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이 추억하는 유랑 시인 허수경… “그의 詩는 사랑 알려준 선배이자 선생님”


지난 9일 오후 6시 50분 서울 종로구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 독자 40여명이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난다)을 펼치고 둥글게 앉았다. 시집에 실린 시 42편과 산문 3편을 돌아가면서 읽는 릴레이 낭독회 자리였다. 1987년 등단한 허수경은 1992년 한국을 떠나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다. 세계를 유랑하며 삶의 폐허를 품는 시를 써왔다. 위암 투병 끝에 2018년 뮌스터에서 타계했다.
“목소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한 장 한 장 듣는 거/ 뭐, 세계사에 남을 일은 아니지만 지워질 일도 아니다// 그러다 언제쯤/ 당신과 나는 누군가 듣고 있는/ 이 지구에 없는 목소리의 유랑인이 될 거다/ 아무도 건설해본 적 없는 국도를 걷는 아픈 고아,// 꿈꾸는 귀가 듣는 발자국일 거다”(‘듣는 책’) 시 한 편에, 하나의 목소리. 마이크가 손을 타고 넘실넘실 넘어갔다.
허수경은 한국 서정시의 독보적인 존재다. 문인들이 특히 사랑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날 낭독 행사에는 고선경·김복희·오은·이새해·이원·임유영 시인, 오경진·오연경 평론가 등이 참석했다. 오은 시인은 “허수경 시인은 내게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누나이자 선배이자 선생님”이라고 했다. 김복희 시인은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습작 시절 허수경 시인의 시를 정말 많이 읽었다. 당연히 와야 했다!”며 웃었다. ‘허수경 작가론’으로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인 김진솔씨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 작품이 나와서 놀랐다”며 “허수경의 초기와 후기 시를 아우르는, 모든 시기의 흔적이 담긴 것 같은 시집”이라고 했다.

유고 시집이 세상에 나온 6월 9일은 허수경의 생일이었다. 참석자들은 낭독회에 앞서 쑥떡·토마토·유과 등을 나눠 먹으며 8년 전 세상을 떠난 시인을 씩씩하게 기렸다. 잔칫날 같았다. 시인의 법적 대리인을 맡고 있는 난다 출판사 대표 김민정 시인은 “언니의 사망 신고가 아직 안 됐다는 걸 작년에 알게 됐다. 언니 생일날 이 시집을 내고, 기일인 10월 3일 전까지 사망 신고를 마치려 한다”고 했다.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작품을 노트북에 정리했고, 이를 절친한 후배 시인 김민정에게 남겼다. 시집 편집 과정에선 여러 짐작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를 넣고 뺄지, 시의 순서는 어떻게 할지 등. 김 시인은 “제 의지가 많이 들어갔다”고 했다. 시집의 문은 ‘1’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던 시 ‘공항에서’로 연다. “모든 길은 거짓이고 또한 그림자 같아서/ 백년을 살아도 낯설 고향의 새벽 공항에 앉아/ 아주 조금 술을 마신다”(‘공항에서’)
시를 눈으로 읽는 것과 입으로 소리 내 읽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낭독은 묘한 울림을 준다. 이날 행사를 위해 대구에서 온 이재원씨는 “너무 좋은 허수경이란 시인이 있어서, 그에게 현재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며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그의 시를 읽는 특별함이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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