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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靖難은 쿠데타였어라

한문역사 2026. 5. 8. 06:42
계유정난
癸酉靖難
시기
1453년 (단종 원년) 10월 10일 (음력)[1]
장소
 

조선 한성부 경복궁 및 인근
원인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야심 및 왕위 찬탈 의도
- 단종 즉위 이후 왕권 불안정 및 수렴청정 체제 부재
-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과 수양대군 일파의 정치적 대립
교전 세력
수양대군 세력
(반란군)
조선 조정
(진압군)
주요 인물
지휘관

수양대군
지휘관

단종 (조선 6대 국왕)
김종서 (좌의정) 
참가자

황보인 (영의정) 
조극관 [15]
이양 [16]
허후 [17]
민신 [18]
안평대군 [19]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수양대군의 정변 성공
-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 숙청
영향
수양대군 일파의 실권 장악 및 훗날 왕위 찬탈의 계기
- 왕실 종친 및 대신들의 권력 지형 재편
- 이후 단종의 양위 및 사육신 사건으로 비화

1. 개요2. 용어3. 배경4. 전개5. 전후 처리6. 영향7. 대중 매체에서8. 관련 영상
8.1. 다큐멘터리
8.1.1. 역사의 라이벌8.1.2. TV평생대학8.1.3. 신역사스페셜8.1.4.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8.2. 영화
9. 기타

1. 개요[편집]

今吾一身, 宗社利害係焉, 托命於天。 丈夫死則死於社稷而已。 從者從, 去者去, 吾不汝强。 如有執迷誤機者, 先斬而出。 疾雷不及掩耳, 兵貴拙速。 吾卽剪除姦兇, 孰敢枝梧?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20]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21]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년, 계유년),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 문종의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 정변이다. 수양대군은 이 사건을 통해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는 이후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용어[편집]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정난(靖難)은 단순히 정치적 혼란(政亂)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협하는 어지러움(難)을 평정하여 깨끗하게(靖)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수양대군 일파가 김종서와 안평대군 세력의 모반 기도를 선제적으로 진압하여 사직을 지켜냈다고 주장하며 붙인 공식 명칭이자, 자신들의 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긍정적인 정치적 수사다. 일각에서는 계유정난이 명분과 정통성이 부족해 '반정(反正)'이라 불리지 못하고 '정난'이라는 모호한 명칭이 붙었다고 오해하기도 하나, 이는 한자어의 맥락을 오독한 것이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정난'은 황실이나 왕실을 위협하는 역적을 토벌해 국가를 안정시킨다는 대표적인 정치적 명분이다. 명나라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를 찬탈할 때 내세운 명분 역시 정난(靖難)이었다.

이 사건이 곧바로 반정이라 불리지 않은 이유는 국왕의 교체 양상 때문이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쿠데타 직후 기존 국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옹립한 사건이다. 반면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직후에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단종을 옥좌에 그대로 둔 채 정적이던 대신들만을 제거하여 실권을 장악한 전형적인 숙청이자 친위 쿠데타의 형식을 띠었다.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는 정난 이후 2년이 지나서 별개로 진행되었으므로, 정변 당시에는 국왕 교체를 뜻하는 반정이라는 명칭을 쓰기 부적절했던 것이다.
"저는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으니, 어찌 능히 모획(謀畫)하는 바가 있어서 반드시 부응하겠습니까? 두루 오랜 옛날의 일을 보건대,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았고,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여러 사특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붙어서 불우(不虞)의 화(禍)가 항상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그때 충의(忠義)로운 신하가 있어서 일어나 반정(反正)을 한 뒤에야 그 어려움이 곧 형통해지니, 부운(否運) 이 서로 이어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자연(自然)이라고 하겠습니다.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하여 장차 불궤(不軌) 를 도모하려 하는 것은 길 가는 사람들도 아는 것이나, 그러나 그의 배반하는 정상을 뒤밟아 그 역모를 드러낼 수 없으니, 비록 즉시 거의(擧義)하려고 하여도 또한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3월 21일 무인 2/6 기사 /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한명회가 세조를 배알하여 안평 대군이 불궤를 도모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이는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이 무인년의 어지러움을 평정했다는 뜻의 '무인정사(戊寅定社)'라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인정사 역시 이방원이 정도전 등을 숙청했으나 곧바로 자신이 즉위하지 않고 형 정종을 내세웠기에 정사(定社)라 명명된 것처럼, 수양대군 역시 일차적으로 반대파 숙청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정난이라 명명한 것이다. 실록을 살펴보면 정난공신들이 스스로의 공적을 언급할 때 반정(反正)이라는 단어를 병용해 쓴 기록도 존재한다.

