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대한민국 수도는 어떻게 북한의 침략 사흘만에 함락됐나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다시 봐도 기막힌
6·25 남침 막전막후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일과가 끝난 후 ‘육군본부 장교 클럽’ 신축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국군 고위 장교 50여 명, 미군 고문관 다수가 파티에 참석했다. 1차는 오후 10시쯤에 끝났지만, 2차, 3차 술자리는 25일 오전 2시까지 이어졌다.
두 시간 뒤인 오전 4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고,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6월 25일 일요일, 서울 시민 대부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휴일을 보냈다. 오전 10시, 육군사관학교 교관 이원엽 대위는 19일 개봉 이후 연일 매진 행진을 이어가던 영국 영화 ‘애원의 섬’을 보기 위해 수도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 갑자기 영화가 중지되더니 안내 방송이 나왔다. “군인들은 당장 원대로 복귀하시오.” 영화는 몇 차례 더 중지됐고, 그때마다 똑같은 방송이 반복됐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이 대위는 영화관을 나와 육사로 복귀했다.
교장 이준식 소장, 부교장 이한림 대령은 군인들이 복귀하는 대로 부대를 편성해서 전방으로 올려 보냈다.
이원엽 대위는 중대장으로 임명돼 생도들을 이끌고 포천 지구 전투에 투입됐다.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는 1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3회 ‘전국 대학 축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고려대와 동국대가 맞붙은 경기에서 전반전은 0대0으로 끝났다. 하프타임 때 본부석 스피커에서
“국군 장병은 즉시 자대로 복귀하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몇 분 후에는 “경기를 무기 연기한다”는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선수들도, 관중들도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다가 해산했다.
대통령 부부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휴일 아침을 맞았다. 오전 9시, 프란체스카 영부인은 치과에서 어금니 치료를 받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9시 30분 휴일 아침 식사 후 늘 해오던 대로 낚시를 하러 경회루를 찾았다.
오전 10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왔고, 30분 뒤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황을 보고했다.
대통령 주재로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된 것은 오후 2시였다.

26일 새벽 3시, 밤새 뜬눈으로 대책을 고심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전속부관이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며 “그동안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테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을 쳤다.
정신이 번쩍 든 부관이 맥아더를 깨웠고,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26일 월요일에도 서울 시민 대부분은 정상 출근했다. 동두천·의정부 전투에서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렸음에도 국방부 정훈국에서 관장한 중앙방송의 뉴스는 국군이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 보도했다. 뉴스와 달리, 서울 거리에는 북쪽에서 꾸역꾸역 밀려드는 피란민들로 가득했다.
27일 새벽 국회는 긴급 본회의를 열어 “국회의원은 100만 애국시민과 같이 수도를 사수한다”는
‘수도 사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신익희 의장이 결의안을 전하러 경무대에 갔을 때,
같은 시간 개최됐던 비상 국무회의는 이미 ‘수원 천도(遷都)’를 결정하고 해산한 뒤였다.
오전 4시, 대통령의 피란 소식이 국회에 전해지자, 국회의원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했다.
국회의원 210명 중 148명이 서울을 빠져나갔고, 62명은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 체포됐다.
그중 27명은 납북되거나 피살됐다.
비상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이 대통령 내외는 수행 비서 1명과 함께 27일 오전 3시 경무대를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에 남겠다는 대통령을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전시에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다”며
간신히 설득했다. 서울역에 마련된 특별열차는 기관차 1량에다 3등 객차 2량을 연결한 초라한 행색이었다.
대구까지 내려간 특별열차는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에 정오 무렵 상행선으로 방향을 틀어 오후 5시 대전에 도착했다.

27일 오전 6시, 중앙방송은 정부의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다. 지난밤 마지막 방송까지 마치 국군이 승기를 잡은 것처럼 전황을 발표하다가 갑자기 천도 뉴스가 나오자,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한강 인도교 부근과 서울역에는 남하하려는 피란민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날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해·공군의 출병과 긴급 무기 원조 명령을 내렸다. 미국 무초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대전 집무실을 찾아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을 전달하며 “이제부터 이 전쟁은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 됐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기 위해 서울중앙방송에 전화를 걸어 담화를 녹음했다. 27일 오후 10시 방송된 이 담화는 북한의 남침 이후 대통령이 국민에게 전하는 첫 번째 육성 메시지였다.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북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용기, 군수 물자를 날라와서 우리를 돕기로 했다.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담화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같은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육성 방송 4시간 뒤인 28일 오전 2시, 인민군 T-34 탱크 2대가 청량리를 지나 서울 시내로 진격했다. 육군본부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면서 채병덕 참모총장은 최창식 공병감에게 북한 탱크가 서울로 진입하기 2시간 전에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고지식한 최창식 공병감은 오전 2시 30분 수많은 인파와 차량이 다리 위에 있는 가운데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대한 폭파 명령을 내렸다. 그 때문에 500~800명이 사망했고, 아군 물자와 장비 상당수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에 노획당했다.
28일 오전 서울 주요 지역과 기관이 인민군 손에 넘어갔다. 11시 30분 북한은 “영웅적 인민군대가 반격을 개시한 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민군의 위대한 승리가 아니라 민족사·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의 첫걸음일 뿐이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6월부터 ‘전봉관의 폐허 위에 핀 자유 시대’를 4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참고 문헌>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유진오 외, 고난의 90일, 수도문화사, 1950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1, 중앙일보사, 1983
프란체스카 리, 6‧25와 이승만, 기파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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