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청렴하진 않았지만 왕 앞에서 할 말 한 명재상
고려 과거에 급제해 조선에서 출세한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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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과거, 서얼 차별 안 한 덕에 관직
세종에 직언하고도 영의정만 18년
세종의 공법, 빈농 부담 크다며 반대
토지 등급과 풍흉 반영하도록 보완
황희의 비리 세종 알았지만 안 내쳐
깊고 넓게 본다며 최종 판단 의지
」

황희(1363~1452)는 조선 세종 때의 정승으로 유명하지만, 고려에서 태어나서 1389년(창왕 1)에 과거에 급제한 ‘고려 사람’이었다. 그는 강릉의 수령을 지낸 황군서의 얼자(孼子)였다. 즉, 어머니가 천민이었는데, 이러면 조선시대에는 과거 응시와 관직 임명,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인 첩 소생인 서자(庶子)와 천민 첩 소생인 얼자는 문과에 응시할 수 없고, 관직에 오르더라도 좋은 관직에는 임명되지 못하며, 승진하는 데 제한이 있었다. 황희가 조선에서 태어났더라면 과거 급제는커녕 응시조차 불가능했고, 정5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을 테지만, 고려시대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그러니 황희는 고려 사람이라서 출세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뿐 아니라 황희가 고려 사람이란 사실은 그의 여러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의 청백리 포상, 16세기에 생겨
고려에서는 청백리란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청렴한 관리를 특별히 포상하는 일도 없었다. 조선에서 청백리를 선정하고 본인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혜택을 준 것과 달랐다. 『고려사』 열전에는 청백리 대신 ‘좋은 관리’라는 뜻의 양리(良吏) 항목을 따로 두었지만 500년 동안 다섯 명만 이름을 올렸을 뿐이고,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은 강직한 관리도 포함되었다. 조선에서 청백리를 포상하는 제도를 만든 것은 16세기 중종 때의 일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거친 뒤 관료 사회의 도덕성 회복이 절실하다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의 대책이었다. 따라서 황희가 살던 시기에는 청백리가 모범적인 관인상(像)이 아니었고, 지위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탐관오리(貪官汚吏)나 실적을 올리려고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구는 혹리(酷吏), 관청 재물을 자기 주머니로 빼돌리는 장리(贓吏)만 아니면 무난하게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무신정권 때 최우가 문신 관료들을 평가하면서 ‘문(文·시와 문장, 문서 작성 능력)’과 ‘리(吏·행정 실무 능력)’ 두 가지에 모두 능한 ‘능문능리(能文能吏)’를 가장 높게 쳐주었다. 고려에서는 청렴한 도덕군자보다 실무 능력이 뛰어난 관리가 더 높이 평가받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고려 사람 황희는 어떤 관리였을까?
황희는 살아 있을 때 청백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세종실록』은 정반대의 사실을 전한다. 당시 한 사관(史官)은 황희가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의 대사헌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대사헌’이라고 불렸고, 매관매직과 재판 개입으로 재산을 늘렸으며, 상속받은 재산이 얼마 없음에도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있어 출처가 의심스럽다는 세평을 기록해 놓았다. 그 사관의 악감정 탓으로 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황희는 여러 차례 비리 의혹에 휘말렸다. 사위 서달의 살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동료였던 맹사성과 공모했다가 파직되었고(세종 9년), 지방관을 구타한 향리에게서 뇌물을 받고 죄를 덮어주려다 발각되어 사직했으며(세종 10년), 국가 소유의 말 1000필을 관리 소홀로 죽게 한 관리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로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세종 12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청렴한 지조가 모자랐으며, 오래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뇌물을 받는다는 비난이 자못 있었다”고 명토 박았다. 그럼에도 황희는 승승장구했다. 87세에 퇴직할 때까지 무려 62년 동안 관직에 있었고, 그중 23년은 의정부의 정승을 지냈으며, 영의정 자리만도 18년을 지켰다. 그가 정승으로 있던 기간은 전부 세종 치세였으니, 가히 세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황희의 사람됨을 몰랐을까?

정사와 형벌 의논할 때 저울 역할
“황희의 과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 황희를 탄핵한 간관에게 세종이 한 말이다. 그러면서 황희의 행동이 잘못되었고 간관의 주장이 옳다고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를 내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사를 의논함에 있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바라보는 데 황희만 한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더 나아가 세 명의 전임 정승, 하륜·박은·이원과 황희를 비교했다. “세 사람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하륜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 했고, 박은은 임금의 뜻에 맞추려 했으며, 이원은 이익만 탐하고 의로움을 몰랐다.” 황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세종은 황희에게 “조정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면 경은 시귀(蓍龜·점칠 때 쓰는 물건)가 되었고, 정사와 형벌을 의논할 때면 경은 권형(權衡·저울)이 되었다”라고 했다. 점치는 것처럼 판단의 기준이 되고 저울처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 이것이 세종이 인정한 황희의 가치였다. 정책을 두고 신하들이 찬반으로 갈리면 세종은 긴 논의 끝에 황희의 의견에 따르라는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럼 황희는 세종에게 어떻게 했을까? 그는 세종의 뜻을 순순히 받들지 않았고, ‘아니 되옵니다’를 거듭 아뢰었다.
세종의 대표적 업적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세금 제도, 즉 공법(貢法) 제정이었다. 이전에는 농민들로부터 생산량의 10%를 세금으로 거두었는데, 생산량을 정하는 과정에서 현지 조사를 하는 관리들의 농간이 끼어들고 그 때문에 늘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세종은 세금 액수를 고정하는 세법, 즉 공법을 도입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법 개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으므로 세종은 그다운 방식으로 해법을 모색했다. 전현직 관리 1500명이 기명으로 의견을 제출하고 17만 명이 넘는 전국의 농민이 찬성 또는 반대 뜻을 밝히는 대토론회를 연 것이다. 이때 좌의정으로 있던 황희는 세종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냈다. 세금 액수를 고정시키면 비옥한 토지를 가진 부자에게 유리해지고 척박한 토지를 가진 빈농의 부담은 더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일 잘하는 관리답게, 책상에서 만들어진 좋은 제도가 막상 실행되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를 알았던 것이다. 대토론회의 결론은 ‘황희의 의견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공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징수하는 전분 6등법을 만들고, 풍흉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정하는 연분 9등법을 덧붙여 공법을 완성했다. 황희의 반대 덕분에 세종은 좀 더 완벽한 법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황희 없었으면 세종도 없었다
황희 사후 실록의 총평은 이러했다.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만드니, 황희는 옛 제도를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홀로 반대하는 의견을 올렸다. 임금이 그 말을 다 따르지는 않았으나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다.” 세종처럼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직진하는 임금 곁에서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며 좌우를 살피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 것이 황희의 역할이었다. 청렴하지도 않고 학문적으로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실무 능력과 거침없는 주장으로 세종을 보필한 황희가 ‘능리(能吏)’함으로써 고려의 이상적 관인상을 보여준 마지막 사람이 아니었을까. 신하들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외쳤다고 잘못 아는 것보다 황희를 청백리로 아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황희를 청백리에 가두어 둠으로써 그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종이 아니었으면 황희는 능력을 펼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임금이라고 해도 황희 같은 명재상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군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사람’ 황희가 조선에서 태어난 첫 국왕 세종에게 갖는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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