3. 배경[편집]

계유정난의 핵심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자 배경은 수양대군의 권력욕과 왕위 찬탈에 대한 야심이며, 사건의 구체적 배경으로 문종의 이른 승하, 단종의 어린 나이, 수렴청정 체제의 부재 등이 거론된다. 당시 정국이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취약했던 구조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 왕실 구심점(대비)의 부재: 문종이 이전부터 몸이 아픈 상황에서 과도한 3년상으로 인해 재위 2년여 만에 39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조선 왕실의 법도상 어린 국왕이 즉위하면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여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단종에게는 이러한 역할을 해줄 왕실의 큰어른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친조모인 소헌왕후와 친모인 현덕왕후는 이미 세종 대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연이은 3년상을 이일역월제라는 군주의 룰을 무시하고 강행하면서 무너지는 문종 자신의 육체적 쇠약을 가속화했으며, 현덕왕후의 사후 세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오랜 기간 정실 왕비를 새로 들이지 않았고 숙빈 홍씨에게 십수 년간 사실상의 중전 역할을 맡겼을 뿐 그녀를 법적인 정실로 올리지 않은, 명백한 정무적 태만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하다못해 후계자 단종이 성인이 될 그 몇 년조차 문종 본인이 버텨내지 못했으며, 자신의 후계자를 보호하고 대신들과 종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줄 최고 권위의 구심점인 왕실 여성 어른(대비)의 부재를 방조했다. 이는 어린 후계자 단종과 고명대신이 왕실 내 강력한 종친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고 어린 국왕을 호위할 '외척 세력'마저 없이 종친 세력의 도전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 고명대신과 종친 세력의 갈등: 성군인 아버지 세종의 후계자 수업과 십수 년의 대리청정을 거쳐 훌륭한 정통성을 지닌 문종이 막강한 왕권을 휘둘렀고 수양대군은 납작 엎드려 있었을 뿐이라는 대중적 사관과 달리, 학자들은 문종 시기 갑자기 커지는 안평대군의 존재감을 두고 막강한 수양대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종친 사이에서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구축하려는 문종의 안배로 본다. 수양대군은 대중적 인식과 달리 문종 시절에 약소한 세력을 가진 왕자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22] 과거에는 안평대군을 단순히 '풍류를 즐기다 권력 투쟁에 휘말린 왕자'로 보았으나, 최근 현대 사학계에서는 문종이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안평대군의 정치적 체급을 키워준 것으로 해석한다. 문종의 몸 상태도 세종 말년에 대리청정을 십여 년 동안이나 소화하며 꽤나 심하게 상한 상태였는데 여기다 3년상 등을 연달아 치르며 국정 장악력이 약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세종은 부왕 태종의 외척 척결로 인해 권력 구도에 믿을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이나 주요 종친들밖에 없었고, 때문에 재위 후반기 아들들이 장성하자 국정의 일부분을 맡게 하는 등 왕자들의 세력을 키우는 쪽을 택했다. 또한 김종서 황보인 같은 대신 세력들은 세종 말년부터 문종 재위기까지 왕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현안을 먼저 결정하고 왕의 재가를 받는 의정부 서사제로 국정을 운영했다. 이는 문종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대신들에게 힘을 실어준 오랜 세종-문종 본인들의 의정부 서사제 관행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왕권 자체가 조금씩 종친들과 대신들에게 분산됨으로써 형해화되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세종 후반부터 실권을 쥔 인물들로, 문종이 즉위했다고 갑자기 이들의 권력이 왕에게 복속된 게 아니며 실록상 문종이 대신들의 건의를 거부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 왕이 강해서가 아니라 당시 문종의 몸 상태나 이미 국왕의 권력이 분산되는 세종-문종조 당시의 조선 권력 구도상 문종이 이를 굳이 거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사람들도 인지하고 있었고, "대신들이 전횡한다"는 비판이 조정 내에 실제로 존재했다.

