서 孤墳臨官道 (고분임관도 )
모래 더미 위엔 붉은 꽃이 피었네 頹沙暎紅萼 (퇴사영홍악 )
두향이의 명성이 사라질 때면 杜香名盡時 (두향명진시)
강선대 위 바위도 떨어지리라 仙臺石應落 (선대석응낙 )
출처 : 아산포커스(http://www.asan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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