문종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결코 손아랫동생 수양대군 상대로 순진한 임금이 아니었다. 이미 실록에서부터 관찰되는 수양대군의 야심과 무력 기반을 몰랐을 리 없다. 당시 수양은 이미 국정 전반에서 부왕 세종의 숙원 사업인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 관여하고 군사적 업무를 맡는 등 상당한 세력을 쌓고 있었고, 조정 신료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문종이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 대신들과 안평대군에게 어린 세자(단종)를 부탁한 것은 수양을 의식한 조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왜 문종 본인이 수양을 직접 견제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실제 문종이 가진 권력의 딜레마가 드러난다. 부왕 세종대부터 국정 전반에 참여한 왕자를 지방으로 쫓는 것 자체가 왕실 권위를 손상케 하는 것이었으며, 동생인 세조가 집권 후 불교를 통치에 끌어들이며 유교적 관성에 휘둘리는 것을 거부한 것과 달리 3년상을 FM으로 치루는 등 유교적 관성에 사로잡힌 문종 본인이 딱히 수양을 쳐낼 무슨 특별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수양과 결탁한 세력이 이미 광범위해 손댈수록 발생할 역풍을 우려했다. 많이들 간과하는 지점이지만 세종 후기 세종 아들들의 국정 참여는 대리청정을 맡던 문종만 한 것이 아니라, 수양이나 안평 역시 세종의 사업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들의 힘과 세력이 증가하는 형태였고, 때문에 적장자인 문종 역시 동복동생들의 세력을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문종은 외척의 세력을 파괴하고 철저히 도외시하는 방식을 썼던 할아버지 태종, 이를 그대로 이어받은 아버지 세종대의 관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숙빈 홍씨를 중전으로 올려 외척 남양 홍씨의 힘을 얻는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수양대군을 견제할 만한 종친 안평대군에게 외교 문서 작성, 무기 제조 감독 등 주요 실무를 맡기며 수양대군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또한 문종은 재위 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즉위하면 그를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23] 결국 단종 초기에 권력은 의정부와 군권을 장악한 좌의정 김종서를 중심으로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정분 등이 나누어 쥐게 된다. 그러나 이는 문종의 실책으로, 결국 이들은 대부분 세종 후기부터 조정의 권력을 좌지우지한 권력형 노신(老臣)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집현전 출신의 신진 소장파 신하들과 왕족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숙빈 홍씨를 중전으로 승격하거나 최소한 다른 계비를 들이지 않은 것도 문제였는데, 내명부의 수장이란 자리는 당시에도 무시할수 없는 영향력의 자리였으며 그중 한 축인 종친을 통제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를 권한 대행에만 맡긴다는 것도 그리고 신하와 종친이라는 역사적으로 왕을 배신한 이가 매우 많이 발생하는 세력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해도 위험한 선택인 것은 명백했다.

세종과 문종은 본인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왕실 종친들을 통제하면서도 국정 권력을 분산하려 나누어 가지게 함으로써 이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배려했다. 그 결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은 세종 치세 후반부터 각기 세력을 형성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숙부들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은 능력과 야망이 모두 뛰어난 왕자들이었으며, 부왕 세종 재위 시절 정치와 문화 사업에 참여하며 각자 상당한 세력을 쌓아 놓은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적차남 수양대군과 적3남 안평대군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여, 사실상 왕실은 두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 치세 후반기에 의정부 서사제 등을 통해 대신들과 신료들의 권력이 강화되었지만, 태종이 다진 왕실의 권위는 여전히 견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 고명대신들은 강력한 종친의 존재가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안평대군 세종의 적6남 금성대군을 포섭했다. 의정부 서사제를 거쳐 신장된 신권을 통해 국정을 주도하는 대신들이 문종이 단종 즉위 직후 보장해 준 이른바 황표정사를 행하며 권력을 독점하자 집현전 소장파 학자들은 이런 갈수록 비대화되는 김종서, 황보인 측의 권력을 두고 대신의 횡포로 여겨 매우 비판적이었다. 때문에 이들 고명대신 세력과 태종 이래로 강력한 권위를 유지해 오던 왕실 종친에 붙어 대신 세력의 권력 강화에 불만을 제시하던 신진 세력 간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 수양대군의 집요한 세력 규합: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 중신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신중하게 행동했다. 단종 즉위 직후 명나라로부터 즉위를 승인받기 위한 사은사 파견 때, 수양대군은 험난한 사행길을 자처하여 명나라를 다녀오며 대신들의 경계심을 늦추려 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자신의 수족이 될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규합하고 있었다.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던 책사 한명회 장원급제했으나 사교성이 부족해 한직을 겉돌던 권람, 집현전 학사 출신의 소장파 관료 신숙주, 황희의 아들 황수신 등을 비롯해 홍윤성, 무관인 홍달손, 양정 등을 끌어들였다. 이들 대부분은 능력이 있으나 당시의 정치 체제나 신분적 한계, 본인의 사정 등으로 출세길이 막혀 있던 소외 계층이거나 야심가들이었다.

    이 밖에도 태종의 적장남이었던 양녕대군[24], 차남인 효령대군을 비롯해 임영대군, 영응대군 등 상당수의 종친들이 고명대신들의 권력 집중에 불만을 품고 수양대군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게 되면서, 정변을 위한 정치적 토대가 완성되었다. 신빈 김씨[25]의 아들 계양군 등의 서출 이복동생도 수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 밖에도 세종의 적차녀 정의공주의 남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세종의 서장녀 정현옹주의 남편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 역시 계유정난에 가담했다. 당시 왕족과 종친들은 정국을 주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왕족이 수양대군을 지지하였다.

4. 전개[편집]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은 친분이 있던 권람을 통해 한명회를 소개받는다. 한명회 권람의 절친한 벗으로, 재능은 있었으나 놀기 좋아하는 기질로 인해 과거에 거듭 낙방하던 인물이었다. 수양대군은 책사 한명회 등의 조언을 받아 훗날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일이었다. 원래 안평대군 이현로의 조언으로 사신행을 자청한 상황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이를 저지하고 결국 자신이 사신으로 나서게 된다.

이 사행길을 통해 수양대군은 상국인 명나라에 자신이 조선의 유력한 왕자임을 알리고, 인맥을 쌓아 후일 사후 승인 등에서 도움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점에서는 할아버지 태종의 왕자 시절 사신 행보와 매우 비슷하다. 또한 이때 신숙주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양대군 신숙주를 자신의 세력으로 완전히 포섭하고,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귀국한 뒤, 수양대군은 수하 세력과 함께 방해가 되는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명회 살생부(殺生簿)이다. 이 살생부의 첫머리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반대파의 거두였던 좌의정 김종서였다.

1453년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수하 무관인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미리 준비해 둔 병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관복을 차려입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이날 단종은 궁을 떠나 누나 경혜공주의 사저에서 묵을 예정[26]이었기 때문에 궁의 경비는 평소보다 느슨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수양대군은 이날을 쿠데타 거사일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이 이날 거병[27]을 준비하면서 수하들을 통해 소집한 무리들에게 정난의 당위성을 설명했음에도, 많은 수하들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역모로 판단하고 당황하여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북문으로 도주했다.[28] 때문에 수양대군은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 앞에서 “혼자라도 결행하겠다”고 선언하며 몇몇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이미 일부 수하들이 역모를 감지하고 계획에서 이탈한 상태였기 때문에 쿠데타 계획이 유출되는 건 시간문제였고, 결과적으로는 잘 지른 셈이 되었다.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수양대군파인 신숙주 최항의 방문을 연이어 받았고[29], 거사 당일에는 수양대군의 최측근이자 핵심 세력인 권람의 방문까지 받았다. 그러나 김종서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에 왕자의 신분인 수양대군을 공손히 맞이하려 했지만, 수양대군 김종서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대기하며 서찰 한 장만 김종서에게 전달하였다. 김종서가 달빛에 비춰 서찰을 읽는 순간, 수양대군의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30], 이어 양정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주변 하인들과 호위무사들을 칼로 베면서 정변의 막이 올랐다.

이후 수양대군은 서둘러 단종이 머무르고 있던 경혜공주 저택을 비롯해 도성 4대문과 주요 군사 시설, 요충지를 확보한 뒤, 이미 장악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궁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동부승지[31] 최항이었다. 수양대군 신숙주의 후임인 최항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편으로 여겼겠지만, 최항은 자신을 수양대군파로 인식하지 않았고, 이 사태를 명백한 쿠데타로 받아들였다. 수양대군이 조정 신료들의 명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최항은 처음에는 말을 돌리며 주저했으나, 결국 수양대군의 짜증에 굴복해 명부를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명부는 한명회 살생부가 되면서 바로 빨간 줄이 그어지고 반대파들은.... 이때 최항의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최소한 시간을 조금만 끌어주었다면 계유정난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는 법이다. 곧이어 수양대군은 국왕 단종에게 역적 김종서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역모를 계획했다고 보고하고,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을 시켜 광화문과 대궐 문을 장악하도록 명령했다.

이제 정난의 최종 단계에서 수양대군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했다. 당시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판중추원사 정인지[32], 참판 이계전, 이순지 등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반대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병조판서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아 사망하였다.

심지어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이조판서 민신과 그의 다섯 아들들은 현릉에서 참살되었고,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우의정 정분 역시 처음에는 유배되었다가 처남인 정인지를 통한 회유가 실패하자 결국 성삼문 등의 처벌 상소가 이어짐에 따라 교형에 처해졌다.

한편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아직 살아있던 김종서는 며느리의 친정으로 피신한 이후, 다시 궁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왕실 친위대인 내금위마저 이미 수양대군 측에 포섭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입궐에 실패했고, 결국 양정과 이흥상 등에게 발각되어 참수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김종서(金宗瑞)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元矩)를 시켜 돈의문(敦義門)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의정부(議政府)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고하고, 아뢰어 내금위(內禁衛)를 보내라. 내가 나를 상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하였으나, 문 지키는 자가 듣지 않았다.

김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복(女服)을 입고서, 가마를 타고 돈의문(敦義門)·서소문(西小門)·숭례문(崇禮門) 세 문을 거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아들 김승벽(金承壁)의 처가(妻家)에 숨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명민(李命敏)도 또한 다시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도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홍달손(洪達孫)에게 고하니 호군(護軍) 박제함(朴悌緘)을 보내어 베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성공에는 그의 내금위 장악 성공이 컸다. 정변 전부터 과정에서 국왕의 친위대인 내금위 병력 상당수가 이미 수양대군 측에 포섭된 상태였기에, 별다른 물리적 저항 없이 쿠데타는 손쉽게 성공했다. 이는 세종 때부터 내금위 처우가 열악해졌기 때문인데 태종은 자신 같은 쿠데타의 재림을 막기 위해서 내금위의 우대 조치도 조치지만 집안 따져서 뽑아야 된다는 문신들 주장을 무시하고 함길도 출신 우대, 무재, 국왕 본인의 신뢰. 딱 이 기준으로 뽑았다.

그러다가 태종 죽자마자 세종은 내금위를 집안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말과 무장을 자비로 마련하려면 집안이 좋아야 된다는 명분이었는데, 명분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점점 이게 더 심해지는 경향이 나타나서 세종 후반기~문종 시기쯤이면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무재로 출사한 지방 젊은이가 아니라 걍 서울에 집안 괜찮은 자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몹시 강해졌다. 근위대 집안 좋은 자제들 채우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 주장을 했던 집현전이나 의정부 문신들, 그리고 이 주장을 가납한 세종은 태종의 의도를 간과한 것이었다.[33]

이렇게 인적 구성은 바뀌는데 반대로 정작 대우는 열악해졌다. 세종 후기 시기에는 강성해지는 오이라트와 이로 인한 토목보의 변 등 조선 북방의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기에 이들이 조선까지 침입할 수 있다는 우려 탓에 군액을 급격히 늘리는데 머릿수 늘어난 반동으로 질적 저하, 대우가 열악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이 때문에 내금위 역시 세종 중반 이후로 체아직으로 굳어지고, 인사 적체가 심해졌다. 문종 때 쯤 가면 걍 내금위 복무 대충하고 별시위나 갑사로 갈아타려는 행위가 늘어서 일부러 태만하게 하면 처벌하게 할 정도로 내금위의 대우가 악화된다. 함길도 출신이면 중앙에서 주상을 모시는 정도로 만족했을지도 모르나 서울의 귀족 자제들로 다 갈았던 상황에서 대우의 열화는 이들의 큰 불만을 불렀다.

결국 문종~단종 때쯤 되면 내금위 내부에서 불만이 큰 상황이었는데, 이런 이들에게 접근한 것이 바로 수양대군이다. 무를 중시하고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던 수양대군은 활쏘기나 사냥 등으로 이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맥을 만들었고, 이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처우 개선을 요구했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호위하는 내금위 무사들 회유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이 덕분에 계유정난 공신 43인 중에 무사는 20명. 개중 절반인 10명이 국왕 호위병인 내금위인 결과가 나왔다.[34] 내금위 60~90명 언저리던 시절에 10명 가담이다. 수양대군이 쿠데타 직후 빠르게 궁궐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전후 처리[편집]

군사 정변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 김종서,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35], 민신[36], 이양 등의 신료들은 함께 역모죄의 명목으로 저자거리에 효시되었고 이후 수양대군의 동복 형제인 안평대군 이용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은 노비로 전락했고 수양대군은 공신이 된 이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 주었다. 사실, 이러한 작업들은 조선이 아닌 어느 나라 왕조 시대에도 초기 정변이나 반란이 일어난 이후에 전후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장면이다.

수양대군은 정난 공신 1등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인지 좌의정에 임명했고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사돈 관계)이었고 명나라 황실의 외척이기도 했던 자신의 일파 한확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 병마 도통사  온갖 직위를 모두 겸직하고, 자신의 일파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나눠 주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수양대군은 사실상 단종을 따르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하면서 실질적인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37]

또한 집현전에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게 하는 등 [38] 단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결국 2년 만에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선위을 받아 조선의 국왕이 되었으며, 단종은 상왕으로 밀려났다.

정난 공신으로 책봉된 42명[39]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나중에 단종 복위 운동에 뛰어드는 집현전 학자들과 왕실의 인물 등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히 포섭용으로 이름만 올려준 것이라고 보기엔 그 지위가 상당히 높고 실권을 포함한 직책들이 분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난 공신과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임명한 좌익 공신을 비교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계유정난의 참여 세력에 대한 이견도 나타나고 있다.

6. 영향[편집]

세조 즉위 후 편찬된 단종실록은 이들이 안평대군 및 후궁, 환관 등과 결탁하여 이른바 황표정사(黃標政事)[40]를 행하며 조정을 장악했고, 종국에는 수양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기록이기에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 그러나 비판의 핵심은, 이들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는 본래의 임무를 넘어 사실상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 사관은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즉,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린 국왕이 즉위하면서 신권이 비대해지고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때문에 정인지, 신숙주는 물론 훗날 사육신이 되는 성삼문, 하위지 등 상당수의 집현전 학자들조차 김종서, 황보인의 지나친 권력 독점에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수양대군이 정난 초기에 큰 반발 없이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수양대군은 국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 세종-문종대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태종대의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 이는 이후 경국대전의 기본적인 직제로 확정되어 구한말 갑오개혁 이전까지 이어진다.#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등 반대파를 척살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 등 여러 중직을 모두 겸하여 정권과 병권을 완전히 독차지하였다. 또한 자신을 도운 정인지, 한확, 정창손, 이계전, 권준, 박중손, 최항, 기건 등을 주요 요직에 앉혔다. 국면이 진정된 후에는 본인을 포함해 공을 세운 정인지, 한확, 정창손, 박종우, 권람,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 신숙주 등 43인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하였다. 바야흐로 조선은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갔고, 남은 것은 그가 옥좌에 오르는 길뿐이었다. 결국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아내어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하였다.

왕위 찬탈에 대한 당연한 반발도 뒤따랐다. 일부 집현전 학자들이 세조의 행위를 묵인하거나 적극 협조하기도 했으나,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에게 세조의 즉위는 명백히 명분에 어긋나는 '찬탈'이었다. 계유정난 직후에는 고명대신 세력의 지나친 팽창을 저지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학자들도 세조가 직접 왕위에 오르자 거세게 반발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456년(세조 2년)에 일어난 사육신 사건이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6인은 세조와 측근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모의했다. 세조가 상왕 단종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자리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호위인 별운검(別雲劒)으로 임명된 것을 틈타 거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가 "장소가 협소하니 호위를 들이지 말자"고 청하여 거사가 연기되었고, 불안감을 느낀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실토하며 세조에게 적발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모의까지 터지면서 금성대군은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고, 노산군 역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끝에 사사(賜死)당하고 만다.

비록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세조 치하에서 벼슬을 거부하고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킨 학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르며,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특히 김시습은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들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노량진 강가에 묻어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카의 왕위와 목숨을 빼앗고 친동생들까지 죽였다는 패륜에 대한 비난은 세조의 치세 내내, 그리고 이후 조선 왕조 존속 기간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한편, 흔히 세조 시기 형성된 훈구파 관학파와 같은 의미 혹은 관학파의 한 갈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훈구파 중에서도 관학파 출신이 제법 포함되어 있고 관료 출신들도 다수 있으나 한명회, 홍윤성과 같이 관학파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고[41], 단종 때 관학파의 핵심 세력인 김종서 세력과 사육신 세력은 각각 계유정난 때 대거 숙청당하고 단종 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하면서 또 숙청당하거나 몰락하였으며 생육신 세력 역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면서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는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훈구파가 기반 잘 깔아놨더니 사림이 다 말아먹었다'는 식의 틀린 인식이 널리 퍼지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붕당에 대한 오해로 연결되는 문제이다.

사림파 항목에도 적혀 있듯 기실 훈구-사림 대립 구도는 후대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구도로 예종 이후의 대립 구도는 공신 세력 등 왕의 친위 세력인 원로 대신들과 성종 시절 삼사의 대간 기능의 강화로 인해 목소리가 커진 신진 관료 세력의 충돌이었다.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구성은 큰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명종 시기까지의 정치 구도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예종-성종 시절 공신이자 원로 대신들이 사림의 견제를 받았고 연산군 시절의 유자광과 중종-명종 시기의 척신들이 견제를 받았듯, 사실 사림 세력 자체가 신진 관료층의 개혁 요구로 뭉친 것에 가까웠다. 심지어 극단적인 예시이기는 하지만 한 집안 내에서도 관직이 어떻냐에 따라 훈구파와 사림파가 갈렸다.

이렇게 사림 세력 자체가 세간의 인식과 달리 후대의 붕당 같은 파벌이라기에는 거리가 먼 집단이었고 그렇다 보니 반대편에 있는 훈구 세력은 분석해 보면 집권자의 세력부터 정체성까지 겹치는 게 별로 없는 공통성이 없는 집단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사림 세력이 자신들의 주장과 반대하는 대신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말이 훈구였던 것으로 보일 정도다. 훈구와 사림의 이분법적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2020년대에는 낡은 학설로 취급받으며 현재는 이른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라는 기존 학설의 구도가 부정되었지만 딱히 이를 대체하는 다른 모델이나 대안도 없는 상황이다.#

7. 대중 매체에서[편집]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비극적인 운명을 걷는 단종,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수양대군, 대의명분과 실권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하들의 모습은 사극의 단골 소재로 쓰였다. 시대와 작품의 관점에 따라 계유정난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크게 달라지곤 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제작된 매체에서는 세조를 '국가를 위해 고뇌하며 결단을 내린 영웅적 군주'로, 김종서를 '권력을 전횡한 권신'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짙었다. 근래 들어서는 세조에 대한 악평이 강화되어 권력에 눈이 먼 찬탈자로서의 세조의 모습이 부각되는 작품이 많아졌다.
  • 공주의 남자: 세조가 피눈물도 없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 관상: 마치 삼국지연의 조비가 생각날 정도로 왕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토리상 주인공 김내경이 계유정난 당시까지 김종서 라인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 사육신: 2007년에 방영된 남북 합작 드라마다.
  • 왕과 비: 역대 사극들 중에서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충실했던 사극으로 유명하며 계유정난의 묘사도 실록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덕분에 단종실록의 왜곡된 부분들까지 충실히 따라가서 세조를 구국의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김종서를 역적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대신 실록의 서술은 아주 소소한 부분까지 잘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수양 측 입장에서 정리한 기록이 이렇다"는 걸 표현한 영상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맨 위 항목의 "운명은 하늘에 맡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는 등의 대사들은 대부분 실록의 기사를 그대로 옮겼으며, 김종서의 살해 과정, 그리고 민신이 현릉의 비석소에서 살해되는 장면 등이 모두 충실히 재현되었다.
  • 왕과 사는 남자: 계유정난 이후, 영월로 유배된 선왕 단종의 처절한 삶과, 그의 마지막을 함께한 엄흥도의 우정이 주를 이루는 영화. 본작의 최종 빌런은 수양대군이 아닌 한명회인 점이 이 극의 핵심이다.
  • 파천무: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대결 구도를 기반으로 극이 전개되는데 수양은 극 중에서 끝까지 김종서를 설득, 회유하기에 힘쓰나 김종서는 끝내 수양대군과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대척점에 선 채로 주살되고 만다. 이순재의 절제되고 노련했던 연기가 볼 만했다.

8. 관련 영상[편집]

8.1. 다큐멘터리[편집]

8.1.1. 역사의 라이벌[편집]

 
역사의 라이벌
수양대군과 김종서

KBS 1995.01.07.

8.1.2. TV평생대학[편집]

 
TV평생대학
1453 수양대군의 쿠데타

EBS 2011. 05.30.

8.1.3. 신역사스페셜[편집]

 
신역사스페셜 83회
조선 역사 뒤바꾼 계유정난
세조는 승리했는가?

KBS 2011.10.06.

8.1.4.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편집]

 
단종과 수양 2부작
1부 누가 수양의 쿠데타(반란)를 도왔나?

KBS 2026.04.26.

8.2. 영화[편집]

 
영화 관상 中에서

9. 기타[편집]

명나라의 정난의 변과 종종 비교된다. 야심을 품은 숙부(영락제)가 조카(건문제)의 제위를 찬탈하고 '정난'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구도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정난의 변은 숙부인 연왕이 북경에서 거병해 남경의 중앙 조정과 수년간 대규모 전면전(내전)을 벌인 사건인 반면, 계유정난은 한양 도성 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기습적인 정변(쿠데타)으로 종결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잉글랜드 왕국 리처드 3세가 일으킨 찬탈극과도 유사하여 서양사와의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1483년, 리처드 3세는 죽은 형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인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섭정이 된 후, 조카들을 런던 탑에 유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리처드 3세를 종종 '영국의 수양대군'에 빗대기도 한다. 리처드 3세와 세조는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다만 세조가 평생 옥좌를 지키다 승하한 것과 달리, 리처드 3세는 짧은 재위 후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하며 몰락했다는 점에서 결말은 다르다.
 
 
 
 
 
[1] 양력으로는 1453년(단종 1년) 11월 19일이다.[2] 경덕궁직[3] 집현전 교리[4] 우부승지[5] 좌찬성[6] 판중추원사[7] 호군[8] 전 주부[9] 첨지중추원사[10] 태종의 적장남[11] 세종의 적4남[12] 세종의 적8남[13] 세종의 서차남[14] 수양대군의 종[15] 병조판서[16] 우찬성[17] 좌참찬[18] 이조판서[19] 세종의 적3남. 유배 직후 사형.[20] 좌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2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직전에 한 발언이다.[22] 세조 본인 입장에서도 굳이 문종을 병마에 시달리며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자신을 견제하는 큰형의 모습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반듯하게 국정을 잡고 세조 본인과 서로 우애 있는 형제로 묘사하는 편이 찬탈 이후 본인의 권력 구도를 위해선 훨씬 괜찮은 선택이었다. 후에 대놓고 형인 경종과 정적 관계였던 영조가 황형을 찾아대며 결코 자신은 형과 대립한 적이 없다며 평생 우애를 강조한 것과 같은 이치다. 영조 쪽은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기도 했었고.[23] 세 사람 중 남지는 얼마 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며 참극을 피했고, 그의 후임 정분이 대신 문종의 유지를 맡게 된다.[24] 양녕대군은 조카 세조의 왕자 시절부터 매우 친했다고 한다. 양녕대군이 종친들을 초대해 술자리를 열었을 때 다른 종친들은 모두 꽐라가 되었으나, 자신과 수양대군만이 멀쩡한 것을 보고 “수양이야말로 진정한 호걸이다”라고 칭찬했다는 일화도 있다. 수양대군 역시 큰아버지인 양녕대군을 평소부터 각별히 따랐다고 한다.[25]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아 세종 소헌왕후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았다.[26] 단종은 평소 누나 경혜공주의 사저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린 나이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궁궐보다 누나 매형이 있는 곳이 더 편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27] 擧兵, 군사를 일으킴.[28] 이렇게 수하들이 동조하지 않은 배경은 애시당초 사람들을 불러 모을때 그 자리가 거병을 위한 자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활쏘기 겸 술자리 모임 정도로 모았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29] 다만, 당시 최항 신숙주의 후임이자 2인자였을 뿐, 이 시점에서 수양대군파로 단정하기는 조금 미묘한 상태였다.[30] 참고로 이때 김종서는 부상만 당했을 뿐, 사망하지는 않았다(!).[31] 승지 중 최하위직(그러나 승지들의 품계는 모두 정3품으로 동일)으로, 공조에 대응되는 역할을 맡았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정도된다. 하지만 동부승지도 승정원 소속인지라 왕실 관련 사안을 처리하고 대·소 신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하긴 했다.[32] 정인지는 1452년(단종 즉위년) 병조판서가 되어 단종을 보필했으나, 그의 강직함을 꺼린 김종서 황보인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판중추원사로 체직된 상황이었다.[33] 당장 신라가 왜 서라벌이 아니라 상주 출신들 데려다 근위병으로 삼았는지 생각해 봐도 된다. 견훤 이전까지 이들은 200년 넘게 신라 왕실에 충성하여 중앙 귀족들의 세력에 맞섰다.[34] 
[35] 김종서와 황보인 이상으로 집안이 큰 피해를 보았다. 훗날 경종실록에는 조극관의 자손을 김종서와 황보인의 자손처럼 후히 대우하자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조극관의 아들 조정서는 귀양 가서 죽고 동생 조수량도 사사되었다. 본인의 후손은 끊어져서 없고 조수량의 후손만 있다.[36] 문종의 비석소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아들들과 같이 참살당하고 말았다, 비석소가 보통 무덤 앞인 걸 생각하면 형의 무덤 앞에서 사람을 죽인 것.[37] 영의정으로 행정 최고직, 이조판서를 겸직하며 인사권을 장악하고, 병조판서로 군정권, 내외병마도통사로 군령권을 모두 장악했다. 수양대군 자신을 거치지 않고는 관리를 임명할 수도, 군대를 움직일 수도 없게 만들었으로 단종을 제치고 완벽한 수양의 시스템적 독재가 완성되었다. 말이 수양대군이지 사실상 시스템적으로는 이때부터 세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38] 이 시기까지 집현전 같은 소장 세력들은 황보인보다는 세조 측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게 아니냐고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소장 세력이 이탈하는 것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직접 즉위하는 시기부터이다.[39] 훈구파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세조의 즉위 이후 책봉된 소수의 좌익공신들이다. 성삼문이 포함되었다가 사육신 문제로 제외되는 것 역시 좌익공신 이야기.[40] 인사 임명 시 의정부에서 추천할 인물들의 이름 위에 노란 표식을 하여 올리면 왕이 그대로 낙점만 하던 것. 사실상 의정부가 인사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41] 다만 한명회는 개국공신 한상경의 형 한상질의 손자이므로 관학파와 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